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74. 해방 그리고 비극 <종>

오늘의 쉼터 2017. 7. 11. 16:35

174. 해방 그리고 비극



내륙인 만주의 7월 중순은 폭염으로 끓고 있었다.

개들이 그늘에서도 혀를 빼물고 헐떡거렸고,

나뭇잎들마저 한낮에는 맥을 못쓰고 시들거렸다.

그 지글거리는 폭염을 헤치고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달려온

자동차 두 대가 지삼출네 마을 앞에 멈추었다.

포장 친 자동차 속에서 군인들 20여 명이 뛰어내렸다.

총을 든 그들은 2개조로 나뉘어 한 패는 마을로 뛰어들었고,

다른 한 패는 들로 흩어져 갔다.
마을로 들어선 군인들은 둘씩 짝을 지어 이 집, 저 집을 덮치기 시작했다.
지삼출의 집에도 군인이 들이닥쳤다.


"머시여!"


마당가 나무그늘에서 잠든 손자에게 부채질을 해주고 있던 지삼출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늙은 지삼출을 힐끗 쳐다본 두 군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워메, 놀래라. 사람 간 떨어지겄네!"


부엌에서 나오던 무주댁이 군인과 맞부딪치며 질겁을 해서 소리쳤다.
두 군인은 기민한 동작으로 집 안을 다 뒤지고 옆집으로 뛰어갔다.


"어째 또 저런다요?"


무주댁이 겁먹은 얼굴로 부산하게 남편 쪽으로 다가왔다.


"몰르겄네, 빌어묵을 놈덜."


지삼출은 혀를 차고는,


"딴 집에 가보소. 또 무신 연고로 저 지랄덜인지".


그의 찡그려진 얼굴에 불안한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누가 숨어든 것도 아니고 요상시러라."


무주댁이 치마말기를 추슬러올리며 잰 걸음질을 쳤다.
개가 짖어대고, 군인들의 외침이 터지고,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울리고,

마을은 금방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손들엇!"


"손 번쩍 들엇!"


군인들의 외침이 여기저기서 울리고 있었다.


"아이고, 저놈덜이 어쩔라고 남자덜얼 또 저리 싹 몰아댄다냐……"


허리가 약간 굽은 무주댁은 군인들이 하는 짓을 보며 허둥대고 있었다.

무주댁의 머리에도 세월의 눈이 하얗게 내려 있었다.
군인들은 늙은이와 어린아이들만 빼놓고 남자들을 무작정 내몰고 있었다.


"아이고메, 난리 나부렀소. 남자라고 생긴 것언 다 잡아가요."


무주댁은 숨을 할딱거리며 남편에게 말했다.


"머시여? 무신 일인고?"


지삼출이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름살 많고 머리 흰 외양에 비해 아직도 기력은 실해 보였다.


"또 군대 끌어갈라는 것 아니겄소?"


무주댁도 산전수전 다 겪어 눈치 빠르게 말했다.


"그렇겄제. 쌈에 판판이 진다는 소문이등마."


지삼출이 바지끈을 새로 조여 묶으며 눈썹이 꿈틀했다.
만주에는 조선에 비해 일본의 전황이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그건 중국공산당 지하공작원들을 통해서 퍼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관동군에서는 유언비어 유포죄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넣고 있었다.

그래도 일본이 질 거라는 소문은 끈질기게 나돌았다.

그리고 사오 개월 전부터는 중국에서 돈벌이를 하던 온갖 조선장사꾼들이

돈들을 챙겨가지고 압록강을 넘어가고 있다는 소문도 퍼지고 있었다.

큰비 올 것을 쥐들이 제일 먼저 알 듯 세상 판세 돌아가는 것은

장사꾼들이 제일 빨리 아는 법인데 그들이 괜히 압록강을 넘어가겠느냐는 말이

일본의 패망을 아주 설득력있게 설명하기도 했다.
무슨 죄를 진 것처럼 남자들이 두 손을 들어올리고 자동차 있는 데로 끌려나왔다.

군인들이 살벌한 기세로 그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들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도 두 팔을 든 채 논두렁에 한 줄로 서서 잡혀오고 있었다.
잡혀 나온 40여 명은 자동차 앞에 두 줄로 세워졌다.

동네사람 2백여 명이 반원을 그리며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군인들 10여 명은 잡혀온 사람들을 겨냥하고 있었고,

 다른 10여 명은 동네사람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지휘봉을 든 장교가 두 줄로 선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나가기 시작했다.


