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70. 패전의 길

오늘의 쉼터 2017. 7. 11. 16:29

170. 패전의 길



파라오의 맑고 맑은 바다는 청록색으로 이루어진 무지개였다.

바닷물이 어찌나 맑은지 물 속의 검은 바위들이 꿰비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고

잔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도 환히 들여다보였다.

그리고 더 아름다운 것은 그 색깔이었다.

물의 깊이에 따라 녹색과 청색이 연한 색에서부터 진한 색까지 여러 층을 이루면서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청록색 무지개로 피어나고 있었다.

수평선도 가이없이 넓었고, 아스라한 수평선 그 끝에서는 새 하이얀 구름들이

언제니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순임이는 또 그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순임이가 바라보고 있는 쪽은 서북쪽이었다.

그쪽이 조선 쪽이었던 것이다.

위안소의 여자들이나 노무자들은 한결같이 그쪽을 바라보고는 했다.
순임이는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눈앞이 흐리멍텅했으며,

속이 메슥거리면서 자꾸 구역질이 솟고 있었다. 606주사 때문이었다.

두 번 째로 성병에 걸려 또 그 독한 606주사를 맞기 시작했다.

 606주사는 어찌나 독한지 밥맛을 완전히 떨어지게 했고,

얼굴색깔까지 노랗게 변하게 했다.

그 주사가 원래 독하기도 독하지만 성병을 빨리 낫게 하려고 양을 많이 쓰기 때문이라고 했다.

위안소 여자들 사이에서는 606을 많이 맞으면 애기보를 상해 영영 아이를 봇 낳게 된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순임이는 또 죽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그 맑고 푸르른 바다를 보면 언제나 죽고 싶은 유혹을 느꼈다.

그런데 성병까지 걸려 독한 주사 에 시달리는 신세가 되니

더 한심하고 비참해 죽고 싶은 마음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죽고 싶은 마음을 꼭 가로막는 삶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순임아, 돈 많이 벌 욕심 내덜 말어.

돈이 사람 따라와야제 사람이 돈 따라간다고 되는 법이 아닝게.

돈이야 되는 대로 벌고 몸 성히야 쓴다 잉. 몸성허니 와야 혀, 몸 성하니…"


끝내 문 앞에서 이별해야 했던 어머니의 눈물 젖었던 얼굴이 어김없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삼월이가 바다에 빠져 죽은 후로는 죽는 것이 허망하고 무섭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삼월이는 군인들을 받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다가 얻어맞기도 많이 얻어맞았다.

마루야마는 성질이 거친 만큼 매질도 무지막지했다.

아가씨들이 조금만 눈에 거슬려도 매질을 하는 마루야마가 돈벌이인 군인들을 받지 않으려고 하니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그런데 삼월이는 옴몸에 멍이 가실 날이 없도록 두들겨 맞으면서도 군인들을 받지 않으려고

발버둥이었다.

맞는 것이 너무 딱해 아가씨들이 나서서 여러 말로 삼월이를 달래고 타이르기도 해보았다.

그러나 삼월이는 그 짓을 하는 게 죽기보다 싫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맞으면서까지 군인을 받지 않으려는 삼월이의 마음을 아가씨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맞는 것으로 군인을 안 받는 게 아니라 맞고 나서 그 짓을 해야 했던 것이다.

아가씨들은 삼월이는 결국 맞아서 죽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삼월이는 마루야마에게 붙들려 군병원으로 끌려갔다.

삼월이는 며칠이고 돌아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삼월이는 거기를 수술 받은 것이었다.

거기가 너무 작아서 거기를 찢어 키우는 수술을 했다는 것이었다.

삼월이는 열흘 만에 돌아왔다. 마루야마는 그날로 삼월이의 방에 군인을 밀어 넣었다

그런데 군인을 물어뜯고 떠밀고 하는 소동은 마찬가지로 일어났다.

그날 밤 삼월이는 기절을 할 만큼 심하게 맞았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삼월이가 보이지 않았다.

해질녘에 신발은 작고 판판한 바위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그 끝이 서북쪽을 향해 있었다.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 채 순임이는 자꾸 풀을 뜯으며 아리랑을 읊조리고 있었다.

