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치명적인 것들 7
유희와 용길, 그리고 은수와 태오.
이들이 어떻게 한 자리에 모여 숯불에 갈매기살을 구워 먹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매사 똑 부러지게 거절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는, 내 우유부단한 성정 탓이라고 자책할 수밖에.
웨딩카를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태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를 채가는 유희의 손은 번개처럼 빨랐다.
나는 조금 뒤 닥쳐올 상황 같은 것은 짐작도 못한 채,
태오와 통화하는 유희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왜 같이 안 왔어요?
보고 싶었는데. 우리 한번 봐요.
아, 오늘, 오늘 저녁 어때요?”
떡하니 입을 벌렸을 뿐 설마 태오가 정말로 유희의 즉흥적인 제안에 응할 줄은 몰랐다.
아, 차라리 그때 갑자기 위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걸 그랬다.
아니면 엄마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뻥이라도 쳤어야 했다.
그 어떤 거짓말도, 이렇게 어색한 조합으로 둘러앉아 숯불연기를 들이마시는 것보다는
오만 배 나았으리라.
용길과 태오를 나란히 놓고 보니 둘은 영락없이 큰형과 막내 동생 같다.
고모부와 조카 사이라고 해도 믿겠다.
용길이 따라주는 맥주를, 태오는 공손히 두 손으로 받았다.
반면 용길은 태오가 따라주는 술을 한 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내가 한참 형이니까 그냥 편하게 대할 게요.”
“형은 무슨. 삼촌 같다야. 태오씨는 피부가 어쩜 이렇게 좋냐? 부러워 죽겠네.”
유희가 옆에서 고시랑거렸다.
그녀의 정중치 못한 말투가 영 거슬렸다.
“그럼 둘이 시작한 지 얼마나 된 거예요?”
유희가 묻자,
태오가 쑥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나도 모르게 퉁명스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얼마 안 됐어. 그리고 그게 뭐가 중요하니?”
“야, 무섭게 왜 그래? 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어.
그동안 감쪽같이 속여 놓고선.”
“속이긴 뭘 속여? 말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야.”
유희가 눈을 흘겼다.
손톱으로 내 팔꿈치 안쪽 살이라도 꼬집을 기세였다.
“그럼, 유준이는 뭔데? 바보된 거잖아.”
나는 얼른 태오의 눈치를 살피며 유희를 쏘아보았다.
난데없이 유준까지 들먹이다니.
이것은 페어플레이가 아니다.
분을 삭이기 위해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평소답잖게 비비 꼬인 유희의 심사를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유희는 늘 내게 솔직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뮤지컬 수업을 받고 있다는 것도,
이혼남이 되어 돌아온 첫사랑 용가리를 다시 만나고 있다는 것도 맨 먼저 나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던 유희였으니,
태오에 관한 얘기를 재인을 통해 듣게 되었을 때 맘이 상했을 것이다.
망고, 파파야, 멜론 같은 것이 가득 들어있는 고급과일바구니를 선물했더니
쪼글쪼글하게 시든 사과 반쪽이 되돌아왔다고 탄식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미안하다.
나도 인간이므로 당연히 유희에게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좋으랴.
나이 들수록 점점,
아무리 친한 친구에게라도 내 깊은 속내를 쉬이 털어놓을 수 없게 되는 것을.
달팽이가 자꾸만 동그랗게 몸을 움츠리는 것이 달팽이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용길의 조심성 없는 목소리가 식당 안을 붕붕 울려대고 있었다.
“히야! 영화! 멋지네.
나도 어릴 때는 영화깨나 봤는데.
그땐 진짜 영화 같은 거나 하면서 인생 자유롭게 살고 싶었건만.”
인간은 죽어도 안 변한다고 하던가,
어떤 화제가 나와도 무조건 대화의 주도권을 제가 쥐어야만 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은 십년 전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근데 요즘 한국영화는 왜 그 모양이야?
조폭영화가 히트 치니까 죄다 그리 몰려가고.
무조건 손님만 많이 들면 장땡인줄 알잖아.
완전히 아사리 장사판이라니까. 안 그래요?”
용가리가 아무렇게나 뒤떠들어댔지만,
태오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그의 말을 차분히 경청했다.
짜증스러울 게 분명했지만 그 비슷한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역시 참 착한 사람이야.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바보, 조금만 덜 착하면 좋을 텐데. 그렇게 꽁알댔던 것도 같다.
이상하게 자꾸만 술잔으로 손이 갔다.
“야, 오늘 술발 좀 받는데.”
다들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깜찍하게 씩 웃었다.
그것이 그날 밤, 나의 온전한 마지막 기억이었다.
제4부 치명적인 것들 8
사람은 왜 선(線)을 넘는가. 끊임없이 선을 의식하고 살기 때문이다.
