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7

오늘의 쉼터 2017. 7. 27. 01:29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7




단어는 내용을 규정한다.
때로는 선입견을 만들기도 한다.
동거. 그 단어는 음습한 그림자를 품고 있다.
그러나 동거에 대해 음탕하고 축축한 어떤 것을 연상하는 사람은,
동거를 해본 적 없는 사람이다.
동거는 생활이다.
판타지가 거세된 적나라한 생활.
 
태오와 지내면서 나는 누군가와 함께 사는 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첫째, 같이 사는 남녀라 해도 꼭 한 침대에서 자지는 않는다는 것.
나는 침대에서, 태오는 이불을 깔고 바닥에서 잤다.

“싱글 침대라 좁지 않아?”

라는 내 의도적인 물음을 태오는 쉽게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우려 하자 그제야 알아차리고 제가 내려가 누웠다.

“더블베드로 빨리 바꿔야겠다.”

태오가 중얼거렸지만 나는 짐짓 못 들은 척 욕실로 들어갔다.
 
둘째, 매일 밤 ‘하지는’ 않는다는 것.
짧은 입맞춤 같은 스킨십은 일상적으로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횟수’는 오히려 현저히 줄어들었다.
 태오가 트렁크 하나만 걸치고 방안을 왔다갔다 하는 모습을 봐도 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닌 듯했다.
태오 역시 내가 타이트한 반바지 차림으로 벌러덩 누워 있어도 특별히 흥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셋째, 내 시간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태오가 내 방에 머물기 시작하고 이틀쯤 지났을 때 갑작스런 야근이 있었다.
아홉 시가 넘으면서부터 20분 간격으로 문자메시지가 빗발쳤다.
저녁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안 오느냐,
늦으면 늦는다고 미리 말을 해줘야 할 게 아니냐 등등
태오의 다그침에 연신 ‘미안해’라는 답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재인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 토요일 저녁에 시간 있느냐고 물었을 때도

“몸살이 너무 심해서 이불 쓰고 누워 있어야 될 것 같아”

라고 거짓말로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넷째, 화창한 주말 오후를 대청소로 보낼 수도 있다는 것.
혼자 살게 된 이후 나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쌓아온 나만의 생활 패턴이 있었다.
대단한 것은 아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대충 살기’쯤 되겠다.
샤워할 때 한번씩 타일바닥에 뜨거운 물을 쫙 뿌려주는 걸로 욕실청소를 끝냈고,
배 고프면 먹고 안 고프면 먹지 않았으며,
걸레 대신 음식점에서 들고 온 일회용 물티슈로 방바닥을 훔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태오는 나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불은 옥상에서 햇볕에 쨍쨍 말려야 제 맛인데. 그래야 바삭바삭해요.”
 
방 한 구석의 옹색한 건조대 위에 이불을 널면서 그가 아쉬워했다.
 저 이불을 구입한 뒤 오늘 처음 빠는 거라는 사실을 알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토요일 저녁인데 우리 나가서 맥주라도 마실까? 고기 구워 먹으면서.”
 
“집 놔두고 왜? 나가서 먹는 고기 값 아깝지 않아요?
정육점에서 사면 질도 좋고 훨씬 싸요. 내가 집에서 맛있게 구워 줄게.”
 
결국 동네 마트에서 삼겹살 한 근을 사다 가스 불에 구워먹어야 했다.
 
“와, 엠티 온 것 같아요. 너무 좋다.”
 
태오가 노릇하게 익은 고깃점을 뒤집으며 감탄사를 뱉었다.
어린 연예인들이 떼거지로 나와 뛰고 뒹구는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을
그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몰입하여 바라보았다.
나는 상추쌈을 커다랗게 싸 입속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태오가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우리 나중에 늙어서도 이렇게 살아요.”
 
나중에 늙어서도 이렇게. 그 말의 자연스러운 울림이 너무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손바닥을 펼쳐 그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태오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나가지 말까?”
 
“티브이 소리 다 들릴 텐데. 가만있어 봐요, 내가 나갈게.”
 
“미쳤어? 그래, 또 옆집 여자일지도 몰라. 자기는 얼른 저기 들어가 있어.”
 
그를 반강제로 화장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삐익. 삐익. 벨은 계속 울려댔다.
현관 앞에는 태오의 큼지막한 나이키 운동화가 잘못 도착한 소포꾸러미처럼 놓여 있었다.
공인되지 않은 사랑은 어느 순간 관계를 남루하고 보잘것없게 만든다.
이제야 알겠다.
동거의 음습하고 우울한 기운은 바로 그 비자발적 익명성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세상의 적의와 맞부딪치기 위해 나는 입술을 앙다문 채 문가로 나아갔다.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8


재인은 눈물과 콧물을 한꺼번에 흘려댔다.
내가 차마 휴지를 건네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눈만 끔벅이고 있을 때,
태오는 물 한잔을 따뜻하게 데워왔다.
보송보송한 세수수건도 착착 접어 그녀의 무릎에 놓아주었다.
재인은 수건을 집어 들더니 요란하게 코를 풀었다.