순임이의 눈에는 이제 바다는 보이지 않고 고향의정경이 보이고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지금 군인들에게 시달릴 시간이었다.

그러나 성병 때문에 주사를 맞는 동안은 군인들을 받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아가씨들은 누구나 성병이 무섭고 임신하는 것이 무서워 꼭 고무주머니를 사용하게 했다.

그러나 오후 늦게 오는 하사관이나 밤중에 오는 장교들 중에는 고무주머니 끼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적잖았다.


쇠투구를 끼면 맛이 안 난다는 것이었다.

그런 계급 높은 사람들에게 규칙위반을 내세우며 관계를 거부하면 마루야마의 매타작이있을 뿐이었다. 마루야마는 일주일에 한 번씩 성병검사는 괜히 하는 거냐고 소리쳤다.

성병이 걸리면 치료하면 되니까 값비싼 손님들 비위부터 맞추라는 것이었다.

사병 1원 50전, 하사관 2원, 장교 2원 50전, 자고가는 장교는 3원이나 4원이니

돈벌이에 눈이 시뻘건 마루야마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마루야마는 처음에 약속했던 한 달에 30원씩의 돈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은행에 저금했다가 고향에 돌아갈 때 한꺼번에 준다고 돈을 구경시키지도 않았다.

 어떤 아가씨는 돈을 집에 부쳐야하니까 매달 달라고 했다가 누굴 의심하는 거냐고

소리치는 마루야마에게 매질만 당했다.


"순임아, 니 여그소 머하누?"


순임이는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이, 분옥이구나. 어여 와."


순임이는 분옥이를 올려다보며 스산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분옥이라는 여자는 임신한 것이 완연히 표가 나도록 배가 불렀다.


"또 고향 생각허고 있었드나?


부옥이는 배를 받치며 거북스럽게 순임이 옆에 앉았다.


"허먼 멀혀, 설거지넌 다 혔어?"


순임이는 풀잎을 씹으며 바다 저쪽에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어물쩍 해치았다."


분옥이는 배가 불러지면서 군인들을 못 받게 되자 식당으로 옮겨 부엌일을 하게 되었다.

원래 일하던 원주민 둘 중에 하나를 내보낸 것이었다.


"인자 얼매나 남었어?


순임이가 분옥이의 배에 눈길을 주며 물었다.


"한 달 좀 못 남았제."


"그걸 낳아서 으쩐댜.


"우짜기넌.  땅에 파묻어삐는 기지"


분옥이는 거침없이 말하고는 혀를 톡 찼다.

순임이의 얼굴이 괴로운 듯 찌푸려졌다.


"그래도 요것이 효잔 기라.

요것 덕에 그 더러분 짓 안헌 기 발써 몇 달이고."


"요것이 나오지 말고 고향가기 전까지 그대로 있었으믄 얼매나 좋겄노."


분옥이가 쓰게 웃었다.


"담배 있소 담배 없소, 담배 있소 담배 없소."


좀 이상스럽게 들리는 조선말에 순임이와 분옥이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맨발에 헌옷을 걸친 원주민 노인이 똑같은 소리를 부슨 노래하듯 되풀이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용타, 저 미런시러분 것덜이 조선말얼 다 헐지 알고 말다."


"우리 노무자 아자씨덜헌티 담배 얻어피울라고 일삼아 배운 것이제

아리랑 잘 부르는 사람덜도 많덜 안혀.

아자씨덜이 여그다 냄기고 간 것이 아리랑허고 저 두마디 말이로구만"…


순임이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담배 있소 하는 말은 원주민들이 조선노무자들에게 담배를 달라고 하는 말이었고

담배 없소는 노무자들의 대답이었다.

1939년까지만 해도 거기만 겨우 가린 채 발가벗고 살아온 원주민들은

담배를 뒤늦게 배워 그들이 접촉하기 쉬운 조선노무자들에게 얻어 피우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일삼아 조선말 한마디를 배운 것이고, 담배를 배급받고 있는 노무자들로서는

그들에게 줄 담배까지 남아돌지 않아 담배 없소라는 말을 자주 한 것이었다.
둘이는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너 달 전에 일어난 엄청난 사건의 충격에 또 휘말려들고 있었다.
파라오에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벌써 조선의 노무자들이 5백여 명와 있었다.

