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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선택의 시대 9

오늘의 쉼터 2017. 7. 25. 17:31

제2부 선택의 시대 9




남의 비밀은 듣고 싶지 않다.
저쪽에서 하나를 주면 이쪽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건네는 것이 인간관계의 기본규칙이다.
유희의 일급비밀을 듣게 되면 나는 무엇으로 보답해야 하지?
원 나이트 스탠드에 대해서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하지 않겠다.
나는 불끈 결의를 다졌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까지 ‘인생 뭐 있나
’이던 유희의 메신저 대화명이 어느새 ‘문제는 인생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용기다!!’로 바뀌어 있었다. 두 개 겹친 느낌표가 심상찮다.
무릇 메신저 대화명이란,
일상의 사건이나 심경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새로 써서 주변에 널리 알리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요즘 내 대화명인 ‘친절한 은수씨’는 사실의 반영일까,
이루고픈 소망일까,
아니면 교묘한 위장일까.
 
‘뭐야? 무슨 용기 필요한 일 있어?’
 
질문에 유희는 묵묵부답이다.
화장실에 갔거나 갑자기 급한 전화라도 걸려온 모양이다.
메신저로 대화하다 보면 흔히 일어나는 상황이었다.
제가 먼저 비밀을 털어놓겠다고 변죽을 올려놓고선 김빠지게 뭐야?
투덜대고 있는데 드륵 휴대폰이 진동했다.
 
‘-토욜 6시 대학로 어떠세여? 안토니오니 회고전이 있어여-윤태오.’
 
태오다! 주책없이 발가락 사이가 간질댄다.
몸이 알아서 먼저 반응하는 이 증세를 뭐라 설명하면 좋단 말인가.
메신저 창을 아래로 내리고 얼른 인터넷 지식검색 창에 들어가 검색해 보았다.
영화감독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사진까지 뜨는 걸로 보아 꽤 유명한 할아버지인 듯했다.
토요일 저녁까지는 이틀이 남아 있었다.
승낙이든 거절이든 이번에는 반드시 답장을 해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일 터였다.
만날까? 말까? 아, 무슨 인생이 이토록 첩첩산중, 선택의 연속이란 말인가.
그때 뽀롱, 메신저 도착음이 들렸다.
유희가 돌아왔나 보았다.
 
‘은수야… 실은 나 오늘 회사 관뒀어.’
 
‘헉. 왜?’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유희는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중견기업 전산실의 과장이었다.
그녀는 우리 셋 중에 같이 잔 남자의 숫자도 제일 많고 돈도 제일 잘 벌었으며 승진도 제일 빨랐다.
그 번듯한 회사를 관두다니? 어디 더더욱 번듯한 데로 스카우트라도 된 게지.
 
‘나, 뮤지컬 배우가 될 거야.’
저 끝없는 말줄임표야말로 이 순간의 솔직한 심정이다.
뮤지컬 배우라. 멋지다, 멋져.
그렇지만 31세 미혼여성의 장래희망으로는 좀 너무하지 않은가?
차라리 알뜰 주부 선발대회에서 우승하겠다는 꿈이 현실적일 것 같다.
그래, 인정한다. 내 친구 강유희, 노래 잘한다.
댄스도 수준급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노래방이나 나이트클럽에서의 일이었다.
‘가무’가 특기는 될 망정 어떻게 직업이 되겠는가.
10년 전이면 모를까, 두 달 뒤면 우리는 서른두 살이었다.
 
‘너 혹시 미친 거니?’
 
그러나 내가 키보드의 enter키를 누르는 것보다 유희가 좀더 빨랐다.
 
‘이해 안 되는 거 알아. 하지만 더 늦으면 정말로 후회할 것 같아서.’
 
그녀의 긴 대화명이 새삼 눈을 잡아챘다.

‘문제는 인생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용기다!!’

느낌표 두 개가 안쓰럽게 꼿꼿했다.
나는 enter키 위에 놓여 있던 오른쪽 셋째손가락을 del 키 위로 조용히 옮겼다.
그리고 천천히 타이핑했다.
 
‘그래. 잘 해봐.’
 
막상 쳐 놓고 보니 어쩐지 비아냥거리는 뉘앙스가 풍기는 듯도 했지만 유희는 몹시 감격해했다.
 
‘ㅠ.ㅠ 정말 고마워. 너라면 그렇게 말해 줄 줄 알았어. 이젠 진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겠어.’
 
녀는 벌써 뮤지컬 배우 지망생을 위한 아카데미에 등록했으며
곧 재즈댄스와 연기레슨도 받을 거라고 했다.
나이는 좀 많은 편이지만 타고난 감각이 있고 상대적으로 풍부한 인생경험도 있으니
배우로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벅찬 희망을 늘어 놓았다.
모니터 가득 펼쳐지는 유희의 옹골찬 계획을 나는 멍하니 눈으로 좇았다.
재인의 결혼 발표를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둔하고 벙벙한 충격이 숨골을 내리눌렀다.
 
