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3

오늘의 쉼터 2017. 7. 27. 00:32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3




우리의 눈빛이 공중에서 쨍강 부딪쳤다.
 
“왜애? 나 일월 일일부로 담배 끊었다고요. 오늘까지 아직 한 대도 안 피웠어.”
 
짐짓 밝게 꾸민 그의 목소리에 난처한 기척이 주춤주춤 묻어났다.
유감스럽게도 농담으로 웃고 넘어갈 기분이 아니었다.
잠시 갈등하다가 내처 묻기로 했다.
 
“복학은 진짜 안 할 거야?”
 
“말했잖아요.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는 나하고 정말 안 맞는다고.
전공이랑 영화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기도 하고….”
 
한숨을 뱉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서울 소재 중위권 대학의 공대를 1학년까지 다니다가 군대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래도 기왕 힘들게 들어간 학교인데 졸업은 해야지.
자기가 아직 몰라서 그런데, 졸업장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커.”
 
“그건 대기업에 취직하려는 애들 얘기죠.
나는 영화를 할 거잖아요.
엉뚱한 데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현장경험이 훨씬 중요해요.”
 
“아니, 사람 일이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래?
혹시 생각이 바뀌면 어쩔 건데? 그러다 나중에 정말 후회한다.”
 
태오가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김밥을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마치 잔소리꾼 엄마를 지긋지긋해하는 중학생 아들처럼.
차라리 스물다섯 살을 지나오지 않았다면 좋을 뻔했다.
통과해 왔으므로, 나는 그 나이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
터무니없이 미화하고 싶지는 않다.
태오와 같은 나이였을 때, 나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그 무렵 첫 직장으로 선택한 (아니, 나를 선택해준 유일한)
중소 규모의 출판사는 일이 많고 월급이 짠 곳이었다.
하루 열두 시간씩 눈에 쥐가 나도록 교정을 보고 나면,
백만 원이 간신히 넘을까 말까 한 액수가 손에 쥐어졌다.
돈을 받는 회사에 다녀보니 돈을 내고 다녔던 학교가 얼마나 편안한 곳이었는지
깨달았다는 고전적인 체험고백은 그만두기로 하자.
분명한 건, 스물다섯은 결코 만만한 나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겪어 보았으므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스물다섯 살의 시간에 대해
나는 그에게 그저 충고해 주고 싶은 것뿐이다.
어린 연인이 ‘올바르지 않은 길’로 겅중겅중 달려가는 꼴을,
멀쩡히 눈 뜨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거리로 나왔다.
바깥바람이 몹시 찼다.
목적지 없이 배회하다가는 온몸이 마비될 것 같은 날씨였다.
자동차를 가지고 있던 과거의 데이트 상대들이 자연스레 떠오른 건
혹시 내가 속물이기 때문일까?
가죽장갑에 감싸인 내 왼손을 태오가 제 오른손으로 찾아 쥐었다.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느슨히 연결된 채 우리는 잠자코 침묵 속을 걸었다.
따뜻하고 안온한 곳에 들어가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노긋노긋 녹이고 싶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야?”
 
태오는 대답이 없다.
기분이 좋을 리 없을 것이다.
조금쯤 상처를 받았는지도 모른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쓴 법이다.
하긴 그 나이에 네가 그걸 어떻게 알겠니?
 
“자기야. 나, 커피 마시고 싶다.
여기서 차 타고 십분만 가면 괜찮은 데 있어.
카페라테가 예술이고, 딸기타르트도 혀에서 살살 녹아.
자기가 밥 샀으니까 이번엔 내가 쏠게.”

나는 일부러 쾌활하게 지저귀어댔다.
혹시라도 그가 택시가 아니라 버스를 타자는 식으로 소심하게 반항해 올까봐
걱정스러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내가 택시비를 계산하는 것도, 한 조각에 4,000원씩인 딸기타르트와
블루베리치즈케이크를 주문하는 것도 묵묵히 지켜보았다.
찻잔과 케이크 접시는 꽃무늬가 잔잔하게 펼쳐진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케이크 속의 과일은 더없이 신선했고, 카페라테의 우유거품은 보드랍게 혀끝에 닿았다.
앞자리의 태오는 계속 말이 없었다.
폭신한 소파에 파묻힌 엉덩이가 의외로 뻐근하다는 느낌과,
이 아이를 달래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거의 동시였다.
 
“아아, 피곤하다. 이제 뭐 할까? 우리집 가서 텔레비전 볼까?”
 
그가, 들고 있던 코코아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그리고 눅눅한 음성으로 이렇게 물어올 줄은 몰랐다.
 
“…자기는 나를, 왜 사랑해요?”
 
