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2부 선택의 시대 11

오늘의 쉼터 2017. 7. 25. 17:47

제2부 선택의 시대 11





매혹은 어디서 오는가?
 
그 사람의 외부가 아니라 나의 내부로부터 온다.
1미터의 거리를 두고 김영수와 마주앉는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멀쩡했다.
‘멀끔’이나 ‘헌칠’이 아니라 ‘멀쩡’이다.
부연설명은 하고 싶지 않다.
맞선이라는 행위를 두어 번 이상 경험한 적 있는 여성이라면 금세 이해할 것이다.
 
175㎝쯤으로 추정되는 신장, 퉁퉁하다고도 말랐다고도 할 수 없는 보통의 체격,
‘블루클럽’에서 깎았음직한 단정한 헤어스타일, 비교적 흰 피부. 매부리코도 아니고
돌출된 입매나 밀도 낮은 머리 숱을 가지지도 않았다.
이만큼 무난하고 평범하기도 쉽지 않다.
나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 2시 신라호텔 커피숍 안에는 첫 만남을 진행 중인 커플이 여럿이었다.
김영수의 외모 경쟁력은 그 남자들 가운데 압도적 1위라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2위권을 다툴 정도는 되어 보였다.
5위도 힘들어 보이는 남자와 마주앉은 여자의 테이블을 지나,
김영수가 기다리는 자리로 도도히 걸어갈 때는 아주 조금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런데 왜 가슴이 뛰지 않는 것인가!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 주말이어서인지 길이 많이 막히더라고요.”
 
겨우 5분 늦었을 뿐이지만 나는 약간은 과장되게 사과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설레지 않는 내 진심을 숨길 수 있다면.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습니다.”
 
남자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말문이 막혔다.
 
그는 개량 옥수수 낱알처럼 가지런한 사람으로 보였다.
그의 목을 졸라매고 있는 표정 없는 감색 넥타이와, 희디흰 와이셔츠 깃을 보고 있으니
뜬금없이 저 사람에게는 아무런 상처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패의 경험이라고는 고작 운전면허 주행시험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는 정도?
그 뒤, 하루에 서너 시간씩 열심히 연습하여 다음 시험에 곧바로 합격해버리고는
먼젓번의 실패 따위 별거 아니라는 듯 씩 웃을 것만 같다.
 
비즈니스 무대에 선 사람들답게 우리는 공손히 각자의 명함을 교환했다.
내가 받아든 명함은 연노란색이었다. 그린캣 대표이사 김영수.
이름 옆에는 깜찍하게 의인화된 초록빛 고양이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김영수가 내 명함을 들여다보더니 눈을 끔뻑였다.
 
“편집회사라면, 책을 만드는 곳인가 봐요?”
 
이 남자 역시 나에 대한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여기까지 나오게 된 모양이었다.
우리는 신속하게 각자의 신상명세를 까발렸다.
 

남자 : 36세, 미국에서 대학과 대학원 졸업, 부모님은 다 미국에 계심,

현재 친환경 유기농 먹거리 유통회사를 경영하고 있음.

(단점 : 나이가 많은 감이 있다 / 장점 : 예비 시부모가 외국에 거주 하신단다! & 회사 오너라니!)

 

여자 : 31세, 수도권의 4년제 대학 졸업, 양친 무고하심,
현재 중소규모의 편집대행회사 대리로 근무하고 있음. (
단점 : 까놓고, 스펙으로만 따지면 남자에 비해 밀리는 감이 없지 않다
/ 장점 : 다섯 살이나 어리고, 에, 또, 그러니까,
이 사회 한구석에서 맡은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여성일지도 모른다.)
김영수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 부녀회장의 소개로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다고 했다.
 
“남자 혼자 사는 게 안쓰러워 보였나 봐요.”
 
눈이 휘둥그레졌다.
결과가 어찌 되든 부녀회 소속 아줌마들의 수군거림이 예사롭지 않을 텐데?
그의 등 뒤편에 둘러선 일군의 투명인간들이 내 모습을 날카롭게 품평하고 있는 것 같다.
 괜히 어깨가 옴츠러든다.
 
“자꾸 거절하는 것도 어른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요.”
 
억지로 끌려 나왔더니 별 볼일 없다는 뜻인가?
나 역시 상사의 강권에 의해 나온 참이라고 응대하려다 말았다.
맞선에서, 평점 80점 이상의 남자와 조우하는 일은 지구와 혜성이 충돌할 가능성보다 희박하다.
내가 그에게 강렬한 이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다.
적어도, 차이고 싶지만은 않다.
그것이 김영수라는 남자를 향한 생생한 욕망의 전부였다.
나는 잇몸을 드러내지 않도록 애쓰면서 생긋 수줍게 미소지었다.





