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치명적인 것들 5
“야! 한대. 한대.”
유희의 숨넘어가는 전화에 잠이 깼다.
오전 열한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어리둥절했지만 곧 재인의 결혼식에 대한 얘기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느리게 대꾸했다.
“그럼 진짜로 안 할 줄 알았니?”
“하긴. 재인이 지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다고 뒤엎었겠냐.
내가 웃기는 년이지. 혹시나 무슨 쇼킹한 반전이 일어나주길 기대했나 봐.”
언제나 느끼는 바지만 유희는 나에 비해 참으로 솔직하다.
비슷한 마음을 품었으면서도 입 밖에 내지 않는 내가 의뭉스러운 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기지개를 켜며 넓지 않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태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말도 없이 어딜 갔는지 궁금했으나 방구석의 배낭에 눈길이 머물자 이내 의문이 사라졌다.
일요일이니 교회에 갔다 돌아올 터였다.
거울 앞에 앉아 오랜만에 공들여 화장을 했다.
어제 새로 산 리본 달린 블라우스에 핑크색 핸드메이드 스커트를 받쳐 입고
아이보리 빛 스타킹으로 마무리 했다.
코트의 허리끈을 꽉 조여 묶고 전신거울 앞에 섰다.
친구의 결혼식을 위해 정성껏 치장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예의를 다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화사하고 은성한 결혼식장의 빛 속에서 나 스스로를 다독이기 위함이다.
아직은 충분히 괜찮다고, 나는 보잘것없지 않다고 주문을 외우기 위함이다.
재인의 예식이 거행되는 곳은 시내의 작은 호텔이었다.
언젠가 그녀가 들려줬던 말이 기억났다.
“그 날이 길일이라 서울 안의 온 예식장이 죄다 동났잖아.
한강 둔치에 천막이라도 쳐야 하나 했는데 갑자기 한 군데가 취소되었다지 뭐야.
파투 난 커플한테 얼마나 고마운지 눈물이 앞을 가리더라.”
원래 이 자리, 이 시간의 주인이었을 그 남자와 그 여자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혹시 다른 하객들 틈에 섞여 로비 어딘가를 서성이고 있는 것을 아닐까.
석류처럼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오르면서 나는 실없이 공상했다
식장 입구에는 양가의 부모들과 신랑이 하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땀인지 개기름인지 모를 성분으로 번들거리는 꼴을 보니,
신랑은 오늘도 일체의 화장품 사용을 거부했나 보다.
몇 해 만에 친구 부모님들을 뵐 때면 세월이 꼬박꼬박 흘렀다는 사실에 대해 새삼 놀라게 된다.
그새 많이 늙으신 재인의 어머니가 내 손을 부여잡았다.
“우리 재인이가 먼저 가서 어떡하니.
은수도 얼른 좋은 사람 만나야지. 엄마가 잠 못 주무시겠다.”
나는 입을 가리고 살포시 웃었다.
하마터면
“엄마 때문에 제가 못 자는 걸요”
라고 대답할 뻔 했다.
신부 대기실은 번잡스러웠다.
한복을 입은 일군의 아주머니들이 재인의 주위를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었다.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단아하고 아름다운 신부였다.
일주일 전,
다 그만두겠다며 내 방에 찾아와 대성통곡하던 여자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재인은 담담한 미소로 나를 맞았다.
“오늘 예쁘네.”
내가 해야 할 말을 그녀가 먼저 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재인의 눈에는, 표정이 없었다.
잔잔한 일렁임도 없이 정지된 그 눈동자에는 설렘과 두려움,
갈망과 공포의 감정을 넘어선 자의 고요한 체념이 들어있었다.
영화 ‘런어웨이 브라이드’가 떠올랐다.
그녀의 손을 낚아채 도망가려면 지금이 가장 적절한 타이밍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고작 친구의 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속삭였을 뿐이다.
“담배 사다 줄까?”
풋, 재인이 짧게 웃었다.
그리고 묵묵히 내 손을 찾아 쥐었다.
새하얀 레이스 장갑에 감싸인 그녀의 손바닥은 한겨울 계곡물의 얼음장처럼 차디찼다.
내 살갗과 뼛속까지 오슬오슬 떨려왔다.
비로소 그녀가 저 편의 어마어마한 세계로 건너간다는 사실이 실감나게 와 닿았다.
“이제 오늘의 성스러운 예식을 위하여 양가 어머님들께서 축복의 촛불을 밝히시겠습니다.”
서른두 살이 되면 결혼식의 순서쯤은 눈 감고도 외울 수 있게 된다.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식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식장 맨 뒤에 선 채로 주례사를 멍하니 듣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툭 쳤다.
유희였다.
“미쳤어? 왜 이제 와?”
소곤대는 내 목소리에 씩 웃으며
“미안해”
라고 사과한 건 유희가 아니라 그 옆의 연두색 넥타이를 맨 남자였다.
