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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치명적인 것들 15

오늘의 쉼터 2017. 7. 29. 16:55

제4부 치명적인 것들 15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차라리 금기가 된다.
재인이 남편에 대해 침묵하는 까닭은
이제 그 남자의 허물조차 제 삶을 규정하는 한 부분이 되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함부로 뱉은 말이 부메랑이 되어 그대로 제 심장에 와 박히는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알 듯 모를 듯한 감정이었지만, 유부녀 친구들이 제 남편 흉이랍시고
늘어놓는 이야기들 대개가 결국은 미묘한 자랑으로 마무리 된다는 사실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아주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그래, 결혼하니 좋아?”
 
유희의 질문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재인의 대답은 썩 아리송했다.

“좋거나 나쁘거나, 뭐 그런 성질의 것은 아니야.”
 
“그럼?”
 
“그런 걸 초월한 어떤 단계에 진입했다고 할까.
작은 감정들에 예민하게 일일이 신경을 쏟으면 힘들어서 살아갈 수가 없어. 뭐랄까,
업무가 지루하고 반복적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꽤나 안정적으로 신분보장이 된다는
장점이 있는 회사에 취직한 기분이야.”
 
유희가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그럼 그 회사 사장은 네 남편이냐?”
 
재인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사장이면 어떻고 또 부장이면 어떻겠니.
나, 직장생활 딱 7년 했어.
그동안 별 더럽고 치사한 꼴도 다 꾸역꾸역 견뎠는데...
그래, 이 정도 근무조건이면 양호하다고 생각하려고.”
 
“그럼 결혼을 왜 했어? 그냥 혼자 즐기면서 재밌게 살지.”
 
“즐기면서 재밌게? 설마 너, 여자 혼자 사는 게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아, 어렵다.
어쨌든 건투를 빈다.
기왕 취직한 거 오래오래 잘 버텨라.
그치만 난 솔직히 뭐가 정답인지 모르겠어. 점점 더.”
 
유희가 머리통을 쥐어뜯는 시늉을 했다.
나 역시 그렇다.
스무 살엔, 서른 살이 넘으면 모든 게 명확하고 분명해질 줄 알았었다.
그러나 그 반대다.
오히려 ‘인생이란 이런 거지’ 라고 확고하게 단정해왔던 부분들이 맥없이 흔들리는
느낌에 곤혹스레 맞닥뜨리곤 한다.
내부의 흔들림을 필사적으로 감추기 위하여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일부러
더 고집 센 척 하고 더 큰 목소리로 우겨대는지도 모를 일이다.
후- 재인이 담배연기를 뱉어내며 나를 돌아보았다.
 
“태오는 잘 있어? 그 소년, 너무 스위트하더라.
오늘 같이 데려오지 그랬어. 심심하게 혼자 있겠다.”
 
“아니야.... 걔, 집에 돌아간 지 꽤 됐어.”
 
목이 콱 잠겨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재인과 유희가 짧게 눈을 맞췄다.

“잘 됐네. 어차피 오래 가긴 어려운 관계였어”

라고 유희가 말하자,

 “그럼. 그런 관계 오래 가면 여자만 손해잖아.
그리고 그 핏덩이랑 뭘 어쩌겠니.
너도 이젠 현실적인 연애를 해야지”

라며 재인이 거들고 나섰다.

아무튼 말들은 잘한다.
각자의 등에 저마다 무거운 소금가마니 하나씩을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걸어가는 주제에 말이다.
우리는 왜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판단하고 냉정하게 충고하면서,
자기인생의 문제 앞에서는 갈피를 못 잡고 헤매기만 하는 걸까.
객관적 거리조정이 불가능한 건 스스로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차마 두렵기 때문인가.
 
“그 사람 오늘 야간당직이야. 자고들 가라, 응?”
 
인이 꺼내다 준 편안한 반바지로 갈아입고 거실바닥에 길게 엎드렸다.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던 유희가 주말드라마에 화면을 고정시켰다.
그리곤 심드렁히 중얼거렸다.
 
“드라마 속에선 왜 결혼만 했다 하면 무조건 시부모랑 같이 살아?
부잣집이든 가난한 집이든 한 울타리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정답! 세트 비 아끼려고.”
 
내 농담에 쿡쿡댄 건 유희뿐이었다.
뜻밖에 재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아우 징그러워. 지긋지긋한 가족주의.”
 
그녀는 그 말을 씹어 뱉듯 했다.
그 때 별안간 덜컹,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혼비백산하여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 실물로 등장한 ‘그녀의 가족’에게 감히 경악하지도 못하면서.




