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72. 신새벽

오늘의 쉼터 2017. 7. 11. 16:32

172. 신새벽



아흔아홉 골짜기를 거느린 지리산 준령에도 봄이 오고 있었다.

한 발 늦은 봄이었지만 4월의 양광은 지리산 준령에 쌓였던 눈을 다 녹이고,

골짜기 골짜기의 응달에 숨은 눈까지 녹이면서 나무마다 풀마다 새 움을 틔워내고 있었다.

웅장하고 장엄한 자태의 지리산은 우아하고 환상적인 유록색 비단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백설로 치장했을 때의 지리산은 위엄이 충만했고, 이제 싱그러운 유록색이 번지고 있는

지리산은 자애스러웠다.

산 높고 골 깊으되 그 준령 또한 몇 십리에 뻗치며 산맥을 이루어내고 수많은 골짜기를 거느렸으니

누구나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며 감탄하는 산, 그것이 지리산이었다.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에 '지리산의 도령들' 소문이 퍼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그 소문은 가지가지였다.

독립군으로 나서기 위해 훈련을 하고 있다고도 했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도를 닦고 있다고도 했고,

왜놈들 총에 이길 수 있는 무술을 연마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 소문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지리산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그냥 '청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도령들'이라고 높여 부르는 것에서

그들의 하는 일을 장하게 생각하고 있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여러 가지 소문들과 달리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만은

어느 사람의 말이나 다 똑같이 일치하고 있었다.

그들이 학병으로 끌려가기를 거부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수가 몇 명인가 하는 것은 또 구구각색이었다.

2백 명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3백 명이라는 사람도 있었고, 4백 명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소문을 경찰서에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 어느 곳 경찰도 그들을 잡으려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는 말이 없었다.

사람들은 그 까닭을 너무나 잘 알았다.

경찰들이 수백 명 지리산으로 들어가 보았자 지리산이 워낙 높고 크고 넓어

도령들을 잡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경찰들이 꼼짝을 못하는 그 사실이 통쾌해 '지리산 도령들'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학병을 피해 지리산에 들어온 학생들은 화전민들의 거처를 따라 여러 골짜기에 분서되어 있었다.

화전민들의 거처 가까이에 자리 잡은 것은 화전민들의 덕을 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화전민들이 살고 있는 곳은 산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지혜를 배워 학생들은 움막을 쳤다.

그리고 화전민들과 인간관계를 돈독히 하면서 그들의 의식을 깨우쳐나가려는 것이었다.

또한 화전민들은 가끔씩 산 아래로 왕래하기 때문에 바깥소식을 들을 수 있는 통로였다.
송준혁은 피아골에 있었다.

피아골의 양달에는 작은 산꽃들이 피어나고 나무들의 실가지마다 연초록의 새잎들이

마치 신비스러운 기적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송준혁의 동료들은 산밭을 파 엎다가 일손을 잠시 쉬고 있었다.

밭두렁에 둘러앉은 그들은 여섯이었다.

모두 10명이었는데 넷은 그 어딘가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그들은 24시간 번갈아 가며 보초를 서는 생활을 입산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었다.

그들은 또 다른 군대생활을 하는 셈이었다.


"선생님이 오실 때가 되지 않았나?"


누군가가 담배연기를 날리며 말했다.


"글쎄, 선생님이야 아무 예고도 없으신 분이니까."


그들이 말하는 선생님이란 이현상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요새 전황은 어찌 돼 가는지 모르겠군."



"태평양 섬들을 다 뺏긴 지가 작년 말이니

지금쯤 동남아세도 거의 다 뺏겨가는 것 아닐까."


"아마 그러기가 쉬울 거야. 일본은 이제 풍전등화야.

국민학교 4학년까지 근로동원을 시키고 있으니

그게 최후의 발악이고 단말마의 비명이 아니고 뭐겠어."


"참, 그 평양사단에서 검거된 학생들은 어찌 됐을까?"


"글쎄, 중형을 받게 되겠지."


"그 사람들도 우리처럼 미리 대처했어야 하는데."


"그러게 말야. 거긴 학생들을 이끌 지하조직이 없었던 모양이야."


"아니야. 있었어도 선생님 같은 탁견을 가진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몰라.

우리도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그 학생들 같은 신세가 됐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지도자란 필요한 거지."


