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6부 그림자 도시 7

오늘의 쉼터 2017. 8. 9. 19:57

제6부 그림자 도시 7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실명이 아니라 ‘blue’였다.
제목 없음.
그 텅 빈 문장의 무게가 묘한 불안감과 함께 가슴을 짓눌렀다.
 
―나에요.
 
그것이 첫 문장이었다.
나는 북극에 납치된 기린처럼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나에요, 라고 말하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불현듯 귓가에 부서졌기 때문이다.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 휠을 아래로 내렸다.
 
―날이 많이 풀렸어요.
벌써, 아니, 이제야 봄인가 봐요.
잘 지내고 있는지… 바쁘다고 밥도 잘 안 챙겨 먹는 건 아니죠?
 
그런 말투로 내 밥걱정을 할 사람은, 지구상에 딱 하나뿐이다.
태오. 나는 눈꺼풀을 껌뻑였다.
읽지 않은 척, 지금이라도 얼른 메일을 닫아버릴까.
그러나 이메일에는 ‘수신확인’이라는 잔인한 기능이 있었다.
발신자는 자신이 보낸 메일을 상대방이 읽었는지 아닌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기능을 처음 고안해낸 이는, 객관적으로 증명 가능한 것만을 믿는 슬픈 실증주의자임에 분명했다.
 
태오의 편지는 담담하게 이어졌다.
 
―나는 그럭저럭 살아요.
요즘엔 이상하게 일찍 일어나게 돼요.
아침마다 강아지를 데리고 동네 뒷산에 다녀오고,
낮엔 재미없는 시나리오를 쓰고,
저녁에는 부모님 가게에 나가 요구르트나 샴푸 같은 걸 팔기도 해요.
참, 그때 말했던 새 영화의 크랭크 인 날짜가 잡혔어요.
연출부로 참여하게 되어서 이제부터는 많이 바쁠 거예요.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니터가 자꾸만 뿌예 보여서 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평온하게 지내고 있어서.
 
―언제나 자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밤에 잠이 들기 전에는 꼭 아파요.
내가 너무 못났었다는 자책감 때문에…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자기한테 고마운 일밖에 없어요.
그리고… 미안해요…
 
말줄임표들이 문장 군데군데 여백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미안해요… 하고 말하는 태오의 차분한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는 알까. 미안하다는 말도 차마 하지 못하는 가난한 내 마음을.
 
―부질없는 욕심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촬영 들어가기 전에… 딱 한번만, 보고 싶어요.
그럼 답장 기다릴게요.
 
찬 물을 한잔 들이켰다.
냉장고에 기대 선 채, 내 작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태오가 이 곳에 살았다는 흔적은 이제 아무 데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배낭이 놓였던 자리에는 빨랫감들이 아무렇게나 쌓여져 있었고,
영원한 사랑이라는 의미가 새겨진 그의 선물은 진즉에 옷장 속 어둑한 곳으로 치워졌다.
하트무늬 쿠션은, 드라이 클리닝하여 넣어둔 겨울코트들 사이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닳아가고 있을 터였다.
 
우리는 이미 헤어졌다.
그러므로 내가 답장을 쓰지 않는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전혀 없었다.
수신확인이 대수인가.
‘100% 무이자 신용 담보대출’이나 ‘신비의 약초 무상판매’ 따위의 광고메일을
실수로 열어보았을 때처럼, 손가락을 까딱하여 그의 편지를 삭제해버리면 그만이었다.
물론 최소한의 휴머니즘을 발휘한다면, 간단한 답신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미안하다. 행복해라.
 
뭐 아무래도 좋다.
그 비슷한 내용의 답장을 보낸다면, 태오에게서 다시 연락이 오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최소한의 가능성조차 잘라버리고 싶다면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정직한 고백을 할 수도 있었다.
심장에 날카로운 스크래치가 남겠지만,
태오는 분노에 치를 떨며 점퍼 속주머니에 칼을 품고 찾아올 만한 스타일의 남자는 아니었다.
 
컴퓨터 의자에 돌아와 앉았다.
‘메일쓰기’ 화면을 띄워놓고 두 손바닥을 오래도록 비볐다.
커다랗게 심호흡을 한 다음, 그에게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잘 지내는구나. 나도 그래.
 