"너!"


장교가 지휘봉으로 가리키면 뒤따르는 군인이 그 사람을 잽싸게 끌어내 따로 세웠다.
햇볕은 쨍쨍 내려쬐고,  땅은 후끈후끈한 열기를 뿜어내고,

폭염으로 숨이 막히는 속에서 무거운 침묵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너!"


장교의 목소리만이 침묵을 쨍 울리고는 했다.


"너!"


"너!"


40여 명 중에서 지적당한 사람은 14명이었다.


"나머지 사람은 해산시켜."


장교의 명령에 따라 군인들은 14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그들은 나이가 많아 보이거나 어려 보이는 두 축이었다.


"에에 또, 여기에 뽑힌 14명은 영광스럽게도 대일본제국의 성전에

참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너희들은 모두 황은을 입은 이들을 열렬한 박수로 환송하도록!"


장교가 동네사람들을 향해 한 말이었다.


"아이고, 나는 마흔 셋이오. 우리 큰아들이 봄에 군대에 나갔소."


한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그 남자는 뼈대가 굵고 몸이 건장해 나이보다 다소 젊어 보였다.


"잔소리 마라!"


장교가 빠락 소리질렀다.


"저 사람 말이 맞으요.

나이도 마흔셋에다가,

큰아들이 군대에 나갔는디 아부지꺼정 나가는 것언 너무 과허요."


지삼출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닥쳐라! 이 늙은이."


장교가 눈을 부릅떴다.
무주댁이 뛰어나와 지삼출을 잡아끌었다.


"우리 아덜언 인자 열여섯밖에 안되았소."


한 여자가 뛰쳐나와 자기 아들을 붙들었다.

그 총각은 키가 클 뿐 어머니의 말마따나 얼굴에는 앳된 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뭣들 하느냐, 빨리 태워라!"


장교가 지휘봉으로 허공을 후려치며 외쳤다.
군인들이 우루루 달겨들어 14명을 총대로 밀어제켰다.

아들을 붙들었던 여자는  땅바닥에 나뒹굴어지고, 그들은 자동차로 떠밀려 올라갔다.
자동차 두 대는 곧 출발했다.

사람들은 그때서야 다른 자동차 한 대에도 어느 동네에서 끌려가는

사람들이 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이고 이 놈덜아, 이 놈덜아, 그 에린것얼……, 이 죽일 놈덜아……"


그 여자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멍하니 서 있었다.
끝이 안 보이게 넓은 벌판은 푹신하고 두툼한 질감으로 푸르렀고,

강렬한 햇살은 볏잎들에 부딪히며 들녘을 눈부시게 장식하고 있었다.

그 들녘 가운데로 넓게 뚫린 길을 따라 두 대의 자동차는

또 흙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나 지삼출은 큰아들도 군대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니, 머시여? 서, 선상도 군대로 끌어가?"


지삼출은 60리 길을 내달아온 큰며느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

큰아들은 소학교 선생만이 아니었다. 나이도 마흔하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약하고 특히 총에 겁이 많아 일찍이 독립군으로 나서지 못했던

큰아들이 군대생활을 어떻게 견뎌낼 것인지 앞이 암담하기만 했다.

그리고 큰아들 작은아들을 모두 일본군에 빼앗기자고 평생을 싸워온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심정은 너무 착잡했다.


"벨 수있냐, 요것이 조선사람덜 팔자다.

맘 강단지게 묵고 무사허니 돌아오기럴 기둘리자.

소문도 그렇고, 왜놈덜 허는 꼬라지럴 봐도 그렇고,

 이 놈덜이 망헐 날이 바로 눈앞으로 닥쳤응게."


지삼출은 큰며느리에게 힘주어 말했다.

그건 그저 위로의 말이 아니었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지삼출은 일본인 곧 망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왜놈덜이 망허기넌 망허겄소?"


무주댁이 옷고름에 눈물을 찍어내며 물었다.


"두고 보소, 절대로 금년 못 넴길 것잉게. 그간에 나가 점친 말 틀리는 것 봤능가?"


"아이고, 그리만 됨사 얼매나 좋겄소. 당신이 점친 말이야 열에 아홉언 맞었제라."


"큰아가, 아부님 말씸 믿고 기운 채리자 잉?"


무주댁은 큰며느리를 다둑거렸다.


