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71. 아이누족의 온정

오늘의 쉼터 2017. 7. 11. 16:30

171. 아이누족의 온정



일이 끝나고 나면 막사 안은 뒤숭숭해졌다.

노무자들은 십장이나 감독 모르게 수군수군하고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도로공사는 거의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도로공사가 완전히 끝나면 어디로 가게 될 것인지 며칠 전부터 여러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유바리탄광으로 가게 될 것 같다던데."


"뭐라구 유바리탄광…"


"아니, 그 생지옥이라카는 탄광 아이가…"


"맞구만 한분 들어갔다 허먼 살아서 나오기 에홉다는탄광이 거그여."


"아니야, 비행장이 더 급해 비행장 닦으러 간다는 말도 있어."


"맞다, 나도 그런 말 들었는기라."


"글쎄, 그런 말이 있기도 한데 어떤 것이 맞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나저나 어디가 더 나슬랑고."


"그야 석탄가루 안 마시는 석만으로도 비행장이 낫지."


"하모, 날마다 굴속에 드가먼 해럴 한분 지대로 보나, 숨얼 한분 지대로 쉬나."


"어데 그뿐이가. 굴 무너져 저승객 되는 것언 우짜고."


"그래, 석탄 캐내기 어렵고 굴 무너질지 모를 나쁜 데로만 우리 조선사람들을 딜여민대잖아."


"그도 그렇고, 잘 묵지도 못헌 속에 석탄가리 및년만 마시먼 다 폣병쟁이 된다는 것 아니여."


"맞다, 운좋게 살았다캐도 폣병쟁이로 집 찾아가믄 머하겄노."


"그러게 말야. 땡전 한닢 벌지도 못하고 맨주먹 쥔 신세에 폣병쟁이나 돼서 집 찾아가면

그 꼴 참 한심시럽지."


"아이고, 처자석덜 어찌 사는고 모르겄다. 워째 요새넌 꿈도 잘 안 꿔지고."


"그러게 말야. 기한이 넘었으니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텐데."


"다 굶어죽지나 안했는지 모리겄다.

내사 마 처자석만 생각허믄 가심에서 피가 솟는다."


"아이고 이 놈으 신세, 전쟁이나 어서 끝나야 집으로 가제."


그들의 이야기는 언제나처럼 또 집 생각,

집 걱정으로 모아지며 한숨들이 깊어지고 있었다.


타아향사아리 며엇해던가아…
누군가가 노래를 시작했다.
손꼽아 헤에어보니…
곧 막사 안의 목소리들이 합해졌다.
그들이 단체행동으로 유일하게 제지를 받지 않는 것이 노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업장에서도 점심때 같은 때는 모여앉아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 슬픔도 서러움도 깊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심도 달래지고 힘겨운 것도 이겨낼 수 있고는 했다.

제일 많이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이었고, 그다음이 도라지였다.

그리고 누가 무슨 노래를 시작하건 곧 합창이 되었다.


아아리라앙 아아리라앙 아아라아리요오…


노래는 아리랑으로 바뀌면서 이내 또 합창으로 어우러졌다.

아리랑은 진작부터 조선총독부가 부르지 못하게 한 금지곡이었다.

그런데 조선이 아니라서 그런지 어쩐지 일본인 감독들은 노무자들이 합창하는

아리랑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어떤 감독은 흥얼흥얼 따라 부르기도 했다.

 어쩌면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아리랑이 금지곡이라는 것을 모를지도 몰랐다.

그런데 일본인 감독만 아리랑을 흥얼거리는 것이 아니었다.

북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족들까지 아리앙을 부를 줄 알았다.

그동안 조선의 노무자들이 이곳 저곳의 공사장에서 수없이 아리랑을 불러온 결과였다.
물론 조선노무자들과 아이누족들과는 접촉이 철저히 금지되었다.

공사장이 아니누의 마을에서 가까운 듯하면 감독과 시장들의 감시는 더욱 철저해졌다.

조선노무자들은 일본경찰의 통제를 받고 있어서 그런지 공장에는 접근할 생각도 하지 않고

말리 지나다녔다.

그러면서 그들은 끝없이 바람결에 실려오는 아리랑을 익힌 것이었다.
아이누족들은 세 가지 점에서 일본사람들과 다른 것이 금방 표가 났다.

첫째 얼굴들이 검었고. 둘째 키가 작으면서 몸통이 굵고 동그라며,

셋째 머리카락을 완전히 뒤로 넘겨 색색의 치장을 하고 있어 .

