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5부 연인들의 비밀 15

오늘의 쉼터 2017. 8. 5. 16:55

제5부 연인들의 비밀 15




“부탁인데, 얘들아, 그렇게 불쌍해 죽겠다는 표정 짓지 마.
너희들 마음 알아. 불쌍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지?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나, 후회는 안 해. 후회가 다 뭐니?
발이 푹푹 빠지는 펄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기분인걸.
 
이틀째 잠을 못자는 건 그동안 너무 탈진해버렸기 때문일 거야.
대체 뭘 믿고 그렇게 낙관적이었는지 몰라. 결혼 준비할 때 분명히,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신호등이 깜빡였거든. 그런데도 멈추지 못했어.
에라, 모르겠다,
그냥 풍덩 뛰어들었지.
다른 사람들도 다들 멀쩡히 잘 사니까
어디 하나 모자란 데 없는 내가 불행해질 이유 따위 없으리라 생각했나봐.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내 모습을 어릴 때부터 줄곧 상상해왔어.
결혼에 대해서도 남들만큼은 진지하게 고민해왔고.
그런데, 글쎄, 결혼식이 끝난 다음날에야 깨달은 거 있지?
결혼에 관한 내 고민은 온통 결혼식 자체에 쏠려 있었을 뿐.
정작 결혼생활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는 냉정히 따져 본 적 없다는 걸.
 
그 남자도 나랑 똑같았다니 정말 황당하지?
그 사람이 그러더라. 아무려면 어떠랴 했대.
나이 차면 누구나 결혼을 하고 또 대충들 맞추며 사니까 자기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대.
그렇지만, 막상 닥쳐보니 그게 아니더래.
나랑 한 달 살아보니까 자기가 인생을 휙 던져버렸다는 걸 깨달았다나.
허, 참, 죽어도 이해할 수 없어서 죽이고 싶었던 그 남자가 그제야 이해되더라.
내 입장에선 일방적인 가해자라고만 여겼던 남편인데,
이 남자도 나름대로 그동안 참 힘들었겠다 싶더라고. 여기서 관두자.
결혼하고 처음으로 둘이 의기투합했지.
 
뭐? 그 마음으로 그냥 정붙이고 살지 그랬느냐고?
후우, 그 인간, 마지막 멘트가 뭐였는지 아니?
글쎄, ‘기왕 이렇게 된 거, 끝으로 우리 한 번 할래? 쿨하고 화끈하게!’ 그러더라.
미운 정마저 딱 떨어지게 해줘서 눈물나게 고마웠어.
혼인신고 안 했으니 서류 정리할 것도 없어.
자기 짐 챙겨가지고 그 사람 오늘 이사 나갔을 거야.
앞으로,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지금은 그냥 푹 자고 싶어.
오늘은 제발 딱 한 시간만이라도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야, 하재인. 왜 괜히 오버하고 난리야.
너, 하나도 안 불쌍해. 차라리 부럽다.
앞으론 왜 시집 안 가느냐는 각계각층의 오지랖에 들볶이지 않을 거 아니야?
한 번 갔다 왔는데요, 라고 하면 다들 깨갱하고 나가떨어질 테니까.
사실 결혼이라는 게 별 거니?
이혼은 또 대수고? 어차피 인간이 만들어 낸 제도인데,
정작 인간들은 그 속에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꼼짝달싹 못하는 모양새가 너무 우스워.
용가리…좋아, 솔직하게 말할게. 은수가 짐작하는 대로야.
이혼, 아직 못 했대. …아아, 오은수, 그렇게 끔찍한 얼굴 하지 마.
걔 그렇게 질 나쁜 놈 아니야.
일부러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래. 이혼할 예정인건 맞는데,
아직 도장을 안 찍었을 뿐이래. 애 낳고 살면서 재인이네처럼
심플하게 갈라서기가 쉬운 일은 아니잖아.
정리할 거래, 꼭. …너무 뻔한 레퍼토리라고?
 