제4부 치명적인 것들 16




드라마는 판타지다.
현실에 비하면 차라리 조금쯤 귀여울는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서는 아무리 곤란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음 신(scene)으로 화면이 바뀌거나, 거기서 장면을 멈추고
‘다음 회에 계속’ 이라는 자막을 깔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현실은 훨씬 구질구질하고 잔혹하다.
노처녀 친구들과 (술과 담배를 곁들여) 난장판을 벌이고 놀다가
시부모의 예고 없는 방문을 받은 그 끔찍한 시추에이션 뒤에도 시간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황금 같은 토요일 밤이었다.
무슨 불심검문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전화 한 통 없이 아들 며느리 집을
불시에 방문한 노부부의 의중을 도통 헤아릴 수 없었다.
그뿐 아니다.
아들 집이든 며느리 집이든 엄연히 ‘타인의 집’ 이 분명하건대,
어찌하여 남의 집 열쇠를 그분들이 가지고 있는 거지?
좋다. 백번 양보하여 열쇠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한들,
어떻게 초인종 한 번 눌러볼 시도조차 않고 벌컥 문부터 연 거지?
그 막무가내의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비롯된 거지?
 
그러나 의문들을 해결하지는 못했다.
 거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맥주 캔들과 재떨이를 부랴부랴 신문지로 덮고,
담배냄새 휘도는 실내 공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여느라 무척 바빴기 때문이다.
재인의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는 브루클린 뒷골목 지하클럽의 헤로인 파티에 초대된
원장수녀님보다 더 황당해하는 표정이었다.
유희와 나는 쫓기듯 집을 나섰다.
그곳이 재인의 집인데도 꼭 재인만 남겨두고 오는 것 같아 미안했다.
자유로를 지나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유희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 시간에 시부모 접대하면 특근수당 받는 거야?”
 
농담에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유희도 깃털처럼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밤의 자유로 한가운데를 관통하여 버스는 빠른 속도로 달렸다.
차창 밖으로 완벽한 어둠이 뭉텅뭉텅 지나갔다.
어깨가누가 수상하게 따라 흔들렸다.
길이 흘러가 닿는 곳이 어디인지 꼭 알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차라리 그냥 모르고 살련다.
 
유희를 데리고 집으로 온 건,
 전등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침대 한쪽에 놓인 쿠션에 시선이 꽂히자 유희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태오의 크리스마스 선물. ‘4ever love’. 포에버 러브. 영원한 사랑.
제삼자의 웃음거리가 되는 곤궁한 사랑. 나도 씁쓸히 따라 웃었다.
 
유희의 주요 화제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용가리였다.
 
“이혼남은 당최 첨 사귀어보니 알 수가 있어야지.
내가 이상한 건지, 그쪽이 이상한 건지 구별이 안 가.”
 
이혼남 용가리의 행태 중 가장 의아한 점은,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연락이 딱 끊긴다는 점이라고 했다.
 
“본인 말로는 자느라 바빠서 못 받는다는데 그게 말이 되니?
또 지가 나한테 전화하는 건,
편의점에 생수 사러 나왔다거나 쓰레기 버리러 나왔다거나 꼭 그럴 때야.”
 
익히 짐작했던 바라서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내가 누구더냐.
일찍이 국민학생 시절부터 동네 미장원을 들락거리며
각종 여성잡지를 탐독해 왔을 뿐더러 하릴없는 금요일 밤이면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을 시청하며 내공을 쌓아온 이론의 귀재가 아니던가.
용가리의 태도는 이혼남인 척 하는 유부남들의 수법과 극히 유사했다.
설마 혼인빙자간음 사건의 피해자가 된 친구를 위해 법정에서 증언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근데 정말 웃겨.
걔는 한 번 결혼했다 왔으면서 어떻게 그 실력은 하나도 안 늘 수가 있니?
헤어진 와이프랑 섹스리스였다더니 진짠가 봐.”
 
야, 그럼 그 집 애는 어디 황새다리 밑에서 주워온 줄 아니?
그런 거 다 뻥이고 그 남자는 다만 ‘원래 잘 못할’ 뿐이야,
라고 일러주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사실 옛날에 걔랑 할 땐 내가 뭘 알았겠니.
하지만 그동안 나도 자연스럽게 학습해온 부분이 있잖아?
그런 거 다 무시하고 걔한테 맞춰서 하향 평준화시키려니까 아주 좀 쑤셔 미치겠다.
미적분 다 떼고 나서 다시 일차방정식 푸는 기분이야.”
 
