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치명적인 것들 11
“오대리, 그래서 내가 그때 분명히 말렸잖아!”
황부장은 나에게 말하였으나 나에게 말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의식하고 있는 청취자는, 나를 제외한, 그 방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었다.
특히 사장이 제1순위임을 굳이 강조하여 무엇 하랴.
내가 의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건,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하지는 않겠다.
회피하고 싶지도 않다.
아시다시피 나는 그렇게 뻔뻔한 인간이 아니다.
인정한다. 문제의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나였다.
그래서 나더러 뭘 어쩌란 말이냐! 다만 어려움에 빠진 회사를 구하기 위해 지혜를 짜낸 것뿐이다.
그때는 다들 헬렐레하며 부화뇌동해놓고서 이제 와서 만만한 나에게 화살을 돌리다니.
조직의 비정함에 새삼 치가 떨렸다.
“오대리?”
사장이 흘끗 나를 돌아보았다. 살기마저 어린 눈초리였다.
물론, 그 자리의 어느 누구도 대놓고 나에게 책임을 추궁하지는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야 될 게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므로, 누가 책임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리라.
회의는 결론 없이 끝났다. 하긴 애초에 결론이라는 게 날 수도 없는 문제였다.
장 선배가 조용히 다가와 내 어깨를 짚었다.
“힘 내. 뭐 별 일이야 있겠어?”
비극의 여주인공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려는 건지
아니면 약 올리려는 건지 의도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번에는 이민정이 주춤주춤 다가왔다.
“대리님, 죄송해요. 어쨌든 도와주시려다 이렇게 된 거 알아요.”
“괜찮아. 할 수 없지, 뭐.”
내 딴엔 대범한 척 대답하고 보니, 무언가 한참 뒤바뀐 느낌이다.
그녀는 팔랑팔랑 제자리로 돌아가 엠피쓰리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나는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뱉고 간 ‘어쨌든’ 이라는 부사가 귓전을 뱅뱅 맴돌았다.
나는 언제나 이민정을 어린아이라고만 생각해왔다.
‘쟤는 아직 어려서 뭘 몰라.
세상 무서운 줄도 모르고 타협할 줄도 모르지.
그에 비하면 나는 속세의 때가 덕지덕지 묻은 누추한 인간인 게야.’
하지만 이제는, 어떤 확신도 할 수가 없다.
과연 누가 어린가?
누가 순수한가?
어떤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섭도록 이기적일뿐더러 자기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는 왜, 이 회사에 다니니?’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아니다.
가장 솔직한 대답은 ‘달리 뭘 해야 좋을지 몰라서’일 것 같다.
나를 안전하게 옭아매고 있는 울타리 밖으로 한 발짝 벗어나는 순간,
막막한 정글 한복판에 내팽개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겁이 난다면 영원히 이대로 사는 수밖에 없겠지.
동물원우리를 아늑한 둥지라고 자위하면서.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해보니,
태오는 집에 없었다.
그의 분신 같은 배낭만 방 한구석에 다소곳이 놓여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를 열어보았다.
하얗고 멀겋게 쑨 쌀죽이 들어 있었다.
파를 종종 썰어 넣고 깨소금을 알맞게 뿌린 양념간장도 종지에 담겨있었다.
사랑의 메모 같은 것은 눈에 뜨이지 않았다.
념간장을 쳐서 죽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다.
죽은 아직 따뜻했다.
의외로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곡기를 목구멍에 흘려보내면서야 종일 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눈물이 났다.
갑자기 태오가 견딜 수 없이 보고 싶어졌지만,
지금 내 마음을 절절히 아는 사람은 오직 나 혼자였으므로 몹시 외로웠다.
사방에 촘촘한 침묵이 흩뿌려져 있었다.
나는 느리게 숟가락질 하면서 아주 천천히 눈꺼풀을 끔뻑였다.
태오 대신 유희에게 전화를 한 것은,
유희가 어제의 태오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희의 첫마디는
“왜?”
였다.
쌀쌀맞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어제는 너무 미안했다는 사과만을 남긴 채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의 부재를 통해 나는 그의 존재를 쓸쓸히 실감한다.
뼈마디가 으슬으슬 떨려왔다.
