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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선택의 시대 17

오늘의 쉼터 2017. 7. 26. 16:05

제2부 선택의 시대 17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가 있다.
주인공 소녀가 가출하기 직전,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떼어내 자기 얼굴만을 오려내던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나도 따라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어차피 우리 집엔 오려내고 자시고 할 만큼 그렇게 커다란 가족사진도 없으니까.
 
몇년 전 오빠 결혼식 날 그 비슷한 걸 찍기는 했다.
하지만 확대해주겠다는 사진관측의 호의를 아버지가 딱 잘라 거절했다.
그날 맸던 자신의 넥타이 색깔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아마도 ‘세상에 거저는 없다’는 투철한 세계관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묘한 바가지를 씌울 요량이 아니라면 왜 굳이 특별한 친절을 베풀겠느냐는 것이
아버지가 타인을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이 용서된다면,
나의 아버지는, 지극히 까다로운 데다 의심 많은 인간형이었다.
 
그런 남자와 수십 년째 살고 있는 여자,
즉 나의 엄마가 낙천적이며 털털하던 본래의 성정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식탁에 모여 앉았음에도, 아버지는 국이 싱겁네, 깍두기가 덜 익었네,
타박을 해댔다.
엄마는 다분히 방어적이며 수세적인 태도로 대응했다.
입으론 작게 꿍얼꿍얼하면서 어느새 엉덩이를 일으켜 소금을 꺼내오는 식이었다.
새언니는 묵묵히 지호의 입에 숟가락을 들이밀고 있었고, 오빠는 슬금슬금 새언니 눈치를 살피면서
이따금 실없는 농담을 던져 좌중을 더욱 썰렁하게 만들었다.
 
어릴 땐 우리 가족이 일일연속극 속의 가족들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었다.
이기적이고 쌀쌀맞은 아버지, 잔소리 많고 감정기복 심한 어머니,
경박하고 뺀질대는 오라버니는 드라마뿐 아니라 어떤 동화책에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참을 만했다. 나이 들어가면서 알게 된 진리는,
겉으로 근사해 보이는 다른 사람들도 실제론 구질구질한 일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 홈드라마 속에 사는 가족들도 카메라가 멈추었을 땐,
환멸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흘겨볼 게 틀림없었다.
 
손사래를 쳤는데도 엄마는 무거운 쇼핑백을 강제로 내 품에 안겼다.
밑반찬을 담은 밀폐용기들, 한 무더기의 일회용 홍삼 팩들이 가득했다.
압구정동 한복판까지 동행하기에는 참으로 난감한 품목들이었다.
재인이 선택한 레스토랑은 새로 생긴 스시&롤 전문점이다.
어찌된 영문이지 그녀는 홀로 앉아 있었다.

“왜 혼자야?”

“유희는 좀 늦는대. 차 막힌다고.”

 “아니, 유희 말고. 그 분은?”

 “어엉, 오빠? 갑자기 병원 들어갔어. 이머전시 콜이 와서.”
 
또 시작이다. 대화 중에 난데없이 혓바닥을 굴리며 영어단어를 섞어 쓰는 건 재인의 고질병이다.
여고시절 영어시험시간에 무조건 답안지 3번을 좌르륵 찍고는 일찌감치 엎어져 자던 주제에!
피차의 과거사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사이는 이래서 위험한가 보다.
오래된 친구 사이가 자꾸만 삐거덕대는 건, ‘잘난 척 해봐야 나는 네 밑바닥을 다 안다’는
오만한 자세로부터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 도착하자마자 유희는 재인의 심기를 벅벅 긁었다.

“딴 약속 다 취소하고 나왔는데 이게 뭐야? 설마 평소에 너한테도 이렇게 하니?”

재인은 연어크림치즈 롤이 아니라 무당벌레라도 씹고 있는 표정이다.
내가 얼른 수습에 나서야 했다.

“바빠서 그렇겠지. 암튼 너 결혼준비는 잘 돼가는 거지?”

“낫 배드.”

어휴, 저 놈의 혀를 확 그냥.
왠지 재인이 더 이상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 눈치였으므로 나도 그만 입을 닫았다.
 
“은수 넌 어때, 요즘 연애전선이?”

유희가 엉뚱한 나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모처럼 무난한 공통 화제를 찾았다는 듯 재인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으응, 사실…”

머뭇머뭇 말을 꺼냈지만, 태오에 관해 고백할 용기가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남자를 한 명 소개 받긴 했는데.”

