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연인들의 비밀 9
“같이 들어가자고요, 여길?”
“안 그러면 뭘 하려고요? 앞으로 한 시간은 족히 걸릴 텐데.”
예식장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다니.
“어디 pc방에라도 가 있거나 아님 근처 커피숍에서 기다릴게요.”
“시장하지 않아요?
들어가서 같이 밥 먹어요.
남의 잔칫집에 일부러 와서 축하해주기도 하는데.”
김영수는 꽤 강경하게 나왔다.
하긴 여기까지 쭐레쭐레 따라 와 놓고선 굳이 안 들어가겠고
빡빡 우기는 것도 매우 촌스러워 보이긴 한다.
식장 안에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이유는 단순했다.
⑴나는 미혼여성이다.
⑵김영수와 나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⑶아마 잘 안 될 가능성이 높다.
⑷세상은 좁다.
이렇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피해의식의 연쇄반응이 일어나는 거다.
이럴 때 내가 뼛속까지 한국여자로 사회화되었다는 자각이 들어 섬뜩해진다.
“좋아요. 신부 얼마나 예쁜지 한번 봐야겠다.”
그래. 쿨해지기로 한다.
까짓, 하려면 못할 것도 없다.
김영수의 표정이 일순 환해졌다.
로비에서 김영수가 신랑과 악수를 나누고 축의금을 접수시킬 동안
나는 그의 뒤편에 멀찌감치 떨어져 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울이나 대전이나, 부산이나 광주나 똑같다.
아마 제주도 역시 마찬가지일 테지.
대한민국 방방곡곡마다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것은
세븐일레븐이나 엘지25시 같은 편의점 간판만은 아니다.
결혼식장 입구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알록달록한 화환들.
분홍리본에는 ‘XX중학교 재경 동문회 일동’ 이나 ‘△△유통 대표이사’ 따위의 글씨가
요란한 궁서체가 쓰여 있다.
한 무리의 사람들 속에 섞여 들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김영수가 손짓으로 나를 부른다.
“은수 씨, 인사해요. 여긴 우리 회사 직원들. 나한테는 가족 같은 분들이에요.”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시선들이 일제히 내 얼굴에 꽂힌다.
바로 이런 순간을 염려했다.
나는 상냥한 볼우물을 만들며 생긋 웃었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다소곳하고 참하게 보여 나쁠 건 또 무엇이랴.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미인이세요.”
마흔쯤으로 보이는 남자가 말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차분한 표정을 가진, 이마가 살짝 벗겨질락 말락 하는 그는 ‘조 이사’ 라고 했다.
우리 회사의 우거지 마니아 안 이사와 비교해본다면 놀랍도록 핸섬했다.
말씀 많이 들었다니. 예의상 해 보는 말 같지는 않다.
김영수는 수줍어하며 부인하기는커녕, 사람 좋은 미소를 만면에 머금고 있었다.
머릿속에 거품이 부글댔다.
어떻게 된 일일까.
김영수가 총에 맞지 않은 이상,
회사직원을 붙들고 내 얘기를 늘어놓았을 리는 없다고 사료된다.
그러니까 결국 심장을 관통 당했다는 얘기일지도 모른다.
오은수가 쏜 사랑의 총알에.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다.
솔직히 기분 나쁠 리가 있겠는가.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나에 대한 남자의 마음이 훨씬 더 진지하다는데.
당에서 습관적으로 갈비탕에 밥을 말고 나서야 후회가 되었다.
국에 만 밥을 퍼 먹는 것보다,
밥 따로 국 따로 먹는 것이 조금이라도 더 조신해 보였을 터다.
입을 조그맣게 오물거리면서, 마치 ‘젊은 사장의 음전한 약혼녀’ 역할을 맡은
연극배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에 올라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김영수 역시 ‘음전한 약혼녀를 동반한 젊은 사장’의 역할을 맡아 공연을 무사히 끝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타인의 눈에 스스로가 ‘정상적이고 반듯한 커플’에 속해 있다고 여겨질 때 여자는
미묘한 자긍심을 느낀다.
남자들도 그럴까?
“저희는 사장님이 여자를 싫어하시는 줄 알았어요.”
화장실에 함께 가게 된 여직원 하나가 제 딴에는 농담이라는 듯 소곤거렸다.
“네?”
“아니, 결혼할 생각도 없으신 것 같고, 통 여자분도 안 만나시고 그래서 다들 걱정했거든요. 그
런데 아까 조 이사님이 오늘 사장님 여자친구 분도 같이 오신다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세요.”
돌아오는 길엔 고즈넉한 정적이 흘렀다.
고속도로의 소통이 원활했지만 김영수는 100km/h를 넘지 않았다.
그는 항상 규정 속도를 엄격하게 준수하는 남자다.
집 앞에 도착하여 조수석에서 내리려는 나를 향해, 그 남자는 오른손을 쑥 내밀었다.
