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6부 그림자 도시 1

오늘의 쉼터 2017. 8. 6. 15:55

제6부 그림자 도시 1




“오늘, 뭐했어?”
 
이렇게 묻는 당신.
당신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그것이

“밥은 먹었어?”

라거나

“요즘 감기 무섭더라”

따위의, 별 뜻 없는 안부인사와 다를 바 없는 말이라는 것도 잘 안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의 무심한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순식간에 면도칼로 턱을 베인 느낌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 달라는 것뿐이다.
이를테면 오늘 내가 한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당당히 밝히기 어려운 나 같은 사람에게는 말이다.
 
아, 오해는 하지 마시라.
오늘 한 일이 무어라고 자랑스레 떠들어대지 못한다 뿐이지,
그렇다고 해서 오늘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니까.
 
생체리듬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회사를 그만둔 다음날 아침, 나는 여섯 시 사십 분에 눈을 떴다.
맨발을 휘적휘적 끌며 욕실로 걸어갔다.
좌변기에 앉는 것과 동시에,
이제 더 이상 이 시간에 깨어날 필요가 없다는 현실을 벼락처럼 깨달았다.
황급히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갔지만 이미 잠이 다 깨버린 뒤였다.
겸연쩍게 다시 침대를 내려왔다. 출근할 일도 없고,
남의 출근준비를 도와야 할 일도 없는 사람이 이른 아침 시간에 할 수 있는 행동은
생각보다 별로 많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켰다.
꽃샘바람이 매서우니 단단히 입고 출근하라고 겁을 주는 기상캐스터의 벌렁대는
콧구멍을 멍하니 응시했고, 십분 만에 모든 줄거리를 죄다 파악할 수 있는
아침드라마를 보았으며, 결혼한 지도 몰랐던 여자탤런트가 출연하여 경마장처럼
넓어 보이는 신혼집의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토크쇼를 시청했다.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김치찌개를 데워 ‘아점’을 때운 다음, 인터넷 서핑을 했고,
재인과 유희에게 ‘난 이제 자유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으며, 또 인터넷 서핑을 했다.
저녁으로 삼선자장면을 시켜 먹으면서 일곱 시 저녁뉴스를 보았다.
아무래도 스카이라이프를 달든지 해야겠어, 라고 고시랑대다 말고 흠칫 놀랐다.
 문밖으로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고 이렇게 하루가 가버린 것이다.
 
백수, 아니 ‘자연인’의 24시간은 너무 빠르거나 너무 더디게 흐른다.
시간의 소비라는 행위만큼 주관적인 것이 또 있을까?
눈에 보이는 생산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시간을 그저 버리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의 계획이 ‘이효리 신곡 듣기’거나 ‘이번 주 씨네21 읽기’가 전부라면 왜 안 되는가?
냉정한 가치로 환원되지 않는 시간은 진정 무의미한가? 한치의 오차도 없이
규칙적인 시계초침 소리가 째깍째깍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이런 생활을 조금만 더 하다가는 현대인의 시간 관념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논문을 쓰게 되거나
아니면 폐인이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것만은 분명했다.
 
두 번째 날 역시 똑같은 시간에 잠을 깼다.
방 안은 어둑했다.
무기력하게 기지개를 켜다가 문득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할 필요가 없다고 해서 아침에 집을 나설 필요도 없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지독히 편협한 시각이었다.
그래, 일단 나가보는 거다. 바람 부는 거리 한복판에 서서 내가 어디로도 갈 수 있는
자유의 몸임을, 소리 높여 목청껏 외치는 거다.
출근할 때는 절대로 입을 수 없던 형광핑크색의 모자 달린 봄 점퍼를 걸치고
머리에는 야구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여느 때처럼 전철은 만원이었다.
무채색 외투 속에 몸을 숨긴 채 일터로 출근하는 사람들 속에 납작하게 끼어 있으니
안도감과 이물감이 어색하게 교차했다.
문가에 서 있다가, 우르르 움직이는 인파를 따라 얼떨결에 충무로 역에 내렸다.
나와 같은 열차에서 내린 수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향해 개미떼처럼 일제히 진군했다.
저 높은 곳, 지상의 어딘가에 그들의 목적지가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공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목적지가 있다는 것에 문뜩 소름이 돋는다.
열차 한 대가 반대편 선로로 막 진입하는 중이었다.
저 객차 안에 꽉꽉 들어찬 이들 역시 모두들
‘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가야만 하는 곳’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곳은 어쩌면 내가 도망쳐 나온 세상,
나를 밀쳐내 버린 세상이었다.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시 받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원히 이 도시의 국외자가 되어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미세먼지들이 허공을 아득하게 날아다녔다.
커다랗게 심호흡을 하고 싶은데 목구멍이 자꾸만 간지러웠다.
내 낡은 운동화는 그 자리에 멈춘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제6부 그림자 도시 2


종일 빈둥대다가 어스름 해질 무렵 목욕재계를 하고 남자랑 놀러나가는 여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전의 나였다면 곧바로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오호, 팔자 좋은데. 진정 부러운 삶이로군!”

