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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연인들의 비밀 13

오늘의 쉼터 2017. 8. 5. 16:43

제5부 연인들의 비밀 13




월요일 아침은 사채 이자 불입날짜처럼 어김없이 돌아온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잤어?”
 
재인이다. 나는 눈을 비볐다.
 여섯 시 반. 아직 이십 분은 더 이불 속에서 미적거릴 여유가 있었지만,
재인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후딱 정신이 들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응.”
 
겁이 덜컥 났다.
 
“엉? 뭔데?”
 
“전화로 말하긴 좀 그렇고, 지금 빨리 밖으로 나와 봐.”
 
녀가 무채색 음성으로 또박또박 말했으므로 한층 더 불안해졌다.
산발이 된 머리는 고무줄로 질끈 묶고, 입고 있던 추리닝에 카디건을 걸쳤다.
지갑 하나만 달랑 들고 뛰어나가면서 내 친구에게 닥쳐온 불행이 부디,
 껌을 씹다 혓바닥을 함께 씹었거나 아니면 길을 걷다
느닷없이 새똥을 맞은 정도이기를 기도했다.
이른 아침의 맵싸한 공기가 코끝에 닿았다.
재인의 빨간 자동차는 골목 입구에 세워져있었다.
운전석 창문이 쓰윽 내려가면서, 알이 노란 선글라스를 쓴 재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일단 타.”
 
조수석의 문을 여는 순간, 좌석을 뒤로 젖히고 있던 유희가 휙 몸을 일으켰다.
 
“서프라이즈!!”
 
“어휴, 깜짝이야. 어떻게 된 거야?”
 
“애 떨어지는 줄 알았지? 흐흐.”
 
유희의 짓궂은 웃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이게 지금 꿈인지 현실인지 도무지 오리무중이었다.
뒷자리에는 제법 큼지막한 보스턴백이 실려 있었다.
 
“얘들이 꼭두새벽부터 쌍으로 미쳤나? 가출이라도 했어?”
 
대답 대신, 재인은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야, 어디 가는 거야? 나 출근해야 돼!”
 
유희가 힐끔 뒤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매일 가는 회사 어쩌다 하루쯤 쉬어주는 것도 예의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뿐더러 오장육부가 뒤집어지는 얘기였다.
 
“야, 빨리 내려줘. 나, 얼른 들어가서 머리 감아야 돼. 삼일째 안 감았다고.
아, 진짜, 계속 가면 어떡해? 전화기도 안 갖고 왔는데… 지각하면 진짜 잘린단 말이야!”
 
내 절규소리에 아랑곳없이 재인의 빨간 자동차는 동네 어귀를 빠르게 벗어났다.
재인은 오직 앞만 보고 운전했다.
유희가 슬그머니 고개를 뒤로 돌리더니 물고기처럼 소리 없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이.옹.앙.대.’
 
‘뭐?’
 
‘이.혼.한.다.고.’
 
매사의 모든 중대한 결정들은 아주 짧고 엉뚱한 한 순간에 내려졌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출근을 포기하고 재인의 곁을 택한 것처럼.
남들 눈에는 우스꽝스러워 보일 테지만 내게는 카이사르를 찔러야했던 브루투스의 칼끝처럼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
자, 다시 한번 말하겠다.
믿어지는가? 오늘 나는, 회사를 재낄 것이다!
월요일 아침 일곱 시, 서울특별시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몇 가지 사건 중에서
아마도 가장 쇼킹한 내용이리라.
물론 회사가 나에게 ‘오은수, 너마저!’ 라고 바르르 떨는지는 알 수 없었다.
 
서해안 고속도로 한 가운데에서, 유희가 우리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아침 회의 준비로 한창 분주할 시간이었다.

“저, 여기는 오은수 씨 집인데요”

라고 말하는 유희의 목소리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은수가 몸이 좀 아파서 병원에 들어갔어요.
네,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글쎄요,
한 이틀 걸릴 것 같은데요.”
 
허허허. 전화를 받은 직원이 누구인진 모르지만,
얼이 빠져 대꾸도 못하고 있을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내 방 침대에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나온 휴대폰이 곧 열심히 울어댈 터였다.
 
“우리 꼭 옛날에 자율학습 땡땡이치던 거 같아?”
 
유희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재인이 작게 웃었다.
이 차에 탄 뒤 처음 듣는 그녀의 웃음 소리였다.
나도 따라 웃었다.
웃지 않으면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이혼에도 숙려기간이라는 게 있다지 않던가.
이 돌발적인 상황이, 회사나 나나 서로의 존재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어쨌든 나오니까 너무 좋다. 꼭 델마와 루이스, 그 영화 같아.”
 
유희가 나른하게 기지개를 켜며 조잘댔다.
유리차창 밖으로 흰 구름들이 뭉게뭉게 우리를 따라 흘렀다.
 
“우리는 세 명인데 어떻게 델마와 루이스냐?”
 
“왜애? 나는 델마, 재인이가 루이스, 은수 너는 ‘와’ 하면 되겠다. 델마 ‘와’ 루이스.”
 
우리가 달려가는 곳이 설마 절벽은 아니겠지?