"그렇지. 어쨌거나 그 학생들이 안 됐어."


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작년 12월에 일어난 평양사단 사건이었다.

그건 다름아니라 평양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학도병들이 훈련소를 탈출하여

항일게릴라전을 전개하려고 계획했다가 발각되어 70여 명이 검거되었던 것이다.

그 사건이 세상에 던진 충격은 대단했다.

남자들은 징용, 징병, 학병으로 무차별 끌려가고, 여자들마저 정신대로 끌려가고,

국민학교 4학년 이상은 근로동원에 끌어내면서 일제의 탄압은 극에 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이 무장게릴라전을 계획했다는 것은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는 조선사람들을

고무시킨 한줄기 빛이었던 것이다.


휘이 휙!


북쪽 등성이에서 날카로운 휘파람소리가 울렸다.

얼핏 들으면 무슨 새소리 같았지만 그건 선요원을 통과시켰다는 보초의 신호였다.

여섯 사람의 눈길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또 무슨 좋은 소식이 있나?"


한 사람이 급하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틀림없이 좋은 소식이 있겠지."


다른 사람도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하나 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 저기 오는군."


한 사람이 커다란 바위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람은 재빠른 동작으로 산비탈을 타 내리고 있었다.


"아, 어서 오시오."


이쪽에서 높인 목소리로 반겼고


"아, 안녕들 하시오."


선요원이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저 기분 좋은 기색을 보니까 좋은 소식이 있는 것 같은데."


"맞어, 그런 것 같아."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화색이 돌았다.


"동지들, 아주 대특보요, 대특보!"


선요원이 그들과 악수를 나누며 부풀어 오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소. 그게 뭐요?"


"예, 너무 놀라지들 마세요.

마침내 며칠 전에 미군이 오키나와 상륙에 성공했소!"


"와아아-"


그들은 두 팔을 뻗쳐올리며 환성을 터뜨렸다.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 그것은 두 달 전에 있었던

마닐라 탈환과 이오섬(유황도) 상륙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미군의 마닐라 탈환과 이오섬 상륙은 동남아 전세의 변화로

일본의 부분적 패배에 불과했지만 오키나와 상륙은

바로 일본영토의 상륙으로 일본의 전면적 패배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럼 일본본토 상륙도 얼마 안 남은 것 아닙니까?"


"글쎄요, 그건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를 문제지요.

왜냐하면 이번 오키나와 상륙도 3개월이나 걸렸으니까요.

섬 주민 전체를 총동원해 저항을 꾀했기 때문입니다."


"아니, 주민들까지 전쟁터로 내몰았단 말입니까?"


"예, 주민들을 총알받이로 써먹은 것인데, 그거 왜놈들답지 않습니까.

그놈들이 좋아하는 소위 사무라이식 말입니다."


"야비한 놈들 같으니라니."


그들이 지리산 속에 있으면서도 나라 밖에서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까지

샅샅이 알고 있는 것은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청취하고 잇기 때문이었다.

그 소식은 이렇게 선요원들을 통해서 각 조직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오키나와를 점령한 위기 속에서 일제가 일억총옥쇄라는

 새로운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는 것을 학생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일억총쇄란 일본과 천황에게 충성을 다바쳐 일본사람 7천만과

조선사람 3천만은 다 같이 깨끗하게 죽자! 하는 뜻이었다.

그건 패전의 위기에 직면한 일제가 발악적으로 내세운 집단자살의 구호였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총독부가 조작하고 있는 승전의 보도에 취해

일본이 조선을 2백 년 동안 지배할 거라는 사실을 굳게 믿으며 일억총쇄를

여기저기서 열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큰 소식이 있습니다.

히틀러가 자살했습니다."


"예?"


"아니, 히틀러가?"


"그럼 독일은 완전 패배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요. 그쪽 전쟁은 다 끝난 거지요."


"그럼 일본의 패배는 정말 목전에 와 있습니다.

그쪽의 병력이 이쪽으로 대거 투입되면 일본이 무슨 수로 견디겠어요."


"그렇지요. 금년 안에 결판이 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힘냅시다."


"예, 힘냅시다."


그들은 목소리를 합쳤다.


"이건 교잽니다."


선요원이 배낭에서 등사물 한 뭉치를 꺼냈다.
선요원은 인사를 마치기 바쁘게 돌아섰다.

