제6부 그림자 도시 11
소주와 초콜릿, 그리고 한때 같이 살았던 남자.
부조화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절묘한 조합이었다.
태오는 이 집의 전직 살림꾼답게 싱크대로 가더니 소주잔과 접시를 척척 꺼내왔다.
“초콜릿 안주로 소주를 마시겠다는 아방가르드한 생각은 어떻게 한 거예요?”
“엉?”
뚜껑을 따지 않은 소주와, 포장을 까지 않은 초콜릿을 나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특별한 의도는 없었다.
그저 편의점 진열대를 둘러보다가 확 필이 꽂힌 두 가지를 연이어 집어 들었을 뿐이다.
술안주의 새 장을 열어보려는 전위적인 계획 따위는 없었다.
내 인생이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나쁘지 않아요. 의외의 매력이 있을 것 같아.”
느긋하게 중얼거리면서 그는 내 앞의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병을 넘겨받은 내가 태오의 잔을 채웠다.
두 개의 자그마한 유리잔은 서로 맞부딪치며 맑게 쨍 울었다.
태오가 초콜릿 은박지를 벗기고 먹기 좋도록 조각냈다.
“근데, 속 아프다며? 이거 둘 다 위염에는 쥐약일 텐데….”
“괜찮아요.”
태오가 싱긋 웃었다.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산다고…
난 나중에 어떻게 될까 봐 지금 당장을 포기하는 짓은 안 할래요.”
우산꼭지로 배꼽을 꾹꾹 누르는 것처럼, 괜스레 찔렸다.
나는 말없이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원 샷으로 잔을 비웠다.
쓰디쓴 소주가 목구멍을 흘러 넘어간 뒤에도
다디단 초콜릿은 혀뿌리에 남아 아주 천천히 녹아갔다.
“잠깐만 기다려 봐.”
갑자기 일어서는 나를 태오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냉장고를 열어 김치 통을 꺼냈다.
며칠 전에 넣어둔 두부의 유통기한은 다행히 오늘까지였다.
평소와 달리 재게 손을 놀리느라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볶은 김치와 두부부침 몇 조각뿐인 초라한 음식을 감히 ‘두부김치’라고
명명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무엇인가가 완성되기는 했다.
태오를 위해 내 손으로 만든 처음이자 마지막 요리였다.
우리는 어설픈 두부김치를 앞에 두고 소주 반병씩을 정확히 나눠 마셨다.
어찌된 영문인지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태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허리를 곧추 세운 자세로 방바닥에 앉아있는 태오는 왠지 모르게 불편해 보인다.
그는 늘 추리닝바지 아니면 박스팬티 차림으로 이 방을 활보하곤 했다.
스타킹도 벗지 않고 있는 나 역시, 그의 눈에는 몹시 낯설어 보일 것이다.
손을 뻗기만 하면 서로를 품에 안을 수 있는 거리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자고 가겠다고 하면 안 되겠지?”
태오가 소리 죽여 말했다.
내가 아연 긴장하는 낌새를 눈치 챘는지 그는 얼른 덧붙였다.
“농담이에요. 물론, 진심을 가득 담은.”
“….”
“실은 지금 기분이 좀 이상해요.
항상 이 공간이 그리웠거든요.
여기서 정말 행복한 추억이 많았잖아요.
여기만 생각하면 아련하고 뭉클하고 복잡했어요.
그런데 막상 이렇게 와 있으니까,
으음, 꼭 오늘 처음 온 것 같아요.
내가 진짜 여기 살았었나, 실감이 안 나요.”
그가 하는 말을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오는 결심하듯 몸을 일으켰다.
“마지막 눈, 같이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나는 그를 잡지 않았다.
건물 앞 현관까지 내려가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 사이 눈이 그쳐 있었다.
눈치 없는 사람이라면, 기습적인 봄눈이 왔다 갔다는 것도,
거리가 미묘하게 젖어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터였다.
“다음 주부터 지방 로케 들어가요.”
“...어디로?”
“강원도 홍천이래요.”
“그렇구나.”
“가기 전에 한 번 더 만나자는 말은 안 할게요.
그렇게 뻔뻔한 놈이 되기는 싫으니까.”
“….”
“그렇지만, 정말 못 견디게 힘든 일이 있을 때, 전화 한번 해도 되죠?”
나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들어가요. 문단속 잘 하고.”
“아니야. 먼저 가.”
그가 조금 머뭇거리더니 악수하듯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는 내 손등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순하고 어슴푸레한 입맞춤이었다.
돌아서 멀어져가는 태오의 뒷모습을 나는 오래 바라보았다.
