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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치명적인 것들 9

오늘의 쉼터 2017. 7. 29. 13:22

제4부 치명적인 것들 9




얇고 투명한 빛이 어슴푸레 쏟아져 들어왔다.
아침은 조각난 거울처럼 불완전하게 도착했다.
방 안은 적막했다.
누운 자세 그대로 두 눈을 깜빡여 보았다.
속눈썹과 눈동자, 눈꺼풀들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결정적인 변화는 아무 것도 없었다.
안도해야 하는지 치욕스러워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두려웠다.
깨나지 않은 척 한참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자기혐오의 느낌과 강렬한 졸음이 함께 밀어닥쳤다.
나는 다시 곯아떨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 때문에 눈을 떴다.
변기로 달려가 웩웩댔지만 빳빳한 목구멍에서는 맑지 않은 침만 끝없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다가온 태오가 내 등을 가만가만 어루만져주었다.
이런 순간,
옆에 있어주는 그의 존재는 나를 몹시 안심시키는 동시에 고통스러우리만치 부끄럽게 만든다.
 
“그렇게 토하고도 아직 남았나 보네. 억지로 하려고 들지 말아요.”
 
“내가...어제도...토했어?”
 
그 질문을 입 밖에 내는 동시에 거짓말처럼,
어젯밤 택시 안에서의 소동이 모조리 기억났다.
찬물로 입안을 헹구어도 미식거리는 기운이 가라앉지 않았다.
늙은 임산부처럼 나는 변기를 끌어안고 오랫동안 헛구역질했다.
차갑게 곱은 손가락을 태오가 꾹꾹 주물러주었다.
 
“자기, 참 오래 자더라.
그렇게 죽은 듯이 자는 모습 처음 봤어요.”
 
태오의 음성은 다정하고 나직했다.
 
“잠꼬대로 계속 엄마 부른 거 모르죠?
엊그제 집에 다녀왔으면서 또 보고 싶었나봐.”
 
엄마. 내가 엄마를 불렀다고?
그제야 현실감각이 소스라치듯 되살아났다.
 
“지금 몇 시야?”
 
“음, 열시 좀 넘었는데.”
 
“오늘, 월요일이잖아!”
 
나는 태오를 밀치고 휘청휘청 일어섰다.
 눈앞이 아득해진다는 표현은 이런 때 쓰는 것인가 보았다.
월요일 아침 열시가 지나도록 출근하지 않다니!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엇부터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세수도 안 한 주제에 코트를 황황히 팔에 꿰는 내 모습을 보고 태오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회사 못 간다고 했어요.”
 
“뭐?”
 
“한 시간 쯤 됐나, 회사에서 전화 왔더라고요.
왜 안 오냐고 해서, 몸이 아파 누워있다고 그랬어요.”
 
“누가, 누가 전화했는데?
남자야, 여자야?
아니, 정확하게 뭐라고 했단 거야?
어디가 아프댔어? 설마 술 병 났다고 한 건 아니지?”
 
“헷갈려요. 하나씩 물어봐요.
 음, 전화한 사람은 여자였고,
술 마셨단 말은 안 했어요.
첨엔 그냥 아프다고 했는데,
그쪽에서 꼬치꼬치 묻더라고요.
그래서 심한 감기몸살이라고 했어요.”

코트를 방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딱따구리가 쪼아대는 것처럼 관자놀이가 쑤셨다.
전화를 건 사람은 아마도 장 선배였을 것이다.
태오의 목소리를 들은 장 선배는 도대체 무슨 상상을 했을까?
나에 관한 소문을 비밀스레 전해주던 그녀의 좁은 이마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래서, 자기가 누구인지는 안 물어봐?”
 
“물어보던데요. 실례지만 누구시냐고.”
 
“그래서, 그래서, 누구라고 했어?”
 
태오가 말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걱정 말아요. 남자친구라는 말, 안 했으니까. 친구라고, 그냥 친구라고 했어.”
 
“미쳤어?”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 왜 최소한의 자제력을 잃었을까.
 
“그게 그거잖아. 아침부터 웬 남자가 전화 받아서는 친구라고 하는 게 말이 돼?
차라리 남동생이라고 하지 그랬어? 아님 오빠라고 하던가.
아니, 남의 전화를 자기가 왜 받아? 울리게 그냥 놔두지!”
 
다시 코트를 집어 들고 일어서는 나를 태오가 붙잡았다.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래서 지금 가겠다고?”
 
우리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위태로이 어긋났다.
 
