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3부 위태로운 거리 7

오늘의 쉼터 2017. 7. 26. 23:41

제3부 위태로운 거리 7




“그냥 고쳐서 다시 찍으면 되지 않나.”
 
내가 쭈뼛쭈뼛 입을 열자 다들 깜짝 놀란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 맞다. 우리 회사에 저런 애도 있었지’ 하는 표정들이다.
그럴 만도 하다.
구석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늙은 암너구리처럼 웅크려 앉은 채
회의 내내 입 한번 떼지 않았으니 말이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나는 주저하며 말을 이었다.
 
“찍긴 찍는 거예요. …딱 천 부만 고쳐서.”
 
“아하. 특제하자는 얘기지? 본사 들여보내는 분량만.”
 
지사 출신인 장 선배가 대번에 내 말을 알아듣고 반색했다.
짐작보다 더 반응이 좋다.
쏟아지는 시선을 받고 있자니 갑자기 이 조직의 주요인사가 된 기분이다.
내가 설명하기도 전에 장 선배가 내 말을 가로채 청산유수로 떠들어댔다.
 
“수정테이프 작업해놓으면 솔직히 지저분하잖아요.
신뢰도 안 가고요. 하지만 이렇게 하면 서로 깨끗하게 넘어가는 거죠.
회사 밖에 뿌리는 책에 뭐라고 되어 있는지 그쪽에서 알 게 뭐예요?”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지. 히야. 오은수 머리 좋네.”
 
“오 대리가 원래 잔머리가 잘 돌아갑니다.”
 
안 이사와 황 부장이 야유인지 칭찬인지 헷갈리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쨌거나 그들은 내 아이디어에 대하여 몹시 솔깃해하는 눈치였다.
일년에 서너 번이나 있을까 말까 한, 희귀한 상황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래요? 눈 가리고 아웅하는 거잖아요.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고요.”
 
이민정이 태클을 걸고 나섰다.

“그건 옳지 않아요”

라고 눈을 치켜뜨는 이민정에게

“옳지 않긴 뭐가 옳지 않아? 자기가 지금 그런 말할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

라고 똑 부러지게 면박을 준 사람은 장 선배였다.
이마까지 온통 벌게진 이민정이 좀 측은해 보였다.
안 이사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천 부는 좀 그렇고, 넉넉하게 천오백 부만 고쳐 찍으라고 해!”
 
점심시간엔 근처의 일본우동전문점으로 몰려갔다. 이
민정이 제 앞의 단무지를 다 먹었기에 슬며시 내 앞의 단무지 그릇을 밀어주었지만,
그녀는 그 뒤부터 단무지 쪽에 젓가락도 대지 않았다.
잘났다, 정말. 누군 뭐 양심에 구멍이라도 난 줄 아나?
‘옳지 않은 일’인 걸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원인을 한번 따져보자.
그녀의 실수가 아니었으면 애초부터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저 조직의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수습책을 내놓은 것뿐이다.
그런 선배에게 눈물로 감읍하지는 못할망정 깊은 적의를 드러내다니,
적반하장도 유만부동이었다.
맘 한구석이 켕겼지만,
그래도 이번 달 월급 값은 했다고,
그렇게 애써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장 선배는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경리부에 제출할 연말정산 관련 서류들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싸맸다.
바야흐로 연말정산의 계절이었다.
일년 동안의 신용카드 사용내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내준 카드사의 노고에 감사 드린다.
하지만 그 목록을 훑어보면 반갑기 이전에 의구심이 샘솟는다.
이것이 진정 내가 그어댄 흔적이란 말인가? 믿기 어렵다.
혹시 다른 누군가의 것과 뒤바뀌기라도 한 건 아닐까.
더 황당한 것은 내가 아직까지 카드 연체자나 신용불량자가 아닌 것으로 보아,
다달이 이 액수들을 꼬박꼬박 갚으며 살아왔다는 점이다.
 
별 카드 사용액은 완만한 W곡선을 그리고 있다.
지름신은 2월과 5월, 8월과 11월에 각각 다녀가셨다.
2월에 지른 45만원짜리 가방
(내 평생 제일 비싼 가방이다.
질 좋은 가죽이라 앞으로 십년, 아니 오년은 넉넉히 쓸 수 있을 뿐더러
매일매일 들고 다녔으니 벌써 본전 다 뽑은 셈이 아닌가),
5월에 지른 독립기념 세간살이(아껴 사느라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는 맨 방바닥에서 신문지 덮고 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8월에 지른 괌 여행(친구들과 여름휴가를 맞춰 다녀왔다.
좀 무리하긴 했지만 일년에 한 번, 휴가도 가지 못한다면
아득바득 돈 벌러 다닐 의미가 없지 않은가),
11월의 알파카코트(할인매장에서 작년 제품을 싸게 샀다.
할부가 몇 달 더 남았지만 너무 예쁘고 따뜻해서 입을 때마다 흐뭇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등등이 2005년 내 소비의 증거들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내 삶의 증표들이기도 했다.
나는 소비하기 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소비하는가.




