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4부 치명적인 것들 3

오늘의 쉼터 2017. 7. 28. 16:23

제4부 치명적인 것들 3




주말이 다 되어가도록 재인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재인의 결혼식은 일요일 오후 두시였다.
유희도 걱정이 가득했다.
 
“환장하겠네. 집 전화도 안 받아. 재인이 부모님도 다 어디 가셨나?
어쨌든 그날, 하긴 하는 거지?”
 
“그렇겠지, 설마.”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니 정오가 넘어있었다.
태오에게 말한 것처럼, 딱히 엄마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이 시간부터 205호로 바로 들어가자니 어쩐지 내키지 않았다.
머릿속이 복작복작했고 동시에 텅 빈 듯 했다.
세일 중인 백화점으로 가 옷을 몇 가지 샀다.
내일 입으면 딱 적당할 리본 달린 실크블라우스를 3개월 할부로 그으면서
‘혹시 재인이 결혼식이 진짜 취소되면 이 옷 환불해야하나?’라는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잠깐 했다.
꼭 분당 행 버스를 기다린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버스가 제일 빨리 왔으므로 얼결에 올라탔다.
 
현관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우리집 열쇠구멍에 새로 달린 디지털 도어 락 시스템 앞에서 나는 낭패감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초인종을 연거푸 눌러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 응답도 없다.

‘당신은 나의 동반자 영원한 나의 동반자 내 생애 최고의 선물…’

엄마 휴대폰의 통화연결음으로 설정된 노래를 듣는 동안 몸이 움찔움찔 떨려왔다.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통화연결음 같은 것을 지정해놓을 분이 아니다.
 
“엥? 집 현관문 비밀번호를 모른다는 게 말이 되냐? 니가 그러고도 이집 식구냐?”
 
“아우 아빠 저 급해요. 그래서 번호가 몇 번인데요?”
 
“공오이오 아니냐.”
 
5월 25일, 내 생일.
그 네 자리 숫자를 선택한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니 왠지 모르게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러게 집에 자주 자주 좀 와야지”

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잔소리도 갑자기 참을 만하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소요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중이라고 했다.
산악회의 정기모임 차 그곳에 갔으며, 내일 오후에 올라올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아버지가 산악회 같은 곳에 소속되어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나는 부모의 요즘 생활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원래부터 그저 거기 있는 존재일 뿐,
부모는 단 한번도 나의 반짝거리는 탐구 대상인 적 없었다.
 
“재미있게 노시다 오세요. 맛있는 것도 많이 드시고요.”
 
“쯧쯧. 놀러온 게 아니라 산악회 정기등반대회래도.”
 
아버지는 혀를 찼지만, 전에 없이 살갑게 구는 딸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느이 엄마한테 전화해서 얼른 들어오라고 해라.
뭔 놈의 여편네가 나이 들더니 아주 한번 나가면 깜깜 무소식이야.”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엄마 어디 갔는데요?”
 
“그 왜 있지 않냐. 고향친구 만난다던데.”
 
가슴이 벌렁거렸다.
0525번을 누르고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다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비어있는 실내는 고즈넉했다.
혈육만큼이나 익숙한, 오래된 아파트. 그 소박한 거실의 풍경을
나는 새삼스런 낯설음에 잠겨 가만히 둘러보았다.
 
낡아가는 기색을 감출 수 없는 고동색 가죽소파는 내가 대학 4학년이던 해에 산 것이다.
늘 그렇듯 아버지와 엄마는 소파의 가격을 놓고 다투었으며,
나는 고동색보다 검정색이 더 낫다고 강력히 우겨대었고,
소파를 운반한 젊은 일꾼에게서는 심한 발 고린내가 났다.
어제인 듯 생생한데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가는 옛일이다.
그때의 이 집에는 반지르르한 윤기와 부산스런 활기가 함께 숨쉬고 있었던 듯하다.
적어도, 이렇게 납작하게 엎드린 채 적요로이 닳아가고 있지는 않았다.
자식들이 모두 떠난 집에서 부모는 매일매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부모에 대해 나는 얼마큼 알고 있을까.
 
거실탁자 한쪽에 놓인 스프링 노트를 집어 들었다.
두분이 전화번호부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좀스럽다고 할만치 꼼꼼한 편인 아버지의 필체와, 큼지막하고 단순한 엄마의 필체가
확연히 구분되었다.
나는 ‘ㄱ’ 부분을 펼쳤다.
기철엄마, 강정식, 김진숙, 고정섭, 권미옥, 광식이네 등등 듣자마자
누구인지 떠오르는 이름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었다.
김포아줌마의 전화번호는 어디에도 없었다.
김포아줌마 성함이 뭐였더라? 곰곰 더듬어보다가 문득,
그분의 본명을 들어본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4부 치명적인 것들 4




세상에는,
눈으로 본 적은 없을지라도 당연히 존재하리라 믿어지는 것들이 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김포아줌마가, 나에게는 그랬다.
왜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을까.
삼십여 년 간 엄마와 김포아줌마가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조차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교하고 치밀하게 헤아릴 기운은 없었다.
짙은 먹장구름들이 휙휙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는 밤 열시가 가까워서야 들어왔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내 모습에, 엄마는 유령이라도 본 듯 기겁했다.
 