…나도 알아. 그런데, 어쩔 수가 없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봐주고 싶어.
그럼 안 되는 거니? 내가 굉장히 나쁜 짓 저지르는 거니?
나, 이대로 포기할 수가 없어.
그저 이렇게 조금만 더 가보면 안 될까?
끝에 뭐가 있대도 좋아.
지금은 도저히 멈출 수가 없는 걸. 이대로 헤어지자고 결심하면,
날카로운 칼날로 심장을 얇게 포 뜨는 것처럼 괴로워서 미칠 것 같은 걸.
눈 딱 감고 한 번만 나쁜 년 하면 안 될까?”
 
나는 무기력하게 친구들의 고백을 들었다.
두 달도 채 못 채우고 결혼생활을 때려치워 버린 ‘참을 성 없는 그녀’와,
유부남이 되어 나타난 옛 애인을 끊어내지 못하는 ‘부도덕한 그녀’.
나는 그녀들의 어깨를 도닥여줄 수도 있고, 함께 눈물 흘려줄 수도 있었다.
머리끄덩이를 잡고 정신차리라고 다그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윤리적으로 단죄하지는 못하겠다.
철없고 개념 없고 바보 같고 이기적인 그 애들을 누군가 손가락질한다면,
그 손가락을 막아줄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이 내가 친구들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뭘 하더라도 상처는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겠니?”
 
끝내 입 밖에 내지 못한 그 말은 어쩌면 나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서해안의 밤이 속절없이 깊어갔다.
밤바다의 파도치는 소리는 여기까지 들려오지 않았다.
곧 날이 밝을 터였다.
우리는 다시, 두고 온 도시로 돌아가야 했다.





제5부 연인들의 비밀 16


서울은 안녕했다.
나만 제외한다면 언제나 안녕한 도시였으므로 별로 놀라울 것도 없었다.
그 한 귀퉁이에 숨겨진 내 작은 방도 어디로 사라지지 않고 거기 있었다.
전화기는 던져두고 간대로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액정화면에 ‘부재중 전화 12통’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회사, 김영수, 김영수, 김영수, 회사, 김영수, 김영수...
콧구멍이 벌름거려지는 결과였다.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천장 벽지가 누렇게 바래 가고 있었다.
무단결근 이틀째. 처리해야 할 일들이 첩첩이 쌓여 있을 터였다.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나, 어쩌지? 마음에 대고 가만가만 묻는다.
마음이 반문한다. 넌, 지겹지도 않니?
 
왜 아니겠는가. 지겹다.
지겨워서 까무러칠 것만 같다.
새로 산 하이힐을 절뚝이며 첫 직장에 출근한 이래, 한 달도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일요일 밤에는 과음을 삼갔고, 월요일 아침에는 지구의 자전이 멈추기를 바랐으며,
월요일 오후에는 아침에 바라던 게 무엇이었는지도 까먹을 정도로 바빴다.
아침 아홉시와 밤 아홉시 사이에는 대변도 마렵지 않았다.
몸의 사이클조차 컨베이어 벨트의 나사처럼 팽팽히 조여져 살아왔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내 어릴 때의 꿈도 이렇게 지지한 사무원으로 늙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특별한 꿈이 있었던 기억도 나지 않는다.
꿈. 간절히 이루고 싶은 미래, 헤엄쳐 닿고 싶은 기슭.
사람들은 모두 다 한가지씩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듯하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태오,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은 유희.
우거지 왕국을 세우겠다는 희망으로 부풀어 터질 것 같은 안 이사도 있다.
꿈은 인간을 생에 가뿐히 헌신하도록 만드는 기적의 동력처럼 보인다.
단 한 사람, 나의 경우를 빼면 말이다.
도무지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이 내 청춘은 끝나가고 있었다.
아니, 애 저녁에 벌써 종 쳐버린 건가?
 
해가 지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김영수와 늦은 저녁으로 칼국수를 먹었다.
 