그들 중에는 가족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약간 있었다.

그들을 노무자라고도 했고 개척단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파라오에 군인들이 증원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증원된 일본군 속에는 징병으로 끌려나온 조선청년들이 3,40명이 있었다.

그들은 파라오에 돈 지 얼마 안되어 노무자들과 접촉해서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에 대항하고 나섰다.

일본군은 다른 섬에 주둔하는 군인들까지 동원해 그들에게 동격을 감행했다

그 항전에 가담하지 않은 노무자 몇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일본군의 집중포화 속에 몰사했다.

일본군은 그 시체를 한 구덩이에다 다 파묻어버렸다.

그들이 그렇게 쉽게 한 덩어리가 될 수 있었고, 항전에 나섰던 것은 만용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미군은 파라오를 3월 31일과 4월 1일 이틀 동안 맹렬하게 공습했다.

그리고 또 미군은 사이판 섬의 상륙작전을 6월 15일에 시작하면서 엄청난 공습을 가해대고 있었다.

바로 그시기에 파라오에서는 그들이 뭉쳐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미군이 파라오에 상륙할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태평양 고도의 원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순임아, 우예 됐든지 간에 니나 나나 요새 그 드러분 짓 안하니께네 천만다행인 기라.

와 요새 와서 군인놈덜이 그리 사납게 변허는지 우리가스나덜이 시끕묵능다 아이가."


"즈그 놈덜이 쌈에 지게 생겼응게 지랄발광덜 허는것이제."


"왜놈덜이 지기넌 지겄제"


"하먼, 사이판섬얼 뺏긴 지가 은젠디."


"그라모 우리도 고향 갈 날 얼매 안 남은 거 아이가. 몸조심하제이."


"그려, 그래야제…"


순임이를 따라 분옥이도 한숨을 쉬었다.


1994젼 6월 15일에 사이판섬의 상륙작전을 개시한 미군은 7월 10일에 작전을 성공시켰다.


며칠이 지난 아침나절이었다.


쾅 콰당쾅쾅 콰광쾅


느닷없는 폭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에그머니나"


"아이고메"


"어무이요"


아가씨들은 제각기 비명을 지르며 방에서 뛰쳐나왔다.

계속 터지는 폭음과 함께 집이 곧 무너져 내릴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가자, 여기 있으면 죽는다."


"아니야, 곧 끝날 거야. 이런 일 한두 번 당했나 뭘."


금방 패가 갈라졌다 반수는 벌써 집을 뒤쳐나가고 있었고,
나머지 반수는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먼저 위안소를 나간 여자들이 빈터를 가로질러 숲속으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

새로 터지는 폭음들과 함께 위안소가 불길에 휩싸였다.


"저, 저…"


"안돼, 안돼…"


그들은 숲 속에서 발을 굴렀다.
위안소는 폭삭 무너지며 불붙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 나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분옥아…, 분옥아아…,"


순임이는 나무를 붙든 채 분옥이를 부르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폭탄은 쉴 새 없이 떨어지고, 코롤 시내는 여기저기서 검은 연기와 함께 불길이 솟고 있었다.

싸이렌 울리는 소리와, 양철지붕에 소나기 쏟아지듯 하는 총소리와, 사람들의 비명과 아우성과,

군인들이 내닫는 군홧발 소리와, 폭음과 폭음이 얽히고설키고 뒤엉키며 코롤 시내 일대는

수라장이 되고 있었다.


"폭탄이 이쪽으로도 떨어진다."


"여그 있으먼 안 되겄다. 산으로 피허자."


그들은 숲속을 뛰기 시작했다.

순임이는 손등으로 눈을 씩씩 문지르고는 그들을 따라 뛰었다.
폭격은 하루종일 계속되었다 산에서 바라보는 코롤 시내는 완전히 불바다였다.

