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연인들의 비밀 5
“이사님, 꼭 드릴 말씀이 있어요.”
“흐음. 지금 식구들하고 저녁 먹는 중인데.”
“저, 잠깐이면 되거든요.”
이거야 원,
밀회를 즐기다가 슬슬 몸을 빼려는 직장상사에게 눈치 없이 매달리는 가련한 여직원 모드로군.
안 이사는 큰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
딸내미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와야 하니 한 시간 뒤에 보자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여러 가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안 이사가 누군가의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것은 영 실감나지 않는다.
건너편 빌딩의 창문에 하나 둘 불이 꺼지고 있었다.
턱을 괴고 앉아 내 인생에 대해 차근차근 생각해보려다 그만둔다.
생각을 쥐어짜느라 안간힘을 쓰는 일도 이젠 정말 지친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인간의 이성이란 참으로 무기력할 뿐이지 않겠는가.
나는 아프게 입술을 깨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야하겠지. 삶을 이대로 멈추게 할 용기는 없으므로.
지하철에서 김영수의 전화를 받았다.
“그날은 정말 죄송했어요”
라고 정중하게 사과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잠시 잠깐 자신의 맨 살을 드러냈던 이 남자는 어느새 완벽한 정장 슈트를 갖춰 입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예. 어제 하루 푹 쉬었더니 거뜬하네요. 다 은수 씨 덕분입니다.”
우리의 대화는 거죽을 빙빙 맴돌았다.
그래. 이것이 김영수와 나 사이의 원래 거리였다.
조금 가까워졌다고 믿은 것이 나의 착각이었을 테지.
약속장소에 도착하자,
구부정하게 앉은 안 이사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 마주 앉고서야, 첫 마디를 어떻게 뗄 지 전혀 준비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확 질러 버리기로 했다.
“이사님. 정말 독립하시는 건가요?”
“독립? 독립이라...
글쎄, 어쨌거나 홀로서기를 궁리 중이긴 하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먼.”
“...그럼, 저는요?”
헉. 너무 직설적이었다. 안 이사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제가, 이사님을 따라 나간다고, 회사 안에 그런 소문이 파다해요.”
“엥. 왜?”
왜라니.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안 이사는 아예 소문 자체에 대해 처음 듣는 눈치였다.
몰래 귀띔해주는 사람 한명 없었다니,
역시나 우리 회사 내의 비공식적 왕따가 분명했다.
그와 나를 둘러싼 소문들, 내가 처한 곤경들에 대해 더듬더듬 구차하게 설명했다.
안 이사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것 참. 여러 가지로 내가 미안하네.”
“....”
“오 대리 회사생활이 힘들었겠구먼.”
그 한 마디에 콧등이 시큰해진다.
여기서 눈물을 보이면 진짜 우스워지는 거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저도 이 참에 한번 옮겨볼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에요.”
“오호, 그래? 어떤 쪽으로?”
지금이야말로 솔직하게 말할 타이밍이었다.
“이사님이 준비하시는 회사에는, 사람 필요 없으세요?”
아아, 너무 노골적인 추파로는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 이사가 내게 바짝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귓가에서 운명의 종소리가 먹먹하게 메아리치는 것만 같다.
안 이사가 숨을 내쉴 때마다 어금니 썩어가는 냄새가 옅게 풍겼다.
“혹시 우거지 좋아하나?”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안 이사가 계획하고 있는 사업은, 우거지 비즈니스였다.
매형과 동업으로 우거지 전문 식당을 개업할 것이며,
부속사업으로 가칭 ‘우리 우거지 바로 알리기 운동본부’를 열고,
격월간 잡지 ‘우거지’의 발간도 추진할 예정이라고 했다.
“누구한테나 가슴에 품고 있는 필생의 아이템이 있잖아.
나한테는 그게 바로 우거지였던 것 같아.
어릴 때 우리 어머니 우거지찌개 끓이는 솜씨가 국보급이셨거든.
새우젓 넣고 보글보글 끓이면, 캬 정말, 그 구수하고 깊은 맛은 필설로는 다 못하지.”
“...”
“이십년 동안 억지로 밥벌이했으면 됐잖아?
처음에야 좀 힘들겠지만 하고 싶은 걸 하고 살면 속은 편하겠지.
그리고 이 우거지라는 거, 잘만 하면 세계시장에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안 이사의 눈빛에서 반짝거리는 것은 희망이었다.
‘격월간 우거지 취재기자 오은수.’ 꽤나 도발적이다.
참았던 눈물이 찔끔 났다.