제4부 치명적인 것들 6
사람의 얼굴은 어떻게 변하는가,
혹은 변하지 않는가.
유희 옆에 서서 웃고 있는 남자가 용길이라는 것을 나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10년 만이다.
십년은, 잔인한 시간이다.
휴가 나온 까까머리 육군상병을 애 딸린 이혼남으로 만들어놓는.
그러고 보면 누군가와 10년 만에 조우하기에 가장 적당한 장소는,
10년 전에 공통으로 알던 이의 결혼식장인 것 같다.
유희에게서 요즘 용길과 다시 만나고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렇게 재인의 결혼식장까지 버젓이 데리고 나타날 줄은 몰랐다.
나는 친구의 옛 애인이자 현재 애인인 남자에게, 어색하게 인사했다.
“정말...오랜만이네...요.”
존칭어미 ‘요’ 를 작게 덧붙였다.
깡마르고 키만 멀대같이 컸던 용길은 십년 동안 10 kg 은 너끈히 불어난 듯했다.
해사한 낯빛을 가지고 있던 남자아이가 허옇게 두부살 오른 아저씨가 되는 데는
10년이라는 시간 말고 또 무엇이 필요한지 궁금하다.
22살의 오은수를 기억하고 있는 용길의 눈에
32살의 오은수가 어떻게 비치고 있을지 문득 겁이 난다.
“와아- 반갑다...길에서 보면 못 알아보겠어.”
옆에 있던 유희가 속살거렸다.
“얘도 많이 늙었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나는 유희를 슬쩍 째려봐주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축가연주에 골똘히 매혹된 척했다.
양가 친척 사진촬영에 이어, 친구들 사진촬영이 있다는 멘트가 들려왔다.
새삼 느끼건대, 여자가 늦게 결혼해서는 안 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 순간 때문이다.
정말 궁금하다.
아무리 일요일이긴 하지만,
친구 결혼식에 참석할 때는 애들 좀 잠깐 집에 두고 오면 어디가 덧나나?
백번 양보해서, 달랑 축의금 5만원 내고는 남편과 큰애, 작은애까지
4인 가족이 몰려와 한 끼 해결하고 가는 행태는 이해한다고 치자.
하지만 신랑 신부와 함께 사진촬영을 하는, 그 3분여 동안만큼은
애 좀 잠깐 옆에 치워두고 홀몸으로 사진기 앞에 서면 왜 안 되느냔 말이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계속 울어서 촬영이 지연되었다.
결국 아이를 맨 앞자리, 신부 옆에 떡하니 세운 채로 사진을 찍어야 했다.
안 그래도 무슨 흠잡을 거리 없나 눈을 번뜩이고 있던 하객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어머, 친구는 벌써 저만한 애가 있네. 신부가 몇 살이랬지?”
“서른이 휙 넘었다잖아.”
“쯧쯧.”
부케는 유희가 받았다.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물론 내가 부케를 받고 싶었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마음 한 구석이 왠지 조금 시큰했을 뿐이다.
일곱 살 연하의 남자친구와 결혼하는 것보다 애 하나 딸린 이혼남과
결혼하는 편이 더 수월하리라고 아마도 재인은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재인이 던진 부케는 유희의 품에 무사히 안착했다.
짝짝짝 박수를 치면서 생각했다.
부케를 던지고 받고 하는 풍습은 누가 만들었을까?
신부가 던진 부케를 받으면 육 개월 안에 반드시 결혼을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3년 동안 결혼을 ‘못’하는 저주에 걸린다는 식의 루머는 또 무슨 뜻일까?
혹시 꽃 대신 다른 것, 이를테면 장난감 로보트나 노트북, 하트 모양 쿠션 같은 것을
손에 들고 입장하고 싶어 하는 신부도 있지 않을까?
왜 모두들 똑같은 형식 속에서 ‘식’을 올려야 안심하는 걸까?
피로연은 뷔페였다.
식욕이 별로 없어도,
뷔페식당에만 오면 갑자기 그악스런 속도로 접시를 채우게 되곤 한다.
생선초밥과 고기산적, 마카로니샐러드와 잡채들이 계통 없이 뒤섞인 접시를 들고
유희 커플 옆에 앉았다.
유희가 수북이 가져온 광어회를 용길의 접시에 덜어주며 조잘거렸다.
“은수 너도 그 꼬맹이 데려 오지 그랬어?”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둘이 있었다면 ‘주책은 너 하나로 족해’ 라고 쏴붙여주었을 것이다.
용길이 거들었다.
“일곱 살 연하라며? 야, 오은수 예전엔 몰랐는데, 아주 보통이 아니네.”
유희가 벌써 내 남자관계에 대한 브리핑까지 마친 모양이었다.
민망한지, 유희가 제 남자친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짐짓 못 본 척, 나는 맹렬히 탕수육을 씹었다.
고기가 몹시 질겼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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