 비행기는 코롤 시내만이 아니라 섬 안에 있는 건물이라는 건물에는

차근차근 폭탄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폭격은 밤에도 계속되었다. 어디에서 불빛만 반짝했다

하면 여지없이 그곳에 폭탄이 떨어졌다.
폭격은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다음날도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산으로 밀려들었다.

그러나 먹을 것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다.

폭탄은 대중없이 산에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찢기고 터진 사람들의 시체가 여기 저기 널브러졌다.

 사람들은 배가 고파 허덕거리며 폭탄을 피해 다니다가 뒤늦게 왜 산을 폭격해대는지 알았다.

군인들이 산으로 피했기 때문이었다.
폭격은 나흘, 닷새 계속되었다.

순임이네 일행은 열셋에서 여덟으로 줄었다.

다섯이 폭탄에 맞아 죽은 것이었다.

그들은 굶다 못해 골짜기의 개울에 있는 커다란 달팽이를 잡아먹기로 했다.

그동안 산열매는 많은 사람들이 다 따먹어 도이 나버렸다.

산에서 쌀을 가지고 있는 것은 군인들뿐이었다.

군인들은 분대별로 몰려다니며 낮에만 밥을 해먹었는데,

그들의 눈빛이 이상한 게 제 정신들이 아닌 것 같았다.
폭격은 파라오와 가까운 섬들에도 매일같이 계속 되고 있었다.


"세상에 무슨 배행기가 그리 많고 무슨 폭탄이 그리도 많니."


"왜놈덜 씨럴 말릴 작정인 갑다."


"왜놈덜 씨 말릴라쿠다가 우리도 다 죽겄다."


순임이네 일행은 이제 다섯으로 줄어들었다.

그들은 이제 도마뱀과 뱀도 잡아먹었다.

원주민들이 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이었다.

그들은 사람의 꼴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느날 밤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군인들은 총을 들이대며 옷을 벗으라고 했다.

군인들은 예닐곱 명 되었다.


"좋아요. 얼마든지 위안을 해줄 테니까.

그 대신 쌀을 좀 줘요.

우리는 며칠동안 계속 굶어서 죽을 지경이에요."


누군가가 나서서 말했다.


"아, 바로 조센삐로구나. 좋아, 주지."


그들은 군인들의 담요를 깔고 치마를 걷어 올려야 했다.
순임이와 관계를 한 군인은 엎드린 채 울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내일 싸우러 나간다고 했다.


"우리는 오늘 밤이 마지막이다.

내일 나가면 다 죽는다. 너희들은 살아서 돌아가거라."


어느 군인이 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세 번, 네 번 달겨들었다.

우는 일본군은 처음 보았던 것이고, 그도 어느 집 귀한 아들이라는

생각에 딱하고 불쌍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새벽에 군인들은 떠나갔다.
폭격은 열흘을 넘겼다.

순임이네는 셋으로 줄었다.

 산골짜기마다 시체 썩는 냄새로 잔동하고 있었다.

순임이네는 항고를 꼭 들고 다니며 도마뱀이며 쥐를 거기에다 익혀 먹었다.
열사흘째 되는 날 순임이는 폭격을 당했다.

혼자 남은 아가씨가 순임이를 부르며 통곡했다.
보름만에 폭격이 끝나고 비행기에서 삐라를 뿌렸다.

조선사람은 손들고 나오라고 한글로 씌어 있었다.

연합군은 1944년 5월 15일에 파라오의 한 섬인 페리류에 상륙했던 것이다.


"빨리 타라, 빨리 빨리!"


야마가다가 손을 내저으며 소리치고 있었다.
자동차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줄지어 달리고, 군인들이 어지럽게 뛰고 있었다.

폭음은 사방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복실이 일행은 정신없이 자동차로 떠밀려 올라갔다.

포장 친 차안에서 군인들 몇 명이 그녀들의 손을 잡아끌었다.

 자동차가 출발하고 한참이 지나서였다.


"한 씨 아저씨 어디 있지?"


한 아가씨가 두리번거렸다.


"으응 안 보이네."


"야마가다하고 저 앞에 타고 있겠지 뭐."


"아난디. 한 씨는 야마가다 꼬봉으로 우리럴 감시나 하제 그럴 자격이 없는디."