제5부 연인들의 비밀 14




봄이 당도하지 않은 해변은 황량했다.
바다로 나가는 길목에 누가 나무장승을 세워놓았을까.
다섯 살짜리 사내아이 키 높이의 장승은 물이 밀려들 때는
 바다에 잠긴 채, 물이 쓸려갈 때는 몸을 드러낸 채 온종일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바람이 휭휭 불어 머리칼이 휘날렸다.
 버려진 검정색 비닐봉지도 춤추듯 나부꼈다.
바다 앞에 한 줄로 서서 우리는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때론 어떤 언어도 침묵을 압도하지 못한다.
 서해안의 이름 모를 작은 해변 풍경 속으로,
우리들은 낡은 표지판처럼 묵묵히 잠겨들었다.
 
차 안에 돌아와 언 몸을 녹이고 있는데 유희가 돌연 제안했다.
 
“우리 이런 데 내려와 사는 건 어때? 셋이 같이.”
 
“여기서 뭘 하고 사니?”
 
재인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잘 안 들렸다.
 
“설마 할 게 없겠어? 그래. 횟집 열면 되겠다. 서울처녀횟집! 이름, 죽이지?”
 
내가 자못 씩씩하게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살지 못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으아, 너무 좋아. 미인계로 일단 동네 아저씨들부터 공략하고…”

 

유희가 신나서 맞장구쳤다.
맨 먼저 눈에 띄는 횟집의 유리문을 드르륵 밀면서도 우리는,
사전조사 차원이야, 라고 농담 같은 진담을 주고받았다.
식당 주인은 사십대 부부였다.
앞치마 두른 아내가 밑반찬을 날라 오고, 고무장화 신은 남편이 회를 쳤다.
열 두어 살쯤 돼 보이는 그 집 아들아이는 홀 한 구석의 테이블에
수학문제집을 활짝 펼쳐 놓고는 열심히 풀고 있었다.
그곳은 한 식구들의 생활 터였다.
유희도, 나도, 그쯤에서 입을 닫았다.
 
화장실에 가는 길에 유희의 전화를 빌려 음성사서함을 확인했다.
사서함에는 아무 것도 남겨져있지 않았다.
나 하나 없다고 뒤집어질 만큼 허투룬 서울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거대하고 완벽한 도시 서울에서 나는 시청 앞 광장의 잔디 한 포기보다 못한 존재였음이 자명했다.
김영수에게 전화를 걸어 내 부재를 알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회사에 멀쩡히 잘 출근해있을 줄 아는 사람을 실망시키는 것도 예의는 아니다.
또한 내 예고 없는 일탈을 그 반듯한 남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걱정스럽기도 했다.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고 나니 뼈마디가 혼곤해져 왔다.
 
“저, 서울 가려면 지금 출발하는 게 낫지 않아? 내일은 진짜 출근해야 된단 말이야.”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내가, 나도 싫었다. 재인이 짧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오늘만 같이 있어주면 안 될까? ...실은, 나, 이틀 째 전혀 못 자고 있거든.”
 
식당 주인남자가 근처에 멋진 펜션이 있다며 친절하게 약도를 그려주었다.
그러나 근처를 아무리 빙빙 돌아봐도 폭 좁은 일차선 도로는
또 다른 도로와 이어질 뿐 우리가 찾는 곳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족히 한 시간은 헤맨 것 같았다.
우리가 도착하려는 곳이 혹시 지상에 없는 곳은 아닐까 스멀스멀 의심이 들기 시작했을 때,
유희가 마침내 차창 밖 먼 곳을 가리켰다.
 
“저기다!”
 
외벽을 크림색으로 칠한 아담한 이층짜리 건물이었다.
이층 베란다에 서면 먼 바다가 한눈에 잡힐 것 같았다.
마치 그래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꺄아- 비명을 질러대며
차 밖으로 깡충깡충 뛰어나갔다.
 
“죄송합니다. 예약을 주셨어야죠.
오늘은 단체 손님들이 오시기로 해서 방이 없습니다.”
 
우리는 패잔병처럼 조용히 물러나왔다.
재인이 갑자기 건물 옆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건물의 흰 벽을, 그녀는 발로 뻥 걷어찼다.
우리를 받아주지 않는 벽 앞에 차례로 선 우리 셋은 오줌을 갈기듯 힘껏 발바닥을 던졌다.
퍽 퍽 퍽. 우리의 검은 발자국들이 불에 달군 낙인처럼 아로 새겨졌기를 바란다.
 
멀지 않은 곳에 모텔이 있었다.
 텐트 천으로 만든 휘장이 펄럭이며,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차들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해주었다.
해도 지기 전에 웬 여자 셋이 들이닥치자 카운터의 아저씨는 설핏 당황하는 눈치였다.

“주무시고 가신다고요?”

라고 거듭 확인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한 쌍의 중년남녀가 열쇠를 반환하며 우리 쪽을 힐끔댔다.
방 안은 전형적인 B급 러브호텔 분위기였다.
옆방에서 여자의 교성이 들려왔다.
 
“허, 참, 저 언니 꽤나 오버하시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나는 심드렁한 척 중얼거렸다.
유희가 강하게 반박했다.
 
“야. 진짜 좋아 죽는지 또 아냐?
짐작만으로 아는 척하지 말 것.
그 입장이 돼보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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