나는 얼굴도 가물가물한 김영수씨 얘기를 늘어놓았다.
저녁식사 권유를 거절했더니 ‘못내 아쉬워하는’ 눈빛으로 약속장소까지
태워다 주었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스스로가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제2부 선택의 시대 18


애인을 뜻하는 ‘남자친구’와, 성별이 남자일 뿐인 ‘그냥 친구’ 는 어떻게 다를까?
우선 스킨십의 유무에 의해 구분된다.
남자친구와는 키스를 하는 사이이고, 성별이 남자인 친구와는
그 키스에 대해 품평을 하는 사이인 것이다.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도록 손 한번 잡지 않았으나,
상대방의 전 애인의 침실매너까지 빠삭하게 알고 있는 유준과 나는
누가 뭐래도 ‘그냥 친구’ 가 확실했다.
우리는 스무 살 때 유희가 주선하는 미팅에서 처음 만났다.
몇 번 데이트 비슷한 걸 하기는 했지만 오래지 않아 우리의 관계는 ‘우정’으로 정리되었다.
 
“청춘 남녀가 어떻게 손톱만큼의 미묘한 감정도 없이 친구 사이가 될 수 있지?
어쨌든 그 새끼 불쾌해.”
 
고릴라는 유준 얘기만 나오면 짜증스럽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었다.
그러나 내가 마치 제 소유재산이라도 된다는 듯 오만불손하게 지껄이던 놈이
휑하니 떠나고 난 뒤에도 곁에 남아 위로주를 사 준 건 ‘그냥 친구’ 유준이었다.
남자친구는 한번 헤어지면 그만이지만, 성별이 남자인 친구는
오랫동안 연락이 끊기더라도 얼마든지 편안하게 다시 만날 수 있다.
 
“어, 은수!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잘 지냈냐?”

기쁠 때나 화날 때나 늘 변함없이 무덤덤한 목소리다.

“유희한테 들었어. 안 좋은 일 있었다면서?”

“안 좋은 일은 무슨.”

 “그래도 이번 여자친구랑은 잘 될 줄 알았는데. 널 되게 좋아했잖아.”

 “글쎄. 원래 집착이 센 애들이 포기도 빠르더라. 뭐 홀가분하고 나쁘지 않아.”
 
쌍꺼풀 수술자국이 또렷하던 그 여자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와 유준이 약 1년여 전 연락을 끊은 건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는 전문대학을 막 졸업한 어린 아가씨였는데 어느 날 술에 취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언니랑 유준 오빠, 두 사람 얼마나 우스운 줄 알아요?
그 사이에 끼어있는 내 감정은 생각이나 해봤어요?
언니, 뭐라고 대답 좀 해보세요, 언니.”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건 미안해서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꼬박꼬박 문장 앞뒤로 ‘언니’ 소리를 붙여대는 기세에 얼이 빠져서였다.
 
그 사건 이후 결국 나와 유준은 평화로운 합의에 이르게 되었다.
어느 한쪽이라도 애인이 있을 때는 서로 연락을 자제하기로 말이다.
결정적 순간에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냥 친구’의 한계였다.
그렇다면 자존심이나 자의식 따위 염두에 두지 않고 대뜸 속엣말을 뱉을 수 있는 건
‘그냥 친구’의 특권일 터였다.

“야, 일단 우리 얼굴 좀 보자. 그 동안 핫이슈들 엄청나게 많았단 말이야.”

“그럼 지금 올래? 아직 세수 안 했으니까 한 30분 뒤에.”

일요일 저녁 아홉 시까지 세수를 안 하고 있었다니.
그의 생활패턴은 그 동안 아무 변화가 없는 모양이었다
유준은 역삼동의 주거용 오피스텔에 혼자 살았다.
근처의 아이스크림 집에서 잡지를 뒤적이며 한참을 기다렸다.
유리문을 밀고 등장한 유준의 복장은 가관이었다.
1930년대의 지식인이 썼음직한 크고 동그란 안경테를 코끝에 걸치고,
검은색 벨벳재킷을 입은 것까지는 봐 줄 만했다.
그러나 재킷 속에 받쳐 입은 흰 티셔츠는 누렇게 물이 빠졌고,
나달나달 낡은 청바지의 엉덩이는 축 처져 있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주워 입고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온 품새였다.
 
“오은수도 이제 많이 늙었네.”

“어이구. 남 말 하시네.”

농담 같은 진담에 맞장구치면서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나는 경악했다.
유준의 청바지 아래로, 맨발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영하를 오락가락하는 기온이었다.
이 추운 날씨에 그는 양말도 신지 않은 채로, 슬리퍼를 질질 끌고 거리를 걸어 온 것이다.
유준은 내 다리를 감싸고 있는 롱부츠를 머쓱하게 바라보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날이 언제 이렇게 추워졌냐? 나, 양말 신기 되게 귀찮은데.”
 
허허 웃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기야 귀찮은 걸 얼마나 싫어하면,
직장 구하는 것도 귀찮아서 몇 년째 백수로 지내고 있겠는가.
내가 아는 한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제 힘으로 돈을 벌어본 적 없는 인간이었다.
 
내가 유준에게 달려간 이유는, …고백하기 위해서였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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