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5부 연인들의 비밀 1

오늘의 쉼터 2017. 7. 30. 01:18

제5부 연인들의 비밀 1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는 되지 않겠어.
 
생리가 시작되는 아침이면 어금니를 깨물며 다짐한다.
물론 이 풍진 세상 별로 다시 태어나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말이다.
탱크가 지나가는 것처럼 아랫배가 와락와락 쑤신다.
플라스틱 생수 병 주둥이에 입을 대고 진통제 두 알을 꿀꺽 삼킨다.
그 와중에 세 가지 아이섀도를 섞어 눈두덩에 바르고 아이라인까지 꼼꼼히
그리고 있는 내가 징글징글하다.
 
김영수와의 약속은 퇴근 후였다.
점심시간을 아껴 미용실에서 드라이를 했다.
네일 케어는 이틀 전에 미리 받아두었다.
청록색 매니큐어를 권하는 네일 아티스트를 뿌리치고 투명핑크를 선택했다.
약속시간을 기다리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애썼으나 거짓말처럼 눈, 코, 입의 모양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 그쪽도 그렇겠지?
그가 나를 다시 만나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은근히 두근거렸다.
멍청하게도,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느낄 나의 감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아니다. 모르는 척하고 싶었던 거다.
 
디어 그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0.1초 만에 꿈에서 깨어났다.
이 남자는 근사한 왕자님이 아니었다.
전에 봤을 때와 똑같은, 삼십대 아저씨일 뿐이다.
해물탕은 더디게 끓었다.
비등점에 다다르기 위해 뭉근히 끓는 그 순간이 가장 곤욕스럽다.
언젠가 팔팔 끓어오르기는 하는 걸까?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나는 불쑥 말했다.
 
“제 전화 받고 많이 놀라셨죠?”
 
“아, 아닙니다.”
 
“사실은 그게, 제가 단축번호를 잘못 눌렀었나 봐요.
원래 친구한테 걸려고 했었는데.”
 
할 수만 있다면 이 놈의 입을 공업용 재봉틀로 드르륵 박아버리고 싶다.
 
“그러셨군요.
그래도 반가웠어요.
저도 연락 한번 드려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우연히 통화가 되어서요.”
 
“……”
 
담담한 배려였다.
치졸한 변명이나 늘어놓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이 사람이 적어도 ‘나쁜 놈’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니, 지구상의 인간들을 선/악의 카테고리로 구별해야 한다면 확실히 좋은 나라 사람일 것이다.
나? ……말을 말자.
 
영원히 끓어오르지 않을 것 같던 해물탕 국물이 어느새 보글거리고 있었다.
 
“와, 시원하다!”
 
김영수가 커다랗게 감탄사를 뱉었다.
립스틱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는 입술을 오므려 국물을 떠먹어보았다.
들큼한 인공조미료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네. 참, 맛있네요.”
 
그러자 그는 기쁘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입 속에 든 밥풀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지만, 슬그머니 외면했다.
반찬으로 나온 어묵볶음을 씹을 때 쩝쩝 제법 요란한 저작소리도 났지만,
그것 역시 못 들은 척했다.
서른두 살 미혼녀의 내공이란,
그 정도 문제쯤은 애교로 받아넘기는 것이리라.
 
라리 다방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근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주로 자신이 하고 있는 사업에 대해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스스로도 반신반의했지만 일이 점점 본 궤도에 올라가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했다.
무조건 많은 수익을 얻기보다는, 만드는 이와 먹는 이가 한마음으로 좋은 먹을거리를
나누는 데에 자그마한 다리 역할을 하고 싶다고도 했다.
뭐 바람직하신 말씀이었으므로 미천한 나는

“그러시군요”

라는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를 찬찬히 뜯어본다.
아무리 봐도 나무랄 데가 없는 남자다.
객관적으로 판단하건대 나보다 여러모로 나은 조건의 남자다.
나와 이 남자가 결혼정보회사에 각각 남녀회원으로 가입한다면,
서로 다른 클래스에 소속될 것이 분명하다.
뜬금없이 걸려온 전화에 당황하지 않고, 저녁식사를 제의한 걸로 보아
그는 내게 어느 정도의 호감은 가지고 있는 듯싶다.
착각하지 말라고? 뭐, 적어도 ‘별로 깊게 사귀어볼 마음은 없지만 연락 끊기에도 아쉬운
여자 명단’의 한 귀퉁이에 내 이름도 당당히 올라 있다고 우겨보기로 하자.
 
“부모님이 외국에 계신다고 하셨죠? 그립지 않으세요?”
 
별 의도 없이 던진 질문이었는데 김영수의 눈동자에 얼핏 당황의 빛이 스쳐 지났다.
 
“아니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너무 완강히 부정했기 때문에 도리어 이상하게 느껴졌다.





제5부 연인들의 비밀 2


“부모 얘기를 안 하는 남자라고?
흠, 그거 둘 중 하난데.
당장 붙잡아야 될 남자, 아니면 엄청난 고단수.”
 