“어딜 가면 간다고 말하지 그랬어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김영수는 짐짓 화를 억누르는 것 같다.
이 남자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두방망이질 쳐야 정상일 텐데
웬일인지 별 감흥이 일지 않는다.
시뻘건 고춧가루로 범벅된 김치를 뽀얀 면발 위에 척 얹어 입속에 밀어 넣고 있는 남자를
나는 새삼스런 상념에 잠겨 바라보았다.
나에 대한 이 남자의 마음은 어떤 빛깔일까? ‘남들처럼!’을 인생의 캐치프레이즈로
높이 치켜들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혹시 그는 오은수라는 여자가 보유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외적 조건들에 편안함을 느끼는 건 아닐까?
키 보통, 몸무게 보통, 얼굴 보통, 가슴크기 보통, 옷 입는 센스 보통, 학벌 보통,
집안사정 보통. 어딜 내놔도 튀지 않고 인파 속에 파묻히는 여자라는 점 때문에
안심하는 건 아닐까? 피장파장이었다.
나 역시 바로 그런 이유로 이 남자를 좋아하니까.
 
이 남자에게

“친구가 이혼을 했어요, 또 다른 친구는 유부남을 사귀고요”

라고 조잘조잘 털어놓을 수는 없다.
내심 여성잡지의 과장광고처럼 통속적인 스토리라고 경멸어린 시선을 보낼 가능성이 농후했다.
나에게 바람 난 모친이 있다는 사실도, 얼마 전까지 일곱 살 연하의 남자와 같이 살았다는 사실도,
회사에서 감봉처분을 받았다는 사실도 영원히 말할 수 없다.
내 평범함 뒤에 숨겨진 남루한 비밀들에 대해 알게 된다면 이 남자의 호의가 어떻게 변할지 두려웠다.
 
“영수씨는 어릴 때 꿈이 뭐였어요?”
 
화제를 바꾸기 위해 물은 말에, 그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첫 몽정의 추억을 질문받은 것 마냥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남자아이들 꿈이란 게 대개 대통령이나 과학자, 아니면 우주비행사. 맞죠?
영수씨도 그중 하나였어요?”
 
“아, 뭐, 그렇죠.”
 
꿈이 없었다는 것 또한 나와 닮은꼴인가. 반사적으로, 태오가 떠올랐다.
그는 여덟 살 때부터 만화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고 말하곤 했다.
새 남자를 앞에 두고 옛 남자를 떠올리는 건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새로 시작하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몸속의 피를 몽땅 교체하고 싶다.
육체만이 아니라 아예 나라는 존재 자체를 바꾸고 싶다.
애타는 열망이 강렬하게 솟구쳐 영혼을 뒤흔들었다.
시작하려면 먼저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그날 밤, 나는 사직서를 썼다.




제5부 연인들의 비밀 17


‘상기 본인은 개인사정으로 인해 사직코자 하오니 재가하여 주십시오.’
 
도장에 입김을 하- 불어넣어 꾹 내리찍는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가 파 준 상아도장이다.
이 물건이 이런 용도로 쓰이리라곤 아버지도 나도 짐작지 못했다.
당시에 어림으로 헤아리지 못한 일은 그밖에도 많았다.
서른두 살이라는 나이에 요 모양 요 꼴로 제도권의 변두리를 두리번거리고 있을 줄을
갓 스물에 어찌 알았으랴.
하긴 그땐 서른두 살이라는 흐리멍덩한 나이까지 살아있을지도 몰랐다.
 
동안 몇 차례의 실패한 연애들을 겪었다.
나의 옛 연인들은 제각각 다양한 결격사유들을 비밀처럼 숨기고 있었다.
그런데 나와 헤어진 뒤 그들 대부분이 결혼하여 멀쩡한 결혼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내게는 치명적이었던 그 남자들의 문제를,
다른 여자들은 둥글게 감싸 안고 살아가고 있는 거다.
나의 연애들이 무위로 돌아간 것은 그 남자들의 사정 때문이 아니라
나의 사정 때문임을 이제는 알겠다.
선혈처럼 붉은 인주 자국을 내려다보며 나는 가느다랗게 몸을 떨었다.
이 사직서 한 장에 연루되어 있는 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그 모두를 혼자서 감당해야만 했다.
 