 그들은 대부분 일본옷들을 입고 있었지만

그 특이한 생김은 한눈에 일본인과 다른 종족임을 구분할 수 있게 했다.
조선노무자들은 그 아이누족과 일본인들과의 관계를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아 알게 되고는 했다.

북해도가 원래 아이누족들의  땅이었는데 일본사람들이 빼앗았고,

살기 좋은  땅은 일본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아이누족들은 산간으로 밀려 천대받고 산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됨과 동시에 왜 아이누족들과 접촉을 못헤게 하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조선사람들과 아이누족들과 접촉을 못하게 하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조선사람들과 아이누족들은 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노무자들 사이에서는 자기들끼리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는 은밀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아이누족들한테 도망가면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무자들은 쉽게 도주를 감행하지 못했다.

도망자들이 잡혀와 처형당하는 참혹한 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섬이다.

아무리 도망쳐 보아야 사방이 빙빙 둘러 바다다.

갈 곳이 없으니 도망칠 생각은 안하는 게 좋다.

 그런데 바보 같은 놈들이 가끔 도망을 친다.

그런 놈들은 반드시 잡힌다.

너희들도 일본경찰의 조직망과 수사력이 어떤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잡혀온 놈들은 절대로 살려두지 않는다.

너희들은 딴생각을 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또 바보 같은 놈이 생기는 경우,

그놈이 어떤 꼴로 죽어가는지 그때 보면 잘 알 것이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국민복 차림을 한 일본사람이 한 말이었다.
차득보네가 투입된 곳은 도로공사장이었다.

북해도에서 조선노무자들이 일하는 곳은 세 군데라고 했다.

탄광, 비행장, 도로공사장인데 그중에서 제일 나쁜 곳이 탄광이라는 것이었다.

차득보는 도로공사장에 떨어진 것을 그나마 큰 다행으로 여겼다.

그러나 도로공사장의 노동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루에 12시간씩 하는 중노동은 농사일보다 몇 갑절 더 힘이 들었다. 

땅을 파고, 돌을 지고, 밀차를 밀고,  땅을 다지고 하는 쉴틈없는 일들이 농사일보다

중노동인데다가, 그 일에는 농사일과는 달리 흥겨움이나 줄거움이 없었던 것이다

일에 흥이 돋지 않고 즐거움을 느낄 수 없으면 세상에 그 일처럼 힘겨운 일이 없는 것이었다.

농사일이야 정성을 들이고 힘을 쏟는 만큼 작물이 실하게 잘자라는 성이 눈에 보이고,

그 보람은 알찬 수확으로 결실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로공사는 아무리 고되게 해보았자 남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헛일이었다.

더구나 명색이 자작농으로 살아온 차득보로서는 도로공사가 더욱 허망하고 지겹기만 했다.
도로공사는 평지만이 아니어서 보통 힘드는 것이 아니었다.

낮은 산줄기를 끊어 내거나 경사진 산비탈을 깎아내게 될 때는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고

바위를 깨내고 하기 때문에 큰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을 위험도 많았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한층 힘겹고 고된 것은 배고픔 때문이었다.

한철 허리 휘는 농사는 밥심으로 짓는다는 말이 있었다.

아침 먹고, 샛밥 먹고, 점심 먹고, 샛밥 먹고, 저녁 먹고…,

그런데 그 밥이 그릇 담긴 것보다 위로 솟긴 것이 더 많은 고봉밥이 아니었던가.

그런 푸짐한 밥을 먹거도 한바탕 논일을 해대고 방귀 몇 번 뀌고 나면 푹 꺼져버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농사일보다 훨씬 억지 기운 써야 하는 중노동을 하면서 먹는 것이라고는 딱 세끼 밥뿐이었다. 그것도 말이 좋아 세 끼지 그 양을 다 합해 놓아보았자 농사철 고봉밥 한 그릇이 될까말까 였다.

더구나 반찬이라고는 단무지 한 가지가 제멋대로 나오다 말다 하는 그밥을 먹고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하자니 그 누구나 배가 고프고 기운이 달려 헉헉거렸다.

그렇다고 적당히 요령을 피울 수는 없었다.

그것을 막으려고 책임량을 정해 놓고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십장이나 감독들은 죽도며 몽둥이를 휘두르고 다녔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언제나 연락만 하면 트럭을 타고 득달같이 나자나는 경찰들이 있었다.

