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2부 선택의 시대 19

오늘의 쉼터 2017. 7. 26. 16:23

제2부 선택의 시대 19





모든 고백은 이기적이다.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고백을 할 때,
그에게 진심을 알리고 싶다는 갈망보다 제 마음의 짐을 덜고 싶다는 욕심이 더 클지도 모른다.
상대가 왜 유준인지는 묻지 마시라.
애정문제와 관련된 카운슬링엔, 맑고 담담한 사이의 이성이 제격이니까.
그러나 나보다 유준이 한 템포 빨랐다.
 
“여자들은 왜 연애 초기만 지나면 다 마누라처럼 굴지? 이거 해라,
저거 하지 마라,
너의 실존을 변화시켜서 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봐라,
왜 그런 요구들을 하는 거냐고.”
 
흠, 쉽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하루하루를 일요일처럼 보내는 유준과 사귀고 있으면 그 어떤 마음 넓은 여자라도
‘자기야, 나를 위해 제발 좀 변해줘’ 라고 애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군색하게 대답했다.
 
“사랑하니까 그렇지. 뭐랄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지금보다 좀 더 나아졌으면 하는 걸 거야.”
 
“아니. 사랑은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다 받아들이겠다는 약속 아니야?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여자들의 자존심과 관계 있는 것 같아.
자기가 선택한 남자가 지질한 걸 못 참는 거지.
 자기 남자가 친구 남자보다 뒤처지는 걸,
꼭 자기가 친구한테 뒤지는 걸로 생각하는 거야.
남자 등에 업혀 가는 인생이 그렇게 좋나.”
 
유준은 전에 없이 시니컬하게 발톱을 세웠다.
여자친구와 어떻게 헤어진 건지 단박에 감이 잡혔다.
만약 다른 남자가, 이를테면 사무실의 황 부장 같은 인간이 저런 소리를 지껄였다면
속으로라도 냅다 쏘아붙여 주었을 것이다.

 “흥, 오버하지 마시지!”

 하지만 유준은 원래 그런 사이비 마초 아저씨가 아니다.
어쩌다 저렇게 된 걸까 안쓰러웠다.
대꾸할 만한 적절할 말을 찾지 못해 아이스크림 스푼만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구세주처럼 전화벨이 울렸다.
 
“통화 괜찮으세요?”

김영수는 휴대전화 이용자의 대부분이 ‘여보세요’
 대신 애용하곤 하는 문장으로 첫마디를 시작했다.
유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편히 전화 받으라는 손짓을 했다.
두 번째 질문도 못지않게 전형적이다.

“지금 어디세요?”

친구와 함께 있다는 말에,
그는 용건은 말하지 않고 계속

“아, 예, 저…”

하는 식으로 뜸을 들였다.
하도 답답해서 내가 먼저 말했다.

“제가 좀 이따 전화 드릴게요.”
 
유준이 피식 웃었다.

 “남자하고 통화할 때 너 목소리 싹 바뀌는 거 모르지?”

“힛. 어제 선 본 남잔데 왜 전화했나 모르겠네. 별 말도 없이 썰렁하면서.”

유준이 명쾌하게 정의했다.

“뻔하지. 의무방어 및 탐색 차원.”

그럴듯한 분석이다.
그러나 내심 섭섭해진다. 내가 듣고 싶었던 답변은 혹시

“뻔하지. 너한테 홀딱 반했기 때문이야”

 같은 종류는 아니었을까? 유준이 내 가방을 가리켰다.

“야, 너 또 전화 온다. 완전 인기폭발이네.”
 
태오다.

“자기, 통화 중이던데요?”

어쭈, 자기? 두 번 만나서 두 번 잤다고 얘가 아주 엉기네?
그러나 태오의 음성을 듣는 순간 이미 내 목덜미의 솜털들이 일제히 곤두섰다.

“으응, 친구랑 좀.”

황황히 변명하는 내 꼴이 우스웠다.

“밖인가 봐요?”
“아니야. 집 앞 편의점에 잠깐.”
유준의 어이없어하는 표정은 짐짓 외면할 수밖에.

“큰일 났어요. 자꾸만 보고 싶어서.”

 “…”

“내일 춥대요. 따뜻하게 입고 나가요.”

“그래, 자기도.”

자기라고, 나도 모르게 말해버렸다.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그가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코 앞의 유준은 확실히 알아들은 눈치였다.

“너 요즘 상당히 잘 나가나 보다. 근데 실속은 좀 있는 거냐?”

“실속이 있겠냐.”

자조 섞인 한숨이 나왔다.

“안 그래도 너한테 물어볼 게 있어. 남자들은 말이야. 여자를 왜 만나지?”

뱉고 보니 꽤나 멍청한 물음이다.

‘인간은 왜 밥을 먹지?’가 차라리 낫겠다.