"야아, 그리허겄구만요."


큰며느리가 머리를 조아렸다.
한편, 남만석네 집단부락에서도 다급한 징병이 실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쪽에서는 세대주를 제외한 그 자식들로 국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집단부락을 운영해야 했기 때문이다.

집단부락은 일본군이 전쟁을 수행하는데 아주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후방기지들이었던 것이다.

여름에는 군량미를 생산해 내고 겨울에는 연료를 생 새 내는 조직이니

아무리 형편이 급하더라도 그 조직을 파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요것이 무신 소리여? 어찌서 우리 아그덜이 왜놈군대럴 나가?"


"금매 말이여, 여그가 조선도 아니고 만주 아니여?"


"그렇제. 만주꺼정 와서 그 고상히갖고 키운 자석덜 아니라고."


"하먼, 요것언 말이 안되는 것이여.

즈그덜 좋자고 허는 쌈에 어째 우리 자석덜얼 끌어가."


"그려, 요것언 그냥 당헐 일이 아니여."


"하먼, 따질 것언 따져야제. 다른 일도 아니고 자석덜 일 아니여?"


"그렇제. 시상에서 질로 중헌 일이여."


집단부락 경비대장한테 징집통지를 받은 부모들은 쉽게 뜻을 모았다.

그러나 총을 들이댄 군인들 앞에서 그들은 따지고 어쩌고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동안 만주의 조선사람들은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징용이나 징병에 많이 끌려갔다.

일본의 선만일여 정책에 따라 만주의 조선사람들도 일본이 좋을 대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에는 징용이나 징병으로 끌어가려면 며칠 전에 통지서를 발부하는

최소한의 절차는 밟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징병은 그런 형식적 절차도 없이 총을 들이대고 마구잡이로 끌어가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만큼 사태가 급박해진 것이었다.

그건 제2차 세계대전의 상황변화 때문이었다. 2개월 전에 독일은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유럽전선에서 독일군을 도맡다시피 해서 승리를 이룩한 소련은 연합국 안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일본의 문제에 정면으로 대응할 수 있는 힘을 확보한 것이었다.

유럽전선에서 승리한 병력을 만주에 투입하면 일본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해 있었다.

이런 급박한 상황변화 앞에서 일본은 최대 위기를 느꼈다.

그동안 중국과 동남아 전선을 막느라고 병력을 빼돌려 관동군은 형편없이 허약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유럽전선에서 승리한 사기를 앞세우고 소련군이 소만국경을 돌파해 공격을 해오는 날에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 위기를 막아내기 위해서 관동군은 부랴부랴 병력 충당에 나선 것이었다.
지만복은 송화강 건너 하얼빈 외곽지역에 있는 훈련소로 끌려갔다.

폭염 속에서 실시되는 훈련은 하루 12시간을 넘었다.

낮이 긴 여름의 해가 뜨기 전에 시작된 훈련은 해가 지고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영웅 나폴레옹은 자기의 사전에는 불가능이 없다고 했다.

그건 바로 우리 관동군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 관동군에는 불가능이 없다.

훈병 여러분은 영예스러운 관동군으로서 지금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신화를 창조하고 있는 주인공들이다.

그 신화는 무엇인가? 1주일, 단 1주일만에 신병훈련을 완수하는 일이다.

영광스러운 황군, 무적의 관동군 용사로서 여러분은 대일본제국의 명예를 쌍견에 짊어지고 있다.

신화를 창조하라! 최선을 다하라! 관동군 용사에게 불가능은 없다!"


매일 아침 훈련교장에서 교관들이 핏대를 세우며 외쳐대는 소위 정훈교육이었다.
정말 신병훈련은 1주일간이었다.

겨우 7일 동안에 제식훈련, 사격훈련, 돌격훈련까지 하자니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강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폭염은 기승을 부리고, 먹는 것은 부실하고, 훈련은 강행되고,

훈련병들은 견디다 못해 퍽퍽 쓰러졌다.

그러나 쓰러지는 사람들에게 휴식이라고는 없었다.

정신력이 해이되었다 하여 조교들의 군홧발이 빗발칠 뿐이었다.

맞아죽지 않으려면 쓰러지지 말아야 했다.
지만복은 마흔이 넘은 나아에 낙오되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사나흘이 지나면서 죽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었던 것이다.

지만복은 자식들만을 생각했다.

