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연인들의 비밀 11
“살다보면 그런 날 있잖아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고 조용히 한 잔 하고 싶은 날. 오늘이 그래요.”
김영수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턱대고 퍼마시러 가자고 할 수는 없기에 급한 대로 둘러댄 말인데,
막상 입 밖에 꺼내고 보니 현재의 내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같다.
이유 따위를 집요하게 캐묻지 않는 것,
그것이 이 남자가 가진 첫 번째 장점이다.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언젠가 함께 간 적이 있는 ‘무제한 15,000원’ 참치 집이었다.
세종대왕의 용안을 방석커버로 사용하여 김영수의 감탄을 자아낸 그곳 말이다.
그사이 조금쯤 더 꼬질꼬질해진 것 같기도 했으나 어쨌든 방석은 거기 그대로 있었다.
속전속결이다.
나는 소주를 주문했다.
김영수는 자기 앞의 잔을 손으로 가렸다.
“건배도 안 해 줄 거예요?”
애교 섞인 말투로 투정하자, 가렸던 손을 얼른 치운다.
잘 보면 귀여운 구석이 있는 남자다.
투명한 술이 목구멍을 아릿하게 타고 넘어간다.
참치접시가 나왔다.
나는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흉내 냈다.
“요기 이 빨간 쪽이 비싼 부위니까 먼저 드세요.”
“어, 기억하시네.”
그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기억하는 건 또 있다. 여기서 이 남자와 밥을 먹는 동안, 태오가 계속 전화를 해댔었다.
몹시 추운 날이었고, 태오는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 들려있던 장미꽃 두 송이... 그때의 나도 내가 아닌 것 같고,
지금 여기 있는 나도 내가 아닌 것 같다.
현재는 언제나 부서질 것처럼 허약하다.
소멸해버리고 말 한 순간이라면, 영원히 유한하도록 뼛속에 각인시키고 싶다는
공격적인 욕망이 샘솟는다.
아, 벌써 취했나 보다.
“같이 마셔주면 안 돼요? 딱 한 잔 만.”
김영수는 곤란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굳이 그에게 술을 강권하는 이유는, 이따가, 만약에, 혹시라도, 키스를 하게 된다면
나한테서만 술 냄새가 나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술잔을 입술에 살짝 댔다가 그대로 내려놓았다.
“조 이사님 부를까요? 술은 그분이 잘 마시는데.”
그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 이 남자와 그 남자...
혹시...! 나는 염탐꾼의 냄새를 애써 숨기며 물었다.
“조 이사님하고는 각별한 사이인가 봐요?”
“각별하죠.
나한테는 정말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고마운 분이에요.
사석에선 형이라고 하는데, 그 형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나는 없었을 테니까.”
김영수가 누군가에 대해 이렇듯 애틋한 음색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인 줄 처음 알았다.
동시에 내 가슴에서 요동치는 이 감정은, 어쩌면 질투일까?
김영수 때문에 질투심에 불타오르게 되리라고 어찌 감히 예상이나 했겠는가.
나는 억지로 방긋 웃었다.
“사석에서는 저도,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불시에 어퍼컷펀치를 맞은 복서처럼 그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혀를 쏙 내밀고 ‘농담이었어요’ 라고 얼버무려야 하는 걸까.
내가 졌다는 것을 알겠다.
나는 이 사람이, 좋다. 나는 빠르게 덧붙였다.
“오늘은 우리 둘만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가 갑자기 제 앞의 소주잔을 들더니 쭉 들이켰다.
빈 술잔을 내려놓는 그의 얼굴에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이고
난 무기수(無期囚)의 회한 같은 것이 스쳐 지났다.
모든 것이 매뉴얼대로 되어가고 있었다.
식당에서 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그가 마포, 라는 행선지를 댔다.
일단 우리 집 앞까지 같이 간 뒤에 그 다음 코스는 거기서 생각해볼 작정이었다.
‘집에 들어가서 차 한 잔 마시고 가요’ 는 너무 식상하려나?
아니면 사거리 은행 건물에 새로 생긴 DVD방에 가자고 해 볼까?
차가 흔들릴 때마다 그와 나의 어깨가 맞부딪쳤다 떨어졌다 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보았을 때, 나는 깨달았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것을.
태오에게서 부재중 전화 두통이 와 있었다.
그리고 문자메시지 한통.
-좀 아팠어요. 많이 보고 싶다.
“중요한 문잔가 봐요?”
김영수가 묻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전화기 폴더를 덮으며 그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택시기사의 뒤통수를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아저씨, 죄송한데요. 마포 말고 가양동으로 가주세요.”