“그럼 어떻게 안 가? 회사가 무슨 학교인줄 알아? 으휴, 정말,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내가 옳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 자신이 싫어서, 스스로를 속이고 싶어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내 팔을 붙들고 있던 그의 손아귀에 서서히 힘이 빠졌다.
붉게 상기되었던 그의 표정이 고요하게 가라앉더니 곧 싸늘히 식었다.
그의 내부에서 무언가 꿈틀 움직였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치명적일, 아주 작은 것.





제4부 치명적인 것들 10


곤란한 상황이 닥치면 일단 피하기부터 했다.
문제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순간까지 최대한 질질 끌면서,
나 혼자 눈 가리고 귀 막고 숨어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 엉망으로 본 시험 성적이 발표되던 날,
꾀병을 부리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엄마는 미심쩍다는 눈초리를 보냈지만 배를 잡고 뒹구는 어린 딸에게 못 이기는 척 져 주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나는 이제 회사라는 이익집단의 구성원.
아무리 아프더라도, 아무리 숨고 싶더라도, 꾸역꾸역 나가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책상 위에 잔뜩 쌓여 있을 뿐더러 결근보다 지각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훨씬 부드러웠다.
 
하철의 작은 진동에도 속이 계속 울렁댔다.
엘리베이터에서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는지 모른다.
숨을 가다듬고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사무실 문을 열었다.
이런 자세를 책임감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사무실은 반쯤 차 있었다.
직원들 몇이 나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그들의 표정이 어쩐지 딱딱한 정물처럼 느껴졌다.
 
“어디 불편하다면서. 이젠 괜찮아요?”
 
미술팀의 새끼디자이너가 아는 척을 했다.
우리 팀과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앉는 그녀까지 알 정도라면,
오늘 아침 나의 부재사유에 대하여
이 회사 구성원들 거의 모두가 인지하고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장 선배와 이민정은 웬일인지 나란히 들어섰다.
장 선배는 나를 보고

“얼굴 핼쑥한 것 좀 봐. 왜 나왔어? 그냥 하루 쉬지”

라고 말했을 뿐,
전화 받은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추궁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오후 내내 원고청탁전화를 돌려야 했다.
오늘 따라 전화를 안 받는 사람들이 많았고,
겨우 어렵게 연결이 되더라도 단칼에 거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바쁘시더라도 한 번만”

을 비굴하게 간청하는 동안,
토기(吐氣)가 여러 차례 치밀었다.
텅 비어서 나오는 구역질은, 비릿하게 속을 긁어내린다.
틈틈이 유희에게 문자메시지를 날렸다.
‘나 많이 취했지? 필름 끊겼어. 정말 정말 미안 미안 ㅠ.ㅠ’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던 황 부장이 네 시쯤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섰다.
그는 나의 지각 사유 따위는 전혀 궁금해 하지 않았다.
곧 긴급회의를 소집하겠으니 다들 회의실에 모이라는 말만 했다.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터졌음이 직감되었다.
회의실에 편집팀원 전원이 집합했다. 안 이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안 이사와 내가 한데 엮여 번성 중이라는 풍문이 새삼 떠올라 기분이 척척해졌다.
안 이사 대신 긴급회의를 주재한 사람은 사장이었다.
다들 상체를 직각으로 꼿꼿이 세워 앉은 자세로 사장의 첫마디를 기다렸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몹시 비장하고 비감어린 어조였다.
 
“지금 제 심정은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차라리 이것이 나 개인의 문제라면,
그렇다면 지금 저 창밖으로 몸을 던져 속죄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차라리 한 마리 가련한 새가 되어 먼 하늘로 펄펄 날아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사장이 대학 때 문학청년이었다는 소리를 어디선가 주워들었다.
시를 써서 신춘문예에 투고하곤 했다던데
저런 실력으로는 언감생심 예심도 통과했을 리 없을 것 같다.
늘 자신만만하던 사장이 왜 갑자기 얼굴을 죽상으로 찌그러트리고
눈동자를 희번덕대고 있는 것일까? 의문은 곧 풀렸다.
 
“K건설로부터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다음 말은 들으나마나였다.
홍보브로슈어에 난 오타를 눈속임하기 위해 일부 물량만 특제했던 것이,
거래처에 직방으로 들통나고 만 것이다.
사장은

“도저히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습니다”

라는 요지의 문장을 반복했다.
아마도 그는 안 이사의 주도 아래 처리된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오너로서 그는 어쨌거나 ‘모르는 척’ 해야 하는 필연적 명분을 찾고 있을 것이다.
 
건너편에 앉은 이민정의 얼굴빛이 시뻘게졌다.
맞다,
그때 실무자가 이민정이었지. 쯧쯧, 안 됐다,
욕보겠구먼. 나는 그녀를 동정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불이 난 곳이 강 건너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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