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2부 선택의 시대 1

오늘의 쉼터 2017. 7. 24. 16:13

제2부 선택의 시대 1





지구에는 모두 몇 개의 도시가 있을까?
 
나는 상상한다.
1975년 5월 25일 오후 두 시,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 귀퉁이의 작은 산부인과가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태어난 나를.
 
스톡홀름, 상파울루, 뉴욕, 에든버러, 프라하, 이스탄불, 베를린, 로마, 암스테르담, 쿠알라룸푸르,
마드리드, 토론토,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득하고 머나먼 이국 도시들의 이름이라면 앉은 자리에서
수십 군데는 댈 수 있다.
스톡홀름의 나, 뉴욕의 나, 쿠알라룸푸르의 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나. ‘그녀’들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쌍둥이자리, RH+ B의 혈액형, 대외적으로는 163인 161.5cm의 키,
120이 간당간당한 아이큐 지수는 다를 바 없겠지.
학교 다닐 때 화학과 체육을 지지리 못했다거나,
우울한 날엔 뜨겁고 달달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면 좀 나아진다거나,
브래드 피트가 전 세계에서 제일 섹시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취향도 엇비슷할 것 같다.
 
그렇지만 이국의 도시에서 나고 자란 그녀가 설마 서울 구석의 오은수 씨만큼이나
별 볼 일 없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겠지?
그것만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심정이다.
나를 닮은, 어쩌면 나였을지도 모르는 이름 모를 그녀는 적어도 내가 매일 맞닥뜨리는
이 지긋지긋하고 구질구질한 일상보다 수십 배는 더 달콤한 생을 구가하고 있어야 한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하릴없는 환상조차 품어보지 못한다면,
사는 게 너무 팍팍하고 목구멍이 답답해서 꿱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아침 출근길,
여느 때처럼 지하철은 칙칙폭폭 지루하게 선로를 달리고 있다.
뒤로 가지도, 하늘을 날지도 않는다.
네모난 상자에 빽빽이 들어찬 시든 귤처럼,
혹은 나무궤짝에 겹겹이 줄 맞춰 누운 죽은 갈치처럼 나는 영혼 없이 실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운 좋게 좌석을 차지하고 앉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이 칸의 승객들 대부분은 인간의 존엄권
수호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떠밀리거나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말고,
지금 여기서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누군가의 불타는 의지를 무력화시키고픈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 출퇴근시간에 맞춰
서울 지하철에 태운 다음 뱅뱅 돌려보라.
 목적지에 도착하면 어깨에 힘이 쪽 빠지고 ‘모든 게 귀찮다,
의지 따위야 어떻게 돼도 좋으니 어디 드러누워 쉬고 싶다’는 열망만 굴뚝같아지니까.
그래도 나는 좀 나은 편이다.
집에서 회사까지 네 코스만 가면 된다.
앞으로 딱 8분만 더 버티면 되는 거다.
사무실엔, 매일 아침 의정부에서 마포로 출근하는 사람도 있고 용인에서 오는 사람도 있다.
그들을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게 사실이다.
나는 몸체를 최소한의 부피로 짜부라트리려 애쓰면서 시커먼 어둠이 휙휙 지나가는
창 밖을 멍하니 응시했다.
 
뒤쪽에서 난데없이 사그락사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예감이 좋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곧 정수리에 신문지의 감촉이 와 닿았다.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엉덩이를 쓰다듬는다면 확 신고해버리거나 개망신이라도 줘 버릴 텐데,
이 발 디딜 틈도 없는 지옥철 한복판에서 조간신문을 펼쳐 읽어대는
 저 뻔뻔한 인간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나는 소리 없이 크게 외쳤다.
 
“아이 씨, 우리나라는 이래서 안 돼!”
 
용서하시라. 물론 나도 안다.
세계 어느 나라엘 가도 저렇게 개념 없는 치들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잠시 잊고 싶다.
저런 인간은 오로지 대한민국 안에서만 숨쉬고 있다고,
 그렇게 믿어버리기로 한다.
내게 닥치는 짜증스런 상황들을 이곳에서 태어난 빼도 박도 못할 운명 탓으로 돌려버리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문제가 단순해지고 어쩐지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만약 내 손으로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면, 나는 어떤 도시를 골라 태어났을까?





