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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치명적인 것들 13

오늘의 쉼터 2017. 7. 29. 16:37

제4부 치명적인 것들 13




유준의 마음을 거절하는 방법은 굉장히 쉽다.

“아니. 나는 괜찮아.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이렇게 말하는 순간,
 눈치 빠른 그는 무슨 말인지 금세 알아듣고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말하지 못하겠다. 아니 말하지 않으련다.
비겁하고 이기적이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게 바로 나, 오은수니까.
 
그에게 딱 부러진 의사표시를 하지 않는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 너머에 도사리고 있는 진짜 이유에 대해서 나는 다만 침묵한다.
그렇다. ‘혹시 몰라서’. 혹시 몰라서, 나는 그의 뜬금없는 구애를 거부하지 않는 거다.
다른 이의 마음을 연금보험처럼 이용하려는 나는 누가 봐도 나쁜 여자겠지.
손가락질 받아도 싸겠지. 그러나 서른두 살이 되었으며, 같이 살던 어린 남자애는 외박을 했고,
회사에서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해있을뿐더러,
애인과 목하 열애중인 모친의 비밀까지 알게 된 한 여자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대해 듣는다면
아무리 냉정한 신(神)이라 해도 눈물을 찍으며 너그러이 용서해주실 것 같다.
 
몇 번이고 마다했지만 유준은 나를 집 앞 골목까지 바래다주었다.
성별만 남성인 그냥 친구와, 사귀는 남자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여자를 매번 집에 바래다주느냐의 여부다.
가로등도 없는 골목길을 나는 종종종 걸었다.
유준이 잰 걸음으로 쫓아왔다.

“지지배. 다리도 짧으면서 걸음은 되게 빠르네.”

유준이 투덜댔다.
이제야 내가 아는 유준 같다고 느끼는 찰나,
느닷없이 그의 상체가 가까이 다가왔다.
설마? 나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렸다.
아마도 내 이마에 닿으려고 계획했을
그의 입술은 방향을 찾지 못하고 내 뒤통수에 와 꽁 부닥쳤다.
십년 만에 나눈, 우리의 첫 번째 스킨십이었다.
유준은 민망함과 기막힘,
슬픔과 우스움이 김장 속처럼 버무려진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황황히 돌아갔다.
집에는,
태오가 돌아와 있었다.
안도감과 불안감이 빠르게 교차했다.
혹시 저 창문으로 나와 유준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고스란히 내려다보고 있던 건 아니겠지?
태오는 말이 없이 설거지에 열중하고 있었다.
내가 비운 죽 그릇을 씻나 보았다.
납처럼 무거운 고요가 실내를 휘감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그의 등을 향해 나는 소리를 질렀다.
 
“어젠 어떻게 된 거야?”
 
입 밖에 내는 순간 한없이 남루한 질문임을 깨닫는다.
태오는 대답이 없다.
그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니 핏대가 휙 솟구쳤다.
 
“전화를 해야지. 사람 걱정하는 거 몰라?”
 
“미안. 걱정하게 해서요.”
 
태오가 우물우물 말했다.
 
“실컷 힘들게 해놓고 미안하다면 다야?”
 
“...잘 생각해봐요.
정말 나를 걱정한 거였어요?
걱정하고 있다는 그 느낌이 싫었던 게 아니고?”
 
맥이 탁 풀렸다.
사랑이 저무는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누군가와 이별할 순간이 도래하면 엉뚱하게도 오래 전 운동회 때가 생각난다.
줄다리기 시합. 청군과 백군이 동아줄 하나를 마주 잡고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그때 불현듯 한쪽에서 동아줄을 휙 놔버린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모든 것이 덧없다는 듯.
그럼 다른 한쪽은 어떻게 될까.
게임의 승자가 되겠지만 그걸 진짜 이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게임이 끝나 버렸는데 누가 승리자이고 패배자인지를 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이대로 줄을 놓치고 말기에 안 그래도 나는 지금 너무 힘겹다.
 
나는 태오를 등 뒤에서 안았다.
커다란 그의 등이, 자그마한 나의 가슴에 오롯이 안긴 채 꼼짝하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그의 길고 섬세한 등뼈를 쓰다듬었다.
 태오의 몸을 돌려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
처음에 입술을 오므린 채 움직이지 않던 태오는 곧 주춤주춤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는 이내 격정적으로 나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대로 몸과 몸의 경계 없이 서로 스미고 뒤섞이면 태오와 나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가 그의 귓바퀴에 혀를 밀어 넣는 순간,
그러나 태오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나는 홀로 남겨졌다.
 