이라는 코멘트를 날려주었을 것이다.

 그 속에 다량의 비아냥거림이 내포되어있음은 물론이다.
진짜로 성실한 여자들이 들으면 기가 막혀서 입도 못 다물겠지만,
나는 내심 스스로를 꽤 성실한 부류의 여성이라고 규정해왔었다.
그 말 속에는, 남자에 매달리지 않는 여자,
경제적 부분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자립적인 여자 등등의 의미가 들어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성실한 여자’의 반대편에는 ‘한심한 여자’가 있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반대로, 남자밖에 모르는 여자, 경제적 부분을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의존적인 여자 등등의
 의미가 들어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런 여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고,
은근한 자부심을 가졌었다. 한 마디로, 너무 교만했던 거다.
이제 나는 그토록 경원해 마지않던 ‘한심한 여자’가 된 것인가.
 
김영수와의 약속시간은 일곱 시였다.
화장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링 귀걸이를 꽂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는 약속을 한 시간 늦추자고 말했다.
 
“오늘 안에 꼭 보고받아야 할 사안이 있는데 담당자가 좀 늦네요. 정말 미안해요.”
 
“아니에요…. 천천히 오세요.”
 
다소곳하게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내 귀에도 가증스럽게 들렸다.
보석함을 뒤엎고는 거기 있는 모든 귀걸이들을 죄다 한번씩 귓불에
밀어 넣었다 뺐다 하며 시간을 때웠다.
며칠 전,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말을 어렵사리 꺼냈을 때,
김영수가 보였던 반응은 의외였다.
그의 첫 마디는

“왜 의논 안 했어요?”

였다.
비난의 기미는 없었다.
오히려 좀 섭섭해 하는 기색이 묻어났기 때문에 나는 멍해졌다.
 
“아니. 너무 갑작스럽게 결정한 일이고, 또…”
 
“은수씨한테 중요한 일이잖아요.
내가 큰 도움은 못 돼도 이런 저런 답답한 얘기들은 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어쨌든 잘 했어요.
은수씨가 어렵게 내린 결정일 테니 틀림없이 좋은 일만 있을 거예요.”
 
텅빈 위장에 흰 죽을 흘려보낸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뜨뜻하게 젖어왔다.
그런데 이 남자, 설마 며칠 만에 변한 건 아니겠지?
내가 백조라고 슬슬 무시하기 시작한 건 아니겠지?
하는 일 없이 오직 남자만을 바라보는 여자=만만한 여자.
이것은 남녀관계의 오래된 불가지론이었다.
일 때문에 바쁜 남자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구차한 신세로 전락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최대한 느릿느릿 약속장소로 나갔다.
연인들로 북적이는 패밀리레스토랑에 들어서는 순간, 다시 전화가 왔다.
 
“정말 너무 너무 미안해요.
지금 출발하니까 삼십 분만 기다리면 될 거예요.
제일 맛있는 거 먹고 있어요.”
 
구석자리에 홀로 앉아 지난달 보그를 절반 가까이 읽을 동안 김영수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아홉 시가 다 되어서야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왜 안 먹고 있어요? 정말 배고팠겠다.”
 
“나 혼자 우걱우걱 처먹고 있었어야 네 속이 시원하겠니?”

라고 큰소리치지는 않았다.

그저 입술을 꼭 다물고 그의 시선을 외면했을 뿐이다.
토라진 여자 열 명 중에 일곱 명 정도가 자신의 화를 표출하는 방법이었다.
일부러 늦지 않았다는 사실을 번연히 알면서도 쉽게 화를 풀 수가 없는 것은
내 알량한 자격지심 탓일지도 모른다.
 
“와, 은수씨 무섭네.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아요?
이번 한번만 봐줘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는 메뉴판에서 제일 비싼 음식 두 개를 골라 주문했다.
그러면 내 기분이 좀 풀리리라고 머리를 굴렸나 본데,
그의 판단은 어긋나지 않았다.
밥을 먹고 나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주차장으로 나와 그의 자동차에 올라탔다.
 
“우리 이제 어디 갈까요?”
 
“...아무 데나요.”
 
“그런 말이 제일 어렵더라.
얘기해 봐요.
안 그러면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릴 거예요.”
 
“…”
 
“흐음. 그럼 출발해 볼까요?”
 
한강을 건너 올림픽 대로로 진입할 때까지 그는 진짜로 차를 멈추지 않았다.
올림픽대로의 소통은 원활했다.
오른 편으로 잠실종합경기장이 스쳐 지나갔다.
 
“이대로 쭉 가면 미사리 나오는데… 거기서 조금 더 가면 양수리고…”
 
물론 그렇긴 하지만,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지?
 
“은수씨, 우리 드라이브 할래요?”
 
“지금 하고 있잖아요.”
 
김영수가 허허 웃었다. 길은 끝없이 뻗어있는 듯 보였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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