복실이의 말이었다.


"그래, 그 말이 맞아. 그런데 어딜 갔지?"


"도망간 거 아니가?"


"맞어, 그 백여시가 그랬을랑가도 몰러. 얼렁 야마가다한티 알리자."


복실이가 야무지게 말했다.


"그래야 되겠다. 우리가 당할 필요는 없잖아."


"맞다. 벌 끼 없어 매 벌게 생겼나."


그래서 그들은 목소리를 합쳐 <야마가다 상!>을 외쳐댔다.

그런데 그 목소리들은 생기가 돌고 있었다.
자동차가 멈추고 야마가다가 뒤로 뛰어 왔다.


"뭐야!"


야마가다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으로 찢어졌다.


"한 씨가 없어요, 한 씨."


어느 아가씨가 일부러 <한 씨>라고 말했다.


야마가다가 펄쩍 뛰듯이 놀랐다.


"어디 갔나요?"


다른 아가씨가 묘한 어투로 물었다.


"이 놈이, 이런 족제비 같은 놈이 도망을 갔구나. 이런 죽일 놈이."


아가씨들은 웃음을 참으며 눈길을 주고받고 있었다.
야마가다는 앞으로 갔다가 되돌아 와서 차에 올랐다.

자기가 아가씨들을 감시하겠다는 뜻이었다.


"나쁜놈의 새끼, 은혜를 배신하다니.

제 놈이 가면 어딜가. 폭탄에 맞아 뒈지겠지. 조센징, 개만도 못한 놈!"


야마가다는 이빨로 말을 갈아내듯이 하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가씨들은 야마가다가 당한 것을 보고 고소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씨에 대한 믿고 괘씸한 감정은 더 커지고 있었다.

자신들을 여기까지 끌고 와서 그렀게 못되게 군 것도 원한이 맺혔는데

형편이 위급하게 되니까 혼자서 미꾸라지처럼 도마을 가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아가씨들은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일본군이 몰리고 있는 전세는 생각보다 훨씬 불리하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이길 가망이 없으면 한 씨가 도망을 갔을 것인가.
폐구에서 만달레이로 옮겼을 때 벌써 쫓기고 있다는 것을 다 눈치챘던 것이다.

만달레이로 와서도 하루도 편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배행기의 폭격은 날로 심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두 달이 못되어 어디론가 쫓겨 가고 있는 것이다.

그 눈치 빠른 한 씨가 도망가 버린 것은 일본군이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이 지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


아가씨들은 한 씨가 도망가 버린 충격과 함께 불안에 휩싸이고 있었다.
복실이는 또 말숙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폐구를 떠나올 때 말숙이는 함께 오지 못했다.

실성한 것이 낫지 않아 쓸모가 없으니까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차가 떠나고 나서야 그것을 알았고, 함께 데리고 가야 한다고 야마가다에게

덤벼들었다가 흠씬 두들겨 맞기만 했다.

실성한 말쑥이가 어디를 떠돌고 있는지 생각할수록 기가 막힐 뿐이었다.

어쩌면 진작 세상을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매일 폭탄이 질정없이 떨어지고, 먹을 것은 없고,

실성한 말숙이가 살아갈 있는  땅이 아니었다.

또 말라리아에라도 걸리면 더 가망이 없는 일이었다.


"바쿠온! 바쿠온!"


자동차가 갑자기 멈추면서 들려온 외침이었다.


"빨리 내려, 빨리!"


야마가다는 차에서 뛰어 내리면서 소리쳤다.
아가씨들은 재빨리 차에서 뛰어 내리면서도 놀라지 않았다.

그놈의 '바쿠온!'이란 소리는 그동안 신물나게 들어온 것이었다.


"저 장글로 들어가, 장글로!"


야마가다가 겁 실린 얼굴로 방정 맞을 만큼 빠른 손짓을 하고 외치고 있었다.

자동차는 숲 가까이에 밀어 붙이느니라고 야단법석이었다.

 비행기에서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쾅 콰광 쾅


가까이에서 폭탄이 터지기 시작했다.

복실이 일행은 정글 속을 마구 뛰었다.