제3부 위태로운 거리 8


좋다. 살기 위해 소비한다고 치자.
그런데 카드 영수증과 교환한 물건들을 받아 들어도
인생을 탕진하고 있다는 불안감이 치미는 것은 왜일까?
 
인생을 소모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관계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걸까?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사랑 속에 몸을 던지나 보다.
순간의 충만함, 꽉 찬 것 같은 시간을 위하여.
그러나 사랑의 끝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안다.
소모하지 않는 삶을 위해 사랑을 택했지만,
반대로 시간이 지나 사랑이 깨지고 나면 삶이 가장 결정적인 방식으로 탕진되었음을 말이다.
이번 사랑에서는, 부디 나에게 그런 허망한 깨달음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참치를 먹은 뒤 김영수에게서는 다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 남자도 나와 똑같은 이유로 나를 한 번 더 만나본 건지도 모르겠다.
관능을 자극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기쁘고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지던
여자들하고만 거듭하여 만나온 결과, 2005년 12월 현재 자신의 모습이
요렇게 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첫인상이 강렬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놓쳐버린 인연의 숫자를 세어보다가 탄식하고,
그리하여 첫인상이 강렬하지 못한 여자 오은수에게 울며 겨자 먹기로 애프터 신청을 했으리라.
 
그렇지만 우리의 만남은 어떤 매듭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끝나 버린 듯하다.
그래, 그것이 정답이라고, 씁쓸하지만 분명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이유는
 내 옆에 태오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태오와 나는 어느새 여느 연인들처럼 데이트하고 있었다.
같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했다.
연인 사이의 대화는 세 가지의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처음에는 각자의 주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이야기하려 들고,
종국에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얼굴만 바라보고 있어도 편안해지는 상태가 온다는 것이다.
 
나와 태오는 첫 번째 단계의 끄트머리에서 두 번째 단계로 막 들어서려는 중이었다.
나는 그가 수유리에서 태어나 지금껏 살고 있으며, 그의 부모는 같은 자리에서
 10년째 수퍼마켓을 운영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동생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고, 가벼운 치매 기를 가진 외할머니와 함께 산다.
태오는 나에게 세무공무원으로 은퇴한 냉랭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아버지와 평범하기 그지없는
전업주부 어머니가 있다는 것, 유
희라는 이름의 친구는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뮤지컬배우 수업을 받고 있으며,
재인이라는 이름의 친구는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내 눈에는 그 남편감이 영 마뜩치 않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태오가 자신이 중1 때까지 반에서 맨 앞줄에 앉는 꼬맹이였으나
중2 때 무려 20cm가 자라버렸다는 사실을 들려주었을 때,
나는 그 나이 때 그룹 소방차의 열혈 팬이었으며 여름방학엔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그들의 숙소까지 찾아간 경험이 있다는 얘기를 해주려다가 그만두었다.
태오가

“소방차? 그게 누구더라, 이름은 들어봤는데”
라고 대꾸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굳이 강조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는 일곱 살 차이였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가 돌쟁이 아기였고,
내가 처음으로 남자와 잤을 때 그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는 걸 상기하면
녹슨 화살촉이 허벅지를 스쳐간 것처럼 멍멍해지곤 했다.
 
우리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이브를 위해 태오가 영화 ‘킹콩’을 어렵사리 예매해 놓았다고 했다.
성탄 전야에 멀티플렉스 극장이라니, 인파에 떠밀려 다닐 생각만으로도 뒷골이 지끈지끈 쑤셔왔다.
연말의 들뜬 분위기가 설레지 않고 무덤덤하거나 차라리 짜증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한 지
한 2~3년 되었지만 어린 연인에게 일부러 고백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선물에 대해 고민하다가 폴로랄프로렌에서 민트색의 단정한 옥스퍼드 셔츠를 샀다.
태오의 흰 피부와 썩 잘 어울릴 것 같았고, 무엇보다 큼지막한 구제
털점퍼에 헐렁한 건빵바지를 즐겨 입는 그의 패션 스타일에 서서히 변화를 주어 가고 싶었다.
허리선을 끈으로 묶는 쥐색 정장코트에 파시미나 머플러를 두른 삼십대 여자와 애인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면, 태오 입장에서도 이 정도쯤은 기꺼이 맞추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태오의 선물을 받아드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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