제5부 연인들의 비밀 6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격월간 잡지 우거지의 창간멤버가 될 수도 있으니까.
안 이사가 편집장이라는 직함은 달아주겠지?
그의 말대로 우거지 비즈니스가 대박난다면 나는 일등개국공신이 되는 거다.
마음만 달리 먹으면, 선택의 폭은 넓을지도 모른다.
2개월 감봉의 치욕을 감수하고 그냥 주저앉을 수도 있고(감수하기엔 치욕이 너무 크지만),
이 기회에 평소 자나 깨나 염원해왔던 우아한 백조의 길에 들어설 수도 있으며
(우아하기엔 무슨 돈을 쓰고 살아야 할지 대책 없지만),
이도 저도 아니라면 아예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도 있다.
대학 졸업 후 줄곧 편집 일로 잔뼈가 굵어왔다.
내 힘으로 한 권의 책을 묶어내는 데에 특별한 애정이 있는가를 묻는다면 부정하지는 않겠다.
한 달 내내 고생한 끝에 만들어진, 인쇄냄새 물씬 풍기는 책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면
뿌듯함이나 성취감이 꿈틀대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8년을 살아왔다.
8년. 목도 못 가누는 갓난아기가 초등학생이 되는 시간이다.
아직도 열정적인 에너지로 충만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이 바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밥벌이를 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 나도 잘 모르겠다.
지금껏 쌓아온 노하우와 인맥을 깨끗이 버리고, 전혀 다른 필드에서 초보자가 되어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이 가당키나 할는지.
위기는 찬스라는 말이 허튼 위로가 아니라면 지금이야말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정답 없는 고민으로 며칠을 보냈다.
내가 밥을 먹고 다니는지 생쌀을 씹고 다니는지도 모르는 채 시간이 흘렀다.
퇴근 길, 오랜만에 동네 반찬가게에 들렀다.
손바닥만한 용기에 포장된 반찬 서너 종류를 샀다.
우거지 나물을 집어 들었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줄곧 우거지를 싫어해왔다는 걸 새삼 깨닫고는 조용히 내려놓았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양심이 있지.
아무래도 우거지 잡지의 편집장이 될 수는 없을 듯하다.
비닐 랩만 겨우 벗긴 반찬용기를 테이블에 쭉 늘어놓고 전자레인지에 햇반을 돌린다.
혼자 밥을 먹을 때는 평소보다 훨씬 빨리 먹게 되거나 아니면 아주 더디게 먹게 된다.
꾸역꾸역 젓가락질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누구지? 태오의 얼굴이 퍼뜩 스치고 지나갔다.
“막내야, 나다.”
방문객은 엄마였다.
요 며칠, 엄마의 전화를 가볍게 씹어주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내 방에 성큼 들어선 엄마의 첫 번째 행동은, 혀를 차는 것이었다.
“어이구. 이걸 지금 밥이라고 먹는 거냐?”
내 소박한 밥상이 별안간 처량하고 초라하게 전락하는 것 같아 화가 치솟는다.
“이게 방이냐, 짐승 우리냐. 저 방바닥에 머리카락 굴러다니는 것 좀 봐.
이렇게 먼지가 풀풀 날리는 데서 어떻게 목구멍에 밥이 넘어가니.”
“여긴 왜 오셨어요?”
내 목소리가 한겨울 얼음장처럼 냉랭하게 들리기를 바란다.
“걱정 돼서 왔지. 연락도 안 되고, 요새 계속 꿈자리도 사납고.”
엄마 때문에 내 꿈자리가 사나워요,
라고 내뱉고 싶어서 혓바닥이 옴찔옴찔했다.
엄마는 양손 가득 밀폐용기가 담긴 쇼핑백을 들고 왔다.
황폐한 냉장고를 열어본다면 또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을 게 분명했으므로
엄마가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재빨리 냉장고를 열고 그것들을 아무렇게나 대충 집어넣었다.
“세상에. 너, 이게 뭐니?”
엄마는 세면대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여기 칫솔이 왜 두 개야?”
약과 칫솔꽂이로 사용하는 투명유리컵 안에는 두 개의 칫솔이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태오의 것이 아니라,
얼마 전 유희가 자고 갔을 때 새로 꺼내 놓은 것이다.
“왜? 내가 남자라도 끌어들였을까봐 무서워요?”
엄마는 내 말의 내용이 아니라 오만하게 빈정대는 말투 때문에 충격을 받는 것 같다.
나는 작은 악마처럼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러면 좀 어때서? 엄마가 나한테 뭐라고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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