키보드 누르는 소리가 예의바른 노크소리처럼 또각또각 울려 퍼졌다.
나에게 문을 열어주는 곳이 천국일까, 지옥일까. ‘보내기’ 버튼을 누르자마자,
콜타르처럼 검고 끈끈한 후회에 사로잡혔다.




제6부 그림자 도시 8


연인들은 어떻게 이별하는가.
이별이 결국 ‘과정’의 문제라면 세상의 연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헤어진다.
‘자, 이제부터 각자의 길을 가자’는 합의에 도달하는 커플도 있겠고,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을 수도 있을 것이며,
제3자가 끼어들어 머리칼을 쥐어뜯는 드잡이를 벌이고서야 끝을 보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나의 사랑이 완성되었다는 말은, 누군가와 영원을 기약하는 순간이 아니라
지난한 이별 여정을 통과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입에 올릴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사랑할 때보다 어쩌면 헤어질 때, 한 인간의 밑바닥이 보다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가끔은 행복하게 사랑하는 연인들보다 평화롭게 이별하는 연인들이 더 부럽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헤어진 남자와 다시 만나는 일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더구나 나에게는 이제, 새로운 남자가 있지 않은가!
 
께름칙한 혼란이 엄습한다.
시간을 돌이켜보겠다는 불순한 의지 같은 것은 없었다.
언제였던가, 영수와 함께 있을 때 태오가 보낸 문자메시지를 무시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래. 그때 나는 이미 태오에 대한 마음을 확실히 접었던 거다.
그런데 왜 태오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최소한의 의리에 관한 문제였다.
 
우리는 한때, 몹시 친밀한 사이였다.
상대방이 씹고 있던 껌까지 입으로 받아 씹을 수 있었다.
어쩌다 보니 흐지부지 멀어졌을 뿐,
서로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돌아선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내가 만약 그의 청을 차갑게 뿌리친다면, 그는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한번만. 딱 한번만 만나는 것이 그리 큰 죄가 될까?
과거의 회한을 깨끗이 털어버리고, 앞으로의 나날들을 축복해주고 오면 되는 게 아닐까?
 
내가 승낙의 메일을 보낸 약 2분 후에, 그가 수신확인을 했다는 알림이 떴다.
곧이어 답장이 도착했다.
 
-정말 고마워요. 그럼 내일 저녁 어때요?
 
-괜찮을 것 같아.
 
실시간으로 메일을 주고받고 있으니
이 방에 함께 살 때보다 태오라는 존재가 한층 더 가깝게 여겨졌다.
다음날은 일요일이었다.
일요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부터 이상하게 가슴이 쿵쿵 뛰었다.
회사를 그만둔 뒤 벌써 몇 번의 일요일이 왔다 갔다.
일주일이 ‘평일/주말’로 나눠져 있을 때는, 일요일의 무력감에 대해 알지 못했다.
매일을 일요일처럼 보내는 사람에게, 일요일은 탕수육과 자장면을 시키면
함께 따라오는 군만두처럼 느껴진다.
맛은 없으면서,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 것이다.
 
오전 내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빈속으로 ‘도전 맛 대 맛’을 보다가, 목욕용품을 챙겨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한창 붐빌 시간인데도 동네사우나 안에는 손님이 몇 없었다.
오랜만에 뜨거운 쑥탕 속에 들어가 앉았다.
머리꼭지에서부터 땀이 비 오듯 뻘뻘 흘러내렸다.
나는 입술을 앙다물고 숨을 참았다.
찰랑거리는 물 밑으로 몸이 한없이 까부라질 것 같기도 했고, 허공으로 붕 떠오를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은 영 앞으로 흐르지 않았다. 태오를 보고 싶다는 마음과, 약속장소에 나가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이 어지러이 교차했다.
 
점심 대신 목욕탕 앞에서 사온 호떡으로 요기를 하고 있는데 김영수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회사에 일이 생겨서 출근했어요. 일요일 잘 보내요.’
나는 설탕물 묻은 손가락을 움직여 ‘수고하세요.
저는 이따 저녁약속이 있어요’ 라고 답했다.
누가 뭐래도, 분명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약속시간보다 좀 서둘러 집을 나섰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를 항상 기다리게 했다.
그는 항상 웃는 얼굴로 나를 기다리곤 했다.
마지막까지, 기다리게 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역시, 태오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무릎이 조금 떨렸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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