“온다고 말을 해야지. 밥은?”
 
“라면 먹었어.”
 
“냉장고 열어보면 장조림이랑 밑반찬들 다 있고,
감자국도 아침에 끓인 건데 좀 데워 먹지 그랬어?”
 
오늘따라 엄마의 태도는 어쩐지 과장되고 어딘지 모르게 붕 떠있는 것만 같다.
엄마의 코트자락에서 바깥거리의 차가운 바람 냄새가 옅게 펄럭였다.
코트를 벗는 엄마의 뒷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어디 갔다 온 거예요?”

라고 묻고 싶었다.

“정말 김포아줌마 만난 것 맞아요?”

라고 따지고도 싶었다.

“그때 그 아저씨는 누구예요?”

라고 추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짐짓 조용히 고개를 틀었다.
 
엄마와 나,
우리 둘 사이에 멀고도 깊은 강이 흐르고 있다는 느낌은 소름 끼치도록 낯설다.
보통의 모녀지간이 그렇듯 우리는 몹시 친밀한 편이다.
아니, 친밀하다는 표현은 어색하다.
적확한 형용사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질긴 애착으로 뒤엉켜있는 것이 엄마와 딸의 관계인 것이다.
내가 그녀의 자궁 속에 잉태된 오렌지만한 아기였을 때부터,
우리는 격렬하게 다정했고 자주 싸웠으며 소리 소문 없이 화해했다.
 
나에게 엄마는 말랑말랑하고 폭신폭신하고 축축한 사람.
그리고 생리 첫날, 냉랭하게 식은 내 아랫배에 손을 집어넣어 찜질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영원히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순간, 무엇이 나를 망설이게 하는가?
이제 더 이상 나는 엄마의 ‘사랑하는 어린 딸’이 아닌가?
나는 무엇이 두려운 건가? 누구도 대신 대답해줄 수 없는 물음들이 꼬리를 이었다.
 
엄마의 전화기는 내 것과 같은 브랜드의 제품이었다.
최근 통화목록을 훔쳐보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였다.
수신번호 리스트에는 전화번호들이 어지러이 나열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처음 보는 숫자들이었다.
유독 여러 번 찍혀있는 번호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 번호를 재빨리 내 전화기에 입력시켰다.

‘오늘은 날이 좀 풀렸네. 그래도 따뜻하게 입어.’
 
오늘 아침에 온 문자메시지의 내용이다.
그 밑에 남겨진 전화번호는, 좀 전의 그것과 일치했다.
 
“왜, 아빠도 안 계신데 안방에서 엄마랑 같이 자자.”
 
“아니야. 그냥 편하게 주무세요. 오랜만에 내 방에서 자고 싶어.”
 
내가 떠나왔던 내 방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비어있는 공간은 어쩔 수 없을까,
책상 위에 얇은 먼지들이 사뿐히 내려앉아 있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문장과,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다는 욕망이 뒤섞여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상자를 열면, 다시는 닫을 수 없을 것이다.
재앙이 빠르게 몰려와 곧 온 세상을 뒤덮으리라는 악착같은 예감에 나는 몸을 떨었다.
하지만 누가, 어떻게 참을 수 있을 텐가!
 
이쪽의 발신번호를 감춘 채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어디서 무엇 하다 이제 왔나요
당신을 기다렸어요
라이라이야 어서오세요
당신의 꽃이 될래요’

꽃이라는 이름의 노래가 흐르는 동안 심장이 시시각각 죄어든다.
 
“여보세요.”
 
남자다. 중년의 남자. 나는 전화기의 폴더를 닫았다.
눈으로 직접 보고서도 믿지 못했다. 믿으려 들지 않았었다.
그렇지만 이제 무기력하게, 승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겠다.
 
엄마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
 
무슨 정신으로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나
는 맨발로 야트막한 꿈속을 서성였다.
희멀건 빛깔의 슬픔이 가슴 속에 서서히 차올랐다.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다.
얼추 첫차가 다닐 시간이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옷을 입고 집을 나왔다.
견고하게 닫힌 안방 문 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205호에 도착하자, 해가 반쯤 떠 있었다.
태오는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다.
말없이 그의 곁을 파고들었다.
하룻밤 새 폭삭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소설방 > 달콤한 나의 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4부 치명적인 것들 7   (0) 2017.07.29
제4부 치명적인 것들 5   (0) 2017.07.28
제4부 치명적인 것들 1   (0) 2017.07.28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7   (0) 2017.07.27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5   (0) 2017.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