그러니 탄광만 생지옥이 아니었다.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4개월쯤 되어 마침내 한 사람이 밤중에 도망을 갔다.

남은 사람들은 눈 뒤집힌 십장들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도망가는 것을 지키지 못한 죄였다.

그러나 그들은 터무니없이 매질을 당하면서도 도망간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이 잡히지 않기를 빌었다.

송아지만한 개를 앞세운 경찰들이 수색을 나서기 시작했다.

도망간 사람은 이틀 만에 잡혀오고 말았다.

그 사람의 처형은 곧 공개 으로 이루어졌다.

노무자들 5백여 명을 공사장에 모아놓고 그 사람을 끌어왔다.

그런데 손을 뒤로 묶인 그 사람은 팬티밖에 입지 않은 알몸이었다.

그 사람은 노무자들이 막사별로 줄지어 앉은 앞쪽의 빈터에 세워졌다.

노무자들 양쪽으로는 경찰들이 열 명씩 총을 들고 서 있었다.

 그 사람을 잡아온 경찰들이었다.

그리고 그 경찰들 앞에는 산줄기를 끊으면서 깨낸 돌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에에 또, 너희들이 여기 도착했을 때 내가 워라고 했었나 도망가 봐야 소용없다고 했었지.

저놈을 바라. 저놈이 바로 내말을 믿지 않은 악질 배반자다.

그때 내가 워라고 했지 도망가는 놈은 절대로 살려두지 않는다고 했다.

 저런 놈은 시범조로 처벌해야 한다. 그런데 저놈한테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저놈이 도망갈 수 없도록 철저히 감시하지 않은 너희들에게도 죄가 있다.

그러니 너희들 손으로 저놈을 시범조로 처단해서 너희들의 시범을 삼도록 하겠다.

지금부터 처단을 실시하라."


총감독은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는 시범조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앞줄 일어섯!"


감독 하나가 나서서 구령했다.
앞줄의노무자 50명이 일어섰다.


"똑똑히 들어라. 준비 명령에 따라 각각 25명씩 양쪽에 있는 돌을 하나씩 집어 들고

신속하게 3보 앞에 쳐진 줄에 맞춰선다.

그리고 실시 명령에 따라 저놈을 향해서 일제히 돌을 힘껏 던져라.

만약 돌을 던지지 않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던지거나,

힘없이 던지는 놈들은 모두 경찰서로 끌어갈 것이다.

다들 똑똑히 알아들었지 자아 지금부터 시작하겠다. 준비이!"


노무자들은 양쪽으로 갈라져 돌무더기에서 돌을 집어가지고 다시 일렬로 늘어섰다.

노무자들과 그 사람과의 거리는 20여 미터 정도였다.


"실시이!"


노무자들의 손에서 돌들이 날아갔다.

돌들이 빗발치는 속에서 그 사람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다음 줄, 일어섯!"


두 번 째 줄의 노무자들이 일어서는데 저쪽에서는 십장 두 명이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사람의 이마와 얼굴, 가슴팍 같은 데서 피가 내비치고 있었다.

눈을 꼭 감은 그 사람은 허리를 약간 구부린 채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준비이!"


뒤에 앉은 노무자들은 모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실시이!"


빗발치는 돌들과 함께 그 사람은 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다음 줄, 일어섯!"


그 사람의 몸 여기저기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위에서 깨져나온 그 돌들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 사람의 허리는 좀더 구부러져 있었다.


"준비이!"


까마귀 서너 마리가 까욱거리면서 날아가고 있었다.


"실시이!"


빗발치는 돌들에 떠밀려 그 사람은 또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다음 줄, 일어섯!"


그 사람의 몸에서 흐르는 피들이 엇갈리고 있었다.

푸들푸들 떨리는 그 사람의 몸은 흔들리고 있었다.


"준비이"


차득보는 나도 사람인가 우리가 이게 사람인가 하는 생각으로 입술을 깨문 채 떨고 있었다.


"실시이"


빗발치는 돌들에 파묻히듯 하며 그 사람의 비명을 들리지 않았다.


"다음 줄, 일어섯"


그 사람의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두 십장이 물러서자 그 사람은 더 서 있지 못하고 머리부터 곤두박이고 말았다.

십장 둘이 달려갔다.


"안되겠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


십장 하나가 소리쳤다.


"그만하면 됐다. 매달아라."


총감독이 명령했다.


