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5부 연인들의 비밀 3

오늘의 쉼터 2017. 7. 30. 02:00

제5부 연인들의 비밀 3




나쁘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나쁜 년이다.

119 구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 나는 몸서리치며 자책했다.

평소 꽉 막힌 도로에서 경광등을 켜고 삐뽀삐뽀 질주하는 앰뷸런스들을

괜스레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봐오던 일을 이제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토요일 오후,

서울 도심의 거리는 자동차들로 가득했다.

 날개를 펴고 창공으로 날아오르지 않는 한 119 구급차라도 꼼짝없이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쌔고 쌘 게 대학부속병원이던데 왜 하필 의과대학이 없는 학교에서 사고가 난 건 지,

별 게 다 원망스러웠다.
 

김영수는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진짜로 죽었을지도 몰랐다.
아직 죽지 않았다 해도 서서히 죽어가고 있을지도 몰랐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주황색 제복을 입은 구급대원이 나를 위로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확실치는 않지만 외부충격에 의한 일시적인 기절 상태일 가능성이 큽니다.”
 
물을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어라, 구급대원은 제법 해사한 인상에 콧날이 날렵한 미남자다.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하고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머리칼을 살그머니 귀 뒤로 넘겼다.
남자친구-아니, 뭐, 어쨌거나, 나와 같이 있다 봉변을 당한 남자-가
급작스레 날아든 축구공을 맞고 기절하여 응급실로 실려 가고 있는 이 긴급 상황에서
외간남자의 미모에 현혹되다니.
나는 정말 어쩔 수 없는 구제불능 아메바인가 보다. 멈췄던 눈물이 다시 솟구쳤다.
김영수에게 내 마음을 들켰을까봐 죄스러웠다.
 미안해요, 영수씨, 깨어나기만 해요, 제발.
 
119 대원들이 김영수를 응급실 침상까지 뉘어다주었다.
흰 가운을 입은 여자 의사가 다가왔다.
요즘엔 왜 똑똑한 여자들이 예쁘기까지 한 걸까.
나보다 네댓 살은 어려 보이는, 맑고 총명하게 생긴 의사 앞에 서자 어쩐지 주눅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축구공에 맞았다고요”

라고 더듬더듬 설명하는 내가 무슨 명랑만화 속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의료진 몇이 달라붙어 그의 눈동자를 까뒤집어보고 맥박과 혈압 등을 체크했다.
정신이 육체를 제어하지 못하는 상황은 상상해본 적도 없다.
낯모르는 사람들이 제 몸에 이리 손대고 저리 굴리는 것을 김영수는 나무인형처럼 누운 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일단 저쪽에 가서 접수 먼저 시키세요. 환자분 주민등록번호 쓰시고.”
 
“주민등록번호요?”
 
부모의 주민등록번호도 외우지 못하는 나에게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였다.
 
“환자 지갑 안에 신분증 있을 거 아녜요.”
 
김영수의 코트 안주머니에 조심스레 손을 넣어 보았다.
반들반들한 촉감의 검정 남성용 가죽지갑이 잡힌다.
김영수답게 몹시도 평범한 물건이다.
지금 이 병원 로비에 앉아있는 남성들 중 열에 여덟은 이와 비슷하게 생긴
가죽지갑을 몸 속 깊은 곳 어딘가에 소중히 품고 있을 것 같다.
지갑 내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렵잖게 주민등록증을 찾아냈다.
아는 이의 신분증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책꽂이 한구석에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지리책을 꺼내든 기분이 된다.
우리 동네가 축약된 페이지를 딱 펼쳤더니
암호 같은 선과 점만 가득할 뿐 오시오슈퍼마켓이나 럭키약국, 가나안안경점은
흔적도 없을 때 느껴지는 당혹감 말이다.
 
성명 김영수(金永洙). 한자까지도 참으로 평범하다.
증명사진 속의 김영수는 지금보다 조금쯤은 젊고 또 피로해 보였다.
눈앞에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에 긴장했었는지 눈가와 입매가 딱딱하게 굳은 것 같기도 하다.
접수창구에서 직원이 알려주는 대로 간단한 서류를 작성하고 그의 주민등록증을 맡겼다.
응급실에 다시 한 발을 들여놓는 순간 꼬마아이가 숨넘어갈 듯 울어 젖히는 소리가 긴박하게 들려왔다. 듣는 이의 피부세포를 바늘 끝처럼 곤두서게 하는 소리였다. 여기가 어떤 곳이었는지 새삼 환기되었다.
 
김영수의 침상 앞으로 돌아와 엉거주춤 섰다.
이제 어쩌면 좋지? 이 남자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다면,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어쩌지?
누구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해야 하지?
그때였다.
김영수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그
는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내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정신이 들어요?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한꺼번에 쏟아부어대는 질문에 넋이 나간 걸까,
그는 눈만 끔뻑끔뻑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가죽지갑에 시선이 머무나 싶더니 갑자기 그것을 홱 낚아챘다.