고약한 열패감으로 온몸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가.
무엇을 내던져 무엇을 돌이키고 싶었던가.
나는 그를 망연히 노려보았다.
태오가 내 눈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제4부 치명적인 것들 14


왔을 때 그랬던 것처럼,
태오는 ‘짐’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중형 등산용 배낭을 짊어지고 나를 떠났다.
열흘이 흐르는 동안 그에게서는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괘씸했고, 조금 뒤에는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얼마 안 가 무서워졌다.
내 쪽에서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책임감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관계의 종말이 닥쳤음을 확인하고 확인받는 순간 이별은 온전히 내 몫의 책임으로 남게 된다.
한 줌의 희망도 없이 이별의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야 한다.
 이별인지 아닌지 모르도록, 결정적 순간을 조금만 더 유예하고 싶다.
 
그 사이, 유준을 한번 만났다.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커피도 마셨으니 데이트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다.
그는 지나가는 말처럼, 선배가 소개해준 회사에 면접을 보고 왔다고 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뽀뽀 같은 것을 시도하려 들지는 않았다.
엄마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보고 싶은 우리 딸!^^ 너 좋아하는 물김치가 맛있게 익었구나.
 밥 먹으러 와라 *^^*’ 띄어쓰기가 완벽할뿐더러 이모티콘까지
자유자재로 삽입하는 엄마의 문자 전송 솜씨에 나는 긴 한숨을 내리쉬었다.
신혼여행지에서 돌아온 재인이, 주말쯤 저녁을 먹자고 했다.

“어디서 만날까?”

라고 묻자
그녀는

“어디긴 어디야. 우리 집으로 와”라고 했다.
 우리 집이 어디를 의미하는지 아주 잠깐 헷갈렸다.
 
재인의 신혼집은 일산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위치해 있었다.
한손에 무거운 슈퍼타이를 든 채,
죄다 비슷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아파트 동(棟)들을 몇 바퀴나 빙빙 돈 뒤에야
겨우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문을 열어 준 건 먼저 와 있던 유희였다.
그녀의 품에 슈퍼타이를 던지며 투덜거렸다.
 
“죽는 줄 알았네. 세상의 아파트들은 왜 다 똑같이 생긴 거야?”
 
유희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래야 안심하거든.”
 
그러고 보니 그녀와는 재인의 결혼식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좀 어색할 줄 알았건만 막상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스스럼없기만 하다.
실내는 신혼집답고, 또 한편으론 신혼집답지 않았다.
모든 가구와 가전제품은 반들반들 윤이 나는 새것인데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휑했다.
나는 텅 비어있는 거실 벽을 가리켰다.
 
“원래 여기다 뭐 거는 거 아닌가? 맞다. 웨딩사진!”
 
“아직 안 나왔어. 그리고 뭐 굳이...”
 
재인이 말끝을 흐렸다.
신혼여행지에서 선탠을 지나치게 한 걸까,
아니면 신혼부부답게 매일 밤을 뜨겁게 불태우고 있는 걸까.
그녀의 낯빛이 가뭇가뭇하고 볼도 홀쭉해진 것 같다.
 
“뭐 먹을래? 요 앞 중국집 양장피 먹을 만 하던데. 아니면 피자 시킬까?”
 
“앗. 한상 떡 벌어지게 차려주는 거 아니었어?”
 
“야야. 십 오년을 알고도 네가 아직 나를 모르는구나.”
 
재인이 날름 혀를 내밀었다.
그래. 이것이 내가 아는 재인의 모습이다.
 재인아, 그렇게 더 웃어, 활짝. 입속으로 중얼거리다가 곧 실소했다.
오은수씨, 당신 꼴도 지지리 궁상인 주제에 지금 남의 인생을 걱정하시는 건가요?
 갑자기 유희가 눈을 반짝였다.
 
“우리 좀 화끈하게 먹자.”
 
잠시 뒤,
우리는 배달된 불닭을 놓고 식탁에 둘러앉았다.
우리 셋이 이렇게 오붓하게 모인 것이 얼마만인지 몰랐다.
“꼭 콘도에 놀러온 것 같네.”
 
내 말에 재인이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고 나지막이 대꾸했다.
유희와 내가 빠른 속도로 닭을 먹어치우고 있는 데 반해,
재인은 두어 점 집어 먹는 둥 마는 둥하더니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혹시 입덧이냐?”
 
재인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희가 다시 나불댔다.
 
“진짜, 애는 언제 낳을 건데? 기왕 결혼까지 했으니 남 하는 건 다 해봐야지.”
 
“그 질문 벌써 수십 번은 들은 것 같아.
예전엔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묻던 인간들이 이번엔 죄다 애 언제 낳느냐고 들볶아댄다.
지들이 대신 키워줄 것도 아니면서.”
 
“흐흐. 아마 애기 낳고 나면 바로 둘째 계획 물어 댈걸?”
 
“맞다. 대한민국 국민들, 오지랖이 어찌나 넓으신지.”
 
우리는 까르르 웃었다.
뒷맛이 씁쓸한 웃음이었다.
재인은, 남편에 대한 화제는 절대로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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