제5부 연인들의 비밀 10
겨우 손을 잡았을 뿐이다.
남자와 손을 잡은 것이 난생 처음도 아니다.
허허, 처음이라니.
친애하는 나의 옛 연인들이 들으면 뒷목을 부여잡고 쓰러지겠다.
그런데 묘하다. 내 손을 김영수의 손 안에 파묻었을 때 느꼈던
그 단단하고 나른한 감촉이 다음 날까지도 뚜렷하게 남아 지워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 요새 너무 외로웠던가보다.
-좀 이상하지 않아?
메신저에서 만난 유희는 대뜸 뜨악해하는 눈치였다.
-뭐가?
-너희 혹시 잤니?
자기 일은 어설픈 주제에 남의 일에 관해서라면 항상 예리하게 정곡을 찌르는 그녀다.
나는 깨끗이 승복한다.
-아니.
-그럴 줄 알았어. 진도 전혀 안 나갔지?
-꼭 그런 건 아니야. 손은 잡았고, 또 아주 빠르진 않지만 그런대로...
-장난 하냐? 요즘엔 초등학생들이 연애해도 손은 다 잡거든. 아니다. 그 이상도 할 걸.
슬슬 기분이 상하려고 했다.
-그 사람, 함부로 행동하는 스타일 아니야. 신중하고 생각이 많아서 그래.
-어머, 역성드는 것 좀 봐. 아니라더니, 은근히 좋아하나 봐?
-아 씨.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냥 만나는 거야. 안정되고 싶지만 사랑에 빠지긴 싫어서.
가 뱉어놓고도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얘기였다.
지금 그를 놓치면 내 인생에 다시는 이만한 레벨의 남자는 등장하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다는 고백은 차마 하지 못했다.
유희는 김영수의 행동이 수상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직 별 사이도 아닌 여자를 일부러 지방까지 데려가 대외적으로 공개하는 것이,
꼭 자기도 여자 만날 수 있다고 시위하는 모습으로 비춰진다는 거였다.
-야, 그 남자 혹시 게이 아니야?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오은수, 소원 성취했네.
너, 전에 영화 보면서 편한 게이친구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은 가지고 있지 않다.
나와 다른 취향을 가진 사람들일 뿐이라고 생각해왔다.
미국영화나 시트콤드라마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대개 게이 남자친구들을 곁에 두고 있다.
그들은 남자이지만 다정하고 사려 깊은 성품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밤 새워 수다를 떨 수도 있으며,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잠재적 경쟁자가 될 가능성도 없을뿐더러,
갑작스런 사랑고백을 해 우정을 카오스에 빠트릴 염려도 없고,
같이 잘 놀다가 어느 날 결혼제도 속으로 홀연히 뛰어 들어 남아있는 자에게
지독한 배신감을 선사할 우려도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싱글 여성의 베스트프렌드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이는 것이다.
물론 실제 ‘그들’은 그 모든 것이 ‘그녀들’의 판타지일 뿐이라고 불쾌해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만약 김영수가 동성애자라면,
그렇다면, 나는 꿈꿨던 것처럼 그를 ‘좋은 친구’로 삼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아쉬움과 섭섭함이 밀려든다.
자기기만의 덫에 발목 잡힌 채 비틀거리고 있는 스스로가 당혹스럽다.
-나중에 낭패 보지 말고 얼른 그것부터 확인해 봐.
유희의 확신에 찬 추측을, 나는 왜 부정하지 못하는가.
-어떻게?
-낸들 아나. 술 먹이고 확 자빠뜨려보던가 ㅎㅎ
의미심장한 충고였다.
유희는 며칠 전 대낮에 재인이 급작스레 전화를 걸어와 만나자고 했는데,
보컬레슨을 받으러 가느라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뒤로 아무리 전화를 해도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스럽다고 했다.
‘어머, 정말?’ 이라고 대꾸는 했지만 ‘김영수 게이 설’의 충격이 워낙 강렬했으므로
그냥 한쪽 귀로 흘려버렸다.
메신저를 종료하고 나서야 정작 유희의 현안에 대해서는 하나도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용가리와의 관계는 어떤지, 유부남이라는 증거는 잡았는지 등등을 나도 묻지 않았고
유희도 말하지 않았다.
점점, 내 손톱 밑의 가시가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인간이 되어 간다.
김영수는, 차를 두고 나오라는 내 말에 쉽사리 동의했다.
“안 그래도 요즘 운동이 부족한 것 같아 좀 걸어 다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브래지어와 팬티를 아래위 한 세트로 맞춰 입은 건 반드시 유희의 충고를 따르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발현은 아니었다.
사람의 일이란 게 원래 우연으로 시작해 우연으로 끝나지 않던가.
오늘 밤, 나는 그와 술을 한 잔 마실 것이고, 그 다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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