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2부 선택의 시대 5

오늘의 쉼터 2017. 7. 24. 17:36

 제2부 선택의 시대 5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단연코 인간관계다.
아침마다 악어가 우글대는 늪에 머리통을 집어넣는 기분이라며 징징 댔던 적도 있다.
고생 끝에 만들어 놓은 결과물을 살갑게 굴던 상사 손에 홀라당 뺏겨 보기도 했고,
친구처럼 지내던 동료에게 남자문제를 털어놓았더니
며칠 뒤 ‘연애박사 오은수 실연으로 자살 직전’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소문이
온 사내(社內)를 휩쓸었던 적도 있었다.
 
“민정 씨.”
 
는 그녀의 등 뒤에 서서 조그맣게 이름을 불렀다.
대꾸가 없다.
 좀 더 크게 불러본다.
역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어지간히 마음이 상했나 보았다.
손바닥으로 어깨를 짚으려다 멈칫했다.
이민정과 나는 특별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관계였다.

“쟤는 원래 싸가지가 없는 거니, 아님 나를 무시하는 거니?”

장 선배는 이렇게 구시렁거리곤 했지만 내가 보기엔 타고난 성격 같았다.
 
“오늘 메뉴는 오 대리가 정해 보지.”

언젠가 전체회식 때 사장에게 딱 찍혀 메뉴판 앞에서 낑낑거리고 있을 때
이민정이 명쾌하게 던진 한마디를 잊을 수가 없다.

“저는 생등심 먹을래요!”

포커페이스인 사장은 껄껄 웃더니
늘 시키던 삼겹살 대신 한우 생등심을 20인분 주문했다.
어금니로 고깃점을 씹으면서, 나 그때 그녀에게 얼마나 감탄했었는지 모른다.
고마워했었는지 모른다.
 
나는 나쁜 선배다.
인간도 아니다.
아가리를 벌린 늪 속의 악어다.
자책감이 솟구쳐올라 왼쪽 가슴께가 뻐근했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어, 대리님.”
 
이민정이 뒤를 돌아보면서 귀에 꽂은 이어폰을 뺐다.
심드렁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무심한 눈빛이었다.
조직에 빌붙어 먹고 살기 위해 후배 앞에서 안면몰수를 자행한,
인간 같지도 않은 선배에게 그녀는 평소와 똑같은 어조로 물었다.
 
“왜요?”
 
미처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새하얗게 반짝거리는 그녀의 신형 MP3 아이팟 나노를 나는 얼뜨기처럼 내려다보았다.
 
“엉, 아니, 그냥. …뭐 들어?”
 
“요새는 어렸을 때 유행하던 노래들이 끌리더라고요. 들어보실래요?”
 
얼결에 이어폰 한쪽을 받아 들었다.
25세의 그녀가 ‘어렸을 때’ 유행하던 음악이라니,
곡명을 확인하면 어쩐지 무안해질 것 같다.
 
“저기, 민정 씨, 아까는 말이야.”
 
이민정의 이마에 물음표가 뜬다.
아, 어쩌자고 무턱대고 말을 꺼내 버린 걸까.
 
“…미안했어.”
 
결국 입 밖에 내고야 말았다. 내 촌스러움에 학을 뗄 것만 같다.
이민정이 양미간에 바짝 주름을 잡으며 되물었다.
 
“뭐가요?”
 
얘는 정말로 모르는 걸까,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걸까.
 
“아까 그 회의에서, …이사님한테, 내가.”
 
횡설수설 대고 있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이민정이 선선하게 대꾸했다.
 
“아, 그거요. 아니에요.
 대리님 의견은 저랑 달랐을 수도 있죠, 뭐.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야, 내가 잘못한 거야. 사실 민정 씨 말이 다 옳잖아.”
 
객이 전도되어도 유분수지,
나는 어느새 바락바락 우겨대고 있었다.
이민정이 말끄러미 내 얼굴을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나라는 인간은 대관절 어떤 모습일까?
내세울 거라곤 남들 다 먹는 나이와 별 대단치도 않은 경력뿐.
복지부동의 전형. 그러면서도 꼴에 자존심은 있다고 뒤늦은 말 바꾸기까지.
혹시 ‘저렇게만은 늙고 싶지 않다’고 굳은 결의를 다지게 만드는 반면교사의 표본은 아닐까?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이민정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떴다 사라졌다.
 
“아까는 그러실 수밖에 없었겠죠. 대리님 입장도 이해해요.”
 
