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2부 선택의 시대 13

오늘의 쉼터 2017. 7. 25. 17:59

제2부 선택의 시대 13




서른한 살. 토요일 저녁,
왼손에 장미 한 송이를 든 채 햄버거를 사기 위해 패스트푸드점 카운터 앞에 줄 서기에는
약간, 아주 약간 민망한 나이다.
 
영화시간이 빠듯하니 여기서 대충 때우자는 건 태오의 제안이었다.
매장 안에 바글대고 있는 고객들의 평균연령은 스무 살 가량으로 추정되었다.
혹시 아는 사람이 길을 지나다 무심결에 윈도 너머를 들여다보는 건 아닐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니트 벙거지 모자를 쓴 새파란 남자아이는 누구냐고 물어올 게 뻔했다.
만약 태오 대신 김영수와 식사를 하러 갔다면 지금쯤 무슨 메뉴를 앞에 두고 있을지
슬그머니 궁금해졌다.
오, 그러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판타지는 금물. 정신건강에 독(毒)이 되리니.
 
설상가상, 빈자리가 없어 2층의 좁은 구석의자에 겨우 끼어 앉아야 했다. 옛
날 생각도 나고 그런대로 새롭기는 하다.
나는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위안이 되는 것은 그뿐이 아니다.
옆 테이블에 앉은, 교복을 깡총하게 고쳐 입은 소녀들이 아까부터 우리 쪽을 자꾸 힐끗대고 있었다.
태오 때문이었다.
 야릇한 자긍심과 객쩍은 자의식이 거미줄처럼 교차했다.
 
태오가 치킨버거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빵과 고기를 씹는, 속도감 있는 턱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수선한 사방천지가 별안간 정지하고 우리 둘만 고요한 정적 속에 잠긴 듯하다.
조금 아까 만나자마자 태오는 내게 장미꽃을 쑥 내밀었다.
 꽃바구니를 옆에 끼고 거리를 누비는 꽃 행상 할머니들로부터 산 것이 틀림없었다.
고백하건대 남자로부터 꽃을 받은 것은 퍽 오랜만이다.
부연하자면 한 다발도 아니고 한 단도 아니고 딱 한 송이를 받은 것은 대학생 때 이후로 처음이다.
 
“들고 올 때 좀 쑥스럽긴 하던데요.”
 
이 아이는 참 선량한 목소리와 풋풋한 미소를 가졌다.
다시 만나면 혹 창피하지는 않을까 염려했었다.
기우였음을 어렴풋이 알겠다.
 
“제가 고른 작품은 ‘정사’예요.
영화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작품인데 어떠실지 모르겠어요.”
 
정사? 귓바퀴가 달아올랐다.
정사! 아무리 곱씹어 봐도 의미심장한 단어다.
넓지 않은 극장 안은 이내 꽉 찼다.
태오와 나의 어깨가 어둠 속에서 무심하게, 그리고 감질나게 스쳤다.
나도 모르게 머리칼이 쭈뼛 섰다.
 꼬리뼈가 벌써부터 간질간질했다.
 
흑백 필름인 영화는, 제목과는 짐짓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주인공들은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하며 계속 헤매 다니기만 했다.
더 당혹스러운 건, 주위 관객들이었다.
수능시험을 이틀 앞둔 도서관처럼 실내에는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하물며 내 옆의 여자는 무릎 위에 노트를 펼쳐놓고 무언가를 연방 적어대고 있었다.
태오 역시 군기 든 이등병처럼 정자세로 앉아 스크린에 집중했다.
새삼, 내가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낯선 소외감이 엄습했다.
 
삼분의 이쯤 흘렀을까,
엉덩이를 외로 꼬고 있을 때 태오의 손이 조심조심 내 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짧은 숨이 터져 나왔지만 나는 손등을 무릎 위에 얹어놓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태오의 손바닥은 부드러운 나뭇잎 같았다.
찌르르한 전류가 팔목을 지나 팔꿈치 위로 타 오르고, 급기야 겨드랑이께까지 얼얼해졌다.
마치 연애를 처음 시작하는 소녀처럼 가슴이 겅중겅중 뛰었다.
 
영화는 기습적으로 끝났다.
정녕 끝인가 싶어 어리벙벙해하고 있는데 극장 안에 불이 켜졌다.
눈이 부시도록 환한 불빛이었다.
그리고, 믿고 싶지 않지만, 태오는 황급히 내 손을 놓았다.
 
거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우리의 약속은 원래 딱 여기까지였다.
같이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고, 그것을 이행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술? 내키지 않는다.
맨 정신에는 빳빳하고 어색하게 굴다가,
알코올만 들어가면 낭창낭창해지는 여자로 규정되고 싶진 않다.
단 한 번 우연한 섹스를 했던 남자와 다시 만나는 일이 여자에게
얼마나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또렷이 상기되었다.
태오가 머무적대면서 말을 꺼냈다.
 
“저기, 차 한잔 하실래요?”
 