자동차에서 한 발짝이라도 더 떨어지자는 것이었다.

야마가다가 앞장섰고, 함께 타고 있었던 군인들이 아가씨들을 뒤따르고 있었다.


"됐어, 여시 서"


야마가다가 뛰기를 멈추었다.
무성한 나뭇잎들이 얼크러져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다.

키 큰 나무들만 울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 아래로는 또 온갖 종류의 풀들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그 풀들도 풀이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키도 크고 잎도 억셌다.

여름뿐인  땅에서 가장 신바람 나는 것은 정글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과 풀이었다.

아가씨들은 조그만 바위 옆에 오글오글 모여 앉았다.


"그렇게 한데 모이지 말고 멀찍멀찍 떨어져. 몰사하고 싶지 않으면 빨리 떨어지란 말야."


야마가다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아가씨들은 마지못해 나무 하나씩을 등지듯 안 듯 하며 서로 떨어져 섰다.

정글 속에서는 낮에도 모기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가씨들은 폭탄보다도 당장 눈앞에 있는 모기에 질겁을 했다.

그들에게 말라리아는 성병만큼 무서운 병이었다.
아니, 성병은 606주사를 맞으면 낫기나 하지만 말라리아는 키니네를 먹어도 잘 낫지를 않았다.

균이 워낙 독해서 그런다는 것이었다. 몸이 약한 사람은 하루걸이로 오르는 열에 부들부들 떨며

한두 달 앓다가 시름시름 죽어갔다.

말라리아로 죽은 아가씨가 서넛이었다.

일본군의 90%가 말라리아 보균자인 것처럼 아가씨들도 다 한 차례씩은 말라리아를 앓았던 것이다.
폭탄은 계속 떨어지고, 정글에서 놀란 새들이 요란스럽게 울어대며 날개를 퍼득거리고 있었다.

원숭이들도 날카롭게 꽥꽥거리며 어지럽게 날뛰고 있었다.


"어머, 자동차가 탄다."


"아이고메, 큰일났네."


아가씨들의 눈길이 일제히 자동차 쪽으로 쏠렸다.

자동차는 한두 대가 불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칙쇼 칙쇼"


야마가다는 마구 욕을 해대며 막대기로 풀줄기들을 후려치고 있었다.


"그려, 그려, 잘헌다. 아조 아 불질러부러라."


복실이는 속시원한 것을 느끼며 자동차들이 다 불타버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쾅 쾅 콰광


폭탄은 정글 속에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동차가 불타는 것을 보고 군인들이 정글 속에 숨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엄아아"


"엄니이"


아가씨들은 혼비백산 뛰기 시작했다.

군인들도 이리저리 뛰었다.


"너무 멀리 가지 말어. 너무 멀리 가지 마"


그 경황중에서도 야마가다는 소리소리 지르며 아가씨들을 단속하기에 바빴다.


"이대로 도망을 가버리면 어떨까?"


복실이는 아름드리나무 뒤에 숨으며 생각했다.

그때 불현 듯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식당에서 일하던 원주민 아주머니들이었다.

한 씨가 그렇게 도망을 칠 줄 알았더라면 자신도

그 아주머니들에게 숨겨달라고 부탁했어야 했다.

그럼 그 아주머니들은 틀림없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 아주머니들은 가난해서 식당에서 일을 할 뿐

일본사람들을 아주 미워했고,

강제로 끌려와 그 짓을 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무척 딱해했던 것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데리고 다니지 않고 그때그때 새로 구했다.

복실이는 이번에 옮겨가는 곳에서 아주머니들하고 잘 사귈 생각을 하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여기서 도망치다가 잡히면 반 죽게 얻어맞을 것이고, 잡히지 않는다고 해도 아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고, 당장 한 끼 먹을 것도 수중에 없었던 것이다.


"으아악"


느닷없이 터진 여자의 찢어지는 비명이었다.


"뭐야 왜 그래, 왜?"


놀란 야마가다가 그쪽으로 허둥지둥 뛰어갔다.

아가씨들도 그쪽으로 몰렸다.


"뱀이 뱀이…"


왼쪽 다리를 붙들고 주저앉은 미순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더듬거렸다.