그들은 가슴이 울렁이는 감정 속에서 다음 조직을 향해

순식간에 등성이를 넘어가는 선요원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리산에 분산되어 있는 학생조직은 10명을 단위로 하고 있었다.

산속에서 많은 수가 집단적으로 거처할 만한 장소가 마 땅치 않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피해를 최소화하고 기동력을 살리자는 것이었다.

그 10명씩의 조직을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 선요원들이었다.

선요원들은 두 가지로 구분되었다. 본부 선요원과 소대 선요원이었다.

선요원들은 지역을 분할해서 각 소대에다 본부의 지시와 긴급사항 같은 것을 수시로 전하고,

정규적으로 사상교재를 배달했다.

그리고 소대 선요원들은 소대와 소대 사이의 연락만을 맡았다.
각 소대원들이 가장 중요하게 실시하고 있는 것이 사상학습이었다.

그건 물론 사회주의 사상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학습하고 토론하는 그런 날들이 쌓이면서

그들은 사회주의자로 변모하고 강화되어 나아가고 있었다.

바로 송준혁이 그런 전형적인 예였다.

그는 농과를 전공하면서 막연한 독립의식만 가지고 있었지

사회주의 사상은 본격적으로 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리산 생활을 통해서 그는 견고한 사회주의자로 단련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이 두 번 째로 중시하는 것이 체력단련이었다.

그들은 날마다 기본적인 운동과 노동을 중시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골짜기를 치올라 준령까지 등산을 했다.

어느 소대나 준령에 오르면 천왕봉에서부터 노고단에 이르는 지리산 연봉들을 관망할 수가 있었다.

가까이로는 백운산에서부터 멀리로는 수십리 밖까지 바라볼 수가 있었다.

가까이로는 백운산에서부터 멀리로는 덕유산까지, 그리고 그 아랫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조국을, 독립을, 인민을 생각하고는 했다.

그 등산은 단순히 체력단련만이 아니라 평소의 학습을 반추하고 음미하며

의식을 강화시키는 기회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세 번 째로 열성을 바치고 있는 일은 농사짓기였다.

자급자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조직의 운영비를 절감하자는 노력이었다.

산속서 그들의 능력으로 자급자족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고,

자금조달의 어려움을 다소라도 해결하자는 자구책이었다.

그들은 화전민들을 스승으로 받들며 농사를 지어 식량의 반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인민적 삶을 체득하는 것도 하나의 목적이었다.

거의가 농사를 지은바 없는 그들로서는 농사짓기를 통해서 이론과 현실을 일치시키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의 생활규범과 질서를 제시하고 지도하는 총책은 이현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현상을 자주 볼 수 없었다.

그는 서너 달에 한번 정도로 나타났는데 그때마다 옷차림은 달랐다.

 변장을 하고 아랫세상을 다니다가 돌아온 모습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깨닫게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민족은 반드시 해방됩니다.

일제는 지금 망해 가고 있습니다.

이건 악한 자는 하늘의 벌을 받는다는 식의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객관적인 사실의 진행 속에서 일제의 패망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해방의 그날에 대비하기 위해 오늘을 성심껏 살며 분투해야 합니다. "


그가 학생들에게 하는 말은 이런 정도로 짧았다.

그들은 산밭에 고구마를 심고, 옥수수와 조도 뿌렸다. 텃밭에는 상추와 아욱 같은 것도 뿌렸다.

그리고 산나물도 많이 뜯어 무쳐먹고 응달에 말렸다.

화사하면서도 서러운 꽃 진달래가 무리지어 피었다 꽃송이째로 떨어져 지면서 4월이 지나갔다.

철쭉이 피어나기가 아직 일러 5월을 기다리고 지리산은 유록색 만발한 속에 차츰 초록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아무런 예고 없이 그들 앞에 이현상이 나타났다.

선요원과 또 한명이 수행하고 있었다.


"동지들, 수고가 많소."


이현상은 학생들의 손을 일일이 잡으며 악수했다.

송준혁은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할아버지가 이분 같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왜 이분같이 하지 않는 것일까도 연달아 생각했다.

폐병 때문에 아버지는 사실상 운동을 중단한 것 같은데,

지금 옥고를 치르고 있으니 문제였다.
"여러분, 기쁜 소식을 기다립니다.

지난달부터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 소개가 실시되고 있습니다.