보일러를 한껏 높이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길고 고단한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스르르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그날 밤, 태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제4부 치명적인 것들 12
오래된 속담이 사무치는 순간이 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
아침에 눈을 뜨자 나는 혼자라는 사실 앞에 어리둥절했다.
방은 좁고 어둑했다.
기계적으로 출근준비를 시작했다.
회사까지 가는 길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지하철이 정차할 때마다 그냥 이 역에서 내려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회사를 가지 않는다고 해서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꾸역꾸역 내게 주어진 일들을 했다.
K건설회사가 손해배상을 청구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내가 신경을 곤두세운다고 해서 달라질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뚫어져라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납작하게 엎드린 책상 위의 키보드나 유리컵,
하다못해 연필꽂이 같은 정물이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퇴근 무렵,
종일 조용하던 전화기가 요란히 울렸다.
태오라고 확신했으나, 발신자는 유준이었다.
“야, 너희 회사 되게 높다. 고개 아파 죽겠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나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장난치지 마. 어딘데?”
“어디긴 어디야. 너희 회사 앞이라니까.”
“무슨 소리야?”
“사무실이 12층이라고 했나? 하나 둘 셋 넷……. 아, 저기구나. 야, 나 보여?”
얼른 창문 쪽으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지상의 바닥에서 하늘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는,
틀림없이 유준이었다.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나는 눈을 비볐다.
유준이 우리 회사까지 오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내가 아는 한,
이 지구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극심한 귀차니스트였다.
심지어 늦잠을 자느라 재인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인간이 아닌가 말이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얼어 죽는 줄 알았잖아.”
유준이 장난스레 투덜거렸다.
오늘은 맨발에 슬리퍼 대신 멀쩡한 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평소와는 어딘가 다르다.
검정색 모직 코트에 회색 면바지.
근처 빌딩에서 쏟아져 나오는 샐러리맨들 속에 섞여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차림새라서 도리어 내가 어색해졌다.
언젠가 안 이사와 같이 간 적 있는 중국집으로 그를 데려갔다.
우리는 굴탕면을 놓고 마주앉았다.
뻣뻣한 침묵이 테이블 위에 고였다.
나는 짐짓 쾌활한 음성을 내기로 했다.
“깜짝 놀랐잖아. 어떻게 된 거야?”
“지나가는 길에.”
“야, 귀신을 속여라. 네가 여기 지나갈 일이 어디 있냐?”
“그래. 너 만나러 온 거야.”
유준이 담담하게 인정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유희가 유준에게 벌써 태오의 이야기를 했을까?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 순간, 그러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스스로가 가증스럽다.
부리나케 말을 돌렸다.
“재인이 결혼식에 정말 잠자느라 못 온 거야? 재인이가 얼마나 섭섭했겠어?”
“은수야.”
유준이 나를 그윽하게 건너다보았다.
나는 그릇 속에 고개를 박고 흐물흐물한 굴의 개수를 세었다.
“그날, 나 정말 느낀 바가 많다.
눈 딱 뜨니까 결혼식 끝났을 시간이더라고.
그때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
“…….”
“재인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은수, 너더라.
은수가 앞으로 날 어떻게 생각할까. 날 얼마나 구제불능의 인간이라고 여길까.”
나는 젓가락으로 면발을 돌돌 감았다 놨다 반복했다.
“은수야, 그래서 말인데…….”
유준은 오래 뜸을 들이지 않았다.
“네가 원한다면, 나, 취직하려고…….”
내가 잘못 들었나 했다. 유준은 곧 조그맣게 덧붙였다.
“널 위해서.”
평생 직업을 가지지 않겠다고 선언한 남자,
약육강식의 조직시스템은 자신의 체질과 맞지 않는다고 확고부동하게 주장해온 남자,
남유준이 취직을 하겠단다.
나를 위해서! 그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할 확률 99%.
그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누군가의 거대한 음모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복잡하고 절묘하게 꼬일 수가 있으랴.
목구멍에 별안간 사레가 들렸다.
나는 정신없이 컥컥댔다.
유준이 걱정스레 재스민차를 따라주었다.
이 기침이 영원히 멎지 않기를 나는 간절히 바랐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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