미순이의 발목에는 바늘로 찔러놓은 것처럼 뱀의 이빨자국들이 찍혀 있었고,

뱀은 어디로 달아났는지 흔적도 없었다.


"이거 큰일났군, 이봐, 군인들 빨리 와봐, 빨리. 뱀에 물렸다."


햐마가다가 허둥거리며 군인들을 부르고, 아가씨들은 미순이를 둘러싸고 조바심을 쳤다.

독사에게 물리면 즉사하니까 숲속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는 말을 그동안 자주 들어왔던 것이다.


"무슨 뱀이었어요."


군인 서너 명이 뛰어왔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어디 봅시다. 독사면 큰일인데."


아가씨들은 군인들에게 자리를 비켜주었다.

군인 하나가 무릎을 꺾고 엎드리며 미순이의 발목에 입을 대려는 순간이었다.

미순이가 피그르 쓰러졌다.


"아니"


"미순아아"


미순이는 눈을 번히 뜬 채 숨이 끊어져 있었다.

아가씨들은 하얗게 질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꼭 거짓말처럼 그렇게도 빨리 사람이 죽어버리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뱀에 물리지 말아야지요."


군인들이 돌아가며 말했다.


"어쩌지요?"


미순이를 내려다보며 한 아가씨가 울먹였다.


"풀을 꺾어 덮어."


야마가다의 대꾸였다.


"저 군인들보고 좀 묻어달라고 그러세요."


"군인들이 민간인 무덤 파는 일도 있나."


야마가다가 내쏘았다.


"우리가 그냥 민간인인가요, 그동안 군인들한테…"


"잔소리 말앗."


야마가다가 홱 돌아서 버렸다.
아가씨들은 울면서 잎이 크고 넓은 풀줄기들을 꺾기 시작했다.
미순이는 간호원이 되는 줄 알고 선도금 같은 것도 없이 끌려왔다고 했다.

미순이는 아버지의 소작 신세를 면하게 해드리려고 했던 것인데

이 꼴이 되었다며 서글프게 웃고는 했었다.

미순이는 노래를 꽤나 잘해 모두 좋아했던 것이다

그동안 미순이가 부르고 따라서 합창한 아리랑만 해도 수백 번은 될 것이었다.

복실이는 특히 미순이가 슬프디슬프게 부르는 울밑에 선 봉선화야를 좋아했었다.


"미순아, 잘 가그라잉"


복실이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손이 찢기거나 말거나 억센풀잎 줄기를 꺾어대고 있었다.

폭격이 끝나고 정글을 벗어났다.

그들의 차는 파편에 몇 군데가 우그러지고 찍히고 했을 뿐이었다.


"깊이 파지 말고 빨리빨리 묻어라."


"집합, 집합."


폭격으로 죽은 군인들이 있는 모양이었고, 사방은 어수선하고 시끄러웠다.


"차뺏기기 전에 빨리빨리 타."


야마가다는 미순이가 죽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 자동차가 무사한 것만 좋아서 벙글거렸다.
계속 폭격을 당하면서 정글로 숨고, 다시 차를 타고 해서 나흘 만에 도착한 곳이 라시오였다.

만달레이레서 그랬듯 그들은 어느 커다란 2층 집으로 들어갔다.

어떤 부자가 살았던 집인지 발도 많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구들도 더러 남아 있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아 저녁밥은 가까운 부대로 먹으러 갔다.


"야아, 위안부들이다."


"아, 반갑소, 우리 위안 좀 잘 해주게."


"다들 예쁜데. 히히…"


군인들이 반색을 했고, 이를 드러내며 헤벌쭉 웃기도 했다.


"빌어먹을 놈들."


"아이구 징그러워".


목소리를 낮춘 아가씨들은 부들부들 몸서리를 쳤다.
저녁밥을 먹고 돌아오는데 키 작은 하사 하나가 야마가다를 따라왔다.

아가씨들은 그 하사가 한 씨 대신 배치되는 것임을 직감했다.


"내일부터 일 시작이다. 빨리빨리 자기들 방 청소해."


방 배정을 끝낸 야마가다의 지시였다.