태오에게 ‘좋아요’라는 답장을 보낸 건,
유희가 ‘인생에 대한 용기!!’를 전염시켜 주어서일까?




제2부 선택의 시대 10


인생을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살다보면 내 의지만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일어난다.
이를테면 하루에 두 명의 남자와 만나는 일. 따지고 보면 그렇게 부도덕한 것만도 아니다.
토요일 오후 두 시는 소개팅 하기에 딱 어울리는 시간이며,
토요일 오후 여섯 시만큼 데이트에 적합한 시간도 흔치 않으므로.
 
안 이사 와이프의 헬스클럽 동료가 소개해주는 남자 김영수는
휴대전화의 통화연결음을 따로 설정해두지 않았다.
통화연결음으로 어떤 음악을 깔아두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누구인지가 드러난다.
최신가요만을 골라 이틀이 멀다하고 바꾸는 사람에게서는 첨단유행에 대한 강박이 느껴지고,
처연한 클래식 연주곡만을 고수하는 사람에게서는 일말의 허영이 묻어난다.
컬러링 설정을 하지 않고 따르릉 소리를 그냥 놔둔 사람은 게으르거나 무심하거나
아니면 소심한 사람일 것이다.
 
김영수는 게으른 사람일까, 무심한 사람일까, 소심한 사람일까.
 
전화통화만으로는 판별하기 어려웠다.
그의 전화매너는 딱 보통이었다.
깍듯하지도 않고 무례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목소리 역시 평범했다.
가늘지도 허스키하지도 않은, 특징 없는 목소리였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었다면 수업 내내 졸았을 것 같다.
우리는 토요일 두 시에 만나자는 데 쉽게 합의했다.
소개팅을 할 때에 식사시간을 슬며시 피하는 것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생활 상식이었다.
이번처럼 울며 겨자 먹기의 경우에는 더욱 그랬다.
김영수와 두어 시간 의무방어전을 때운 후에,
태오와의 약속장소로 옮기면 될 듯했다.
 
“그럼 어디서 뵐까요?”
 
“알아서 정하시죠. 저는 아는 데가 없어서.”
 
“어쩌지. 저도 아는 데가 없는데.”
 
말꼬리를 흐리고 나니 좀 우스웠다.
이 남자와 나는 지금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아는 데가 없긴 왜 없겠는가.
다만 자기가 선호하는 공간을 입 밖에 냄으로써 제 취향과 정체성을 노출하기가 싫을 뿐이다.
이럴 때는 여자가 좀 유리하다.
내가 잠자코 침묵을 지키자 하는 수 없다는 듯 김영수가 제안했다.
 
“신라호텔 커피숍 어떠세요?”
 
호텔이라니. 기를 쓰고 ‘소개팅’이고자 했던 만남이 졸지에 ‘맞선’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그래도 나는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순순히 동의했다.
어차피 회사 간부 사모님의 친구가 소개해주는 남자와 만나면서 ‘맞선’ 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편이 더 가증스러울지도 모른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돌아서자마자 김영수의 목소리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10%의 기대도 없었다.
안 이사에게 대충 면피만 하면 되는 것이다.
 
토요일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치열한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다.
아무래도 동네 사우나라도 갔다 와야 할 것 같았다.
물론 태오와, 또다시, ‘사건’을 벌일 의사는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인간사란 한치 앞을 모르는 법이 아닌가.
원룸의 코딱지만한 욕실에서 대충 샤워하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미진할지도 몰랐다.
 
옷은 어떤 걸로 입어야 하지?
신라호텔에 이어 곧바로 대학로까지 가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맞선용 옷차림으로 태오를 만나야 하다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두 장소에 다 어색하지 않을 만한 옷을 필사적으로 골라야 했다.
첫 번째 후보는 청바지와 벨벳재킷. 이내 고개를 저었다.
김영수 씨는 분명 스리피스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나올 텐데,
청바지는 곤란할 것이다. 두 번째 후보는 모직스커트와 니트 카디건.
호텔에선 무난하겠지만, 이 차림으로 태오와 나란히 길을 걷다가는
그의 막내고모쯤으로 보일 확률이 높았다.
안 되겠다.
겉옷은 일단 결정보류다.
 
서랍장의 마지막 서랍을 열어보았다.
브래지어와 팬티가 아무렇게나 뒤섞여 쌓여 있었다.
입을 만한 팬티로는 엉덩이에 미키마우스가 프린트된 것,
캘빈클라인의 회색 줄무늬, 고릴라에게 선물받았던 핑크색 땡땡이 정도가 눈에 띄었다.
어쩐지 다 마뜩치 않았다.
문제의 그날, 내가 무슨 속옷을 입었었는지 떠올려 보려 애썼다.
혹시 겹치기라도 하면 태오가 속으로 얼마나 무시하겠는가.
 
내가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건지 아리송했다.
아니, 맞선 보러 나가는 여자가 당치 않게 웬 속옷 걱정이람?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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