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4부 치명적인 것들 1

오늘의 쉼터 2017. 7. 28. 16:09

제4부 치명적인 것들 1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아리스토텔레스.
 
이 명제는 참일까?
물론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점점 더 힘이 든다.
 
빽빽한 나무들이 울창하게 둘러선 숲 한가운데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느낌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힘껏 뽑아버리고 싶은 그 나무들,
그리고 내 주변의 인간들.
제일 먼저 황부장부터 누가 좀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는 왜 종일 아무 얘기도 없다가 딱 오후 4시만 넘으면 갑자기 호출해 새로운 일을 시키는 걸까.
내일 아침까지 끝내라는 명령은 필수 옵션이다.
두어 시간 야근으로는 어림도 없을 만한 분량의 작업에 망연자실해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오은수, 뭐야? 어린 애랑 살림 차렸다며?”
 
다짜고짜 내지르는 유희의 목소리에 얼이 빠졌다.
아 다르고 어 다른 한국어의 뉘앙스를 새삼 절감하는 순간이다.
혹시 그녀의 주책 맞은 음성이 전화기 밖으로 삐져나온 건 아닌지
사무실 안을 소심히 둘러보아야 했다.
 
“그런 거 아니야.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전화를 끊고 나니 비로소 화가 뻗쳤다.
범인은 물론 재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당장 족쳐야 옳은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재인으로서는, 굳이 비밀로 하라는 당부를 받지 않았으니
얼마든지 제삼자에게 얘기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아니, 판단하고 자시고 하는 최소한의 절차도 없이 입을 나불댔을 것이다.
따지기를 포기한 건, 일이 커지는 것이 귀찮아서였다.
다시 모니터 속에 눈을 박는데 찌르르한 오한이 뒷목 뼈를 타고 올랐다.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만 하는 것이 나약한 인간의 비애다.
한 끼를 때우기 위해 회사 앞 식당으로 갔다.
역시 황부장의 오후 4시 대폭격을 맞은 장선배가 줄레줄레 따라왔다.
매 끼니의 식단을 정하는 것도 여간 곤욕이 아니었다.
된장찌개와 순두부, 생태탕과 카레라이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
장선배를 좇아 얼결에 돌솥비빔밥을 시켰다.
주문하고 나서야 점심에도 비빔밥을 먹었다는 걸 깨달았다.
 
“구내식당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영양사가 항상 딱딱 메뉴를 짜 줄 거 아니에요?
골라주는 거 먹으면 되게 편할 텐데.”
 
“저기, 오대리.”
 
장선배가 별안간 직함으로 나를 불렀다.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다.
 
“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아, 아니야. 관두자.”
 
그럼 처음부터 말을 말든가,
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저러다 금세 다시 얘기를 꺼낼 게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밑반찬으로 나온 콩자반을 깨작대다말고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안 되겠다.
아무래도 짚고 넘어가야 될 것 같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오대리, 진짜 옮겨?”
 
“네에?”
 
“안이사 곧 독립한다며?
지가 물어온 거래선들 쏙 빼서 나갈 거라고 소문이 자자하잖아.
근데, 그 사람 나갈 때 우리 회사에서 단 한 명 오은수만 데리고 갈 거라는 얘기가 들려오던데.”
 
금시초문이었다.
요새 안이사와 사장과의 관계가 삐걱거린다는 소식이야 오며 가며 주워들었다.
 새삼스러운 바도 아니거니와 어차피 나하고는 별 상관없는 일이겠거니 싶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안이사가 독립한다는 소문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나를 데리고 나간다고?
나를, 왜? 장선배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자기가 나가는 거야 내가 뭐라 할 사안이 아니지만 이건 또 다른 문제잖아.
물론 나야 안 믿지만, 혹시 둘이 어떤 개인적 관계가 아닐까 하는 묘한 추측들도 없지 않나 봐.”
 
고추장을 조금만 넣었는데도 비빔밥은 소금버캐처럼 짰다.
맞선을 주선한 이후 안이사가 내게 부쩍 친근하게 굴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날의 굴짬뽕 이후 둘이 밖에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안이사에게 스카우트 제의라도 받았다면 이 터무니없는 오해가 조금이라도 덜 억울하련만.
나는 까끌까끌한 밥알들을 억지로 목구멍 속에 밀어 넣었다.
절반을 남긴 채 숟가락을 내려놓았을 때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저녁 맛있게 먹고 힘내서 일해요. 홧팅! 사랑해, 쪽! ♡ -태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삼킨 것이 쌀알이 아니라 돌가루들인지도 몰랐다.