"좌측 25명, 빨리 삽과 곡괭이를 가져와"


감독이 서 있는 노무자들에게 명령했다.

앉아 있던 노무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그들은 모두 그 사람을 파묻으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우측 25명, 저 십장들 앞으로, 뛰어어갓"


노무자 25명은  땅을 팠고, 나머지 25명은 십장들이 시키는 대로 공사장의 각목을

가져다가 십자가를 급조했다.

그리고 기절한 그 사람을 십자가에다 묶었다.

곧 십자가가 세워졌다.

십자가에 매달인 그 사람은 정신을 잃은 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것으로 공개처형을 마친다.

저놈에게 절대로 손대지 마라. 만약 손대는 놈은 저놈과 똑같은 방법으로 또 처형할 것이다

지금까지 소요시간 40분, 오늘 작업을 40분 연장한다. 이상"


노무자들은 각기 십장을 따라 공사장으로 흩어져 갔다.
차득보는 그 사람이 그 정도에서 기절한 것을 고맙게 생각했다.

그가 더 버티었더라면 자신도 곧 돌팔매질을 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어찌 될 것인가…피를 저렇게 흘리고,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고…, 결국 죽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차득보는 아까부터 몇 번이고 공허 스님을 생각했다.

이런 경우에 공허 스님은 어찌했을 것인가.

그러나 어떻게 했을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일을 끝내고 막사로 돌아와서도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림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딴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날과는 다르게 모두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

그렇다고 잠이 든 것도 아니었다.
이튿날 작업장에 나간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사람의 몸뚱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까마귀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너무 질려 소리치지도 못했다.

까마귀떼는 인기척을 느끼면서도 전혀 날아갈 기미 없이 검은 날개들을 퍼득이고

괴기스럽게 까욱거리며 무언가를 다투어 쪼아대고 있었다.
노무자들은 그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쓰며 일에 매달렸다.

그쪽서는 하루종일 까마귀들의 까욱거림이 귀신의 울음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비로소 어떤 꼴로 죽는지 보여주겠다던 총감독의 말을 실감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던 그들은 아침보다 더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많던 까마귀들은 다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는데 그 사람의 시체에서는

사람의 형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너덜너덜한 시체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팔다리와 등 쪽의 살과 가죽이었다.

눈에서부터 내장 전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사람이 하루 만에 그렇게 참혹한 꼴이 되어버리는 것은

난생처음 목격한 노무자들은 저 밥을 먹지 못했다.

그 이변에 놀란 것은 식당의 여자 들이었다.


"아니, 왜들 이러시유?


"무슨 일들 있었소?"


"아니, 금식투쟁 벌이는 거요?"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곧 십장들이 달려왔다.


"빨리 밥들 처먹어"


"내일 일들 어떻게 하려고 이래"


"이 새끼들, 배고프단 말도 다 거짓말이로군."


십장들은 설치고 돌아가갔다.


"비위가 상해서 못 먹겠는 걸 어떻게 해요."


"내일 책임량 다하면 될 거 아닙니까."


"너무 그라지덜 마이소. 우리가 개돼지가 아닌 기라요."


참다 못한 노무자들이 한마디씩 했다.


"좋아, 책임량만 다하면 됐어"


"그래, 그 꼴 보고 한 끼 굶는 것도 효과있는 일이다."


"옳아, 밥 굶으면서 도망갈 마음 싹 씻어내라".


십장들이 코 웃음 흘리며 돌아섰다.
노무자들은 속 쓰린 배고픔 속에서 그 사람을 생각했다.

그리고 역시 도망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했다.
노무자들은 다음날 아침밥은 먹었다. 배도 고팠지만 일을 나가야 했던 것이다.
노무자 50명은 점심시간에 뽑혀나가 그 사람을  땅에 묻었다.

총감독은 봉분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그 사람의 죽음은 흔적도 없이 감추어지고만 것이었다.

노무자 명단에 빨간 글씨로 소모라고 쓰면 그만일 뿐이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서 그 사람이 왜 잡혔을까 하는 말이 조심스레 나오게 되었다.


"더 멀리 달아났어야 하는데 동작이 너무 느렸던 거야."


"아니, 아마 아이누를 만나지 못하고 헤매다가 잡혔을 거야."


"그게 아니야. 소지품을 놓고 가서 개가 냄새를 맡게 한 게 잘못이야."


다 그럴듯한 말이었다.