“그러니까 여자 입장에서 보기에,
남자들이 여자를 사귀는 목적이 결국엔 한 번 자보고 싶어서는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기도 하거든.”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살다 보면, 거꾸로, 만나자마자 먼저 그걸 해버린 경우도 있잖아. 그랬을 때,
그 남자가 그 여자를 계속 만나는 이유는 뭘까? 공짜 섹스 파트너. 혹시 그런 거야?”

 나는 급히 덧붙였다.

“아, 물론 내 친구 얘기야.”




제2부 선택의 시대 20


유준은 역시 본질적으로 사려 깊은 남자다.
처음부터 볼 짱 다 보고 시작한 그 여자의 이름이 ‘오은수’ 인지 굳이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사실 여자들이 짐작하는 것만큼 남자들이 육체에 그렇게 집착하는 건 아니야.
아, 육체에‘만’ 집착하는 건 아니라는 뜻이야.”
 
“그럼 어떤 남자는 책을 맨 뒷장부터 읽기도 한단 말이지? 맨 앞까지?”
 
“그런 여자가 있다면 그런 남자도 있지 않을까.
글쎄, 남자나 여자나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비슷할 것 같아.
연애란 게 결국엔 이 거친 세상에서 마음 붙일 데를 찾는 거 아니겠어?
체온을 나누고 싶고 기대고 싶고 소통하고 싶고.
 지향점이 같다면, 몸이 좀 앞서 나가는 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데?”
 
“정말 괜찮을까?”
 
“그래. 걱정 말고 일단 진도 나가보라고 해.
허 참, 내 연애전적도 백전백패면서 웬 주제넘은 충곤지 모르겠네.”
 
유준이 날름 혀를 내밀었다.
체리주빌레 아이스크림 때문인지 혓바닥이 빨갰다.
민트초코칩을 핥아먹은 내 혓바닥은 바다빛깔로 변해 버렸을까.
수십 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이 늘어선 유리 진열장 앞에 서면
뭘 골라야 할지 몰라 느닷없이 오줌이 마려워지는 사람은 나뿐만 아닐 것이다.
다디단 초코렛무스, 은은하게 새콤한 망고탱고, 씁쓰레한 커피향의 자모카아몬드훠지….
오늘, 민트초코칩을 찍은 건 다분히 의도적인 행위였다.
한 번도 먹어보지 않았기에 한 번쯤 먹어보고 싶었다.
고작 아이스크림 한 스쿠프이기에 그런 모험을 해볼 수 있었다.
 
처음 경험한 민트초코칩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아마도 다음번에 또 먹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초코렛무스, 망고탱고,
자모카아몬드훠지처럼 내 혀끝에 익숙한 맛들을 선택해야 안전하다는 사실을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앉아있는 거냐.”
 
“그치? 어떻게 스무 살이나 서른 살이나 똑같나 몰라.
유준아, 난 서른 살 넘으면 진짜 딱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니까.”
 
“야, 나도 그랬잖아.
서른 지나면 자잘한 희로애락의 감정들은 다 초월하게 되는 줄 알았어.
거 뭐더라, 애련에 물들지 않는 바위!”
 
우리는 어설픈 공모자들처럼 숨죽여 쿡쿡 웃었다.
바깥공기는 싸늘했다.
유준과 나는 큰길가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엄마집에서 가져온 무거운 종이쇼핑백을 유준이 대신 들어주었다.
그의 휑한 목덜미에 자꾸 시선이 갔다. 부츠를 벗어줄 순 없지만
머플러 정도라면 가능했다.
체크무늬 모직 머플러를 받아든 유준이

“나도 남잔데 체면이 있지. 너도 춥잖아”

라며 머뭇댔다.
도톰하게 기모 처리된 내 스웨터를 가리키자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플러를 동여맸다.
유준의 목에 칭칭 감긴 머플러는 우스꽝스럽고 앙증맞아 보였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그냥 친구’였다.
그렇지만 이런 순간에는 어쩐지 손을 잡고 걷는 편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멀리서 빈 택시의 불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 유준이 불쑥 내 이름을 불렀다.
 
“은수야.”
 
이상하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라리 말이야. 그냥 우리 둘이, 같이 살면 어떨까?”
 
“…지금 프러포즈하는 거야?”
 
나는 태연한 척 되물었다. 유준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진심이야. 너라면 지금의 나를 제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도 마찬가지고.”
 
유준은 순모 백퍼센트 겨울목도리 같은 남자다.
사람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감싸준다.
수수한 규모의 유산도 이미 물려받았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상대를 깊이 신뢰한다.
같이 있으면 대화가 끊이질 않고, 이쪽에서 ‘쿵’ 하면 저쪽에서 ‘짝’ 한다.
그러고 보니 완벽한 결혼상대자의 조건이 아닌가!
나는 과장되게 팔을 휘둘러 택시를 세웠다.
 
“이거 네 거잖아. 가져가야지.”
 