미군기의 폭격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사흘전인 5월2일에 영국군이 미얀마 랑군을 점령했습니다.

이로써 일제는 작년부터 본토를 폭격당하는 동시에 이제 동남아 전선에서는

동으로부터 미군에게, 서로부터 영국군에게, 북으로는 중국군에게 대협공을 당하는

최악의 사태에 빠졌습니다."


본부 요원의 말이었다.
그들은 일제히 반색을 하면서도 다른 때와 같이 환성을 지르지는 않았다.

이현상 앞이었던 것이다.


"동지들, 이제 일제는 패망했습니다.

다만 항복의 절차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각오로 새 출발에 임해 주기 바랍니다."


이현상은 이 말을 남기고 유록색 아기잎들이 햇살이 반짝이는 봄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저것 좀 봐!"


누군가의 말에 그들은 모두 고개를 하늘로 젖혔다.

아지랑이 기운 아른거리는 하늘 저 높이 새하얀 비행운을 남기며 반짝거리는

 점으로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최근에 부쩍 자주 나타나기 시작한 B29였다.

그들은 언제까지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지선가 소쩍새가 구슬프고 애절하게 봄 한나절을 울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쌀을 내놔!"


사내는 고약하게 치뜬 눈으로 홍 씨를 꼬나보았다.

다른 일본사내는 어슬렁거리며 집 안을 살피고 있었다.


"및번이나 말해야 혀요. 없소."


홍 씨는 싸늘하게 내쳤다.


"다 알고 왔다니까. 집을 뒤져야 알겠어!"


"맘대로 허시오. 만일에 뒤져서 안 나오먼 어쩔라요?"


마루에서 사내를 내려다보는 홍 씨의 매운 눈길에 싸늘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뭐야? 건방지게 말이 많아. 기우찌 상, 말로 안되 겠소, 뒤집시다."


사내가 일본사내에게 말했다.


"당연하지 처음부터 뒤졌어야지. 쌀 감춘 불령선인둘이 말로 해서 내놓는 것봤소?"


일본사내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하는 말이었다.

두 사내는 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홍 씨는 까딱도 안하고 꼿꼿이 서 있었고,

늙은 머슴은 헛간 그늘에 쪼그리고 앉아 곰방대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머슴도 오래 전부터 젊은 사람이 없어 늙은 사람을 쓸 수밖에 없었다.

역시 농사일은 기운이 밑천이라 소출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작년 6월부터 미곡강제공출제가 실시되면서 농사지은 쌀을 빼앗기고

배급을 타먹는 꼴로 변했던 것이다.

지금 집뒤짐을 하고 있는 두 사내는 미곡공출과 배급을 맡고 있는 식량영단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작농인 경우에 그런 집뒤짐을 당하는 것은 예사가 되어 있었다.

아들 동걸이 때문에 줄곧 주목을 받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자작농들은 공출로 빼앗기는 것이 억울해 쌀을 숨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출가격이라는 것이 총독부에서 일방적으로 책정한

형편없는 헐값인데다가 그 돈마저 온갖 잡부금과 강제저축으로 공제해 버려

사실상 그냥 빼앗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홍 씨는 쌀을 감추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들키는 날에는 아들의 문제까지 덧날까봐서였다.

그저 금예네에게 몇 말 주어 아이에게 먹이도록 했다.

두 사내는 집뒤짐에 이골이 나서 장독대, 헛간 잿더미,

똥장군 속까지 살피고, 담 밑까지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숨긴 일이 없으니 니오는 게 있을 리 없었다.


"하, 숨겨도 아주 단단히 숨겼구만."


사내가 손바닥을 털며 떫은 입맛을 다셨다.


"이거 이상하지 않소. 다른 장소 어디다 빼돌린 것 아니오?"


일본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홍 씨는 방으로 들어가며 방문을 쾅 닫아버렸다.


"갑시다. 제보가 잘못된 것 같소."


사내가 앞서 대문 쪽으로 돌아섰다.


"글쎄, 별로 부자 같지도 않은데.

쌀을 숨겼더라도 이런 집에 5월까지 남아 있을 리도 없고……"


일본사내가 혀를 차며 뒤따랐다.