차득보는 그 말들을 곱씹어 생각해 보았다.

소지품을 두고 간 것부터가 치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로공사는 끝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섬이라고 했지만 바다는 보이지 않았고.

노무자들은 고향 쪽인 서쪽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아리랑을 불렸다.

그 누구도 돈을 벌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 달 18원에서 밥값12원 제하고,

강제로 3원을 저금하고, 나머지 3원으로 배급 나오는 담배와 술 값을 재고 나면 빈털터리가 되었다.

3원을 저금하지 않겠다고 나섰다가 불령선인으로 몰려 매타작을 당한 사람도 있었다.

저금한 돈을 집에 돌아갈 때 준다고 했지만 그건 거짓말이라는 말이 떠들기 시작했다.

계약기간을 어기면서 조선으로 보내주지 않자 생겨난 말이었다.

약속을 지키라고, 집에 돌려 보내달라고 수십 명이 집단 항의를 하고 나섰다가

무장경찰 2백여 명이 출동했다.

그들은 모두 트럭에 실려가 피멍이 들도록 폭행을 당하고 돌아왔다.

계약 기간이 1년인 사람도 있었고, 2년인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끌려오기 쉽게 하려고 마음대로 정한 것 뿐이고,

이제 아무 소용도 없게 된 것이었다.

총을 앞세워 계약기간도 자기들 마음대로 안 지키는데 저금한 돈도 안주면

그만 아니냐 하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노무자는 시름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한사람이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하였다.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사람이었다.


"죽느니 도망을 갔어야지."


"잡힌 다음을 생각해서 못 갔겠지."


"무슨 소리야. 왜 꼭 잡힐 것만 생각해. 안 잡힌 사람들도 있는데."


"잡혀서 그렇게 끔찍하게 죽고 싶지 않았던 게지."


"기왕 죽을 바에야 도망가고 봐야지. 잡히고 안 잡히고는 반반 아니냔 말야."


"그야 자네 생각이고, 그 사람들은 잡히는 것만 생각한 게 아닌가."


그 자살을 놓고 노무자들의 생각이 엇갈렸다.

차득보다는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아이누 마을까지만 가면 살아난다는 것이었다.

아이누족은 일본사람둘에게 감저이 많기 때문에 자기들과 같은 처지에 있는

조선 사람들을 동정한다는 것이었다.
서너달이 지나서 또한사람이 도주했다.

그 사람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게 된 사람이었다.

다시 경찰이 동원되고 야단 법석이 났다.

그러나 이틀, 사흘이지나고, 다시 닷새가 넘었건만 그 사람은 잡혀오지 않았다.

노무자는 전혀 그 사람의 일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서로 쳐다보는 눈빛들은 윤기 나고 안도하고 있었다.

열흘이 지나자 경찰들도 수색을 주저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서너 달이 지나서야 노무자들은 소곤 소곤 그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사람, 평소에도 발이 아주 빨랐어."


"그러게 말야. 운수도 잘 타고 나기도 했을 거야."


"아니야, 그 사람이 똑똑해. 소지품부터 하나도 안 남겨놓은 걸 봐."


"그야 앞 사람이 한 실수니까."


"그나저나 그 사람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는 어쩌려는 걸까?"


"원 별 걱정을 다 하네. 그 사람도 집에 가는 거지 뭐."


"아니, 그때 또 잡혀서 또 당할 것 아니냔 말이지."


"참, 사람 답답한 소리만 하네.

전쟁 끝나 우리를 보내주는 판인데 그 사람이 당하긴 왜 당해."


"그럼 도망가는 게 장땡이게."


"그거 인자 알았나, 삼십육계보다 한 수 위가 도망치는 거란 말도 모르나."


도망에 성공한 그 삶은 노무자들 사이에서 가장 부러운 존재가 되었다.

차득보의 마음에서도 그 사람은 지워지지 않았다.
도로공사가 끝마무리되어 가면서 노무자들의 얼굴에는 실망의 빛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다음에 옮겨갈 곳이 비행장이 아니라 탄광이라는 것이 확실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득보는 마음을 공글리기 시작했다.

절대로 탄광까지 끌려 들어가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진작 도주를 하고 싶었지만 실수 없이 완전하게 하려고 계획을 치밀하게 짜면서

기회를 노려왔던 것이다.