제4부 치명적인 것들 2


여간해선 태오에게 회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지 않는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무직 상태인 태오가 혹여 마음이 상할까봐 염려하는 내 무의식의 작동일 수도 있으리라.
그는 나와 함께 사는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듯 보였다.
깊숙한 속내까지는 알 수 없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내가 회사에 가 있는 낮 시간 동안 그가 무엇을 하며 보내는지 미스터리였다.
 
“심심하진 않아?”
 
내 딴엔 어렵게 물었건만 그는 별 이상한 질문도 다 듣겠다는 투로 대답했다.
 
“하루가 얼마나 금방 가는데.
영화 보고, 시나리오 쓰고, 산책도 하고, 사색도 하고, 인터넷도 좀 하고,
또 오늘 저녁에 우리 자기 뭐 해먹일까 연구도 하고.”
 
그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처럼 잔잔한 일상 속에 있을 때 행복하다고 했다.
우르르 쾅쾅 번개가 내리치고 칼바람이 살갗을 에는 들판에
매일 아침 끌려 나가야 하는 나로서는 진심으로 부럽기 그지없었다.
 
“뒷산 약수터까지 가는 길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가볍게 운동하고 싶을 때 딱이라니까.
산에서 내려오면 바로 시장이 있거든요.
거기 별거 별거 다 팔아요.
우리 이번 토요일에 같이 구경 갈까?”
 
내가 소 닭 보듯 하던 이웃들과도 어느새 안면을 튼 눈치였다.
 
“옆집 누나 말이에요.
큰길 건너 아파트 상가에서 비디오 가게 하더라고요.
꽤 다양하게 잘 갖춰놓았던데요.
내가 원하는 DVD 타이틀도 구해주겠대요.
왜 그 항상 추리닝 입고 다니는 사람은 103혼데, 고시공부 한대요.
참, 그 형한테 들었는데 105호, 강도한테 당한 거 아닌가봐.
그 여자가 변심해서 옛 남친이 그랬다던데. 하긴 진실을 누가 알겠어요.”
 
귀여운 새색시처럼 종알종알 대면서 태오는 열심히 콩깍지를 벗겼다.
시장에서 산 푸른콩이 싱싱하다며 좋아했다.
 
“우리 엄마는 옛날부터 꼭 밥에 콩을 넣으셨어요.
콩 많이 먹어야 키 쑥쑥 큰다고.”
 
내일부터 콩밥을 짓겠다고 벼르고 있는 사람 옆에서,
배를 깔고 길게 엎드린 채 만화책을 보고 있으니
내가 마치 마누라를 부려먹기만 하는 권위주의적 가장(家長)이 된 것 같다.
귀로는 태오의 이야기를 듣고,
눈으로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 최신 권을 읽고 있지만,
머릿속은 수십 마리의 뱀들이 뒤얽혀 똬리를 튼 것처럼 복잡하고 심란하였다.
회사 안팎에 어디까지 소문이 났을까?
혹시 사장 귀에도 들어갔을까? 정작 안 이사는 왜 아무 말이 없는 걸까?
태오의 손에서 미끄러진 콩알 하나가 내 쪽으로 또르르 굴러왔다.
나도 모르게 주워 입안에 넣었다.
콩은 작고 딱딱하고 비렸다.
인생의 맛이 고작 이럴 줄은 몰랐다.
태오를 생각하면 막막해진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선량하고 다정하고 유순한 성품을 가졌으며,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옆모습을 가졌다.
또한 자신이 택한 사랑에 대해 따뜻한 열정도 품고 있었다.
그가 가진 매력이 열 개도 넘는데 비해, 단점은 단 한 가지뿐이다.
 
어리다는 것!
 
‘어리다’는 말이 반드시 생물학적 연령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 속에는, 섬세하고 복잡한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리다는 것은 얼마든지 꿈을 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꿈의 대부분이 몹시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점.
비록 제 딴에는 아주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들은 의기양양하게 외칠 것이다.

“왜 안 돼? 하면 돼. 나는 나니까!”

맞다.
그것이 스물다섯 살에 어울리는 세계관이다.
스물다섯 살이므로, 그럴 수 있다. 문제는 내게 있었다.

‘당연하지. 다 잘될 거야’ 라고 마냥 북돋워줄 수가 없는 건,

내 인생의 시계추를 다시 7년 전으로 되돌리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이번 주말엔 집에 다녀올 거야.”
 
내 목소리가 차갑게 들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따라 갈까요? 인사드리러.”
 
그냥 한번 해 보는 소리인 줄 알면서도,
칠판에 분필이 찌익 길게 긁히는 느낌처럼 선뜩하다.
 
“안 돼.”
 
음기를 머금고 있던 태오의 입매가 미묘하게 굳었다.
 
“왜 안 되는데?”
 
“…놀라실 거야, 아무 얘기도 안 드렸으니까.”
 
“이제 슬슬 말씀드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목이 콱 잠겨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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