선을 밟으면 안 된다는 억압에 짓눌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소한 충동이 고장 난 신호등처럼 깜빡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대형연쇄폭발이 일어난다.
변명은 필요 없다.
그날, 나는 만취했다.
고깃집 카운터에서 호기롭게 계산을 치르던 용길의 뒷모습부터 가뭇가뭇 흔들린다.
나는 소리쳤던 것 같다.
“재수 없어. 왜 지가 내!”
그 말을 입 밖으로 쏟아 내었는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각종 음식점의 네온사인이 즐비한 골목길에서
유희의 어깨를 껴안았던 것은 어렴풋이 기억난다.
“2차 가자. 2차!”
“야, 너 취했다. 태오씨, 얘 좀 똑바로 잡아 봐요.”
그러나 나는 태오의 팔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아이 씨, 나 안 취했다니까. 2차. 2차.”
곧이어 밖으로 나온 용길이 요란하게 내 편을 들고 나섰다.
“가자! 이번엔 소주다.”
그도 이미 충분히 취한 상태였다.
“꺄- 좋아, 소주! 가자, 가자.”
스펀지에 알코올이 스미듯 의식이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지하 술집으로 내려가는 굽이진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진 암흑 미로 같았다.
발밑이 어지러이 흔들리고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뾰로통한 유희의 얼굴, 걱정스런 태오의 얼굴, 불콰하게 달아오른 용길의 얼굴,
그 얼굴과 얼굴들이 주홍색 불꽃처럼 뇌 속에서 출렁였다.
내가 왜 이러는 지 납득할 수 없었고, 납득할 수 없어서 또 술을 들이부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용길에게 카랑카랑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솔직히 고백해 보란 말이야. 그때 유희한테 왜 그런 건데?”
“에이 씨. 오랜만에 봤는데 너 자꾸 그럴래? 치사하게 왜 자꾸 옛날 일을 들추고 난리야.”
“이제 와서 다시 나타난 저의가 뭐야? 넌 세상이 그렇게 쉽니?
우리 유희가 그렇게 만만하니?”
태오가 말리고 나섰다.
“자기야, 이제 제발 그만해요. 너무 취했어.”
“아냐, 자기는 빠져. 자기가 그때 안 봐서 그래.
그때 유희가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얘, 그때 약도 먹었단 말이야. 그치, 유희야?”
내 우정에 감복하기는커녕 유희는 몹시 격분해했다.
“야, 오은수! 너 보자보자 하니까 너무 심하잖아.
술주정하려면 곱게 할 것이지, 왜 우리 용가리한테 트집이야?”
“남유희! 너, 내가 누구 땜에 이러는데? 다 너 때문이야. 너 또 상처받을까봐.
용가리, 너 똑바로 말해봐. 진짜 이혼 한 거 맞아? 이혼도 안 해놓고 사기 치는 거 아냐?”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용길이 테이블에 엎어져 쿨쩍였다.
그 역시 기를 쓰고 지키려던 경계선이 무너진 걸까.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그가 엎어질 때의 충격으로 냄비 속의 알탕이 넘쳤다는 것.
시뻘건 국물은 내 블라우스 앞자락에 튀어 점점이 얼룩을 남겼다.
태오가 얼른 냅킨으로 닦아 주었지만 나는 손을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장실을 향해 몇 발짝 떼었을까.
바닥이 느닷없이 휘청 흔들리더니 시야를 덮쳤다.
나는 고꾸라졌다.
명랑만화 속 주인공처럼 술집의 더러운 바닥에 큰 대(大)자로 엎어졌다.
이마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나를 일으켜 이마의 피를 닦아주고,
용길의 등을 두드려주었을 뿐더러,
유희의 화를 달래준 것은 모두 태오의 역할이었다.
태오가 나를 어떻게 택시 뒷자리에 밀어 넣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문득 가슴이 답답해 눈을 떴다.
차창 밖은 익숙한 동네 어귀였다.
다 왔구나, 라고 생각하는 순간 차가 조금 출렁였다.
별안간 지독한 기름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숨 고를 새도 없이 나는 속의 것을 모조리 게워내기 시작했다.
토사물은 직물시트 위에 작은 동산처럼 쌓여갔다.
택시기사가 도로 한 편에 차를 세웠다.
태오가 팔을 걷어붙이고 치우겠다고 나서자,
오십대의 기사는 구겨진 신문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될 일이 아니야. 아이 썅, 먹으려면 곱게 쳐 먹던가.”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태오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나는 핸드백을 움켜쥐었다.
“자기야, 내 지갑에서 차비 꺼내 드려. 아저씨, 얼마에요?”
입을 열 때마다 시큼한 냄새가 풀풀 풍겼을 것이다.
선을 넘는 순간은 갑작스레 찾아온다.
그리고 수치심에 목매달고 싶은 다음날 아침도.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