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달콤한 나의 도시

제1부 성년의 날 13

오늘의 쉼터 2017. 7. 24. 16:00

제1부 성년의 날 13




성장은, 긍정적 의미로 충만한 단어다.
고통을 통해 정신의 키가 한 뼘 자랐으며 보다
성숙한 인간에의 길에 한발 다가섰다고 믿고 싶은 심정은 십분 이해한다.
그렇게라도 자신을 합리화시키면 마음이 좀 편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옛 애인의 결혼식 날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어제 나는 비로소 진짜 어른이 되었다고 뿌듯해 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왜 어른은 울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걸까?
어른도 때론 흐느껴 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아무도 알지 못할 때,
눈물 없이도 메마른 가슴으로 통곡한다.
그것이 이 도시의 비밀스런 규칙이다.
 
어제는 긴 하루였다.
고릴라는 결혼이라는 묘지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버렸고
그에 대한 내 오욕칠정도 함께 순장(殉葬)되어 버렸다.

“우리도 참 남자 복은 지지리도 없다니까.”

“뭐 어때? 다 안 되면 나중에 우리끼리 여성전용 럭셔리 실버타운 만들어서 같이 살면 되지.”

“그래, 직원은 죄다 꽃미남으로 뽑자!”

이렇게 결의를 다지던 친구 재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안면을 싹 바꿔버렸다.
그 와중에 경쟁 프레젠테이션을 치렀으며,
 전직 거래처 직원의 연애놀음에 본의 아니게 끼어들기도 했다.
그리고 으음 그러니까… 잘 모르는 남자와 아니… 처음 만난 남자와 하룻밤을 보냈다.
 
후회하지는 않으련다.
혼자 금 밖에 남은 자의 절박함과 외로움으로 잠깐 이성을 잃었었다는 핑계는 대지 않겠다.
저지르는 일마다 하나하나 의미를 붙이고,
자책감에 부르르 몸을 떨고,
 실수였다며 깊이 반성하고,
자기발전의 주춧돌로 삼고,
그런 것들이 성숙한 인간의 태도라면,
 미안하지만 어른 따위는 영원히 되고 싶지 않다.
성년의 날을 통과했다고 해서 꼭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나는 차라리 미성년으로 남고 싶다.
 책임과 의무,
그런 둔중한 무게의 단어들로부터 슬쩍 비켜나 있는 커다란 아이, 자발적 미성년.
 
깊은 바다를 유영하는 한 마리 물고기처럼 살면 안 되는 걸까.
이 단단한 제도의 틈과 틈 사이를 자유롭게 흘러다니면서?
그러다 다른 물고기나 산호초와 문득 눈이 마주치면,
생긋 한 번 웃어주고는 이내 제 길을 가는 거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고, 어디에도 미련 두지 않고!
물론 그런 삶이 행복할지는 미지수다.
타인의 온기를 그리워하고 소통을 원하고 누군가와 안정적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내 안의 질긴 열망은 또 어쩌고?
까딱 잘못했다간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모순과 자가당착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지도 모른다.
 
아아, 하지만 예단은 금물!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지금은 그냥 이대로 한번 가보는 거다.
미리 준비하고 예측한다고 해서 삶이 어디 호락호락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굴러가 주던가.
그리고 내가 원했던 방향이 어딘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지금 여기 도착해 있지 않은가.
나는 단호하게 와인색 립스틱을 집어들어 입술에 발랐다.
안 어울리면 어떠랴. 내일은 베이지핑크를, 모레는 단풍잎 같은 빨강을 바르면 된다.
 아니면 까짓 것, 깨끗이 지워버리면 된다.
 
링 귀걸이를 귀에 꽂는 순간, 문자메시지 도착음이 들려왔다.
 
“속은 갠찬으세여? 전 죽겠어여 ㅠㅠ 오늘도 홧팅하시고 주말쯤에 봐여-윤태오”
 
잊고 있었던 현실 감각이 벼락처럼 환기되어 찌르르 빗장뼈를 울렸다.
‘괜찮’이 아닌 ‘갠찬’이라니. ‘요’가 아닌 ‘여’의 압박은 어쩌란 말인가.
몰래 뀌는 방귀처럼 풀썩풀썩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답장 버튼을 누르려다 말고 손가락을 멈추었다.
그에게 답장을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
스스로와 내기를 하는 기분이다. 어느 쪽의 내가 이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선택을 하건 기나긴 어제에 드디어 끝났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아침 여덟 시. 출근 준비를 모두 마쳤다.
또다시 새날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별다를 바 없는 하루, 그러나 어제와 다른 하루.
현관 앞에 서서 잠시 주저하다가 굽 없는 갈색 스웨이드 단화에 발을 꿰었다.
이 구두는 오늘 나를 어떤 곳으로 데려다 줄까?
그 미지의 시간을 향하여 나는 용감한 척,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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