"에이이, 못된 놈. 징용 징병에 안 끌려갈라고 뒷돈 써감서

그 자리 한나 얻어내서 허고 댕기는 짓이라고넌…… 에이이, 쯧쯧쯧……

저것이 어디 양반집 자석이고 배왔다는 놈이여, 저거……"


늙은 머슴이 혀를 차대며 곰방대를 돌에다 마구 두들기고 있었다.

식량영단이라는 데 취직을 해서 공출에 나서고 배급 주는 일을 하고 있는

30대의 조선사내들은 전부가 징용을 피해 사회적 배경과 돈으로

그 자리를 차지한 신종 친일파들이었다.

그들은 공출원과 배급원의 일만이 아니라 수색원의 일까지 하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할아부지, 쟁기질 안 나가요?"


물동이를 이고 들어오던 부엌데기 처녀가 머슴에게 물었다.


"아이고, 이 놈의 시상 농사지서 머허겄냐.  땅얼 그냥 놀리는 것이 낮제."


머슴이 더디게 몸을 일으켰다.


"음마, 경찰서에 잽혀갈 소리만 골라감서 허시오. 잉."


처녀가 부엌으로 들어가서 통을 놓았다.


"야아야, 사정을 몰르면 말얼 말어라. 사람 속터져 죽겄응게."


머슴이 혀끝이 떨어질 정도로 세차게 혀를 찼다.


"아니, 무신 일 있었소?"


처녀가 앞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며 부엌에서 나왔다.


"그려, 난리가 났제"


"무신 난리라?"


처녀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안방 쪽을 재빨리 살폈다.


"식량영단인지 개콧구녕인지 허는 놈덜이 왔다."


"아니, 그 잡것덜이 왜 우리 집얼 와라. 가실허는 것도 아닌디."


"에이, 벽창호시."


"무신 소린게라?"


"집 뒤지로 왔당게."


"쌀 숨킸다고라?"


"삼천리 돌아 인자 아네."


"그래 어찌 됐소?"


"어찌 되았겄어?"


"숨킨 것디 없덜 않은게라?"


"그려, 헛탕쳤제."


"염병헐 놈덜, 개지랄도 에진간히 허고 댕기네."


처녀가 대문 쪽에다 침을 내뱉었다.


"인자 나 맘 알겄어?"


"야야, 저 잡것덜 꼬라지 뵈기 싫어 실은 다  땅 엎어놓고 농새 안지어야 하요."


"그려, 그려 인자 옳은 말 허능구마 말이라도 그리혀야 속이 풀리제. "


머슴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어줍게 웃었다.

그런데 사실 농사를 짓지 않고 놀리는 논들이 있었다.

관청에서는 식량증산을 외쳐대고 있었지만

그 반대로 놀리는 논들은 이 삼년사이에 부쩍 늘어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건 대지주들의 논으로 소작인들을 구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작인들을 징용과 징병으로 엄청나게 끌어갔기 때문이다.

총독부에서는 1944년에 농사를 짓지 못하고 놀리는 논을 50여만 정보로 집계할 정도였다.
그러나 식량의 감소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농사를 짓고 있는 논들도

노인들이나 여자들이 소작살이를 하는 판이라 소출이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 공출 실시로 지주들은 전처럼 소작인들을 닦달하지 않았고,

자작농들도 농사에 열성을 바치지 않았다. 또한 쌀을 감추는 것도 식량 감소의 한몫을 거들었다.

이렇듯 이중 삼중의 원인이 겹쳐져 식량 감소는 심해지고, 그럴수록 총독부에서는

공출할당량을 높이고, 악순환을 계속되면서 식량영단의 횡포는 극심해지고 있었다.
총독부에서는 공출실시와 함께 미곡의 유통을 일체 금지시켰다.

크고 작은 쌀장수들이 일제히 문을 닫고 역마다 경찰들이 나서서 승객들의 짐을

일일이 조사하는 사태가 벌이지고 있었다.

중학생 이상의 승객들이 가지고 있는 짐들을 전부 수색해서 곡물이 나오면 무조건 압수하는 것이었다. 일본농촌의 식량 감소도 조선 농촌의 경우와 마찬가지여서 일제는 군량미 조달마저

궁지에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 그러고 송진 받고 칡넝쿨 걷는 것 어찌 되았능게라. 곧 걷으러 올 것인디요."


처녀가 걱정스레 머슴을 쳐다보았다.