제2부 선택의 시대 2

 


후보지 1번 스톡홀름. 세계 최고의 사회복지국가 스웨덴의 수도.
 장점-남녀평등이 법적으로 완벽하게 보장되고 동거가 보편화되어 있으며
미혼모에 대한 삐딱한 시선 같은 것도 없다고 한다.
음, 끌린다.
우려되는 점-사회보장제도가 너무 잘 되어 있다니 혹시 심심할지도 모르겠다.
우울증 인구나 자살률이 아주 높다는 것도 꺼림칙한 부분.
 
후보지 2번 뉴욕. 장점-문화와 패션과 유행의 중심지. 두말할 필요 없다.
우려되는 점-살인적인 물가와 집세. 내 아무리 시트콤 ‘SEX & THE CITY’를 좋아한다지만,
그녀들처럼 누릴 거 다 누리고 멋지게 살려면 뼈 빠지게 벌어 카드 값으로 다 바쳐야 한다는
숨은 진실 정도는 알고 있다.
 
후보지 3번 부에노스아이레스. 앗, 어느새 내려야 할 역이다.
나는 온몸으로 정신없이 인파를 헤치고 두 발을 가까스로 지상에 내려놓았다.
아무도 궁금해 하지 않는 중차대한 결정에 골몰했더니 머리가 빠개질 것 같았다.
역사 바깥을 향해 난 계단을 빠르게 걸어 오르는 동안 씁쓸한 결론에 도달했다.
만일 나에게 태어나고 싶은 도시를 직접 고르라고 했다면,
십중팔구 나는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1975년 이래로 아직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 망설이고만 있을 게 틀림없으니 말이다.
 
타의에 의해 이곳에 태어나게 된 것이,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뭐 내가 특별한 애국자여서는 절대 아니다.
그보다는 마음껏 투덜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더 정직한 고백일 것이다.
‘한국 남자들은 왜 다 이 모양이야?’ 또는 ‘우리나라만큼 교통질서 안 지키는 데가 있는 줄 알아?’ 아니면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은데 확 이민이나 가 버릴까’
이렇게 맘 놓고 지껄일 수 있는 자유!
 
만일 고민을 거듭한 끝에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로 결정했다 치자.
 그렇다면 내가 감히 어떻게 이곳에 대한 불평의 말을 함부로 늘어놓을 수 있을 텐가.
네 손으로 선택한 주제에- 더 원색적으로 말하자면 네 눈깔 네가 찌른 주제에-
왜 불만에 차 사사건건 트집이냐는 압박이 무서워서라도
나는 꼼짝 없이 입 다물고 찌그러져 살아야 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래왔다.
선택이 자유가 아니라 책임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항상, 뭔가를 골라야 하는 상황 앞에서 나는 어쩔 줄 몰라 진땀을 흘려대곤 했다.
 
때론 갈팡질팡하는 내 삶에 내비게이션이라도 달렸으면 싶다.

“백 미터 앞 급커브 구간입니다. 주의 운행하세요.”

인공위성으로 자동차 위치를 내려다보며 도로 사정을 일러주는 내비게이션 시스템처럼,
내가 가야할 길이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 누군가 대신 정해서 딱딱 가르쳐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커다란 걸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상사 뒷담화로 아침을 시작하고자 하는 직장 선배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와 같은, 사소하고도 예민한 문제의 정답부터 제발 좀 알려주면 좋겠다.
 
출근길, 건물 앞에서 만난 장 선배는 다짜고짜 내 팔짱부터 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착하고 다정하며 성실하다는 온갖 장점이,
눈치가 없다는 단 한 가지 단점 앞에서 죄다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사회생활의 무서운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인간 진짜 감각 없는 거, 자기도 알지? 근데 그 주제에,
내가 올린 사진이 다 이상하대. 대안도 없으면서. 괜히 트집 잡는 거 맞지?”
 
아무리 봐도 회사가 입주해 있는 건물의 일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눌 대화 같지는 않다.
제 딴에는 낮게 속삭인다지만 장 선배의 목소리는 적절한 수위보다 늘 조금 높다.
주변에 우리 회사 사람이 없다 해도 같은 빌딩에서 일하는 낯익은 얼굴 몇이 함께
승강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인간’의 주인공 황 부장이 언제 불쑥 나타나 굿 모닝 인사를 건넬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엘리베이터가 얼른 도착하기만을 기원했다.
아침부터 이사라도 하는 건지 엘리베이터는 10층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시시하기 그지없지만 결코 빠져나갈 수도 없는 그물에 단단히 코가 꿴 느낌.
지리멸렬한 일상이 네버 엔딩 스토리처럼 끝없이 반복된다는 실감에 나는 문득 진저리쳤다.

 
[정현아 글/권신아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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