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

오늘의 쉼터 2017. 7. 26. 18:11

제3부 위태로운 거리 1




한강이 얼어붙었다.
 
아침방송의 여성 기상캐스터는 올해 들어 최초의 일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강남대로의 이른 출근길 풍경을 담은 CCTV 화면이 이어졌다.
자동차들이 거북이걸음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간밤의 적설량은 고작 3cm. 과연 서울은 과잉의 도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단 1초의 실수로 잉태되는 태아, 사방을 가로지르는 구불구불한 버스노선,
무채색 반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걸어가는 표정 없는 중년남자,
바람에 펄럭이는 모텔주차장의 녹색 천막,
입술 부르튼 아르바이트생이 바코드를 찍어주는 24시간 편의점,
의도된 냉정들과 과장된 친절들. 모든 것이 흘러넘친다.
그리고 문패 없는 콘크리트 건물들도 곳곳에 숨어 있다.
 내가 사는 이 집도 그중 하나다.
 
이 집에는 모두 스물한 개의 방이 있다.
대외적으로 각각의 방은 공평하게 15평형. 하지만 복도와 주차장 같은 공용면적,
또 얼마간의 과장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실 평수는 채 아홉 평이나 될지 모르겠다.
만약 이 집이 연극 무대 위의 세트라면 어떨까?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인형의 집처럼 벽의 한쪽 면이 뻥 뚫려 있다면,
저 멀리 객석에 앉은 관객은 스물한 개의 똑같은 방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겠지?
가로로 일곱 줄, 세로로 세 줄씩 나뉜 칸칸마다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훤히 들여다 보이면 참 가관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맡겨진 배역은 ‘205호 여자’ 일까.
 
관객들은 205호의 그녀가 오늘 아침 머리감기를 과감히 생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늘색 바탕에 흰 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는 파자마를 벗어 착착 개키기는커녕
꾸깃꾸깃 접어 침대 위에 대충 던져놓았다는 것과, 소변을 보면서 양치질을 하는
그 여자의 오랜 습관 또한 적나라하게 공개될 것이다.
쫄쫄쫄 내 배설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뜬금없이 웃음이 난다.
스무 개의 다른 방주인들도 다들 똑같이 이 위치에 앉아 변의를 해결하겠지 싶어서다.
아직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옆방 206호의 배우는 매일 아침,
 내 변기 물 내리는 소리를 자명종 삼아 눈을 뜰지도 모를 일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냉장고의 냉동실을 여는 이유는 아이스크림을 꺼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난 밤 벗겨 먹은 사과껍질을 버리기 위해서다.
큼지막한 성에가 잔뜩 끼어 원래 공간의 절반도 안 되게 줄어들어버린 냉동칸에는
고기나 생선 대신 꽝꽝 언 음식물쓰레기통이 얌전히 들어 있다.
음식물쓰레기를 내다 버리지 않았다는 것 말고 지난 보름여 동안 205호 여자가 쌓아온 비밀은
또 하나 있다.
세 명의 남성을 동시에 만나고 있다는 것.
달착지근한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어깨가 으쓱해지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가장 자주 만난 것은 역시 태오다.
대학로에서 같이 영화를 본 뒤로 세 번 더 만났는데 섹스는 한 번밖에 안 했다.
육체와 영혼을 무조건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균형을 이루어가는 고무적인 현상이라 믿는다.
물론 육체의 진도가 영혼의 진도에 맞추어 하향평준화 되고 있다는 비판적 분석도 가능하겠다.
 
유준과의 만남은 예고 없이 이루어졌다.
유준과 유희, 두 사촌남매가 한잔 하다가 나를 불러낸 것이다.
내가 나갔을 때는 둘 다 이미 거나하게 취한 상태였다.
유준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쪽 팔을 들어 “하이! 은수”라고 인사했다.
실망이라 할 수도 없고 모욕이라 할 수도 없는 야릇한 감정이 치솟았다.
노래방이 뮤지컬공연장인 양 현란한 개인기를 선보이던
유희가 별안간 마이크를 던지고 화장실로 뛰어가 버리자,
유준은 그제야 내 옆에 가까이 다가앉았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너 편할 때 대답하면 돼.”
혀가 무척 꼬여 있었지만, 어쨌든 내 귀에는 분명히 그렇게 들렸다.
 
그리고 오늘, 얼어버린 한강을 건너 세 번째 남자를 만나러 간다.
김영수. 아파트 광고의 배경음악처럼 반듯하고 무난하며 지루한 남자.
이 도시의 어느 모퉁이를 돌아도 쉽게 부딪칠 만한 얼굴로 기억되건만,
단숨에 알아볼 수 있을지 도통 자신이 없었다.