다음날,
친구들을 만났을 때 이 일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얘기를 다 듣기도 전에 유희가 고함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오은수, 너 정말 너무 이기적이야!”
제6부 그림자 도시 12
나, 퇴직금을 걸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나더러 이기적이라고 핏대를 세우는 유희 역시, 이 사회의 평균적 시각
(설마 이런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에서 볼 때 몹시 이기적인 여자였다.
“넌 지금 네 욕심 때문에 태오를 힘들게 하는 거야!”
내 속내에는 아랑곳없이 유희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왜? 은수가 태오랑 다시 잘 해보겠다는 것도 아닌데.”
재인이 내 편을 들고 나섰지만 유희는 코웃음을 쳤다.
“야. 쟤 속을 진짜 모르냐?
저 먹기는 싫고 그렇다고 버리기는 아깝고,
딱 그거잖아.
너, 솔직히 말해봐. 태오 진심 알면서 딱 자르지 못하는 거,
보험 가입하는 심리랑 비슷하지?
걔랑 완전히 헤어졌다고 생각 안 하지?
옆에 영수씨 놔두고 있으면서도?”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굳이 내숭떨고 싶지는 않다.
나의 무반응을 긍정의 표시라고 받아들였는지 그녀의 음성은 더욱 커졌다.
“정말이지 친구로서 충고하는데, 딴 건 몰라도 양다리는 하지 마라. 그건 너무 나쁜 거야.”
‘양다리’라는 원초적이고 적나라한 표현까지 등장하다니. 유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은수, 네 문제가 뭔지 알아? 네 인생에 등장하는 남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야.”
“뭐?”
“잘 생각해 봐.
넌 항상 안정된 관계를 꿈꾸는데 그게 안 된다고 불평하잖아.
근데 그 이유는 남자들이 저마다 하나씩 결격사유가 있기 때문이지?
태오는 스위트하지만 장래성이 없고, 또 영수씨는 부족한 게 없어 보이지만
사실 결정적인 매력 한 방이 없고….”
어쩐지 반박할 수 없는 분석이었다.
“넌 그 남자들 단점은 다 버리고 장점만 뽑아서 하나로 모으고 싶지?
근데 사랑은 그런 게 아니지 않냐?
진짜 사랑한다면 망설이지 않을 걸.
절실하게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들 쭉 늘어놓고 문방구에서 연필 고르듯 하는 거,
난 너무 비윤리적이라고 봐.”
속사포처럼 다다다 쏘아붙이는 유희의 공격을 웬만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그만 폭발하고 말았다.
“야! 말 너무 함부로 한다.
비윤리적이라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그런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유희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순간, 내가 실수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인이 유희를 달랬다.
“기분 나빠하지 마. 은수는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닐 거야.”
“그래. 용가리나 만나면서 이 사회의 도덕기강을 무너뜨리는 나 같은 년이,
윤리가 어쩌고저쩌고 한다는 게 웃긴다는 거지?”
“….”
“괜찮아. 난 적어도 이 남자 저 남자 저울질은 안 하니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사랑, 세상의 잣대로 보면 손가락질 받겠지.
하지만 난 최소한 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있어도 다 이해하고 사랑해.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아. 그럼 된 거 아니야?
사랑의 윤리에서, 진실한 사랑 말고 또 뭐가 필요하니?”
‘조강지처 클럽’의 멤버들이 듣는다면 기절초풍할 논리였다.
할 말은 태산이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희가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막연하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녀에게 동의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들은 사랑에 대해 저마다 한 가지씩의 개인적 불문율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자신의 규칙을 타인에게 적용하려 들 때 발생한다.
자신의 편협한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기준을,
타인에게 들이대고 단죄하는 일이 가능할까.
사랑에 대한 나의 은밀한 윤리감각이 타인의 윤리감각과 충돌할 때,
그것을 굳이 이해시키고 이해 받을 필요가 있을까.
유희가 만나는 남자가 유부남이든 수도승이든 내가 터치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한 다스의 남자를 만나든 한 두름의 남자를 만나든 유희 식의 윤리로 재단되고 싶지는 않았다.
“나 먼저 갈게. 다른 약속이 있어.”
유희가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재인이 한숨을 쉬었다.
“쟤 어쩌니? 용가리가 이제 와서 딴 소린가봐.
뭐 뻔하잖아. 널 사랑하긴 하지만 가정을 쉽게 정리할 순 없다는 둥.”
“….”
“그나저나 넌 요새 어때? 쉬는 것도 슬슬 지겹지 않아?”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는 듯 재인의 말투는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주눅 비슷한 감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아직은 뭐 심심하지는 않네. 이제 좀 움직여봐야지.”
“그럼 혹시 면접 하나 안 볼래?”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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