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5

오늘의 쉼터 2017. 7. 27. 00:46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5


시간은 규칙적으로 흘렀다.
사흘 동안 내 방에서 나는 몇 가지의 단순한 일들을 반복해서 했다. 문
을 열고 신발을 벗고 화장을 지우고 양치를 하고 똥을 누고 잠을 잤으며,
잠에서 깨면 오줌을 누고 양치를 하고 화장을 하고 신발을 신고 문을 닫았다.
그 밤의 해프닝 따위를 곱씹기에는 너무 바빴다.
마감기간이라 야근이 이어졌고, 그 와중에 억지로 틈을 내어 태오를 만났다.
피곤해서 꼼짝도 하기 싫었기 때문에 포테이토 피자를 배달시켜 침대 위에서 먹었다.

태오는

“자기 힘들면 안 해도 돼요”

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피자를 나누어먹은 다음 습관적으로 섹스 했다.
 
며칠 뒤,
출근하러 집을 나서는데 원룸주택의 일층 계단참에 사람들 몇이 무리지어 웅성대고 있었다.
이곳에 이사 온 뒤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의아해하며 곁을 스쳐 지나려 할 때, 무리 속의 누군가가 반가이 알은체를 했다.

 

“어머, 205호 언니! 일루 와요.”

 
그날 밤에 본 옆집 여자였다.
환한 데서 보니, 못해도 마흔은 되어보였다.
동그란 원을 지어 서있던 사람들이 내가 들어설 자리를 터주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동그라미 속에 끼어들었다.

“그거, 105호였대요.”

 
206호 여자가 호들갑스레 말했다.
무슨 얘긴지 한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아우, 왜, 그 비명!”

 
그 비명소리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105호라면, 내 방 바로 아래층이다.
양 옆의 벽에 대해서는 가끔 신경을 써보았어도,
발밑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불길한 예감이 쿵쿵 다가왔다.
 
“글쎄…그 여자.”
 
옆집여자는 회갈색 눈썹을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잠시 숨을 멈추었다.
제 말이 전달할 파장을 극대화하고 싶은 눈치였다.
 
“…칼로 찔렸대요.”
 
“네에?”
 
추리닝 바지에 운동화 뒤축을 꺾어 신은 남자가 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확실한 건 아니라니까요. 다른 흉기일지도 모르고요.”
 
“아이고, 참. 그게 그거지 뭘.”
 
옆집여자가 답답하다는 듯 퉁을 주었다.
 
“칼이면 어떻고 망치면 어때요? 어쨌든 강도한테 당한 건 맞잖아요.”
 
강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란 이런 걸까.
맞은편에 서 있던 분홍색 토끼털코트의 여자가 양미간을 좁히며 물어왔다.
 
“진짜 강도가 확실하대요? 원래 아는 사이가 아니고?”
 
한기 어린 정적이 감돌았다.
‘진짜 강도가 확실하대요?’라는 의문문 속에 숨겨진 함의를 파악하는 순간부터
나는 그대로 주저앉고만 싶었다.
진짜 강도라면,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둥그렇게 모여 수군대고 있는
우리 중 누구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었다.
강도가 205호를 피해 105호에 침입한 이유를 누가 논리정연하게 설명할 수 있을 텐가.
옆집여자가 부르르 어깨 떠는 시늉을 했다.
 
“앞으로 무서워서 어떻게 살아. 안 그래도 여기 대문 항상 열려있어서 늘 찜찜했는데.”
 
복면강도인지 면식범인지 모를 놈에게 칼인지 망치인지 모를 흉기로 린치를 당했다는 105호 여자.
그녀에게 닥친 그보다 더 끔찍한 재앙은, 사건 발생 사흘이 지나서야 발견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연락이 끊어져 걱정하던 애인이 찾아왔다 발견했다는 설도 있고, 무단결근을 염려하던
직장동료들이 찾아왔다는 설도 있었다.
105호 여자의 생김새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키가 크고 홀쭉한 젊은 아가씨였다는 설도 있고,
몸이 동글동글하고 귀염성 있는 노처녀였다는 설도 있었다.
그 자리에 모여선 누구도 105호의 얼굴을 정확히 기억해내지 못했다.
추리닝 사내가 어제 오후 직접 목격했다는 경찰차와 119 구급차만이 확정된 진실이었다.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인간은 참으로 간사한 동물이었다.
발바닥 바로 아래 사람이 쓰러져 있던 것도 모르고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했던
주제에 왜 뒤늦게 오금이 저리고 죄책감이 밀려드는 것인가.
 
“그 여자 죽었을까? 나 때문이야. 내가 그때 바로 신고만 했어도.”
 
“맘 편히 가져요. 괜찮을 거야.”
 
태오가 나를 위로했다.
 
“나 너무너무 무섭다.
다 무서워. 서울이라는 도시도 무섭고, 여자 혼자 산다는 것도 무섭고.”
 