문득 이것이 텔레비전 미니시리즈의 한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정의롭고 순수하며 이해심까지 넓은 여주인공 이민정’ 대(對) ‘
제 몸 사리기에 여념 없는 비겁한 노처녀 회사동료 오은수’.
 아니, 이름이 다 무엇이랴. 대본에는 그저 ‘직원3’으로 표시되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
 




제2부 선택의 시대 6




주인공 자리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스캔들 한 방에 추락할지 몰라 불안해하는 주연배우보다는 차라리 명줄 긴 엑스트라,
뭘 하든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단역배우 쪽이 안전하다.
무능력한 30대 회사원의 비굴한 생존법이라고 비웃어도 좋다.
아니라고 우기고 싶지만, 그게 사실이니까.
 
하루 종일 명치 끝이 묵직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퇴근시간 무렵, 교정지와 손목시계를 번갈아 들여다보고 있는데
책상 위의 직통 전화벨이 울렸다.
 
“오은수 씨? 나야.”
 
남자다. 내게 전화 걸어 다짜고짜 ‘나야’라고 할 만한 남자는 극소수였다.
굵은 저음이 귀에 설면서 동시에 묘하게 익숙했다.
태오의 얼굴이, 불쑥 섬광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목소리도 전혀 다를뿐더러 그가 회사 번호를 알 리도 만무하건만,
상대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별안간 태오를 연상하다니 생뚱맞은 상상력이었다.
엑스트라 오은수, 점점 정신과 전문의와의 상담이 필요한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이 확실했다.
나는 얼른 제정신을 추슬렀다.
 
놀랍게도, 그는 안 이사였다.
불과 30미터 거리의 제 방에 앉아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급히 뒤를 돌아보니 이사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이사님, 무슨 일…?”
 
“쉿!”
 
안 이사가 황급히 내 말을 막았다.
 
“혹시 지금 옆에 누구 있나?”
 
나는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사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장 선배는 MSN 메신저 창을 띄워놓고 채팅에 열중하고 있었고,
이민정은 외근을 나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황 부장은 어이없게도,
책상에 신문지를 활짝 펼쳐놓고 손톱을 깎는 중이었다.
보통 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퇴근 직전의 풍경이었다.
 
안 이사가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전한 용건은, 간단했다.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뒤에 회사에서 좀 떨어진 중국음식점으로 나오라는 것.
전화를 끊기 전에 엄숙한 목소리로, 가능하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밥을 먹자고? 단 둘이? 대체 왜?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릿속이 더욱 복작복작 금세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차가워지자. 차가워지자.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려 애썼다.
최대한 객관적인 관점으로 사태를 바라봐야 한다.
 
직장의 중년 간부로부터 업무시간 이외에 느닷없이 개인적인 호출을 받는 경우라면,
일반적으로 두 가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개인의 업무와 관련한 아주 중요한 통고. 이를테면 권고사직.
 흠, 그러나 그리 높지 않은 확률이었다.
질적 측면을 제쳐둔다면 현재 스코어 내가 맡고 있는 업무량은 꽤 많았다.
이 정도 연봉에 이만큼의 일을 꾸역꾸역 해치우는 노동자를 지들이 어디서 또 구한다고?
한 명을 자른다면 내가 아니라 누가 봐도 황 부장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아아, 너무도 명징한 두 번째 힌트 앞에서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왔다.
 어디 단체로 가르쳐주는 학원이라도 있는 모양인지 아저씨들이 작업을 걸어오는
방식은 몹시 비슷하고 또 진부했다.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 등의 프로그램에서도 유치해서 차마 내보내지 못할 것 같은
전형적인 방법이 아직도 횡행하고 있었다.
내게도 물론,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내가 특별히 중년 남성의 순정을 자극하는
외모의 소유자이기 때문일 리는 없다.
그저 ‘목표물’이 되기에 만만하고 어리어리해 보여서일 것이다.
어쨌거나 그 목표물로 낙점되었다는 건 무척 골치 아픈 일이었다.
 
안 이사는 먼저 도착해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줄무늬 셔츠에 노타이,
 진한 감색 코르덴 재킷을 입은 그는 회사에서 볼 때보다 아주 약간 젊어 보였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백 번 양보한다 해도, 절대 내 스타일은 아니다.
 
“뭐, 탕수육이라도 먹을래?”
 
나는 세게 고개를 저었다.
 안 이사는 굴 짬뽕 두 그릇을 주문했다. 불행 중 다행이다.
설마 양심이 있다면, 6000원짜리 짬뽕 한 그릇으로 감히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은 아닐 테지?
 
“내가 이런 얘기 꺼내는 걸 은수씨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네.
괜한 오해 없이 들었으면 좋겠는데.”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소설방 > 달콤한 나의 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부 선택의 시대 9   (0) 2017.07.25
제2부 선택의 시대 7  (0) 2017.07.24
제2부 선택의 시대 3   (0) 2017.07.24
제2부 선택의 시대 1   (0) 2017.07.24
제1부 성년의 날 13   (0) 2017.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