“고마워요, 흑흑”

이라는 인사를 잊지 않는 걸로 보아 완전히 맛이 간 상태는 아닌 듯 했다.

울면서 웬 영어단어를 신음처럼 중얼거리나 했는데 잘 들어보니

 “어떡해, 어떡해, 어떡해”

였다.
재인의 결혼식은 다음 주 일요일 오후 두시였다.
오늘부터 딱 8일 남아있었다.
피부 관리실에 누워 스페셜 스킨케어를 받아도 모자랄 판에
얼굴이 띵띵 붓도록 통곡하고 있다니.
친구 된 도리로서 ‘어떡해’의 바다에 빠져 같이 울어주고 싶었다.
 
느낌이 좀 잦아들자 재인은 비로소 태오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태오 쪽을 흘낏거리며 내게 연방 턱짓을 했다.
인사를 시켜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말릴 새도 없이 태오가 먼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윤태오라고 합니다. 은수씨 친구예요.”
 
재인의 입매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당황하기는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망설임 없이 겨우 ‘친구’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표방하고 나선
태오가 어리둥절하면서도, 고마우면서도, 마음 아팠다.
재인은 미심쩍어하는 눈치가 역력했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그럴 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재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얘기들은, 들으나마나 번연히 예상하던 것들이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이라는 관문을 안전히 통과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사항들에 대해 합의해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스위트 홈’ 하나만 놓고 봐도 그렇다.
신혼집의 위치, 평수, 금액마련, 등기부등본상의 명의, 거실벽지무늬, 도배비용정산 등등
두 사람 혹은 그들을 둘러싼 두 집안이 평화롭게 의견을 조율하지 않으면
넘어설 수 없는 문제들이 산적해있었다.
재인과, 그녀의 고집 센 약혼자는
이 결혼 앞에 놓인 현실적인 당면과제들에 대해 사사건건 대립했다.
설상가상 약혼자의 어머니는
웬만한 봉급쟁이의 일년치 연봉에 해당할 만한 액수를 현금예단으로 요구했다.
불만을 토로하는 재인을 달래주기는커녕 약혼자는

“이 세상에 우리 엄마처럼 착하고 경우 있는 분이 어디 있다고 그래?”

라며 도리어 거세게 화를 냈다.
 
“와, 그 새끼 진짜 마마보이네요. 나이만 먹는다고 다 어른이 아닌가 봐요.”
 
재인의 말을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던 태오가 주먹까지 흔들며 분개했다.
재인이 훌쩍임을 멈추고 반색했다.
 
“맞아요, 마마보이! 내가 그 인간이랑 결혼을 하는 건지
그 엄마랑 하는 건지 모를 지경이라니까요.
 자기엄마한테 가서 나랑 있었던 일을 줄줄이 다 얘기한대요.
그 엄마가 글쎄 우리가 언제 첫 키스했는지도 훤히 꿰고 있더라니까.”
 
“같은 남자로서 진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차라리 잘 됐어요. 더 늦기 전에 그만두면 되잖아요.”
 
“휴, 이제 와서 어떻게 관둬요? 청첩장 발송까지 다 했는걸요.
 300인분 음식 예약해놨고 꽃길장식, 얼음조각 모양 다 정해놨단 말이에요.
혼수 사 놓은 건 또 어쩌고요? 냉장고도 양문개폐형 제일 큰 걸로 샀다고요.
아, 정말 내 발등 내가 찍었어요.
칵 죽어버렸음 좋겠어.”
 
“그런 약한 말씀 마세요. 행복하려고 결혼하는 거잖아요.
그게 아닌 걸 아는데 왜 불구덩이에 뛰어들어요? 마음 굳게 잡수세요.”
 
“정말, 정말 나한테 그런 용기가 있을까요?
이 사람하고 이렇게 헤어지고도 또 다른 사람 만나 결혼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나이에 또 누가 날 좋다고 할까요?”
 
“그럼요. 지금도 얼마나 예쁘신데요.”
 
둘이 아주 척척 죽이 잘 맞았다.
오늘 처음 본 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태오와 재인의 모습을 나는 입 딱 벌리고 구경했다.
태오가 화장실에 들어간 사이 재인이 소곤댔다.
 
“오은수, 재주도 좋아. 대체 어떤 사이야?”
 
질투를 감추지 않는 목소리와 뺨의 선명한 눈물 자국이 대비를 이루어 지독하게 희극적이었다.
소리 죽여 쿡쿡 웃는 대신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답했다.
 
“쟤? 요즘 여기 살아.”
 
탁구공 만하게 커져버린 친구의 눈동자를 보고서야, 내가 커밍아웃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9


고백의 뒤끝은 얼얼했다.
재인은 눈꺼풀을 몇 차례 깜빡이더니 곧 내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나쁜 기집애.”

