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3부 위태로운 거리 5

오늘의 쉼터 2017. 7. 26. 18:44

제3부 위태로운 거리 5




결혼은 뜨거운 감자다.
재인은 지금 그것을 꿀떡 삼키는 중이다.
함께 삼켜야 할 돌멩이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미처 몰랐다.
 드레스의 주름 문제를 겨우 극복하고나자,
그녀는 곧 메이크업이 마음에 안 든다는 불만으로 잔뜩 부풀어 올랐다.
 
“아이라인이 너무 진하잖아? 양쪽이 짝짝이 아니야? 은수야, 멀리서 한번 봐봐.”
 
무엇이 그리 불안한 걸까.
전형적인 신부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동안 재인은 연신 구시렁거렸다.

나는 “괜찮아, 예뻐, 정말 예뻐”라는

문장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해야 했다.
 
재인의 약혼자에 대해서라면, 별로 길게 언급하고 싶지 않다.
재인이 나를 가리키며

“얘가 은수예요. 여러 번 얘기 했잖아요.
내 베스트 프렌드. 집도 먼데 여기까지 와 준 거예요”

라고 다소 장황하다싶을 정도의 소개를 늘어놓았는 데도
그는 성의 없이 고개만 까딱하고는 미용실 직원에게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진짜! 몇 번을 말해야 되나.
나는 얼굴에 분 안 바른다니까.
거 참 커뮤니케이션 안 되네.”
 
남자 몸에 화장품을 대면 교리에 위배되는 종교라도 가졌는지,
재인의 예비신랑은 뽀얀 사진발을 위해 필수조건이라는 일체의 화장을 거부했으며
텁수룩한 머리칼에 젤이나 왁스도 바를 수 없다고 버튕겼다.
 
“저 사람이 원래 좀 고지식해.”
 
재인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녀가 내게 얼마나 무안해하고 또 미안해하고 있는지
거울 너머의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여기, 뭔가가 와. 아, 이 남자였구나 하는 그런 느낌.”

언젠가 재인이 했던 말이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기억났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발음하던 그 야무진 입매까지도.
괜히 민망해진 기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얼른 맞장구쳤다.
 
“그래. 남자가 자기고집도 좀 있어야지.”
 
“은수야. …정말, 그렇겠지?”
 
힘없이 되묻는 재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있음을 직감했다.
앙상하게 솟은 그녀의 빗장뼈에 손바닥을 얹고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초라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위로의 전부였다.
 
갈수록 뼈저리게 느끼지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기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
결혼에 대한 환상은 없었다.
결혼이란 뜨겁게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둘만의 공간을 이루어
오순도순 아옹다옹 행복하게 사는 행위라고 단순하게 정의내리기에는,
몰라도 좋을 여러 가지 것들을 너무 많이 알아 버렸다.
‘나만은 다를 거야’라는 낙관적 기대에 몸을 맡긴 채 무턱대고 풍덩 뛰어들기에
결혼의 강물은 너무 차고 깊어 보인다.
그렇다고, 결혼 제도 밖에 영원히 머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점심시간이 아니라 2교시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는 것이
그 학급 구성원들의 암묵적 규칙이라면, 나 역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아이는 혼자 점심시간까지 기다려 독야청청 숟가락질을 하더라도 전혀 거리낌이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다.
재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녀는 조바심치며 도시락 뚜껑을 연 것뿐이다.
반찬 통에 담겨져 있던 개구리가 툭 튀어나와 어느 쪽으로 도망가 버릴지,
뚜껑을 열기 전에 어떻게 예상할 수 있겠는가.
 
사진 스튜디오는 자동차로 10여분 거리였다.
혹시 밟기라도 할 세라 두 손으로 재인의 드레스 뒷자락을 치켜들고 조심조심 쫓아 들어가야 했다.
중세유럽왕실의 응접실처럼 꾸며놓은 세트장에서 촬영이 시작되기 직전,
 재인이 화장실에 가겠다고 나섰다.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자기 가방을 들고 따라오라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문을 걸어 잠그더니 그녀는 정신없이 가방을 뒤졌다.
 
“딱 한 대만.”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가느다란 담배 한 개비가 끼워져 있었다.
라이터의 주홍 불꽃이 명멸했다.
웨딩드레스로 몸뚱이를 칭칭 감싸고서,
화장실 벽에 엉거주춤 기대선 자세로 담배를 피우는 여자.
내 친구 재인. 그녀가 내뿜는 창백한 연기 때문에 눈이 아렸다.
나는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가 닿으려는 곳이 어디인지, 우리가 제발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3부 위태로운 거리 6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재인의 약혼자는

“우리나라 여자들은 아무튼”

을 입에 달고 사는 스타일이었다.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도 계속

“이런 식당이 바글거리는 게 이해가 안 가.
요즈음 우리나라 여자들은 말이야,
왜들 그렇게 허영심만 있고 자기 몸 편한 것만 생각하고 이기적인지, 원”

이라며 혀를 찼다.
물론 재인 옆에 앉은 나라는 존재는 거의 무시하고서 재인을 보며 이야기하는 센스를 잊지 않았다.
 