그 어린것들 때문에도 개죽음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훈련병들 사이에 쉬쉬하면서 이상한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선생님, 혹시 그 소문 들으셨어요?"


같은 내무반에 있는 소학교 제자가 지만복에게 속삭였다.


"무슨 소문?"


지만복은 지친 눈으로 생기 도는 제자를 바라보았다.

제자는 이제 열여덟 살이었다.


"못 들으셨군요? 선생님 말입니다,

곧 쏘련군이 만주로 쳐들어온다는 겁니다."


제자는 더 목소리가 낮아졌다.


"뭐라구?"


지만복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처럼 반가운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쏘련군이 만주로 쳐들어오면 우리 조선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검게 빛나는 제자의 눈은 지만복에게 산수문제를 풀 듯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글쎄다……, 그게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지만복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덧셈과 뺄셈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말이야 좀 복잡한 문제다.

쏘련이 들어와 일본을 쳐부수면 우리 조선사람들에게는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지. 헌데 말이다,

곤란한 문제는 일본군이 되어 있는 우리 조선남자들이다.

우린 쏘련군에게 총을 쏘아야 하는 일본군이고, 쏘련군이 볼 때에는 우린 적군일 뿐이니 말이다."


지만복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선생님, 그건 간단하잖아요. 우린 총을 안 쏘면 되지요."


제자는 재빨리 말했고, 지만복은 제자를 딱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게 그런 뜻이 아니다.

 총을 쏘고, 안 쏘고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일본군이라는 게 문제란 말이다."


"선생님, 그건 하나도 걱정할 게 없어요.

쏘련군이 진짜로 쳐들어왔다하면 그때는 도망가면 되잖아요."


제자는 또 거침없이 말했다.


"너!"


지만복은 소스라치며 재빨리 주위를 살피고 제자를 응시했다.


"……그러면 안 되나요?"


제자는 계면쩍어하며 말을 어물거렸다.


"안 되는 게 아니라 큰일난다.

그런 생각으로 자칫 잘못했다가는 어떻게 되는지 아냐? 왜놈들 총에 총살당하기 쉽다.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를 말아라. 알겠느냐?"


"예에……"


"그냥 대답만 해선 안 돼. 경거망동했다가는 큰 변 당하면 어찌 되겠느냐.

이런 때일수록 진중해야 한다. 알겠지?"


지만복은 다시 다짐했다.


"예에……"


제자는 소학생처럼 풀이 죽었다.


"그리고 말이다, 그런 말 다시는 딴사람한테 꺼내서는 안 된다.

그런 말 한 것을 여기 교관이나 조교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

고이 살아남지 못한다. 알겠지?"


"예에……"


지만복은 불안한 속에서도 희망을 얻었다.

훈련을 이겨내기가 한결 수월했다.

소련군이 기왕 일본군을 치려면 하루라도 빨리 치기를 그는 고대하고 있었다.


"요새 아무런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유포시키고 있는 놈들이 있다.

그런 놈들은 적발 즉시 총살이다. 장병 여러분들은 추호도 현혹되지 말기를 바란다."



교관과 내무반장들이 열을 올려 협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유언비어가 어떤 것인지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걸 입에 올리면 모르고 있던 훈련병들까지 알게 될 거라는 염려 때문일 거였다.

그러나 그 유언비어가 어떤 것인지 모르는 훈련병은 하나도 없었다.
지만복은 가까스로 훈련을 견디어내고 기성 부대로 떠났다.

자동차들은 산이라고는 볼 수 없는 광막한 벌판을 달리기 시작했다.

차는 쉴 새 없이 덜컹거리며 요동 쳤고, 신병들은 포장 친 차 속의 찜통더위와 함께

끊임없이 조리질당하면서 기진맥진해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 강가에서 밥을 해먹을 때나 어느 들판에서 야영을 하게 될 때마다

다른 차를 타고 온 사람들에게 서로 묻고는 했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해가 저쪽에서 뜨니까 동쪽으로 가고 있는 건 틀림없지요?"


"그쪽이 동쪽이긴 한데, 차가 꼭 동쪽으로만 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요."


"어쨌거나 넓게 잡아 동쪽이면 쏘련 쪽이 맞지요?"


"그렇지요. 쏘련 쪽이지요."


그들은 어렴풋이 소만국경지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사흘 만에 부대에 도착했다.