그리고 벅찬 음성으로 소리쳤다.

“너 되게 멋있다!”
 
유레카를 외치며 벌거벗은 채 욕탕을 뛰어나왔다는 전설의 과학자처럼
그녀는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다는 기쁨으로 한껏 고양되었다.
 
“그래. 너처럼 이럴 수도 있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나는 왜 바보처럼 살았던 거니?”
 

재인은 자기가 알게 된 기념으로 근사한 곳에 가서 축하주를 마셔야 한다고 우겨댔다.

왠지 재인과 태오를 한 공간에 두고 싶지 않았지만 고집 부리는 재인을 따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강북강변로변의 고층 카페로 갔다.

 

보그 최신호를 넘기듯 우아한 자세로 메뉴를 훑어 내리는 재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지갑 속에 신용카드를 잘 챙겨왔던가를 헤아렸다.
그녀가 지목한 와인은 한 병에 7만 원이 넘는 것이었다.
안주로 주문한 모듬치즈 가격까지 합하면 10만 원에 육박할 액수였다.
 
재인은 내가 아주 좋아하는 친구다.
우리는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다.
서로의 틴에이저 시절과 질풍노도의 이십대를 거쳐 삼십대의 나날들을 나란히 통과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나는 간절히 염원한다.
태오가 내 친구 때문에 불편하지 않기를.
악의 없을지라도 내 친구가 태오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질문 같은 것은 던지지 않기를.
그것이 그에 대한 나의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나 스스로를 지키고 싶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똑똑히 말할 거야. 전부 없었던 일로 하자고.”
 
모호한 희망의 힘으로 부풀어 오른 탓일까,
재인은 전에 없이 포도주 두어 잔에 해롱댔다.
 
“여기서 때려치우자고 하면 그 인간 뒤로 나자빠질지도 몰라.
아니면 나한테 싹싹 빌면서 제발 식만 올려달라고 애원할지도 모르지.
왜? 쪽팔리니까.
그 인간 평생 한 번도 남 앞에서 창피한 일 안 겪어봤잖니.
여기서 파토 나면 아마 이민가 버릴걸. 아유, 고소해.”
 
“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조금만 더 잘 생각해봐.”
 
차마 ‘너는 안 쪽팔리겠니?’ 라고 핵심을 콕 집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태오가 내 의견에 반박하고 나섰다.
 
“자꾸 왜 그래요? 생각 더 하면 더 복잡해지기만 해요. 하루라도 빨리 그만둬야죠.”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것 같아? 내 맘 내키는 대로 ‘여러분 미안, 이제 여기서 끝!’
이럴 수 있는 건 줄 아느냐고. 일이 얽히고설켜 감당하기 어렵게 커졌더라도
실타래 풀 생각을 먼저 해야지.
괜히 도망가라고 했다가 나중에 얘 인생 더 꼬이면 자기가 책임질래?”
 
“야, 싸우지 마. 왜 나 땜에 싸워. 재인이, 갈래.”
 
제 이름을 유치원생처럼 칭하며 재인이 비틀비틀 일어섰다.
나는 번개처럼 카운터로 달려 나가 계산을 치렀다.
재인을 택시 뒷자리에 밀어 넣고 나자,
찬바람 부는 골목 안에 우리 둘만 남겨졌다.
 
“왜 그랬어요? 자기 친구 처음 보는데 당연히 내가 내야지.”
 
불콰한 뺨을 한 채 태오가 언성을 높였다.
그가 화내는 모습은 처음이다.

 “네가 주저하는 모습은 차마 보고 싶지 않았어.”

아니, 나는 그만큼 솔직하지 못하다.
기껏해야 고개를 떨어뜨리고

“미안해”

라고 대꾸할 뿐이다.
 

2층 복도에서 옆집 여자와 마주쳤다.

먹하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각자 제집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득, 이런 때엔 나도 혼자 문을 따고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의 방이란 무엇일까.

시골마을에서는 이웃에 가려면 언덕을 넘고 개울을 건너야 한다.

 

그러나 도시의 방과 방 사이, 집과 집 사이는 다닥다닥 붙어있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불편하다며 늘 투덜거리곤 한다.

타인과 가까이 있어 더 외로운 느낌을 아느냐고 강변한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언제나 나를 외롭지 않게 만들어줄 나만의 사람,
여기 내가 있음을 알아봐주고 나지막이 내 이름을 불러줄 사람을 갈구한다.
사랑은 종종 그렇게 시작된다.
그가 내 곁에 온 순간 새로운 고독이 시작되는 그 지독한 아이러니도 모르고서 말이다.
 
컴퓨터의자에 앉은 태오의 등은 완강하고 딱딱해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투룸을 얻는 건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에 걸터앉자,
이제 오롯한 내 공간은 여기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옆집 화장실의 물 내리는 소리가 평소보다 커다랗게 들려왔다.
도시의 방들은, 가늠할 수 없는 거리 위에 위태로이 서 있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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