점심시간, 회사 앞으로 찾아온 재인이 심드렁하게 분석했다.
벌레 씹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부모가 떠올랐다.
그날 별 일 없었느냐는 질문은 차마 하지 못하겠다.
어쩐지 약 올리는 것 같을 테니까.
 
“은수야. 넌 지금 네가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지?”
 
푸핫. 입 속에 가득 든 국수 가닥들을 그대로 뿜어버릴 뻔했다.
 
“그게 무슨 망발이냐? 허허, 참, 관두자, 관둬.”
 
“너한텐 아직 무한한 선택권이 있잖아.”
 
“얘가 지금 장난하나. 서른 두 평짜리 아파트에 거주하는 의사 사모님께서 그런 소릴 하시면
원룸 구석에 찌그러져 사는 가난뱅이 노처자는 혀 깨물고 죽으란 거냐?”
나는 다소 과장되게 재인의 말을 반박했다.
친구의 눈동자에 짙게 드리워진 청회색 그림자가 아까부터 줄곧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그녀의 얼굴색은 마치 폭설경보가 발효되기 직전의 서울 하늘 같았다.
내 몸을 던지는 눈물겨운 노력에도 아랑곳없이 재인은 유효기간 간당간당한 크림빵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그 남자네 회사 요즘 잘 나가봐?
우리 동네에도 체인점 생긴다고 인테리어 공사 하더라.”
 
“그래?”
 
“전도유망한 사업가에다가, 별로 효자도 아닌 것 같다고 하고, 인물도 멀쩡하다면,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네? 결혼하자는 말도 하지?”
 
결혼? 결혼이라니. 그저 웃지요.
김영수와 나의 만남은, 어쨌거나 계속 이어져오고 있기는 했다.
알코올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남자와 같이 할 만 한 일은 별로 많지 않았다.
밥을 먹고 차 한 잔을 마시고 나면 ‘집에 가서 아홉시 뉴스 중간부터 볼 수 있겠네’ 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드는 것이다.
그의 자동차 라디오는 늘 교통방송에 주파수가 고정되어 있었다.
징그럽도록 꽉 막혀있는 성산대교를 건너면서 올림픽대교나 한남대교의 원활한 소통 상태를
실시간으로 전해 듣는 것만큼 비현실적인 것도 없다.
삼십을 훌쩍 넘은 남녀가 데이트하면서 결혼의 ‘기역’ 자도 안 꺼낸다는 것
역시 그다지 현실적인 상황은 아니었으므로 굳이 남에게까지 밝히고 싶지는 않다.
 
“뭐, 그 비슷한 얘기를 하긴 하는데…”
 
대충 얼버무렸다. 내 새빨간 거짓말을 알아챈 걸까, 별안간 재인이 정색을 했다.
 
“그래도 그냥 연애만 해라. 결혼은 하지 마. 너니까 특별히 말해주는 거야.”
 
“…”
 
“결혼하고 보니까, 사는 게 참 내 마음 같지 않다.
아니야, 내 마음이 비뚤어진 건지도 모르지만.”
 
내 몫의 쌀국수가 국물까지 싹 비워질 동안,
재인의 그릇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젓가락을 쥔 그녀의 손가락이 겨울나무의 가지처럼 앙상했다.
빈 나뭇가지는 가만히 있어도 휭휭 바람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토요일 오후, 김영수를 만났다.
늦은 점심 겸 저녁을 먹고 나자,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그는 근처의 대학 캠퍼스 주차장에 자동차를 세워 두었다고 했다.
우리는 터벅터벅 걸어 캠퍼스로 올라갔다.
멀리서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축구란 참 희한한 운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그란 공 하나를 따라 저렇게 여러 명이 우르르 몰려다니다니.
 
“저 사람들 춥지도 않나 봐요?”
 
내가 묻자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날이 많이 풀렸잖아요.
그리고 겨울철일수록 몸을 많이 움직여야 혈액순환에 좋아요.”
 
“축구 좋아하시나 봐요?”
 
“그냥 남들만큼이요.”
 
괜히 물어봤다. 무엇이든 ‘남들만큼’인 남자이니 당연할 텐데 말이다.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있는 운동장의 가장자리를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그가 몇 발짝 앞서 걷고 내가 뒤를 따랐다.
내가 한 발자국 전진하면 그의 딱딱한 등짝도 그만큼 멀어졌다.
등은 연기(演技)하지 않는다.
 타인의 등을 본다는 행위는 눈을 마주 보는 것과는 다르다.
그건 어쩌면 그 사람 내면의 더욱 깊은 곳을 훔쳐보는 순간이다.
이 순간, 나는 이 남자의 무엇을 훔쳐 볼 수 있을까?
 
그때였다.
축구공이 맹렬한 속도로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아주 가까이에서 퍽-소리가 들렸다.
김영수가 꺾이듯 쓰러져 있었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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