지만복은 막사 안에 붙어 있는 달력을 보고서야 7월 24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튿날은 모처럼 휴식이었다.

그 하루 동안에 신병들은 부대에 대한 이런저런 소식들을 앞다투어 물어 날랐다.

소련 땅 하바로프스크가 한 2백 리쯤 떨어져 있다는 것,

고참병들 중에 조선사람은 별로 없다는 것,

부대 앞에 흘러가는 큰 강이 흑룡강이라는 것 등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무엇보다 놀란 것은 그 부대에서는 소련군이 쳐들어온다는 것이

전혀 비밀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전불사를 외치며 신병들의 사기를 북돋우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병들은 사기가 오르기는커녕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자신들의 능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총알받이 하려고 끌려온 것이구나!……"


지만복은 참담한 심정으로 이 생각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었다.

 직업도 나이도 불문하고 징집을 했을 때부터 관동군이 얼마나 위기에 몰려 있는지는 짐작했었다.

그런데 7일간의 속성훈련에다가,

그런 엉터리훈련을 받은 조작군인을 최전방인 국경부대에 배치하는 것을 보면

관동군의 위기는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도망가면 되잖아요.'


어린 제자의 말이 떠올랐다.
지만복은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고 싶었다.

일본을 위해서 소련군에게 총을 한 방이라도 쏠 이유가 없었고,

이런 속 빈 군대에 있다가 개죽음당하는 것은 너무 뻔한 일이었던 것이다.


"미리 경고한다. 너희들 중에 혹시라도 탈주를 도모하는 자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일찌감치 버려라. 여기서부터 신경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해서 만주의 절반인 동부 전역에 헌병대 조직망이 거미줄처럼 쳐져 있다.

제아무리 영리하고 날쌘 놈이라고 하더라도 부대 밖 이삼십 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체포된다.

다 알다시피 전시하의 도망병은 무조건 사살이다. 비겁한 짓으로 더럽게 죽지 말고,

황군으로서 충성을 다하라!"


대대장이 신병환영사에 덧붙인 말이었다.
속이 빈 군대인 것처럼 그 말도 터무니없는 공갈협박인지도 몰랐다.

그럴 가능성은 다분했지만 그러나 이 국경에서부터 길림까지는 너무나 까마득하게 멀었다.

아무런 경계나 조사가 없어도 걸어서 가기에는 몇 달이 걸릴 수천리 길이었다.

지만복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암담한 심정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루를 쉰 이튿날부터 신병들은 총 대신 삽과 곡괭이를 들었다.

그들은 참호파기에 동원된 것이었다.


"이건 단순히 방어선이 아니다. 너희들 개개인의 목숨을 지킬 생명선이다.

최단시간 내에 최장의 거리를 파도록 최선을 다하라!"


키가 작으면서도 독기가 성성한 중대장이 쇳소리를 내며 외친 말이었다.


"미친놈들, 말은 그저 뻔질나게 잘 내뱉는군.

밥은 그저 배가 고파 허리를 펼 수 없도록 주면서도

뭐, 최단시간 내에 최장의 거리를 파도록 최선을 다하라?"


지만복은 쓰게 웃었다. 어렸을 때 배가 많이 고팠었지만

나이 들고 나서 이처럼 배가 고프기는 처음이었다.

 양이 너무 적어 그야말로 수저를 놓으며 배가 고팠다.

젊은 사람들은 그저 '아이고, 배고파 죽겠네'를 훈련소에서부터 입에 달고 살았다.

기성 부대에 오면 좀 나아지려나 했던 꿈은 사라진 것이었다.

일본군은 군인만 모자라는 것이 아니라 식량도 모자라는 것이 분명했다.

지만복은 초라한 일본군의 허상을 쓴웃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참호는 서서 총을 쏠 수 있는 깊이와 두 사람이 왕래할 수 있는 넓이로 파야 했다.

그런데 참호파기는 하루이틀로 끝나지 않았다.

소대별로 독립된 그 작업은 1차방어선이 끝나면 2차방어선으로 이어지고,

 2차방어선이 구축되면 3차방어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3차 방어선이 거의 완성되어 가고 있는 어느 날이었다.


쿵! 꽝! 쿵쾅!


난데없는 폭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쏘련군이다, 쏘련군!"