제3부 위태로운 거리 2


맞선을 본 남자와 여자가 보름 만에 다시 만났다고 치자.
남자가 여자에게 건네는 첫인사에는 몇 가지 패턴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정도가 무난하겠다.

 “더 예뻐지셨네요”

라는 접대성 멘트를 던질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 남자 김영수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참치 드시죠?”
 
참치, 드시죠?
다섯 음절의 그 짧은 의문문 속에 내포되어 있는 복잡다단한 의미들이 머릿속에서 뒤얽혔다.
 첫째, 그는 이미 메뉴를 정해두었다는 것.
둘째, 상대가 그 메뉴를 거절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다는 것.
셋째, 그 ‘참치’가 뜻하는 것은 (참치라는 단어에서 즉각 연상되는) 참치‘캔’이 아니라
참치‘회’ 임에 분명하다는 것.
넷째, 상대에게 가진 호감이 적어도 참치회를 사줄 수 있을 만큼은 된다는 것.
나로서는 기뻐해야 하는 건지 불쾌해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뇨. 못 먹는데요. 아니, 안 먹어요. 정말로 먹기 싫다니까요”

라고 소리친다면 그의 무덤덤한 표정이 어떻게 변할까 궁금했다.
하지만 어쩌랴. 나는 이미 다소곳한 말투로 대답해버린 것을.
 
“그럼요. 좋아해요, 참치.”
 
“아, 다행입니다. 근처에 아는 음식점이 거기밖에 없는데.”
 
김영수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가 데려간 음식점은, 간판에 ‘무제한 15,000원’ 이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붙어 있는 곳이었다.
실내는 좁고 한적했다.
나는 테이블 쪽으로 주춤주춤 다가가려 했으나,
김영수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하는 다다미방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덕분에 지퍼도 없는 롱부츠를 최대한 우아하게 벗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야, 이게 바로 돈방석이네. 히야, 발상이 대단하죠?”
 
김영수가 진심으로 경탄해마지 않는 대상은 방석이었다.
방석커버에 시퍼런 일만원 권 지폐 수십 장이 어지러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무시할 수 없어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세종대왕의 용안을 엉덩이로 깔고 앉으려니 어쩐지 불경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무한정 주거든요.
빨리 먹으면 질리니까 천천히 많이 드세요.
요기 이 빨간 게 비싼 부위니까 이쪽을 주로 드시고요.”
 
손을 비벼 닦은 물수건으로 얼굴을 문지르면서 그가 재빠르게 행동요령을 숙지시켜 주었다.
숨어 있는 최고의 음식점을 찾기 위해 파견된 비밀요원들처럼 우리는 묵묵히 젓가락질을 했다.
내 잇새에서 뭉개지고 있는 차디찬 물질이, 심해를 헤엄쳐 다니던 커다란 동물의 살점이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았다.
자꾸 물컵으로 손이 갔다.
김영수가

“뭐 사이다라도 드실래요?”

하고 물어왔다.
내가 머뭇대자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반주라도 한 잔?”
 
“영수씨 드실 거면, 저도 한 잔 받아놓고요.”
 
도기주전자에 담긴 정종이 나왔다.
그가 주전자를 구십도 각도로 들어 내 앞의 술잔을 칠십 퍼센트 채웠다.
내가 술을 따라 주려 하자,
그는 꽤 완강한 포즈로 거부의사를 밝혔다.
 
“저번에 말씀 안 드렸던가요? 저는 못합니다.”
 
“전혀 못 드신다고요?”
 
“예. 전혀.”
 
“사업하는데 불편하시겠어요.”
 
내 딴에는 예의상 한 말이었는데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런 오해들을 많이 하시곤 하는데 사실 딱히 어려운 건 없습니다.
시대가 바뀌었다니까요.
접대라는 단어에서 술을 연상하는 시대는 지났어요.
요즘엔 그런 방식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잘 꾸려나갈 수 있습니다.”

흡사 ‘신세대 대표 CEO 독점인터뷰’의 한 장면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문득 재인이 이 남자를 신문에서 보았다고 우기던 말이 떠올랐다.
확인해볼까 하다 그만두었다.
내가 친구들에게 자기 얘기를 과장되게 떠벌리고 다녔다는 걸
당사자가 알아서 좋을 일이 무어란 말인가.
 
조용히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뜻밖에 맛이 향긋했다.
잔이 비는 족족 김영수가 다시 채워주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서는데 핑글 현기증이 일었다.
화장실까지, 내 양가죽 부츠 대신 식당의 지저분한 슬리퍼를 질질 끌고 가야만 했다.
문을 잠그자마자, 묵음 모드로 바꿔둔 전화기부터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3통. 모두 태오에게서 온 것이었다.
 
“언제 끝나요?”
 
“글쎄. 잘 모르겠네. 오늘 워낙 중요한 회식이라서.”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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