유준이 들고 있던 쇼핑백을 차 문 틈사이로 들이밀었다.
 
“그냥 너 먹어. 다시 연락할게.”
 
나는 힘껏 문을 닫았다. 자동차가 기우뚱, 지구의 바깥쪽으로 흔들렸다.
 




제2부 선택의 시대 21


쇼핑과 연애는 경이로울 만큼 흡사하다.
 
한 개인의 파워를 입증하는 장(場)일뿐더러,
그 안에서 자신과 비슷한 취향을 가진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정서적 안도감을 느낀다.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이 있을 때는 경제력이 받쳐주지 않고,
경제력이 생겼을 때는 여유로운 시간과 젊음을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재화의 양이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쇼핑도 연애도 인간을 고뇌하게 한다.
인간 오은수도 지금, 깊은 번뇌에 빠져 있다.
인터넷 즐겨찾기의 맨 위에 등록해 놓고 자주 들어가 보는 곳은,
자동차 미니(MINI)의 웹 사이트다.
미니의 앙증맞은 자태를 담은 사진이 모니터 가득 일렁인다.
온몸의 신경세포가 팽팽히 조여든다.
차 옆에는, 열 가지 색깔별로 칸칸이 나누어진 다트판이 놓여 있다.
그중 검정색 칸에 마우스를 올리면, 마술처럼, 자동차가 블랙으로 변한다.
마우스를 조작할 때마다 빨강, 파랑, 노랑, 하얀 자동차가 한 대씩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진다.
누구도 두 대를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참으로 잔인한 아이디어다.
 
나의 드림카는 자주 바뀌어왔다.
 한때는 스포츠카를 사고 싶어 몸달아 했던 적도 있었고,
몇 달 전에는 SUV 차량에 필이 꽂혀 쭉 견적을 뽑아보기도 했다.
운전면허를 딴 지 한참 지났는데 왜 아직 차를 사지 않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웃음으로 얼버무리지만, 솔직한 이유는
 이 세상에 너무도 많은 종류의 자동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차도 좋고 저 차도 끌리는데 어떻게 단 한 대만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까지 모지락스런 인간이 못 된다.
 
이즈음 간절히 원하는 차는 미니다.
물론 비싸다. 아주 비싸다.
그렇지만 내 수중에 그 정도의 돈이 없을 거라는 편견은 사양한다.
나에게도 돈은 있다.
여기, 깔고 앉아 있는 이 방의 보증금! 언제인가
내 인생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복잡하고 위태로운 일이 생기면
그때 전 재산을 털어 미니를 살 예정이다.
그러면 솜씨 좋은 마녀가 끓인 따뜻하고 몽글몽글한 마법수프를 떠먹는 것처럼
금세 행복해지겠지?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지금은 불행하지 않다.
 결정적 순간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마음 놓고 다트를 던질 수 있다.
달콤한 혼돈 속에 허우적대며 빨강, 파랑, 노랑, 하얀 자동차를 차례차례 만들었다
장난처럼 허물 수 있다.
 
텅 빈 노트에 하나하나 이름을 써 본다.
전혀 의식하지 않았는데 맨 먼저 윤태오라는 글자가 적힌다.
갈망의 순서임을 알겠다.
윤태오, 양유준, 김영수. 객관식 선다형 문제를 받아든 것처럼
나는 세 개의 이름들을 골똘히 들여다본다.
마음 가는 것과는 별개로, 이 세 개의 보기들에는 각각 잉여와 결핍이 담겨 있다.
나는 몇 번째 답안에 동그라미를 치게 될까.
그것은 정답일까, 오답일까.
 
첫 번째 이름과 두 번째 이름 사이에 조그맣게 원을 그린다.
원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안에서 바깥을 향해 점점 커다랗게 번져간다.
세 개의 이름들이 곧 새까만 볼펜자국으로 완전히 뒤덮인다.
사랑이란, 여타의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는 거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단일성의 믿음은 언제나 나를 무정하게 배신했다. 상처 입혔다.
 
현재 내가 태오라는 남자에게 이끌리는 건,
 빨간색 자동차가 유독 눈에 들어오는 것과 비슷한 일일 뿐이다.
내일은 파랑에, 모레는 노랑에 끌릴 수도 있다.
우선순위는 언제 뒤바뀔지 모른다.
 
그래. 반드시 지금 선택할 필요는 없다.
가상의 시뮬레이션 게임 안에서는 다트를 몇 번이고 다시 던질 수 있지 않은가.
보증금을 빼어 마녀의 심장과 교환할 그 순간까지 나는 선택을 유예할 것이다.
결정하지 않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밤,
세상에서 가장 우유부단한 인간 오은수가 내린 중차대한 결정이다.
 
나는 충동적으로 전화기를 집어든다.
수신자가 누구일지 궁금하다.
누추한 내 방 창문 너머, 네모나게 박제된 밤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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