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3부 위태로운 거리 9

오늘의 쉼터 2017. 7. 27. 00:00

제3부 위태로운 거리 9




그것은 하트 모양의 커다란 쿠션이었다.
하트 모양 테두리를 따라 두 겹의 연분홍색 레이스가 달려 있고 쿠션 한가운데에는
빨간색 글자들이 수놓아져 있다.
 ‘4ever love’. 포에버 러브. 영원한 사랑.
나는 그 과중한 문장을 엉거주춤한 자세로 받아 안았다.
 
“다음엔 더 예쁜 걸로 만들어 줄게요.”
 
“이걸 자기가 직접 만들었단 말이야?”
 
“아니. 십자수만요. 아직 초보라 서툴러요.”
 
“자기가 십자수를 할 줄 안다고?”
 
“왜, 이상해요?
치매 예방에 좋다고 해서 할머니한테 사드렸는데 본 척도 안 하시잖아요.
그냥 놔두기 아까워서 조금씩 해보기 시작한 거예요.
…자기한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걸 선물하고 싶어서.”
 
가슴 맨 밑바닥으로부터 말캉말캉하고 따뜻한 것이 울컥 솟아올랐다.
이보다 더 촌스러울 수 없는 십자수 쿠션을 품에 그러안고서
태오의 손을 꽉 잡은 채 극장으로 갔다.
용산 CGV 로비의 여자화장실은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터지기 직전이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로만 알았다.
이런 시간, 이런 공간에서 마주치리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해보지 않은 사람이
눈앞을 스쳐갔기 때문이다.
엄마. 우리 엄마가 확실했다.
놀람의 강도로 따지면 엄마도 나 못지않은 듯했다.
우리는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고서도 한동안 “어, 어”만을 반복했다.
 
“엄마가 여기까지 웬일이에요?”
 
“그, 뭐냐, 그래, 영화 보러 왔지.”

그러고 보니 여기는 영화관이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들락날락거릴 수 있는 곳이니 우리 엄마라고 해서 오지 말란 법은 없겠다.
하지만 이상하다.
성탄절 이브의 복잡한 교통사정을 뚫고 바글대는 극장을 찾을 만한 에너지와 열정이
엄마에게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우리 모녀는 수업시간에 싸우다 복도로 쫓겨난 여중생들처럼 어색하게 서서
화장실 차례가 나기를 기다렸다.
급박한 요의와 극도의 조바심으로 배꼽 언저리가 쿡쿡 쑤셨다.
하트 쿠션을 품에 안은 태오가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엄마에게 태오를 보여줄 마음의 준비 같은 것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무슨 영화 보려고?”
 
엄마가 무척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내가 하고 싶은 질문이다.
 
“…킹콩. 엄만?”
 
“나? 글쎄, 그게 뭐더라….”
 
말을 흐리며 더듬는 품새가 엄마답지 않았다.
목덜미를 감싼 자줏빛 스카프는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제법 화려하고 또 촌스러웠다.
예기치 못한 곳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혈육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일기장 같다.
묻지도 않았는데 엄마는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너 김포아줌마 알지? 그 아줌마가 공짜로 표가 생겼다고,
오늘 아니면 못 쓰는 거라고 해서 나온 거야.”
 
김포아줌마라면 물론 알고 있다.
 엄마와 같은 고향마을에서 자랐다는 친한 친구 분이다.
예전에 김포에 산 적이 있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김포아줌마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30년 동안 엄마에게서 줄곧 ‘김포아줌마네 아들은
이번에 한의대에 원서를 넣었는데 실패했다’는 둥,
‘김포아줌마네 옆집에 도둑이 들어서 돼지저금통까지 깡그리 훔쳐갔다’는 둥,
‘김포아줌마네 작은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췌장암이라 고생이 심했다’는 둥의
이야기를 들어와서인지 괜스레 친숙하게 느껴졌다.
설마 오늘,
그 아줌마한테까지 내 어린 남자친구를 선보이는 불상사가 발생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재미있게 보고 가세요.”
 
화장실을 후다닥 빠져 나왔다.
킹콩 상영관에 들어가서도 출입구 쪽을 향해 계속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불이 꺼질 때까지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히도 다른 영화를 보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영화가 시작되자 마음이 스르르 가라앉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스크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극장 관객이 된 자의 관성적 운명이었다.
극장은 익명의 낯선 이들이 어깨를 붙이고 앉아 하나의 방향을 바라보는 곳,
그리고 암흑 속에서 타인의 빛을 훔쳐보는 곳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익명의 관객들 사이를 비집고 환한 로비로 나왔을 때에, 나는 보았다.
잰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가는 우리 엄마의 낯익은 뒷모습을.
누군지 모를 초로의 사내가 그 옆에 함께 있었다.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0


누구에게나 사생활은 있다.
성직자에게도, 영화배우에게도, 유치원생에게도, 그리고 나의 어머니에게도.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 인간의 힘으로 이해 못할 인간의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이틀만 지나면 나는 서른두 살이 된다.
고작 서른둘이다.
얼마나 더 살아야, 불쑥불쑥 들이닥치는 생의 불가사의에 대해 의연하게 찡긋 윙크해줄 수 있을까?
 