어쩔 줄 몰라 하는 김영수의 눈빛은 일단 외면하련다.
가양동은 그의 집이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나는 미래를 선택했다.
어떤 여자라도, 그럴 것이다.
제5부 연인들의 비밀 12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현관 안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내가 이 집에 들어온 첫 번째 여자이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뭐, 그렇다는 얘기다.
그것은 기분이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었다.
실내는 깔끔했다.
심플하다기보다는 휑뎅그렁하다는 부연설명이 어울릴 듯하다.
삼인용 소파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붙이는 순간, 술이 확 깼다.
소파의 쿠션은 지나치게 딱딱했고, 벽에는 그 흔한 장식장 하나 놓여 있지 않다.
당장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이유는 어쩌면 당황스럽기 때문이리라.
집주인의 은밀한 취향을 나타내주는 물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공간에서
방문객은 무엇을 판단해야 될지 몰라 어리벙벙하고 곧 불안해진다.
대체 왜 그렇게 바락바락 우겨대면서까지 이곳에 오고 싶어했던 것인가.
김영수는 유리컵 가득히 찬물을 담아 내왔다.
마치 냉수나 마시고 속 차리라는 뜻 같아 손바닥에 식은땀이 났다.
조금 전, 택시 안에서 그는 “정말, 꼭, 가야겠어요?” 라고 반복해서 물었었다.
택시에서 내렸을 때는
“나중에 내가 정식으로 초대할게요. 지금은 집도 지저분하고…”
라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때, 나는 뭐라고 중얼댔던가.
“오빠는 왜 꼭 1다음에 2가 와야 된다고 생각해요?
사는 게, 그렇게 딱 떨어지는 거 아니잖아요.”
김영수는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나는 온힘을 다해 그의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뒤얽히며 교접하기에는 어둠이 너무 짙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아파트 건물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경비실 앞을 통과할 때, 반쯤 졸고 있던 경비원을 향해 목례를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물을 두어 모금 마셨을 때, 김영수가 몸에 달라붙는 면 티셔츠로 갈아입고 나왔다.
젖꼭지의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난다.
눈앞의 이 남자가 내가 아는 김영수가 아니라 다른 사람인 것만 같이 느껴진다.
하긴, ‘내가 아는 김영수’ 라는 남자는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김영수가 아는 나’ 라는 여자가 어떤 모습인지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어릴 때 앨범 같은 건 없어요?”
“…그런 건 없어요.”
어색함을 씻어볼까 싶어 던진 질문에 그가 고요히 고개를 저었으므로 다시 할 말이 없어졌다.
지금 불쑥 일어나 ‘가야겠어요’ 라고 말하면 이 남자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러나 입에 머금은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 툭 튀어나왔다.
“혼자 사는 거, 외롭지 않아요?”
“…글쎄요.”
그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을 받았다는 듯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하면, 외로운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심심한 거랑 외로운 거랑 많이 다른가?
누구랑 같이 있다고 해서 꼭 외롭지 않은 건 아니잖아.
은수 씨는 외로워요, 혼자라는 게?”
그 말을 신호 삼아, 눈물 한 방울이 손등 위로 툭 떨어졌다.
아무렇게나 떠들어대기 시작한 건,
예고 없이 쏟아지려는 눈물을 숨기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아니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예전에는 내 주변에 사람이 참 많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니,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 곁에 있는 줄 알았어요.
내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우리 엄마, 엄마만은 옆에 있어 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되게 웃기죠? 그런데 이젠... 진짜 혼자인 것 같아요.”
김영수가 크리넥스 통을 내 앞에 슬그머니 밀어줄 때까지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인생이 어디로 가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김영수가 티슈를 뽑아 손에 쥐어주고, 등을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은수 씨만 그런 거 아니에요. 나도 그래요, 항상.”
그것은 어른의 위로였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건 맹세코 유혹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다만 그의 위로에 대한 나의 신뢰를 증명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허공에서 조금 머뭇대던 그의 입술이 내 이마를 찍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의 입술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그의 키스는 뭐랄까, 아주 고전적이었다.
고전적인 키스를 하는 남자가 대개 그렇듯 그는 쭈뼛쭈뼛 내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빗장뼈 부근에서 잠시 멈추었던 그의 손바닥은 이내 왼쪽가슴을 더듬었다.
조금 작은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이라 다행이었다.
그는 절대로 브래지어 아래까지 파고들지는 않았다.
“바보야. 결정적인 걸 확인했어야지.”
유희는 여전히 의심할 테지만, 이미 그런 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건 단단한 나무둥치에 내 발목을 칭칭 붙들어 매는 것.
그리하여, 여기를 견디는 것뿐이니까.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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