그동안 도로공사를 해오면서 줄기차게 살펴온 것이 어느 방향, 어디쯤에

아이누마을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로공사는 자꾸 이동하면서 진행되는 것이었고,

아이누마을은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신경을 쓰며 유심히 살피면 차츰 잡히는 곳도 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전혀 볼 수 없기도 했다.

그리고 별다른 짐 없이 다니는 아이누들이 있는가 하면 어느 지역에서는

큰 짐들을 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아

이누들이 몸 가볍게 다니는 데는 마을이 별로 멀지 않다
는 것이었고, 짐을 지고 다니는 데는 마을이 산골 그 어딘가 멀다는 뜻이었다.

차득보는 도로공사를 따라 이동하면서 그런 곳의 위치. 거리. 방향. 지형 같은 것을

눈에 익히고 헤아리고 했다.

대부분의 노무자들은 반년을 일을 하고도 자기들이 얼마 정도의 거리를

도로로 닦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차득보는 그 거리가 몇 십리쯤 되고 어느 지점에서 방향이

어느 쪽으로 바뀌는지를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등짐을 지면서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발걸음 수를 몇 번씩이고 세었고, 

땅을 다지면서 그저 어기어차 소리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방을 살피고 또 살폈던 것이다

차득보는 특히 산세를 유심히 살폈다

어차피 도로는 도주에 쓸모가 없는 것이었고, 아이누족들은 산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부터 날씨는 꾸물거렸다.

차득보는 하늘을 힐끔힐끔 올려다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비가 와라. 좍좍 쏟아져라."


차득보는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비만 오면 도주를 감행할 작정이었다.

비가 오면 도주하기에 이중 삼중으로 좋았다.

제일 좋은 것이 경찰 수색견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었다.

비가 많이 올수록 빗물에 냄새가 지워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빗소리에 이쪽의 행동을 완전히 감출 수 있었다.

또한 수색대의 출동을 늦추고, 수색을 둔화시킬 수 있었다.
오후가 되면서 빗방울이 후둑거리기 시작했다.


"아이고메 하느님"


차득보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부르짖었다.
천둥이 치면서 비가 쏟아지기 시작해 1시간쯤 먼저 일을 마쳐야 했다.

그건 바로 늦가을에 어김없이 북해도를 지나가는 태풍이었다.

차득보는 탈주를 완전히 작정했다.
천둥번개 속에 비는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빗소리와 바람소리 때문에 이쪽 막사에서 일부러 고함을 쳐대도

 저쪽 막시에서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노무자들은 다른 날보다 일찍 잠이 들었다.

차득보도 태평스럽게 눈을 감았다.

십장들의 방은 막사의 왼쪽 문 양쪽에 칸막이되어 있었다.

차득보는 자정 가까이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매일 술 한잔씩을 하는 십장들은

그 시간이면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질 거였다.
차득보는 계획을 바꾸었다. 산을 타넘기로 했던 것을 도로를 이용하기로 했다.

비가 생각보다 억세게 쏟아지니까 개에게 추적당할 염려가 거의 없었고,

산은 기동력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갑자기 불어나 골짜기들의 급류에 휩쓸릴 위험이 컸고,

개의 추적을 따돌릴 수 있게 된 기회에 도로를 이용하면 산을 타는 것보다 배는

더 멀리 도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십장들의 방에서 띵띵 시계가 울리기 시작했다.

빗소리 속에서도 차득보의 곤두세운 귀에는 그 소리가 또렸하게 들리고 있었다.

시계는 11번을 울렸다. 차득보는 살금살금 일어났다.

발끝으로 걸어 십장들 방으로 가서 귀를 기울였다.

드렁드렁 코고는 소리만 요란했다.

그는 제자리로 돌아와 소지품 보따리를 꺼내 허리에 질끈 동여맸다.

그리고 오른쪽 문으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변소를 오가는 문이라 잠겨 있지 않았다.

숨을 멈추며 살짝 들이 밀었다. 몸이 빠져나갈 만큼 열리자 잽싸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재빨리 문을 닫았다.

옆에 누가 서 있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한 어둠 속에서 비가 기세 좋게 내리고 있었다.

차득보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환히 떠오르고 있었다.

막사들 주위로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정문 초소에는 두 명의 경비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변소 뒤의 철조망을 넘으면 산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일단 산으로 들어가서 방향을 바꿀 작정이었다.
차득보는 숨을 들이켜며 빗속으로 나섰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변소 뒤를 돌아 철조망에 이르렀다.

혁대에 찔러둔 수건을 빼내 손을 감았다. 그리고 철조망을 기어올랐다.