손님 중 절반은 될 듯한 남성 제위들이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요즈음 우리나라 남자들’은 자신의 대외적 이미지를 생각해서인지 잘 모르는 여자 앞에서는

장난으로라도 그런 말을 삼가는 추세였다.

그런데 속마음을 대놓고 표출하고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이 남자가 도리어 순진한 건지

아니면 그 따위쯤은 초월할 만큼 뻔뻔한 건지 감이 안 잡혔다.

재인은 별다른 반응 없이 묵묵히 밥만 먹었다.

평소 누구보다 활기차고 수다스럽고 때론 경망스럽기까지 한 그녀였다.

진한 신부화장, 우아한 올림머리와 지독하게 언밸런스한 후드 티셔츠 차림으로 맥없이

스테이크를 써는 그녀는 내가 알던 하재인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친구가 납득하기 어려운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어도,

남부지방에 폭설이 내려 고속도로가 마비되어도,

뉴욕의 대중교통이 전면파업에 돌입하여도,

서울의 샐러리맨은 꿋꿋이 출근해야 한다.

월요일 아침이 밝았기 때문이다.

이 도시의 다른 모든 월급쟁이들도 그러리라는 것은 불문가지.

그리하여 자그마한 위안이 된다.

 

월요일 아침은 예고되지 않은 대형사고와 함께 시작했다.

이민정이 황 부장을 도와 진행한 모 중견건설회사의 홍보 브로슈어가 인쇄되어 나왔는데,

글쎄, 그쪽 관계자들이 건물 기공식에 참석해 축하테이프를 자르는 사진의 설명이 잘못된 것이다.

사진 아랫단, 참석자 명단을 나열하는 도중에 ‘부장 김xx’이라는 설명이 있었으나

그 작달막한 대머리 아저씨의 직함은 부장이 아니라 부사장이었다.

 

회의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안 이사가 그냥 지나갈 리 만무했다.

솔직히 난감한 일이긴 했다.

그 회사와는 이번에 처음으로 거래를 텄을 뿐더러 이번 결과에 따라

정기적 일감을 맡길 만한 여지가 있는 곳이었다.


“오 마이 갓. 프로페셔널이라면 저지를 수 없는 실수가 아닌가요?”


라고 이민정의 귀에 대고 외치고 싶어 목구멍이 스멀스멀했다.

 

안 이사의 진부한 표현력을 빌리자면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탄 조직원’이었다.
평화 시에는 조직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단단히 결속해야 마땅하고,
위기 시에는 조직의 안녕을 회복하기 위해 한마음으로 뭉쳐야 옳을 것이다.
허나, 조직의 안녕을 희구하는 마음이 이민정―황 부장 듀오가 처한 곤경에 대해
고소해하는 심정보다 우위에 있는지, 지금 이 순간 나로서는 확답하기 어렵다.

“그냥 놔두죠, 뭐. 누가 이것까지 일일이 확인하겠어요?

또 혹시 안다 해도 그냥 웃으면서 넘어갈 것 같은데요.

까짓 부장이나 부사장이나 한 끗 차이인데 설마 조잔하게 뭐라고 할까요.”


―장 선배. 무대책적 낙관주의의 전형이다.

인생을 저런 자세로 살 수 있으면 참 편하겠다.

 

“명백한 저희 쪽 실수잖아요.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죠. 전량 재인쇄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어요.”


―이민정. 지금 이 문제의 원흉이 바로 자신이라는 걸 완전히 망각하고 있는 눈치다.

재인쇄 들어가면 네 월급 얼마치를 까야 되는지 알아?

 

“이사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다 아랫사람 관리 소홀한 제 불찰입니다.

차후에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고, 에, 또…”


―황부장. 횡설수설하는 듯 보이지만,

사건 발생의 책임을 노골적으로 이민정에게 떠넘기겠다는 속셈이 농후하다.

 

안 이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붙여!”

 

미쳤군. 나는 혀로 아랫입술을 축이며 조용히 탄식했다.
‘부장’ 이라고 인쇄된 부분에 ‘부사장’이라는 글자의 수정테이프를 덧붙이라는 것이
 안 이사의 지시였다.
편집부 전 직원들이 파주의 인쇄소로 달려가 날밤을 밝히며 스티커를 붙이는 사태가
벌어질 마당이었다.
이 엄동설한에 왜 엉뚱한 내가, 아무 잘못도 없는 내가, 피박을 덮어 써야 한단 말인가!
그때 난국을 타개할 아이디어가 반짝 떠올랐다.
아아, 어쩌면 나는 천재일지도 몰랐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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