웨에엥엥엥……


폭음과 싸이렌소리가 뒤엉키고, 군인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뛰고,

부대마다 일대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소련군이 8월 8일을 기하여 일본에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소만국경 전역에 걸쳐서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그런대 조선·중국·소련 세 나라의 국경이 맞닿고 있는 두만강 하류의 핫산 일대에서는

소련군이 당일로 두만강을 넘어 함경북도로 진격해 들어왔던 것이다.

'무적의 관동'> 못지않게 '귀신도 잡는 국경수비대'라고 뽐내던 그들이

전쟁개시 단 몇 시간 만에 무너지고 만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드넓은 전선에 걸쳐 장기전을 수행하느라고 일본군이

얼마나 허약해져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쿵! 콰당탕탕! 콰광!


소련군의 탱크들이 가로로 일직선을 이루어 진격해 오며 불을 뿜어대고 있었다.


"기관총! 기관총을 난사하라!"


소대장이 허둥거리며 목이 터지고 있었다.


따다다다다……


지만복네 소대의 기관총들이 숨이 넘어가고 있었다.


쿵! 쿵쾅! 콰당탕!


기관총 사격에 탱크들은 끄떡도 하지 않고 밀려들고 있었다.

그건 마치 코끼리 떼에게 콩알을 던지는 격이었다.


"수류탄, 수류탄 투척! 수류탄 투척!"


소대장이 갈팡질팡하며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지만복네 소대의 고참병들이 수류탄을 던지기 시작했다.

신병들은 소총밖에는 가진 것이 없었다.


쿵쾅쾅쾅! 콰당탕탕탕!……


수류탄의 폭음음 흔적도 없고, 탱크들은 더 거세게 불을 뿜어대며 몰려오고 있었다.

코끼리 떼에게 돌을 던져 코끼리 떼를 성나게 한 꼴이었다.


"소대, 제2선으로 후퇴하라! 제2선으로 후퇴하라!"


소대장이 허겁지겁하며 목소리가 찢어지고 있었다.
지만복네 소대원들은 허둥지둥 참호를 벗어나 제2방어선으로 내뛰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제3방어선에서마저 밀려나게 되기까지 하루 반이 걸렸다.

13일 동안 죽을 힘을 다해 팠던 세 개의 방어선은 단 하루 반 만에 다 무너진 것이다.


"소대, 후퇴! 후퇴!"


지만복네 소대원들은 무작정 벌판을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탱크들이 그들을 앞질러버렸다.

그들을 앞지른 탱크들은 그들을 향해 대가리를 돌렸다.


"와아, 와아!"


그들의 뒤에서는 소련군이 함성을 지르며 쫓아오고 있었다.

그들은 완전히 포위당한 것이었다.

그들은 총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지만복네 중대원 삼분의 일 정도가 죽고 나머지는 다 포로가 되었다.

신병들은 총 한번 제대로 쏘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소만국경의 관동군들은 그 어느 부대나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조선으로 진격한 소련군은 이틀 만인 8월 10일에 웅기를 점령했고,

12일에는 나진과 청진을 점령하고 있었다.
지만복은 포로가 된 중대원들과 함께 집과는 반대쪽인 아무르강(흑룡강)을 건너가고 있었다.

조선사람들과 지만복은 소련 땅을 밟으며 집들이 있는 동쪽하늘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았다.

높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무심히 떠가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남만석네 집단부락에서는 뜻밖의 외침에 놀라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왜놈덜이 다 없어졌다! 왜놈덜이 다 도망갔다아!"


어떤 사람이 이쪽 마당, 저쪽 마당으로 팔을 휘젓고 뛰며 마치 울부짖듯이 외쳐대고 있었다.


"머, 머시라고?"


"무신 소리여? 저것이 무신 소리여?"


"왜, 왜놈덜이 도망얼 가?"


집집마다 사람들이 뛰쳐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우루루 사무실로 몰려갔다.

사무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일본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만주경찰들도 없었다.

그들은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흩어진 책상위에 총 서너 자루가 나뒹굴어져 있었다.


"밤새 다 도망갔구마."


"어쩐 일이까?"


"어쩐 일이기넌. 전쟁에 진 것이제."


"글먼 우리도 고향 가야 되겄네."


"하먼, 가야제."


"와아, 인자 살았다."


그들은 마당으로 나왔다.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마당으로 나와 있었다.

동이 트고 있었다.

아침햇살이 그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들은 말을 잊고 있었다.


"우리도 얼렁 고향 찾어가자아!"


누군가가 힘차게 외쳐댔다.