왜? 백스물두 가지의 이유들과, 깜깜한 암흑이 번갈아 교차했다.
나는 대답을 단념하고 마지막 한 조각의 딸기타르트를 입에 넣었다.
겨울딸기가 어금니 사이에서 무자비하게 으깨어졌다.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4


나를 왜 사랑하느냐는 물음은,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면 태오는 나의 사랑을 철썩같이 믿고 있다는 의미인가.
발을 헛디뎌 막막한 우주와 연결된 맨홀 속에 빠진 느낌이다.
나는 나에게 묻는다.
태오를 왜 사랑하느냐고.
아니, 태오를 사랑하기는 하느냐고.
아니 아니, 사랑이 무엇이냐고.
 
무엇이든 가르쳐주는 인터넷 검색사이트에 접속하여, 검색 창에 ‘사랑’을 친다.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으로 인류에게 보편적이며 인격적인 교제
또는 인격 이외의 가치와의 교제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
나와 태오의 관계를 인격적인 교제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면 인격 이외의 가치와의 교제?
‘특히 미움의 대립개념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근원적인 생명원리로는 그러한 것도 포괄한다.
사랑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또 교제형태에서 여러 양상을 취한다 (네이버 백과사전)’.
미움까지 포괄하는 사랑이라니.
반복해 읽을수록 알쏭달쏭하고 미궁이 더욱 깊어만 진다.
사랑에 대한 복잡한 정의 밑으로는 결혼정보회사, 국제결혼회사, 미팅주선회사 등의
정보가 쭉 나열되어 있었다.
사랑의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 어떻게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는지를 비로소 훔쳐본 듯도 하였다.
 
“불안감의 표출이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준 건 유희였다.
유희의 메신저 대화명은 그새 ‘반짝반짝 빛나는 ♡’로 바뀌어 있었다.
‘사랑이 뭘까’ 인 내 대화명과 대구를 이루면서도 절묘하게 어긋났다.
 
“남자 입장에선 불안한 거야.
여자가 분명 자기한테 불만이 많은 것 같은데 이유를 확실히 알 수가 없으니까.
또 모르지. 이유를 알면서도 회피하고 싶은 건지도.
암튼 왜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말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봐.
나를 힘들게 하지 말아 달라,
계속 이러면 때려치워 버릴 수도 있다는 일종의 위협일지도 모른다고.”
 
“그 사이비 분석, 믿어도 되는 거야?”
 
“야, 선수끼리 왜 그래? 연애 한두 번 하냐.
 그나저나 오은수 땜에 불안에 떨고 있는 그 놈팡이가 누구야? 불어봐. 유준이지?”
 
모니터에다, 마시고 있던 오렌지주스를 그대로 뿜을 뻔했다.
 
“헉. 아니야.”
 
“흥,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
그날 보니까 둘이 딱 그림이 나오던데 왜 자꾸 내숭이야.
근데 유준이가 아무리 내 사촌이긴 하지만 한 명의 남자로 보면 솔직히…”
 
눈망울을 크게 치켜뜨고 유희의 다음 말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에이. 관두자.
 어쨌든 유준이랑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보고해야 돼.
안 그럼 나 무지 섭섭할지도 몰라.
난 항상 네 편이라는 거 잊지 말고.”
 
유준과의 일을 다 털어놓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털어놓고 자시고 할 만한 건더기도 별로 없다.
그러고 보면 오은수의 사랑전선도 실속은 참 지독하게 없었다.
 
“은수야. 나도 만나는 사람 생겼다.”
 
대화명을 보았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라 전혀 놀랍지 않았다.
일년 365일 중에 유희 옆에 남자가 없는 기간은 아마도 총 30여 일을 넘지 않을 것이다.
늘 끊임없이 누굴 만나고, 흐지부지 헤어지고, 또 만나고 하는 것이 유희의 연애패턴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짐작도 되지 않지만 그녀에게도 한때
미련스러우리만큼 지고지순한 첫사랑은 있었다.
재수시절 만나 군대시절 내내 기다린 유희를 제대하자마자 장렬히 차고 떠나갔던 첫 남자친구.
그놈을 제외하고는 지금껏 백일기념파티를 해본 남자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스물 셋 이후
그녀의 번잡한 연애사를 대변해준다고 하겠다.
실속 없는 걸로 따지면 나보다 그녀가 한 수 위이리라고, 나는 내심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너도 아는 사람이야.”
 
“?”
 
“기억나? 용가리.”
 
눈 앞이 뿌예진다.
얼마 만에 듣는 이름인가,
용가리. 용길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본명 대신 우리는 그를 그렇게 불렀었다.
아주 오래전에 말이다.
그러니까, 용가리는 그 망할 놈의, 유희의 첫 번째 남자친구였다.
 
“그 인간, 결혼했다며?”
 
“이혼했대. 재작년에.”
 
뭐랄까.
아침에 멀쩡히 차고 나온 손목시계가 거꾸로 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처럼 어지러웠다.
그때였다.
 아악― 날카롭고 가느다란 여자 비명소리가 등 뒤의 허공을 갈랐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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