"아이고 썩을놈에 것, 나도 몰르겄다."


머슴이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메, 그러먼 어짤라고 그요? 당허기넌 아짐씨가 당헐 것인디."


처녀가 펄쩍 뛰며 안방 쪽을 흘깃 살폈다.


"요런 오살헐 놈덜이 온갖 잡것덜얼 공출허라고 지랄발광이니

농새도 심이 부차는 판에 사람이 어찌 살겄냐. 니가 어찌 잠 히봐라."


"음마, 나라고 노는지 아요. 아주까리씨 뿌래야제, 삼씨에 목화씨 뿌래야제,

나도 공출허니라고 팔자에 없는 농새꾼 일꺼정 허는 것 몰라서 그러요?"


처녀가 당차게 공박을 해댔다.


"빌어묵을 놈덜이 인자 똥도 공출허라고 헐 것이다.

에잇, 천하에 몹쓸 개종자덜 겉으니라고."


머슴은 침을 내뱉으며 지게를 지고 낫을 들었다.


"어디 가요?"


"칡넝쿨인지 왜놈덜 할애빈지 걷으로 가제 어디 가야."


늙은 머슴은 벌컥 쏴지르며 밖으로 나갔다.
총독부가 실시하고 있는 공출은 쌀만이 아니었다.

놋그릇들을 제일 먼저 공출하기 시작해서 해가 갈수록 공출의 종류가 불어나

작년에는 콩·조·수수 같은 잡곡을 비롯해서 목화·아주까리·삼줄·채소·칡넝쿨·송진·솔가지 등

그 종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그런 것들을 집집마다 할당했기 때문에 여자들은 텃밭 한쪽이나 울타리가를 따라

목화·아주까리·삼씨 같은 것들을 따로 뿌려 농사 아닌 농사를 지어야 했다.

사람들은 그런 잡일에 시달리며 왜 그런 것들이 전쟁에 필요한지를 의아해했다.
홍 씨네 머슴은 수심 깊은 타령을 느리게 흥얼거리며 산으로 오르고 있었다.

입성 남루하고 핼쑥하게 마른 계집애들이 쑥을 뜯고 있었다.

보릿고개의 굶주림이 극에 달한 판에 죽거리는 쑥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그 김샌 아니여?"


홍 씨네 머슴이 저쪽에서 낫질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누구여? 잉, 천샌 아니라고."


저쪽 남자가 홍 씨네 머슴을 알아보며 무겁게 허리를 폈다.


"멀 그리 부지런히 혀?"


홍 씨네 머슴 천 서방은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아이고, 요거 헐 짓얼 헝가.

개아덜놈덜헌티 드러운 꼴 안 당헐라고 칡넝쿨 걷고 있네."


김서방이 등을 쿵쿵 소리나게 두들기며 긴 한숨을 쉬었다.


"나도 시방 그 잡놈에 칡넝쿨 걷으로 나오는 참이시."


천서방이 지게를 벗어던지며 허리춤에서 곰방대를 뽑았다.


"아이고, 인자 칡넝쿨도 동이 나부렀네.

양얼 다 채울라면 더 짚이 들어가야 되겄구마."



"으째 안 그러겄어. 니나 나나 다 나스는 판인디. 앉소,

담배나 한 대썩 꼬실리세."


천 서방이 털퍽 주저앉았고, 김 서방이 그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안사람언 잠 어찐가?"


천 서방이 담배쌈지를 건네며 물었다.


"차아암……"


김 서방이 먹구름덩이 같은 한숨을 토해내고는,


"가망이 없구만…… "


하며 저 멀리 눈길을 보냈다.


"그것 참 난리시. 사람이 호랭이가 열두 번 물어가도 정신얼 채래야 살드라고

아무리 복장 터지고 가심 무너지는 일 많이 당해도 맘얼 강단지게 묵어야 되는디."


천 서방이 안쓰러워하는 얼굴로 끌끌끌 혀를 찼다.


"그려, 아덜놈덜 둘이 징용에 끌려나갈 때꺼지만 혀도 할망국가 속 아파 험스로도

그냥저냥 젼디드마 딸년이 정신댄가 머신가로 끌려나간 게 그리 허망허니

병이 나불드랑게. 맘이 병이란 옛말이 어찌 그리 맞는지."