"와아-"


아이들까지도 모두 팔을 뻗쳐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저그 창고에 곡식이 있을 것이여. 그것보톰 노놔갖고 짐얼 싸야제."


"그려, 그래야 노자도 맨글제."


"자아, 여자덜허고 아그덜언 물러스거라."


남자들은 길 떠날 채비를 착착 서두르기 시작했다.
창고의 곡식을 풀어 식구 수에 따라 배급을 시작했다.

내일 떠나기로 하고 여자들은 짐싸기를 서둘렀다.
곡식 배급은 오후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참으로 오랜만에 집집마다 밥을 푸짐하게 지었다.

배가 불거지도록 밥을 많이 먹은 사내아이들은 마당에 나와 옷을 걷어 올리며

서로 배 크기를 자랑했다.
이튿날 아침에 남자들은 자식이 군대에 끌려간 집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의논했다.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지만 결국 다 같이 떠나기로 했다.

다 고향을 찾아올 수 있는 나이이니 떠날 때 같이 떠나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그들은 점심까지 싸가지고 길을 떠났다.

여자고 남자고 힘닿는 데까지 짐들을 이고 지고 있었다.

1백 가구 6백여 명의 행렬은 꽤나 길었다.
그들이 한 20리쯤 걸었을 즈음이었다.

저 왼쪽에서 사람들이 떼지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무슨 소리를 외치며 달려오고 있었는데 손에는 무슨 연장 같은 것들을 들고 있었다.


"저것이 머시여?"


"글씨, 요상헌디?"


"우리헌트로 쫓아오고 있는 것 아니여?"


"잉, 그런 기색인디."


불안스러운 말들이 오가면서 그들의 발걸음은 자연히 멈추어졌다.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외침도 좀더 분명하게 들렸다.

그건 중국말들이었고, 그들의 손에 들린 것들은 여러 가지 연장이었다.


"뙤놈덜이 우리 해꼬지헐라고 오네!"


"그려, 왜놈덜 도망간 것 알고  땅 뺏긴 원한 갚을라고 오는겨."


"맞구마. 요 일얼 으쩌제?"


"큰탈났구만."


"벨 수 없소. 싸와야제."


"무신 수로. 우리넌 맨주먹인디."


"근다고 앉아서 처자석꺼정 다 죽일라요?"


"그려, 처자석덜언 살려야제."


"다덜 짐 내려!"


여자고 남자고 다 짐들을 내렸다.


"우리가 저놈덜얼 맡을 것잉게 여자덜언 새끼덜 델꼬 저짝으로 내빼."


나이 제일 많은 남자가 서쪽을 가리켰다.

모두의 눈길이 그쪽으로 쏠렸다.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는 중국사람들과는 반대쪽,

그쪽에는 망망한 광야가 펼쳐져 있었다.


"일본놈 주구들을 쳐죽여라!"


"주구들을 몰살시켜라!"


중국사람들의 외침이 확실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들이 손에 손에 든 연장이 도끼 낫 쇠스랑 같은 것들인 것도 뚜렷하게 보였다.


"멋덜 허능겨. 얼렁 가!"


나이 많은 사람이 발로  땅을 구르며 소리쳤다.


남자들은 자기 아내와 자식들의 등을 떠밀었다.


"죽기 살기로 내빼야 혀. 저놈덜이 따라오지 못허게."


나이 많은 사람이 목 터지게 소리 질렀다.

여자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와아, 주구놈들 죽여라아!"


중국사람들이 100여 미터도 못되게 가까워져 있었다.


"돌이고 머시고 다 집어 들어!"


나이 많은 사람의 명령에 따라 백여 명의 남자들이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다 죽여라!"


"깨끗하게 원수를 갚아라!


중국사람들이 연장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달겨 들었다.

그들은 중국사람들과 얼크러졌다.


"으악!"


"어이쿠메!"


처절한 비명 속에 피가 튀는 난투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싸움은 쉽사리 끝나지 않고 있었다.

조선사람들이 피를 흘리면서도 중국사람들에게 덤벼들고 또 덤벼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중국사람의 연장을 뺏어 싸우기도 했다.
여자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광막한 벌판 저쪽으로 기를 쓰며 도망가고 있었다.
그들은 압록강과 두만강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남자들이 거의 다 쓰러져 갈 즈음 여자들과 아이들의 모습은

끝없는 광야 저쪽에 점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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