냉혹한 표정으로 휙 내던지리라 각오했건만,
막상 황 부장과 눈이 마주치자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사직서 재중’이라고 쓴 흰 봉투를 공손히 내밀었다.
오래지 않아, 사장이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사장은 흰 종이 한 장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 사표가 틀림없었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흠, 어려운 결정했네.”
 
어려운 결정이라는 말은 너무 어렵다.
세상엔 좋은 결정과 나쁜 결정만 있을 뿐이다.
나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움직임이 너무 작아서 사장은 알아채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임금을 체불한 적도 없고 성희롱을 자행한 적도 없으니,
그는 그다지 악독한 사업주는 아니었다.
 
“이유는 묻지 않을게. 그동안 오 대리도 여러 가지로 힘들었겠지.”
 
사표를 수리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반려하겠다는 건지 헷갈렸다.
사장이 내 사직서를 착착 접어 도로 봉투 안에 넣었다.
 
“권고사직으로 하지. 실업급여 받아야 하잖아.”
 
대단한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한 말투다.
 
“…고맙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내가 참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형식적 절차는 허무하도록 쉽고 간단하게 끝났다.
흥건한 이별은 원하지 않았다.
마지막 출근 날, 팀 사람들과 점심회식을 겸해 간소한 송별식을 했다.
 
“업계 안팎으로 조용하던데 안 이사는 언제 움직인대? 자기 그쪽으로 합류하는 거지?”
 
선배가 도저히 더는 못 참겠다는 눈치를 뚝뚝 떨어뜨리며 귀엣말로 물어왔다.
우거지 프로젝트는 아직 소문이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거지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장 선배는 바닥을 구르며 웃어 젖히겠지?
안 이사의 꿈이 저잣거리의 코미디 취급을 받는 건, 어쩐지 싫다.
 
“당분간 좀 쉬려고요.
그러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천천히 찾아봐야죠.”
 
진심으로, 정직한 말이었다.
대각선에 앉은 이민정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향해 담담한 미소를 보냈다.
남겨지는 자보다야 떠나는 자가 우월한 법이라고, 그렇게 우겨보기로 한다.
사무실, 내 책상서랍 속에는 가지고 나올 만한 변변한 물건이 없었다.
꼬질꼬질 때가 끼고 군데군데 커피얼룩이 묻어 있는 키보드를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2년여 동안 꼬리뼈가 저리도록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었던 초라한 의자와도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회사 앞 큰길에 선다.
매일 다니던 길이 참으로 낯설다.
버스를 타고 명동의 백화점으로 간다.
평일 대낮의 백화점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어리둥절해진다.
티파니 매장에서 목걸이를 골라 든다.
하트모양의 펜던트가 옆으로 기우뚱 쓰러져 있는 이 목걸이의 이름은 ‘오픈하트’다.
기울어진 하트가 내 목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웨이트리스가 “몇 분이세요?” 라고 물어왔다.
 
“혼잔데요. 저 혼자예요.”
 
나는 가만히 되뇌었다.
안심스테이크가 포함된 디너코스를 주문하고, 하우스와인도 한 잔 시켰다.
나를 위해 이 정도의 작은 선물은 해줄 수 있었다.
비통할 것도 없고 죄책감을 가질 것도 없다.
나는 쉬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쉴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은 내 자발적 의지의 산물이다.
와인은 향긋했고 스테이크의 육질은 보드라웠다.
나는 의연한 포즈로 고기를 꼭꼭 씹었다.
눈물 같은 것은 나지 않았다.
불행하지는 않다고, 간신히 생각했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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