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3부 위태로운 거리 3

오늘의 쉼터 2017. 7. 26. 18:27

제3부 위태로운 거리 3




나도 한때는 끌리는 남자만 만났다.
이상형의 완벽한 조건에 부합되는 남자만 만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최소한의 관능을 자극하는 남자, 함께 있는 시간이 기쁨인 남자,
그에 대해 더 알고 싶고 나에 대해 더 보여주고 싶은 남자가 아니라면
두 번 다시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관능을 자극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기쁘고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지던
남자들하고만 거듭하여 만나온 결과, 2005년 12월 현재 나의 모습은 요 꼴이 되었다.
내 현실감각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유난히 재수가 없었던 건지,
판단은 유보하기로 한다.
 그러나 단 한가지만은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다.
단지 첫인상이 강렬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놓쳐버린 인연의 숫자가 그 얼마이겠는가!
탄식이 절로 나왔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다시는 그런 우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김영수를 계속 만나보려는 이유는 다만 그것이었다.
 
“오늘 꼭 보고 싶단 말이에요. 내일은 안 돼요. 꼭 오늘!”
 
무슨 낌새라도 챘는지 전화기 너머의 태오는 꽤나 끈질기게 보챘다.
죄책감과 짜증, 미안함과 귀찮음이 술기운과 한데 섞여 풍선껌처럼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언제 빵 터져버릴지 몰랐다.
 전화기의 전원을 끄고 김영수가 앉아 있는 자리로 느릿느릿 다가갈 때에,
오른쪽 가슴이 아주 짧게 욱신거린 것은 술기운 탓이었을까.
정체모를 생선뼈로 끓인 매운탕을 나누어먹는 것으로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은 종료되었다.
 
식당을 나와, 김영수와 나는 해 저문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그가 조금 앞서고 내가 뒤처져 걸었다.
그는 내 발걸음의 빠르기 따위는 아랑곳없이 제 속도대로 발을 움직였다.
내가 부지런히 따라가면 얼추 보폭을 맞출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기는 싫었다.
흔들리며 멀어져가는 그의 딱딱한 등은 내게 친밀감도 적의도 내보이지 않는다.
대개의 행인이 다른 행인에 대하여 그런 것처럼.
거리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가벼운 목례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요? 오늘 영하 10도라던데.”
 
태오는 일층과 이층 사이 계단에 앉아 있었다.
충직한 콜리처럼 웅크려 앉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자
반갑기 전에 놀라움이 엄습했다.
 
“짠! 자기 몰랐죠? 오늘 우리 이십일 기념일.”
 
빨간 장미 두 송이였다.
순연한 표정으로 태오는 누구라도 무장해제시킬 수 있는 위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현관 디지털도어 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내 손놀림을 그가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다음엔 안에서 기다려야겠다. 여긴 너무 추웠어요.”
 
가슴이 덜컥 내려앉다니.
아, 내가 나쁜 인간이겠지?
정녕 그렇겠지? 내부의 은밀한 동요를 감추기 위하여
나는 과장된 동작으로 현관 손잡이를 비틀었다.
겉옷을 벗고 보일러 스위치를 켜고 찻물을 올려놓고 꽃병을 찾는다며 부산을 떨었다.
원래 없던 꽃병이 어디서 튀어나올 턱이 없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집안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찬장을 열어보고 있는데 어느새 다가온 태오가 등 뒤에서 나를 안았다.
 
“사랑해요.”
 
“…”
 
“사랑해요. 사랑해요. 이 말하고 싶어서 기다렸던 거야.”
 
문지방을 넘어서야 하는 순간이 왔다.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갈망과 이성(理性)의 경계선 앞에서 나라는 존재의 진심은 속수무책으로 오그라들고 있었다.
 
“나도. 나도…사랑해.”
 
서글픈 쾌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태오가 나를 돌려세워 제 품안에 꽉 그러안았다.
그의 스웨터에서 이름 모를 향수와 담배고린내,
돼지갈비를 구워 먹고 난 뒤의 숯불냄새들이 희끄무레하게 뒤섞여 풍겨왔다.
그가 내 머리에 코를 박았다.
아침에 감지도 않고 오만 군데를 돌아다니다 온 내 머리칼에서는
그 어떤 수수께끼 같은 냄새가 날까.
내가 지나쳐온 거리들의 더럽고 섬세하고 미묘하고 위험한 온갖 빛깔의 냄새가
태오의 코를 찌를지도 몰랐다.
 
그의 입술이 가까이 왔다.
입을 벌리지 않고 그의 입술을 맞받았다.
부리를 맞댄 한 쌍의 펠리컨들처럼 우리는 입술과 입술을 필사적으로 부딪쳤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자.
내일은 곧, 또 다른 오늘이 될 테지만.
갈망이 이성을 집어삼키기를,
오늘 밤만은 간절히 바라고 싶었다.




