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선택의 시대 3
사무용 의자에도 계급이 있다.
그 자명한 진리를 미처 모르던 순진무구의 시절이 가끔은 사무치게 그립다.
우리 회사의 의자는 모두 네 개의 등급으로 나누어진다.
사장실 의자, 이사실 의자, 부장들의 의자, 그리고 과장급 이하 평사원들의 의자.
목 받침이 없으며 우레탄 재질의 팔걸이를 가진 중국산 사무용 의자에 앉아 나는 종일을 보낸다.
가끔 외근이 있긴 하지만, 한 달에 닷새 정도는 마감기간이라는 명목 아래 아침 아홉 시부터
자정이 넘을 때까지 엉덩이를 뭉개고 있어야 한다.
전체적으로 따지면 대한민국 사무직 노동자의 평균노동시간에 비해 결코 적은 양은 아닐 것이다.
40대 후반인 오너는 전직 잡지사 기자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남자였다.
직원들의 업무에 대놓고 간섭하는 편은 아니지만,
회사가 돌아가는 세부적인 상황을 자신이 일일이 다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월급 받는 사람 입장에서 보자면 좀 피곤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스스로 신세대 CEO라고 자부하는 사장은 특히 회의를 굉장히 좋아했다.
딴에는 민주적 의사 결정 방법이라고 굳게 믿는 눈치인데,
콧구멍만한 회사에서 틈만 나면 크고 작은 각종 회의가 열린다는 것은 꽤나 비효율적이며
소모적인 행위라고, 오너는커녕, 이사는커녕, 부장도 아닌 나는 목 놓아 주장하고 싶다.
오늘 아침에는 편집 에디터들만의 주간회의가 열렸다.
주제는 규모 있는 예산 관리를 통한 효과적인 제작비 절감 방안.
한마디로 돈 좀 아껴 쓰라는 얘기다. 사실 주제는 중요하지 않다.
회의 주재자가 누구인지가 그보다 열 배는 더 중요하다.
“자, 장미경씨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도는 거야.”
그럴 줄 알았다.
이것이 안 이사의 방식이다.
무슨 친목 계모임 장기자랑도 아니고,
한 명씩 돌아가며 한 곡조씩의 의견을 순서대로 뽑아내야 한다는 발상에 짜증이 솟구쳤다.
“저희 팀의 경우는 진행계획표대로 꼼꼼하게 진행을 해서 불필요한 페이지 낭비를 줄이고, 에, 또.”
교과서 같은 말씀. 장 선배는 심야 토론 프로그램에 발언자로 나선 방청객 대표처럼 진지하지만,
듣고 있는 안 이사의 표정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야속하게도 중간중간 고개 한 번 끄덕여주지 않는다.
내 차례는 다음다음이었다.
나는 열심히 머리를 회전시켰다.
하나마나한 얘기를 해도, 실현 불가능한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해도 신통찮은 반응을 얻을 게 뻔했다.
열두어 명의 중지를 모아봐야 별 반짝거리는 아이디어 하나 못 건질 텐데 왜 자꾸 이런 자리를 만든담?
회의는 보나마나
“이렇게들 생각이 없어서야 원.
자기 지갑 열 때처럼 한 푼이라도 소중히 쓸 궁리를 해 봐.”
따위의 안 이사의 긴 연설로 끝날 것이다.
관리자들이 회의에 집착하는 이유는 공식적으로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자리일뿐더러,
잔소리를 통해 좌중을 장악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알량한 권력욕을 맛보고 싶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제 생각에는요. 솔직히 이 논의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같거든요.”
엇, 이게 무슨 소리지? 별안간 정신이 번쩍 든다.
진원지는, 내 옆자리의 후배 이민정이다.
“돈 100만원이 들어가면 100만원짜리 책 나오는 거고,
200만원이 들어가면 200만원짜리 책 나오는 거잖아요.
100만원을 주시면서 200만원짜리 퀄리티로 만들라고 하는 건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거죠.
이럴 거였으면 차라리 처음에 덤핑 가격으로 계약을 말았어야지,
저희들한테만 자꾸 졸라매라고 하시면 곤란하죠.”
실내에는 침 넘어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모두 얼어붙은 눈치다. 다들 알고 있지만,
절대로 입 밖에 내어서는 안 되는 금기어는 어떤 조직에도 존재한다.
이민정은 분명 발음했다.
덤핑! 평소 거침없는 언행을 자랑하는 스물다섯 살의 그녀일지라도
설마 이렇게까지 용감할 줄이야.
“인쇄소, 출력소, 필자원고료 전부 다 깎는 것도 한도가 있지,
완전 덤핑의 파도타기잖아요. 계속 이러면 우리 이미지만 나빠져요.”
지당하신 말씀이다.