그제야 깨달았다.
남자도, 여자 눈에 비치는 자기 모습에 대해 두려워한다는 것을.
술에 의지하지 않고도 우리는 그날 밤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제2부 선택의 시대 14




입과 몸은 무슨 관계일까.
섹스가 좋았던 남자와의 키스는 한결같이 좋다.
태오와의 입맞춤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는 부드럽게 혀를 굴릴 줄 알았다.
그의 혀뿌리가 내 입 속으로 차르르 감겨들었다.
 
원룸이 밀집한 우리 동네 주택가,
높지 않은 건물과 건물 사이 주차장에는 고요한 암흑이 고여 있었다.
쌀쌀한 밤 날씨였지만 등허리에 축축이 땀이 배어왔다.
태오의 입술에선 달착지근한 유자청의 맛이 풍겼다.
우리 둘의 몸에는 지금 0.001퍼센트의 알코올 도수도 흐르고 있지 않았다.
카페에서 태오는 유자차를, 나는 페퍼민트 허브차를 마셨다.
유자에 성호르몬을 자극하는 성분이 들어있다는 설은 금시초문이었으니
태오가 나를 따라 택시에 올라탄 건 무엇에 홀려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리라.(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요일 밤 열한 시쯤 택시를 타고 서울 도심을 가로지를 때면 참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토요일의 끄트머리임에도 거리는 자동차들로 가득했다.
이 시간까지 도로 위를 어기적거리며 교통정체를 유발하는 저 차의 운전자들은
죄다 뭘 하러 기어 나온건지 궁금해졌다.
나 역시 기를 쓰고 기어 나왔다 들어가는 주제에 말이다.
이런 식의 이율배반적 사고방식은 남녀관계에도 종종 적용된다.
예컨대 극장에서 내 손을 잡고 있던 태오가 서둘러 손을 놔버린 데
대한 앙금이 가슴 속에 남아있으면서도, 내가 먼저 그의 손을 잡아버릴 수도 있다는
발상의 전환은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침 우리가 탄 택시의 뒷자리는,
그의 무릎과 내 무릎을 가까이 붙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비좁았다.
유자가 아니라면 혹시 페퍼민트에 미묘한 성분이 포함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불투명 회색 스타킹에 싸인 내 허벅지가 그의 리바이스 타입원 청바지와 닿을 듯 말 듯 밀착했다.
노골적으로 유혹하려는 뜻은 아니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의도도 없었다.
다만 나라는 여자의 매력이 그에게 아직도 유효한지를,
이렇듯 소심하게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의 몸이 조금 고통스럽기를 바랐다면 나는 나쁜 여자일까, 불쌍한 여자일까.
 
택시에서 내려, 어두운 골목 한편의 남의 건물 주차장 뒷마당에서 우리는 부둥켜안았다.
부둥켜안는다, 라는 동사의 어감은 정겹고 또 질퍽하다.
그를 안자, 그의 입술의 보드라움과 그의 하체의 무거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의 윗니와 나의 아랫니가 딱딱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단풍잎 같은 태오의 손이 얇은 반코트 속을 파고 들어왔다.
어디서 멈춰야 하는 거지?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서도 나는 계산하려 애썼다.
쉬운 여자가 되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숄더백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태오가 흠칫 놀라며 내게서 몸을 뗐다.
재인이었다.
나는 전화기를 꺼내어 한 손으로 배터리를 뽑았다.
하재인, 가만두지 않겠어.
기껏 달아올랐던 분위기가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피시식 죽어 버린 듯했다.
갑자기 태오가 외쳤다.
“어, 꽃은요?”
 
그러고 보니 꽃이 없었다.
그에게서 받은 첫 번째 선물.
 카페 화장실의 세면대 위나 택시 뒷좌석에 오도카니 놓여 있겠다.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무언가를 스르륵 놓고 오는 건 나의 특기였다.
 덜렁이처럼 질질 흘리고 돌아온 것에는 어쩌면 ‘마음’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가 사는 원룸빌라로 우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지금, 집 상태가 어떻더라? 속으로 바삐 더듬어보았다.
남자를 데리고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은, 독립할 때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었다.
또한 무엇보다 방이 무척 지저분했다.
이틀째 싱크대에 방치돼 있을 설거짓거리들,
마구 구겨진 채 침대 위에 켜켜이 쌓여 있을 옷가지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우렁각시라도 다녀가지 않았다면 좁디좁은 내 방 안은 피폭된 바그다드 시내를 방불케 할 터였다.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서 끝낼 수밖에. 태오에게 바이바이 손을 흔들고 사뿐사뿐 계단을 올랐다.
일층과 이층 사이 계단참에서 문득 눈앞이 흔들렸다.
 
그래. 세상에는 깨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약속도 있는 것이다.
나는 어둠을 향해 돌발적으로 몸을 돌렸다.
저만치 휘적대며 걸어가는 태오의 뒷모습이 보였다.
나는 커다랗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소설방 > 달콤한 나의 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부 선택의 시대 17   (0) 2017.07.26
제2부 선택의 시대 15   (0) 2017.07.25
제2부 선택의 시대 11   (0) 2017.07.25
제2부 선택의 시대 9   (0) 2017.07.25
제2부 선택의 시대 7  (0) 2017.0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