평소에 보아두었던 대로 나무기둥 옆을 타고 오르는데도 철조망은 심하게 흔들렸다.

철조망에 다 올라 아래로 뛰어내렸다. 빗소리와 바람소리는 역시 고마웠다.

차득보는 대중 잡아 산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어둠에 눈이 익으면서 흐릿한 형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평수에 눈여겨보아 두었던 산은 별로 높지 않았다.

큰 산줄기에서 뻗어 내린 여러 개의 지맥 중에서 하나였고,

그 끝부분에 솟은 작은 봉우리였다.

빨리 골짜기를 찾아가기로 했다. 골짜기에는 그동안 쏟아진 비가 몰려 흘러내리고 있을 거였다.

그물줄기를 타고 내려가며 냄새를 완전히 지울 작정이었다.

그러면 제아무리 냄새를 잘 맡는 개라도 더는 어쩔 수가 없게 될 거였다.
골짜기에는 역시 물이 세차게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차득보는 무릎까지 차오르는 물 속을 걸었다.

골짜기를 따라서 내려가면 도로에 이르게 되어 있었다.

그는 미끄러지고 넘어져 가며 도로에 다다랐다.

일단 탈주에 성공했다는 안도감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새까만 까마귀떼의 퍼드득거림과 괴기스러운 울음소리들이 떠올랐다.

차득보는 왈칵 소름이 끼치는 걸 느끼면서 주먹을 부르쥐었다.

그는 도로에 발을 디디면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뛰기 시작했다.
비는 강해지다가 약해지다가 하며 끊임없이 내렸다.

차득보는 줄기차게 뛰면서 한 가지 안타까운 게 있었다.

바람이 등 뒤에서 불었으면 좋으련만 맞받으면서 뛰자니 힘도 들고 속력도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가 으는 것만도 천행인데 그것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날이 희미하게 트일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뛰었다.

얼굴을 흘러내리는 비를 계속 핥아먹어 목마른 줄을 올랐다.

날이 더 밝아지기 전에 몸을 숨겨야 했다.

대강 짐작으로 7,80리는 온 것 같았다.

아이누들을 보았던 지점을 되살려가며 차득보는 산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산길을 따라서 산등성이 두 개를 넘었다.

그러자 분지가 나오면서 특이하게 생긴 초가집 대여섯 채가 빗발 속에 말리 보였다.


"아이고메, 고맙십니다."


차득보는 나무를 부둥켜안으며 가쁜 숨과 함께 이 알을 토해냈다.

아이누의 초가집은 온몸에 털이 난 짐승처럼 집 전체가 짚인지 풀인지 모를 것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가운데 창문이며 큰 문 같은 것이 달려 있었다.

차득보는 비안개 부 게 서린 산비탈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산속이라 바람이 별로 심하지 않았다.

분지에는 밭농사가 지어져 있었고, 어떤 밭들은 벌써 추수한 흔적이 보였다.

밭가의 도랑으로는 물이 넘치며 흘러가고 있었다.
차득보는 첫 번 째 집의 큰 문을 두들겼다.

짐을 뒤덮고 있는 것은 억새풀 종류였다.

안에서는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잠들이 깨기는 너무 이른 새벽이었다.

그렇다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차득보는 다시 문을 두들겼다.
안에서 무슨 말이 들렸다. 그러나 차득보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일본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누말인 것이 분명했다.


"조선사람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저는 조선사람입니다."


차득보는 일본마로 또박또박 말했다.


"아버지 조선사람이래요."


안에서 들려온 일본말이었다.


"어서 문 열어라."


차득보는 손을 가슴에 얹으며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숨길을 따라 그의 눈은 내려 감기고 고개는 한정없이 수그러들고 있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며 차득보를 맞이한 것은 머리 하얀 오십객의 남자였다.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차득보는 안으로 들어서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서 올라오시오. 춥지요."


주인이 다정하게 웃으며 차득보의 손을 잡았다.

비에 젖을 대로 젖은 차득보의 몸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그의 입술은 시퍼렇다. 차득보는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때 젊은 여자가 가지고 나온 수건을 젊은 남자가 받아 차득보에게 건네주었다.


"예, 고맙습니다."


차득보는 또 머리를 공손하게 숙였다.

