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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선택의 시대 7

오늘의 쉼터 2017. 7. 24. 17:40

제2부 선택의 시대 7




“결혼은, 왜 안 하는 거야?”
 
내 이럴 줄 알았다.
여직원을 사석으로 은밀히 불러내어 대뜸 건네는 말이 저 따위로 너절하다니.
유혹이든 뭐든 제대로 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다면,
 좀 더 신선하고 창의적인 노하우를 개발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나는 단무지를 아작 깨물었다.
식초를 병째 들이부었는지 시큼털털한 맛이 입안 가득 불쾌하게 퍼졌다.
결혼을 왜 안 하느냐고? 나 역시 까무러쳐 죽을 만큼 궁금하다.
 
이런 때를 대비하여 모범답안 몇 가지 정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중, 더 이상 이 주제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밝힐 때 쓰는 것으로 골라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말했다.
 
“아직 못한 겁니다.”
 
자유 의지가 아니라는데 어쩔 텐가.
 
“그럼 하고 싶은 사람은 있고?”
 
이 아저씨, 집요한 구석이 있었군. 다시 깍듯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결혼은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것이며, 남자도 없다.
뱉어놓고 보니 더할 나위 없이 정직한 고해성사처럼 들렸다.
남자만 구하면 만사 오케이? 사는 게 그렇게 단조로우면 참 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 이사의 눈동자에 노골적으로 떠오른 측은지심의 기척을 짐짓 외면했다.
 
굴 짬뽕 국물은 지나치게 밍밍했다.
급작스레 추워진 날씨, 거래처의 사내 인사이동에 관한 풍문,
청소 담당 아줌마의 근무태만 등을 안 이사는 두서없이 화제에 올렸다.
나는 그때마다 딱 적당한 각도로 고개를 끄덕여 상사의 견해에 동의를 표하는 척 했다.
그가 정작 핵심적인 용건을 남겨둔 채 빙빙 겉돌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눈치 챌 수 있었다.
이상하다. 여기쯤에서 예의 진부하고 느끼한 레퍼토리가 나와 주어야 하는데.
 
“팍팍 많이 먹어. 요 굴이 말이야. 여자한테 아주 그만이라잖아.”
 
그렇지. 바로 이거다. 나는 한숨을 삼키면서 조용히 젓가락질을 했다.
안 이사는 국물을 쭉 들이켜더니 한증막 안에서나 어울릴 것 같은 감탄사를 뱉었다.
 
“어허, 시원하다.”
 
“…”
 
“나는 웬만하면 저녁은 밖에서 해결하고 들어가.
애들 엄마한테 부담주기도 싫고. 사실 애들 엄마가 몸이 좀 안 좋거든.”
 
슬슬 본론으로 진입하려는 낌새다.
뒤이어 자신과 ‘애들 엄마’ 가 얼마나 무미건조하며 형식적인 사이인지를 좔좔 읊어대겠지.
오래 전부터 각방을 쓰고 있다는 대목까지 나오면, 정말이지 바닥을 치는 거다.
아무래도 말을 끊고 화장실이라도 다녀와야 할까 보다.
 
“그래서 요즘 운동을 아주 열심히 하더라고. 헬스 시작하면서 많이 활기차지고,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하고도 가깝게 지내는가 봐.”
 
흐음, 논리가 좀 엉뚱하게 전개되어 간다는 감이 왔다.
 
“거기서 사귄 아줌마 하나가, 주변에 혼기 놓친 신랑감이 있다고
우리 마누라한테 중신을 부탁한 모양인데.”
 
오 마이 갓. 제발, 더 듣고 싶지 않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안 이사 본인이 직접 추파의 손길을 뻗치는 편이 훨씬 고마울 것 같다.
후환이야 어찌 되든 딱 잘라 거절하면 그만이니까.
그렇지만 직장상사가 어설픈 마담뚜를 자처하고 나설 때에,
 자칫하면 상황이 사뭇 복잡하게 흘러갈 수 있었다.
그것은 경험으로 체득한 뼈아픈 진리였다.
 
막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무렵,
직속 팀장이 자기 동생을 소개해주겠다고 제안해왔다.
뭣도 모르고 대학 때 미팅하는 기분으로 쭐레쭐레 따라 나갔다.
한달쯤 만나다 관뒀는데 그 후 남자는 스토커로 돌변하여 하루에 30통씩 전화를 해댔다.
팀장은 틈만 나면 면담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호출해서는 자기 동생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안 되겠느냐는, 부탁인지 협박인지 모를 작태를 일삼곤 했다.
또, 바로 먼젓번 회사의 전무로부터는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이혼남을 소개 받았던 일도 있다.
그 대머리 남자가 유리한 조건으로 전무의 대출을 도와준 은행원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안 이사는 꼬깃꼬깃 접은 메모지를 꺼내어 단무지 그릇 옆에 펼쳐놓았다.
‘김영수’ 라는 글자와, 전화번호로 추측되는 숫자들이 휘갈겨져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흔하디 흔한 이름 김영수. 내가 만나게 될, 그 남자였다.