제2부 선택의 시대 12


과연 이 남자와 매일 밤 한 침대에서 잠들 수 있을까?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김영수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느슨한 포즈로 깍지 낀 자세는 섬세한 데 없이 뭉툭한 손가락 생김새를 무방비로 노출했다.
가느다란 털 몇 가닥까지 드문드문 나 있다.
저 손가락이 내 몸의 모든 곳을 척척 더듬어대는 것을 용납할 수 있을까, 평생?
 
이 사람을 데리고, 부모님에게 인사 드리러 가는 상상을 해본다.
두 분은 내심

‘우리 막내가 9회 말 역전홈런은 못 쳤어도 끝내기 안타는 날렸군’

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숨을 내쉴 게 분명하다.
인생이 포커 판이라면, 김영수는 내게 남겨진 몇 안 되는 패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평범하게 사는 인생이 가장 바람직한 거라고, 요즘엔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숨이 턱 막혔다. 나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자세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들으니 그다지 내세울 만한 인생관은 아닌 것 같다.
 
3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서울에서 ktx를 탔다면 부산에 도착했을 것이고,
인천과 상하이를 왕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멀리까지 왔다는 느낌은 없었다.
자의 커피 잔은 진즉에 비어버렸고 화장실도 한 번씩 다녀왔다.
누구든 먼저 일어나자고 해도 될 시점이었다.
남자가 불쑥 물었다.

“뭘 좋아하세요?”

“네?”

“식사하러 가셔야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어요.”

인생의 조커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다른 남자와 약속이 있다고 고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김영수로부터 최소한 저녁을 사주고 싶어할 정도의 점수는 얻고 있다는 확신이 왔다.
그래. 오은수, 아직 죽지 않은 거야.
쾌재를 불러야 마땅하건만 혀끝에 쌉싸래한 맛이 감돌았다.
어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태오를 바람맞히고 김영수와 저녁을 먹으러 갈 것인가?
재인이라면 두 번 생각도 안 하고 그런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약속시간을 한 시간도 안 남겨두고 취소하는 건 큰 결례다.
유희라면 “조금이라도 더 섹시한 남자랑 먹어” 라고 충고할 것이다.
나는 오은수다.
어느 쪽의 기회비용이 더 큰지 판단할 사람은 바로 나였다.

“네가 진정 원하는 게 뭐야?”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저는, 그러니까, 어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김영수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짧은 순간이지만 내장을 꿰뚫어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길이었다.

친구 아기, 돌잔치가 있어요.”

아, 하나마나한 궁색한 변명이다.
그는 현금으로 계산을 치렀다.
건물 밖으로 나와, 늘어서 있는 택시가 아니라
그의 자동차에 올라탄 건 죽어도 내 뜻은 아니었다.
내 잘못이라면

어느 쪽으로 가시죠?”

라고 묻는 맞선남의 호의에 곧이곧대로 대학로라는 목적지를 밝힌 것뿐이다.
가뜩이나 식사 요청을 거절해서 미안하던 차에, 반색을 하며 데려다 주겠다는
 남자를 어떻게 매몰차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 정도로 똑 부러진 성격이었다면, 인생살이가 일곱 배는 더 수월했을 것이다.
 
김영수는 은색의 중형차를 몰았다.
전국 방방곡곡 어딜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차였다.
‘튀지 않음’ 을 모토로 살아가는 30대 중후반 남성에게 잘 어울렸다.
밀폐된 공간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으니
내가 이 사람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어색한 실감이 확 다가왔다.
서로 마주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가 카 오디오의 전원을 켰다.
교통방송이었다. 디제이의 호들갑스런 멘트에 이어,
신곡인 듯한 경박한 템포의 트로트곡이 흘러나왔지만 그는 주파수를 변경하지 않았다.
 
다른 남자의 차를 타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다니.
아무튼 내 삶이 갑자기 살짝 화려해진 것 같다.
평소보다 차가 많이 막혔지만 약속시간보다 20여 분 빨리 대학로에 도착했다.
태오가 설마 벌써 나와 있진 않겠지.
약속장소인 KFC 앞을 50미터쯤 지나서 세워달라고 할 참이었다.
아니, 그런데? 김영수의 차가 신호에 걸려 횡단보도 앞에 정차했을 때 나는 보고야 말았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는 태오의 모습을.
그리고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투명비닐에 싸인 장미꽃 한 송이를.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소설방 > 달콤한 나의 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부 선택의 시대 15   (0) 2017.07.25
제2부 선택의 시대 13   (0) 2017.07.25
제2부 선택의 시대 9   (0) 2017.07.25
제2부 선택의 시대 7  (0) 2017.07.24
제2부 선택의 시대 5   (0) 2017.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