태오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걱정 말아요. 내가 같이 있어줄게.”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6




태오는 그날 밤 내 방에서 자겠다고 했다.
맨발로 방바닥을 스치며 걸을 때마다,
 아래층 여자는 어떤 자세로 쓰러져 있었을까
자꾸만 상상이 되었기 때문에 태오의 배려가 고마웠다.
그랬다.
자고 가는 것은 분명히, 나에 대한 그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으니,
나쁜 꿈을 꾸지 않고 쉬이 잠들 수 있었다.
 
아침 일곱 시.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출근하자마자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방 안은 희붐한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태오는 혼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 옆선은 섬세하고 날카롭다.
나는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출근준비를 했다.
 
‘먼저 나갈게. 문 잠그고 가. 사랑해.’
 
드라마에 많이 나오는 대로 침대 머리맡에 메모를 남겼다.
태오는 짭, 입을 다시며 돌아누웠다.
혹시 아침상이라도 봐두고 나가야 하는 건가?
새하얀 레이스 보로 덮은 정갈한 아침 밥상.
레이스 보는커녕 밥상을 덮을 신문지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공연히 미안했다.
이것이 이 나라 여성들의 핏속에 유구하게 흐르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일까.
정작 나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누렇게 뜬 얼굴에 처덕처덕 분을 바르고 있지만 말이다.
 
구두를 신다가 문득 컴퓨터에 신경이 미쳤다.
나는 30대의 신체 건강한 성인여성이었다.
예전에 18금(禁) 동영상들을 몇 번 다운 받은 건 순전히 단순한 호기심 탓이었다.
 
그것들이 아직 컴퓨터 한 구석에 들어 있을지도 몰랐다.
옛 남친들과 찍은 사진파일 역시 하드디스크 어딘가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설마 주인이 없는 빈방에서 태오 혼자 컴퓨터를 켜고 구석구석 훑어보지는 않겠지?
그가 벽장 속에 무질서하게 처박힌 옷가지의 개수들에 기겁하거나,
사막처럼 황폐한 냉장고 속 풍경에 경악하는 사태도 벌어지지 않겠지?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 타인을 무방비로 들여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오후 세시쯤.
거래처에 들어가 그쪽 홍보담당자와 이번 달 사보 콘셉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태오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빨리 와여...♡’
 
어딜 빨리 오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지만, 바로 답장을 하지는 못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하여 내 방 205호의 문을 열었을 때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방바닥 한 쪽에 부려져있는 등산용 배낭이었다.
태오가 일곱 살짜리 사내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나를 맞았다.
 
“나 이사 왔어요!”
 
머리가 띵했다.
태오의 짐은 단출했다.
 ‘짐’이라고 명명하기도 민망한 중형 등산용 배낭을 짊어지고
설마 그가 ‘이사’를 왔으리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혼자 두는 게 영 불안해서요. 자기 마음 가라앉을 때까지만 있어줄게.”
 
있어줄게? 나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곤조곤 말하려 애썼다.
 
“미리 나한테 상의를 했어야지.”

“어제 얘기 했잖아요.
안 그래도 평소에 이 방, 여자 혼자 있기에 좀 위험하다고 생각했어요.
누가 나쁜 맘먹으면 여기 벽을 타고 2층까지 기어오르기는 식은 죽 먹기라고요.”
 
태오가 창문을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이중창이 정말로 허술하기 짝이 없어보였다.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한풀 꺾인 내 표정을 눈치 챘는지 태오가 헤벌쭉 웃었다.
그래, 며칠만이다.
두려움이 좀 물러가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때까지만 같이 있을 것이다.
 원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옆에 있어주는 것이야말로 애인의 존재가치가 아니던가.
태오가 밥상을 들고 오며 눈을 찡긋했다.
 
“먹을 게 너무 없어서 집에서 좀 훔쳐왔어요.”
 
소복이 담은 쌀밥에, 참치통조림을 넣고 끓인 김치찌개,
 계란말이로 구성된 상은 소박했으나 제법 그럴듯했다.
 
“오늘 역사적인 날이에요.
계란말이 처음으로 성공한 날.
 그리고 자기가 내 손으로 지은 밥 먹는 날!”
 
우리는 물 컵으로 건배했다.
문득 이런 게 결혼이라면, 할 만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다 먹은 뒤 설거지를 하려 일어서는 나를 태오가 도로 주저앉혔다.
 
“자긴 하루 종일 일하고 왔잖아요. 티브이 보면서 쉬고 있어요. 귤이나 까먹으면서.”
 
우리의 어설픈 동거는 이렇게 얼떨결에 시작되었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소설방 > 달콤한 나의 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4부 치명적인 것들 1   (0) 2017.07.28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7   (0) 2017.07.27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3   (0) 2017.07.27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1   (0) 2017.07.27
제3부 위태로운 거리 9  (0) 2017.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