누가 들을 새라 우리는 숨죽여 낄낄댔다.
혼자가 가장 편하던 공간에,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위로가 되다니.
태오가 남겨주고 간 잔인한 선물이었다.
그가 떠난 뒤 처음으로 나는 오래 뒤척이지 않고 잠이 들었다.



4부 치명적인 것들 17




인생의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는 마라톤 클럽에 가입할 것이고,
어떤 이는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갈 것이며,
또 다른 이는 머리 꼭대기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꺽꺽대며 울다 잠들 것이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한글 2002 프로그램을 띄운다.
서투른 창녀의 윙크처럼 커서가 깜빡인다.
자, 이제 정리해보자.
시시각각 숨통을 조이며 내 인생을 피폐하게 만드는 그것들을.
 
一. 회사. 내가 아는 진실은 단 하나뿐이다.
회사도 나를 싫어하고 나도 회사를 싫어한다는 것.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위기에 봉착한다.
대개는 참고 버티거나, 아니면 그만둬 버리겠지.
나는.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만두고 나면 당장은 속이 편하겠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는 유희나,
한국 최고의 제빵사가 되겠다는 삼순이처럼 미래를 걸 만한 딱 부러진 꿈을 가진 것도 아니다.
물론 회사에 대한 최고의 복수는 확 독립하여 편집대행회사를 차리는 거겠지.
뛰어난 창의력과 타고난 성실성, 저돌적 추진력(까짓것 가졌다고 치고) 등을 바탕으로 승승장구,
이 놈의 회사를 꿀꺽 집어삼켜 버리는 거다.
으하하. 상상만으로도 통쾌하다.
 어쩌면 안 이사도 그 판타지를 이루기 위해 출사표를 던졌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조만간 안 이사를 한 번 찾아가긴 해야겠다.
 
一. 엄마. 난들 왜 모르겠는가.
우리 아버지 같은 사람과 삼십 년이 넘도록 같이 살아왔다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다 멋있어 보일 거라는 사실을.
엄마도 나약한 한 인간일 뿐이니 이해하라는 충고 또한 고맙게 받겠다.
그 엄마가 ‘나의 엄마’가 아니라 ‘남의 엄마’라면
나 역시 기꺼이 그렇게 생각해드릴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엄마의 일이었다.
새언니라도 아는 날엔 지독한 집안 망신일 것이며,
 아버지가 아는 날에는 상상만으로도 몸서리쳐지는 피의 숙청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 휴대폰에 고이 저장되어 있는, ‘김포아줌마’를 가장한 그 영감탱이의 전화번호.
발신번호를 숨긴 채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다 알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짓 그만하세요.’
심장이 벌렁거리지만 이상하게 마음은 착 가라앉는다.
 
一. 태오. 독한 놈. 겨우(?) 그만한 일로 연락을 끊어버리다니.
첫사랑에 실패했을 때처럼 가슴이 훅훅 타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머릿속에 엄지손톱만한 꿀벌 한 마리가 날아들어 멈추지 않고 잉잉거리는 느낌이다.
백스페이스(backspace)키를 눌러, ‘태오’라는 글자를 지운다.
대신 ‘사랑’ 이라고 입력한다.
언젠가 그는 ‘나를 왜 사랑해요?’라고 물었었지.
이젠 내가 물을 차례다.
우리가 나누었던 그 짧은 시간이 정말로 사랑이었을까?
고개를 끄덕여도, 혹은 가로저어도 남는 것은 쓰디쓴 자책뿐이다.
 
‘사랑’을 지우고 ‘남자’를 입력한다.
남자. 이별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새로운 남자를 찾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 비슷한 이유로 새로운 여자를 찾는 남자가 어디 없을까?
서로에 대한 감정적 기대지평을 극도로 좁히고, 상대방에게 온 마음을 던지지 않으며,
피차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그런 관계를 맺을 수는 없을까?
아무런 기대도 바람도 환상도 환멸도 없는 사이.
예민하고 순수하며 매력적인 태오와는 정반대인, 동아줄처럼 신경이 튼튼하고
매사에 무덤덤하며 손톱만큼의 매력도 원천적으로 결여된 그런 남자와 쿨하게 만나고 싶다.
 
섬광처럼 어떤 이름 하나가 떠오른다. 튀지 않음을 모토로 살아가는 남자,
블루클럽에서 갓 나온 헤어스타일을 한 남자,
만원짜리가 인쇄된 식당 방석에 흐뭇해하던 남자,
김영수씨. 귀신한테 홀린 걸까.
나는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천천히 울렸다.
하나, 둘, 셋.
 
“여보세요?”
 
김영수였다.
과거를 돌이킬 수 없다는 후회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눈앞의 미래조차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매혹적 특권이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나는 천연히 입을 열었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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