두려움 없이 불의에 항거하는 어린 후배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야 옳겠으나,
나는 고개를 내리깐 채 애꿎은 테이블의 나뭇결만 눈으로 더듬었다.
제2부 선택의 시대 4
‘짬밥’은 위대하다.
사회생활 7년차의 연륜에 의해 나는 신상에 닥쳐올 위험의 그림자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안 이사는,
까마득한 평사원의 도발을 여유롭게 받아 넘길 만큼의 고수가 아니었다.
그의 숱 없는 눈썹이 지렁이처럼 꿈틀댔다.
이민정은 자신이 불러일으킨 사태의 파장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똑같은 표정으로,
한쪽 다리를 꼰 자세를 풀지 않았다.
안 이사의 핏발 선 눈동자가 이민정을 스윽 지나 내게 머무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차례는, 나였다.
“…오은수씨는, 오 대리는 어떻게 생각해? 지금 이 의견에 동의해?”
안 이사의 말꼬리가 조금 떨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눈치채고 말았다.
그는 사장의 대학 선배였다.
직원들 앞에서는 ‘님’자를 붙여줘도 될 텐데 사장은 굳이 더 커다랗게 ‘안 이사’라고 불렀다.
안 이사는 사장의 코빼기가 안 보이는 자리에서도 꼬박꼬박
“사장님께서 안 계셔도 열심히들 하란 말이야”
라는 식의 말투를 썼다.
죄다 그런 건 아니지만,
몇 건의 거래처와 시중가보다 좀 낮은 액수로 수의계약을 맺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 대부분이 안 이사의 작품이라는 설도 유력했다.
모두들 내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내 한마디에 따라 분위기는 이쪽으로, 아니면 저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나는 시민혁명의 불씨를 살려 활활 타오르게 한 영웅이 될 수도 있고,
진실을 교묘한 거짓으로 포장하여 임금의 눈을 멀게 하는 간신배가 될 수도 있다.
입사 이래 가장 극심한 압박감이 등허리를 내리눌렀다.
그 많은 회의실 의자들 중에 왜 하필 이민정 옆에 앉았던 걸까,
후회막급이었다. 인생 참 어렵다.
그저 언제나 조용히 묻어가는 생이고 싶었건만. 숨을 고른 다음, 나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아니오.”
비굴하다.
정말 비굴하다.
말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그 사실을 뼈아프게 의식했다.
그러나 하던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민정이 어이없다는 듯 내 쪽을 흘끔 쳐다보고는 곧 고개를 돌렸다.
“그래, 오 대리 말이 맞다.”
황 부장이 뒤늦게 끼어들어 좌중을 수습했다.
“이제 와서 원론적인 얘기해서 뭐 어쩌겠습니까.
일단 정해진 틀 안에서 어떻게든 윈윈(win-win)하도록 노력을 해 봐야죠.”
다행히 아무도 손뼉 같은 것은 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다들 자기 자리로, 복도로, 화장실로 뿔뿔이 흩어졌다.
장 선배가 나를 탕비실로 잡아 끌었다.
“암튼 저 싸가지. 저거, 언젠가는 사고 한 번 오지게 칠 줄 알았어.”
나는 대답 대신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하긴 하지만 목구멍이 타는 듯한 열패감은 깨끗이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
“어디서 감히 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냐. 윗사람들 다 바보로 만들고 말이야.”
“…뭐 솔직히, 틀린 얘기 한 건 없잖아요.”
“그래도, 그 뭐냐, 똥오줌 못 가리는 거. 그건 큰 잘못이지.
혼자서 그렇게 잘난 척 해버리면 나머지는 뭔데? 누군 뭐 비겁해서 가만있는 줄 아나.”
장 선배가 씹어 뱉듯 던진 마지막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비겁해서 가만있는 줄 아나. 스물다섯 살, 첫 직장에서의 나였대도 오늘처럼 대답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망가 버리거나 회의실 탁자에 얼굴을 묻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민정에게 과감한 지지표를 던지고는 혼자 안절부절못하다가 다음날 비장한 각오로
사직서를 제출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때가 그립다는 뜻은 아니다.
옳은 일과, 옳지 않은 일을 판단하는 기준이 점점 더 모호해져만 간다.
25세의 여자를 부러워하는 건 탱탱한 피부 때문이 아니다.
내 질투의 이유는, 그녀의 무모한 용기가 수틀리면 쉽게 손 털고 첨부터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자의 자신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제자리에 앉아 있는 이민정의 뒷모습이 보였다.
홀로 앉아 미동도 없는 그녀의 좁은 어깻죽지를 보니,
좀 전에 마신 물이 식도를 타고 역류하는 것 같다.
나는 머뭇머뭇 그녀에게 다가갔다.
[정이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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