엄마에게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엄마도 나에게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으므로 피장파장이다.
연말은 이렇게 버틴다 해도 새해 첫날에는 집에 가야만 할 것이다.

“그 아저씨 누구예요?”

라고 곧바로 따지고 들어야 하나.

 “자주색 스카프 잘 어울리던데요”

라고 빙빙 돌려 떠봐야 하나.
어쨌거나 엄마 얼굴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주볼 자신이 없다는 것만은 숨기지 못할 진실이었다.
 
“얼마 전에 극장에서 우연히 친구 어머니를 봤거든.
그런데 그 아주머니, 웬 아저씨와 같이 계시더라. 어떻게 된 걸까?”
 
태오는 잠에서 막 깨난 망아지처럼 눈만 끔벅거렸다.
못 알아들은 눈치다. 왜 섣불리 말을 꺼냈나, 후회가 되었다.
 
“으음, 그러니까 그 두 사람, 부부가 아니었다고.”
 
“아하. 그러면 바람?”
 
‘바람’이라는 단어를 듣자 어쩔 수 없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야, 절대로, 그런 건.”
 
“에이. 자기가 몰라서 그래요.
요즘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러브호텔에 항상 빈방이 없다잖아요.”
 
비약적인 상상력 앞에서 오한이 일었다.
태오는 그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12월 31일에 다른 계획 없죠? 같이 송구영신 예배 보러 가요.”
 
“엉? 교회에?”
 
“새해를 둘이 함께 맞이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부모님이 자기 한 번 보고 싶다고 그날 꼭 데려오라고 했어요.”
 
너무 의외의 제안은 사람을 무방비로 만든다.
놀라서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부모님한테, 내 얘길, 했어?”
 
“그럼요. 자기 나이가 좀 많다고 첨엔 걱정하셨는데, 아 기분 나빠하지는 말아요,
어른들은 아직도 그런 거 잘 이해 못하잖아요,
그렇지만 이젠 안 그러세요.
내 얘기 들어보더니 좋은 사람 같다고, 보고 싶대요.
사실 울 엄마도 아빠보다 십 개월 연상이에요, 헤헤.”
 
태오의 부모님과 함께 2006년 새 아침을 맞이하라고?
허허허. 쓴 웃음에 이어 근원 모를 공포가 지진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나 역시 그런 특별한 날은 우리 부모와 보내야 하지 않겠느냐며
간곡히 설득한 끝에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2005년 12월 31일 토요일. 365일 중의 하루일 뿐인, 365일의 마지막 날.
가족도, 애인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은 다만 혼자서 이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해야 한다.
 
생생우동으로 늦은 저녁을 때우고는 삼 분에 한 번꼴로 리모컨을 눌러대며
양 방송사의 연기대상을 번갈아 시청했다.
불과 두어 시간 뒤 2006년이 된다는 것이 몹시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다섯 개째의 귤껍질을 까는데 유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유준이네 집에 모여 있어. 맥주 사 갖고 빨리 와. 하이트랑 카프리 섞어서.
야, 재인이가 쥐포도 사오란다.”
 
어제와 오늘이 별 다르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과 내일 사이에도 경천동지할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에는 매듭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한하게 지속되는 그 반복성이 두려워
자꾸만 시간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구별 짓고 싶어한다.
 
아아, 그렇게 해서라도 복잡한 현재를 깨끗이 털어버리고 맑은 새날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맨발로 폴짝폴짝 뛰어 내일을 마중 나가겠다.
 
유준의 집에 도착했을 때,
텔레비전 카메라는 보신각 현장을 비추고 있었다.
나와 재인, 유희, 그리고 유준, 우리 넷은 쨍그랑 소리가 나게 맥주잔을 부딪쳤다.

“위하여!”

누군가 조그맣게 의문을 제기했다.

“근데 뭘 위해서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마침내 제야의 종이 울렸다. 종
소리는 담담하고 아득하게 가슴 안쪽으로 퍼져 나갔다.
입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려보았다.
안녕, 2005년.
너는 나를 조롱했지만 나의 방식으로 나는 너를 사랑했다.
잘 가라.
내 서른한 살. 뒤돌아보지 말고.
 
[정연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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