"저거 아주 독하게 생겼다."


"그려, 적은 꼬치가 맵드라고 아조 깡아리가 있게 생겼는디."


아가씨들은 자기네 방으로 돌아가며 하사에 대해 수군거렸다.

억시 그들의 예감대로 그 하사는 한 씨 대신 배치된 것이었다.


이튼날부터 아가씨들은 인육지옥으로 빠져들었다.


"아이고메, 어찌 된 것이 우로 올라올수록 이 놈덜이 성난 짐승덜이 된다냐."


"그것도 모르나. 전쟁터는 가찹제 언제 죽을란지는 모르제

하니께네 물불 안 개리고 덤비는 거 아이가."


"맞았어, 다 죽기 전에 발광들을 하는 거야.

그나저나 우리 조선청년들이나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

 그 사람들 아니면 무슨 소식을 들을 수 있어야지."


"그래, 기왕이면 조선청년들이 말 한마디라도 정이 붙고…"


아가씨들은 누구나 조선청년들을 기다렸다.

조선청년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슴통이 트였고,

그들한테서 궁금한 소식을 한두 마디씩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며칠이 지나 그들은 이동병력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또 한바탕 까아귀떼에게 뜯길 각오를 했다.

그런데 들이닥친 군인들은 그들의 각오를 비웃듯 거칠고 난폭하기 짝이 없었다.

먼지투성이인 구두를 신은 채 방에까지 들어오는가 하면,

아가씨들보고 각반을 풀고 구두를 벗기라고 명령했다.

 하사관이나 장교들은 가끔 그런 경우가 있었지만 사병들은 그런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아가씨들이 그 요구를 들을 리 없었다.

그러자 그 군인들은 거침없이 따귀를 갈기고 들었다.

이방, 저 방에서 아가씨들의 비명과 울음소리들이 터지고 그들의 욕설로 시끌덤벙해졌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야마가다와 하사의 태도였다.

그들은 이 방, 저 방으로 부산스럽게 뛰어다니며 원하는 대로 다 위안해 드려.

이분들은 특별한 분들이야 하면서 아가씨들을 달랬다.
아가씨들은 그동안 눈치가 늘어 재빨리 태도를 바꾸었다.

히 거칠은 사람들을 상대로 폭행을 당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횡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자기들도 옷을 홀랑 다 벗고는 아가씨들에게도 다 벗으라고 했고,

고무주머니를 끼우지 않으려고 했고, 일을 한차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담배 한 대를 피우고는 또 달겨들고 또 달겨들었던 것이다.

아가씨들이 그걸 거부하면 칼을 뽑아 목에다 들이댔다.

정해진 30분 안에 몇 번을 하든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야마가다와 하사가 똥 집어먹은 상이 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으니

아가씨들은 그 일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아가씨들은 그들이 도대체 어떤 특수부대 인지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가씨들은 하루종일 짓이겨져 또 걸음들을 엉기적이며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그것들 만주에서 온 놈들이래."


조선청녀을 만났다는 아가씨의 말이었다.


"만주 그게 어떤 부댄데."


"그건 말 안해, 비밀이래."


"아이고 만주라카믄 멀리서도 왔네."


싸움에 지게 생겼으니까 만주의 군인들까지 끌어오는 거라고 복실이는 생각했다.
그건 극비리에 이루어지고 있는 관동군 투입이었다.
며칠이 지나 복실이는 조선청년을 만나게 되었다.

복실이는 우울해 보이는 그 청년을 정성스럽게 대해 주었다.


"요 새 전쟁판이 저찌 돼가고 있는게라."


복실이는 청년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며 물었다.


"형편없소.

우리 부대는 반수 이상이 죽어 부대를 재편성하려고 일시 퇴각한 거요.

일본은 곧 질 거요."


청년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글먼 어쩌실랑가요?"


"나도 모르겠소.

학병들은 기회만 있으면 영국군 쪽으로 탈주하고 있는데…"


"글먼 오빠도 그리허시제라."


"…"


청년은 복실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울 듯한 얼굴이 되며 복실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가씨나 조심해요. 여기서 전쟁터가 얼마 안 되니까."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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