제2부 선택의 시대 8


맹세코, 속물은 아니다.
그래도 남자를 소개 받을 때 기본적인 조건은 미리 들어두자는 것이 나의 철칙이었다.
말하자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는 것이다. 물론 배기량 몇 cc 자동차를 모는지,
결혼 후 시부모에게 다달이 생활비를 보태드려야 하는지와 같은 민감한 사안까지는 묻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야말로 필수불가결한 체크 요소라고 믿는 내 친구 재인 같은 여자도 있으나,
차마 그 정도까지 대놓고 속되지는 못하다는 게 내 딜레마였다.)
 
하지만 적어도 출생연도가 언제인지, 직업은 무엇인지,
 키가 큰 편인지 작은 편인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기왕이면, 두산 베어스의 팬인지 엘지 트윈스의 팬인지,
혈액형이 O형인지 AB형인지 등등의 부가정보도 예습하고 나가는 것이
대화의 우월한 고지 선점에 유리했다.
 
하지만 안 이사는 이름을 제외하고는,
나와 만나게 될 상대남의 기본 정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안 이사 같은 사람들 눈에는 그저, 여기 ‘결혼하지 않은 나이 든 남자’가 있고
저기 ‘결혼하지 않은 나이 든 여자’가 있다, 라는 사실만이 중요한가 보았다.
그렇다면 그 둘이 짝이 되지 못할 이유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그 노총각 노처녀가 서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면,
저리 까다로우니 여태 저 꼬락서니로 남아 있는 거라며 혀를 차겠지.
어쨌거나 그가 건넨 쪽지를 주머니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내일 중으로 김영수씨에게 꼭 전화를 하여 이번 주말을 넘기지 말고
만나보라는 것이 얼치기 마담뚜 안 이사의 신신당부였다.
“사실 우리 회사 여직원들 중에 누굴 골라야 하나 고민했어.
근데 역시 오은수씨만한 사람이 없더군.”
 
그는 마치 황태자비 간택 과정에 관여한 탐관오리처럼 생색을 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인데 오해는 하지 마.
오늘 아침 그 회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다른 직원들한텐 얘기 안 할 거지?
그럼 이제 은수씨와 나 사이에 둘만 아는 비밀이 생긴 거네. 흐흐.”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는 그 얼굴을 보자 하염없이 심란해졌다.
이 요상한 소개팅을 미끼로 나를 꾀어 프락치로 심어두려는 불순한 의도가 명백해 보였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복잡다단한 상념에 빠졌다.
 
자, 여기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둘은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각의 가족, 친구, 동료와 함께 전혀 별개의 추억을 쌓으면서 살아왔다.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걸어온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어느 날 처음 만난다.
호텔 커피숍에서, 정장을 떨쳐 입고, 서로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암호명처럼 숙지한 채 말이다.
그들은 매우 정중하고 약간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수인사를 나눌 것이다.
그리고 불과 얼마 뒤, 그들이 영원한 법적, 경제적, 성적, 정서적 공동체가 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이 그들의 가족, 친구, 동료에게 전해진다.
 
믿어지는가? 이것이 내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시시각각 일어나는 일이었다.
짐칸 가득 돼지들을 싣고 가는 트럭과 광화문 한복판에서 마주치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불가사의하지 않은가! 그날 밤,
 메신저에서 만난 유희는 내 말에 코웃음을 쳤다.
 
‘모르니까 결혼하는 거지. 속속들이 잘 알면 지겨워서 왜 하겠니?’
 
나는 생고구마칩을 와그작거리면서 자판을 눌렀다.
 
‘말 되네. 근데 넌 안 해봤으면서 어떻게 알아?’
 
과자부스러기가 키보드의 ‘ㅂ’과 ‘ㅈ’ 사이에 점점이 떨어져 박혔다.
밤에 먹는 주전부리가 다이어트에 독약이라는 거, 잘 안다.
하지만 사람이 육체만 가지고 사나? 가끔은 정신을 위한 웰빙도 필요한 법이다.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이 과자 한 봉지가 몇 kcal인지는 잠시 잊기로 한다.
어차피 딱 절반만 먹을 예정이니까.
아니, 운이 좋으면 3분의 1만 먹게 될 수도 있다.
 
‘바보야. 꼭 겪어봐야 아니? 남들 다 아는데 너만 모르는 거야 ㅋㅋ’
 
계집애. 한마디를 해도 꼭 덧정 없이 한다.
 대꾸하고 싶지 않다.
그때 유희가 느닷없이 말했다.
 
‘은수야. 나 할 말 있어…. 비밀 지켜줄 수 있지?’
 
비밀? 궁금증보다 짜증이 먼저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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