제5부 연인들의 비밀 4




물에 빠진 걸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격이었다.
배은망덕한 인간 같으니.
내가 119에 전화하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그 차가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을 주제에.
테러용의자의 증거를 발견한 에프비아이 비밀요원처럼 그는 자신의 지갑을 샅샅이 뒤져댔다.
 
“아무것도 안 건드렸어요. 정말이에요.”
 
력 부인하며 손바닥을 휘휘 내젓고 있으니 꼭 진짜 용의자가 된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김영수가 손동작을 멈추고 나를 쏘아보았다.
작살에 뒷덜미를 찍힌 어린 짐승의 표정이 저럴까.
그 남자의 내부에서 지금 무언가가 절박하고 불안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지만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단기기억상실증인가 하는 증상에 대하여 들었던 생각이 났다.
그렇다면, 혹시?
 
“나예요, 나. 나, 알죠?
내 이름은 오은수. 그쪽 이름은 김영수.
영수씨 좀 전에 나랑 같이 걸어가다가 머리에 축구공 맞았잖아요. 기억나요?”
 
“…”
 
“아, 진짜 미치겠네. 여긴 응급실이고요.
영수씨 공 맞고 쓰러져서 여기 실려 왔다니까요.”
 
김영수의 이마가 움찔 떨렸다.
 
“내가 왜 정신 잃은 사람 지갑에 손댔겠어요?
저기, 간호사 언니가 시켰단 말예요.
접수하려면 신분증 필요하다고. 주민등록증 말고 딴 건 진짜 보지도 않았어요.
현금 얼마 있는지도 몰라요, 난.”
 
사실 현금이 얼마나 있나 슬며시 들여다보기는 했지만 고의는 절대로 아니었다.
억울함이 복받쳐 목이 메어왔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급박히 몸을 일으켰다.
응급실을 가로질러 겅중겅중 달려가는 그 남자의 뒷모습을 나는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건너편 침상에서는 술에 잔뜩 취한 소녀가 손가락에서 피를 뚝뚝 떨어트리면서도
해롱해롱 천진난만하게 웃어대고 있었다.
이 도시에는, 내 알량한 상식으로는 차마 가늠하기 벅찬 일들이 예사로 일어난다.
헐레벌떡 주민등록증을 찾아온 김영수가 내게 다가와 허리를 으스러지게 껴안고
입술을 쭉쭉 빤다고 해도, 나는 더 이상 놀라지 않겠다.
물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조금 뒤, 그는 아까보다 훨씬 정돈된 표정으로 나타났다.
세수를 하고 온 듯 얼굴에 물기가 남아 있었다.
 
“이제, 가죠.”
 
그가 조그맣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그래도 몸이 아직… 뇌사진도 찍어봐야 된댔어요.”
 
“괜찮아요. 내 몸,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의 말투가 부자연스러울 만큼 필사적이었으므로,
나는 잠자코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뻣뻣이 누운 채로 바퀴침대에 실려 들어갔던
그는 두발로 천천히 걸어서 그곳을 나왔다.
 
“미안해요, 은수씨. 오늘은 못 데려다 줄 것 같아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택시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며 그는 덧붙였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택시 뒷유리창 너머로 김영수의 모습이 점점이 뭉개지듯 사라져갔다.
짧고 이상한 꿈을 꾸고 난 기분이었다.
우리의 관계가 오늘을 계기로 조금 다른 층위로 접어들게 될지도 모른다는
서늘한 예감이 들었다.
 
월요일 아침.
예측하지 못했던 대형선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가 나에게 2개월 감봉 결정을 내린 것이다.
믿어지는가? 정녕? 미안하지만,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징계사유라는 것 또한 가관이었다.
회사에 중대한 손해를 입혔다니.
이 병아리 콧구멍만한 회사에 그런 사규가 있었다는 것도 몰랐거니와,
도저히 타당한 이유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징계위원회가 열렸다는 소식을 못 들었으니 사장 혼자 결정한 일이 뻔했다.
이건 아무리 봐도, 누가 뭐래도, 명명백백한 노동법 위반이었다.
이 와중에, 황 부장과 이민정 역시 나와 같은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만이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복수는 둘 중 하나였다.
노동청에 고발하거나, 사표를 던지거나. 오전 내내 고발장을 썼다 지웠다 했고,
오후 내내 사직서를 썼다 지웠다 했다.
나라는 인간의 우유부단함에 치가 떨렸다.
 
“안 이사는 환송회도 없이 나가나봐?”
 
“그런가봐. 하긴 사장이랑 원수지고 나가는 건데.”
 
장 선배와 디자인팀 김 과장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내 자리에서 고스란히 다 들렸다.
 
“그럼 오은수는 언제 따라가는 거야?”
 
장 선배가 내 눈치를 살피며 김 과장의 팔뚝을 꼬집었다.
안 이사의 이름을 듣자 차라리 마음이 가벼워진다.
모두들 퇴근하기를 기다려 나는 안 이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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