제3부 위태로운 거리 4


타인의 코 고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가 정말로 ‘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커엉, 푸우, 커엉, 푸우. 저러다 갑자기 숨이라도 멈추면 어쩌나 걱정스럽기도 하다.
 태오가 잠든 지 한 시간째다.
 
지금 이 순간 나의 소망은, 나의 구름무늬 파자마를 입고, 나의 폭신한 침대에서,
나의 사지를 편안히 벌린 채 푹 잠들고 싶은 것뿐이다.
일인칭 소유격이 네 번 반복되는, 객관적으로 보아 소박하기 이를 데 없는
그 바람이 때에 따라선 참으로 사치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절감한다.
자정을 가리키는 벽시계 바늘과, 꽃병 대신 머그잔에 꽂힌 채 화장대 한켠에 놓여 있는
장미꽃 두 송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사랑을 고백한 남자에게 ‘얼른 일어나서 나에게 평화로운 일상을 돌려주는 게 어때?’
라고 정중히 제안한다면 본의와는 달리 이중적인 여자로 취급당하기 십상이리라.
 
태오의 어깻죽지에 조심스레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꿈쩍도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조금 더 세게 흔들어본다.
태오가 번쩍 눈을 뜨더니 후다닥 허리를 곧추세웠다.

“벌써 아침이에요?”

 “아니. 그건 아닌데. 열두 시 넘었어.”

그리고 넌지시 덧붙였다.

“자기 집에 가야 되잖아.”

그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며 장난꾸러기 소년처럼 웃었다.
 
“괜찮아요. 으음, 한 번 더 할까?”

“미쳤어?”

저절로 새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잠기운이 남아 있는 태오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변했다.

“농담이었어요”

라며 손사랫짓까지 하는 걸 보니 조금 미안해졌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일 노는 토요일이지만 아침 일찍 나가야 돼.
친한 친구 웨딩촬영이거든.
하루 종일 가방모찌 노릇 해주기로 했단 말이야.”
 
여덟 시까지 청담동 뷰티 숍으로 오라는, 신부 하재인 양의 분부는 거짓이 아니었다.
 그러나 태오는 내 말의 요점을 파악하지 못한 눈치였다.
뭐가 문제냐는 갸우뚱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뭐가 문제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왜 기를 쓰고 이 아이를 돌려보내려는 거지?
 
“그러니까, 여기서, 아침 일곱 시엔 나가야 된다고.
자기 잠들어 있을 텐데 혼자 놔두고 갈 순 없잖아.”
 
어물쩍 핑계를 만들어 붙이면서도 찜찜했다.
 
“웨딩촬영, 나도 같이 가면 되잖아요. 일곱 시? 나도 그때 일어날게요.”
 
저 멀리 아득한 곳으로부터 비상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선선하고 천진하게 대꾸하는 그의 진심을 알기에 더욱 어지러웠다.
오은수, 제발 솔직해지자. 35세의 비뇨기과 전문의와 31세의 그래픽 디자이너가
결혼사진을 찍는 곳에, 24세의 무직 청년을 데리고 갈 만한 용기가 너에게 있다고?

“내 남자친구와 인사들 나눠요.”

그 반듯반듯하고 질서정연한 세계에 태오를 당당히 드러내놓을 만한 배짱이 정녕 너에게?
 
태오는 곧 돌아갔다.
바라던 대로 나의 잠옷을 입고 나의 침대에 큰 대(大)자로 드러누웠으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태오의 선의를 배반했다는 죄의식과, 스스로의 졸렬함에 대한 자책이 양심을 내리눌렀다.

다음날 아침,
재인이 신부화장 중인 장소에 도착할 때까지도 마음 한구석이 계속 시큰거렸다.
 
오늘의 주인공 재인은 붉으락푸르락한 낯빛으로 울상 짓고 있었다.
한 떨기 백합처럼 청초하다고 칭찬하고 싶었지만,
눈썹조차 그리지 않은 상태로 이마를 훤히 깐 그녀의 적나라한 몰골을 보니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가끔 친한 친구의 완벽한 맨얼굴과 조우할 때 흠칫 놀라게 되는 것은 왜일까.
여고시절부터 내 머릿속에 각인된 정보에 따르면,
재인의 피부는 메추리알을 알맞게 삶아 껍데기를 샤사삭 벗겨놓은 듯 매끄럽고 보드라워야 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우리가 열일곱 살에서 서른한 살이 될 때까지,
가장 엄청난 속도로 팽창한 것이 설마 얼굴의 땀구멍은 아니리라 믿는다.
 
“진짜 환장하겠네. 허리선에 주름이 네 줄이 아니라 두 줄이었다고!
저렇게 쭈글쭈글한 드레스를 어떻게 입으라는 거야?”
 
격분한 재인이 벽 쪽을 가리켰다.
다소곳이 걸려 있는 그것은, 주름 따위야 몇 줄이든 간에, 순백의 아리따운 웨딩드레스였다.
그 꼿꼿한 자태 앞에서 문득, 기가 죽었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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