김 서방은 담배를 빨며 시름 깊게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도 헐 것이여. 에미덜 맘이란 것이 독헐 적에넌 참 독허다가도 허물어질라먼

그리 허망허니 허물어진당게. 내 마누래도 아덜 둘이 돈벌어 올 것이라고

오륙 녕얼 잘 젼디등마 죽었단 소식 듣고넌 똑 거짓말맨치로 열흘얼 못 넴기고

눈얼 감아불드랑게. 참, 나도 팔자가 꼬부랑 막대기 팔자지만 김샌 팔자도 다 늙어 참 고약허시."


천 서방은 쓴 입맛을 다셨다.


"참말로, 내 말년 팔자가 이리 비비꾀일지 누가 알었간디.

왜놈덜이라먼 인자 자다가도 치가 떨리능마."


"그려, 그려, 당연지사제. 그려도 너무 속 태우덜 말어.

그리 당헌 사람덜이 한둘이 아닝게 자석덜 생각히서라도 김샌언 기운 채래서 자석덜 기둘려야제."


"그리 맘묵을라고 애넌 쓰는디……"


김 서방이 또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의 얼굴은 그가 입고 있는 무명옷만큼 바래고 삭아 있었고,

주름지고 처진 눈꼬리에는 눈물이 지적지적했다.


"나 인자 가볼라네."


"어이, 애쓰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글픈 웃음을 나누고 헤어졌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징용과 정신대에 빼앗기고 또 공출할 칡넝쿨을 걷느라고

산비탈을 타고 있는 김서방의 팔자에 비하면 자신의 팔자는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생각하며 천 서방은 산을 오르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 홍 씨네 마을은 시끌범덩해졌다.

여자들까지 낀 칠팔 명이 2명씩 조를 짜서 이 집, 저 집에서 시비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들은 국민총력연맹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안 되어라, 안 돼. 우리넌 멀로 밥 묵고 살으라고 인자 숟그락 젓그락꺼정 뺏어갈라고 드요."


부엌데기 처녀가 두 팔을 쫙 벌려 부엌문 앞에서 버티고 서서 기를 세웠다.


"빨리 비켜나지 못해. 성전이 급하다고 했잖아!"


종아리가 절반 이상 올라간 짧은 검정색 통치마에 하얀 인조저고리를 받쳐 입은

 젊은 여자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금매, 숟그락 젓그락 뺏어가불먼 손꾸락으로 밥 묵고 국 묵으라 그것이요?"


처녀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당차게 맞서고 있었다.

그 기세에는 자기 영역인 부엌을 아무렇게나 침범당하지 않겠다는 뜻도 엿보이고 있었다.


"정말 말 안 들을 거야. 꼭 완력을 써야 되겠어!"


사십 중반의 남자가 처녀를 곧 잡아챌 것 같은 사나운 기세로 불쑥 다가섰다.


"을선아, 그만허먼 되았다. 다 맘대로 가지가게 문 활짝 열어줘라."


그때까지 마루에서 그 시비를 내려다보고 있던 홍 씨의 말이었다.


"아이고메, 아짐씨이……"


을선이가 울상이 되며 홍 씨를 쳐다보았다.


"니 말대로 손꾸락으로 묵고 살자."


홍 씨는 이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자가 을선이를 밀쳤고, 을선이는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와 여자는 거침없이 부엌으로 들어가 살강 위의 나무함에 담긴

숟가락과 젓가락들을 몰아잡아 자루에다 넣었다.

살강 위에 엎어놓은 그릇들 중에서 놋그릇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벌써 이삼년 전에 놋그릇들은 말할 것도 없고 놋제구, 심지어 놋요강까지 다 쓸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릇들은 사기로 바뀌었고, 제구는 기계로 깎아 붉은 칠을 한 나무제구로 바뀐 것이다.

그것들도 거의가 일본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라 엉뚱한 사람들을 떼부자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마침 홍 씨댁에 와 있던 금예는 죽어라고 자기 집으로 뛰고 있었다.


"엄니, 엄니 수, 숟그락……"


금예는 사립을 뛰어들며 다급하게 말을 토해냈다.


"아이고메!"


금예는 울부짖으며 주저앉았다.

아들 제일이의 숟가락만은 안 뺏기려고 달려왔던 것이다.

그것은 아이 낳기를 바라며 남편이 징용 끌려가기 전에 장만해 주고 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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