공허 스님이 여동생을 찾아주려고 자신을 데리고 주막에 찾아갔을 때 이후로

그만큼 고마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공허 스님의 말을 듣고 일본말을 배워둔 것이 마침내 큰 효험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차득보는 머리와 얼굴을 대충 닦았다.


"저쪽으로 가서 옷부터 갈아입으시오."


주인이 옷을 내밀었다.


"예에, 정말 고맙습니다."


차득보는 머리를 숙이고 또 숙였다.
젊은이가 웃으면서 한쪽 방문을 열어주었다.

차득보는 일본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때서야 그는 몸이 부들부들 떨리도록 추은 것을 느꼈다."


차득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주인이 담요를 내밀면서 뒤집어쓰라는 시늉을 했다.

차득보는 또 고맙다고 인사하고 담요로 몸을 감쌌다.

주인이 담배를 권하는데 젊은 여자가 차를 끓여가지고 왔다.


"자아, 추운데 어서 드시오."


"예, 고맙습니다."


차득보는 정말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그 사람들의 따뜻한 정성에 그는 내가 언제 남한테

이런 인정을 베풀어본 적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여긴 오래 있을 데가 못됩니다.

곧 여길 떠나서 안전한 데로 가세요.

그곳에 조선사람들 몇이 사는데,

조선사람들이 오면 자기네들한테 보내달라고 우리보고 부탁을 했어요.

그 사람들은 이제 우리 아이누하고 똑같아요.

여긴 샤모들이 오늘이라도 들이닥칠 위험이 있으니까요.

우리아들이 그곳까지 모셔댜드릴 겁니다".


주인은 차를 마시며 말했다.

샤모는 아이누족들이 일본인들을 경멸해서 부르는 아이누말이었다.


"예, 예, 고맙습니다."


아침을 먹고 곧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젊은 여자는 그동안에 차득보의 옷을 짜서 불에 쪼여가지고 거의 다 말린 상태였다.

차득보는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섰다.


"편히 가시오."


"이 은혜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차득보는 그야말로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다.
젊은이와 함께 산을 넘고 또 넘었다.

 빗속을 하루종일 걸었다 젊은이가 싸온 점심을 동굴 비슷한 데서 먹었다.


"조선사람들은 샤모들보다 몸집도 더 크고, 기운도 더 세고,

얼굴도 더 잘생겼는데 왜 샤모들한테 당하며 사는지 모르계어요.

우리 아니누는 수가 너무 적어 당했지만."


젊은이가 점심을 먹으면서 한 말이었다.


"예, 권력을 잡고 있던 대신 몇 놈이 나라를 팔아먹은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나라를 되찾으려고 30년 넘게 독립투쟁을 해오는데도

우리 조선은 신식무기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일본놈들은 신식무기를

얼마든지 만들어내니 싸우기가 너무 어렵지요."


차득보는 얼굴을 들 수 없는 수치심을 이렇게 말했다.
깊은 산중의 분지에 도착한 것은 저녁밥때가 다 되어서였다.

집이 십여 채가 서로 감싸듯 다정하게 모여 있었다.


"조선사람이 왔소, 조선사람."


젊은이는 어느 집의 문을 두들기며 목청 높이 외쳤다.
문을 열고 뛰쳐나온 사람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조선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차득보를 얼싸안았다.


"어서 오시오.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예에…, 고맙구만요, 고맙구만요…
차득보는 목이 메고 있었다. 동포라는 곳이 이렇게도 좋은 것인가…,

차득보는 난생처음으로 동포의 뜨거운 피를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차득보는 깜짝 놀랐다.

아이를 안고 부끄러운 듯 인사하는 여자는 분명 아이누였던 것이다.


"놀라셨지요? 제 아냅니다."


스물대여섯 되어 보이는 그 남자는 씨익 웃었다.


"예에, 그러시구만요…"


아침에 젊은이의 아버지가 '그 사람들은 이제 우리 아이누하고 똑같아요'

했던 말뜻을 비로소 알아차렸다.


"난 외삼촌집으로 가겠어요."


젊은이가 밖으로 나갔다.


"예, 이따가 연락할게요. 모두 모여 술 한잔해야지요."


"술이 있어요?"


"그럼요 샤모가 여기까진 못 오니까 맘 놓고 담가먹어요."


"예, 좋지요. 연락하세요."


두 사람은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자아, 몸 닦고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그 남자는 아내가 가지고 나온 수견과 옷을 차득보에게 건네주었다.
차득보는 옷을 갈아입으며 자신이 너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아이누마을 몇 군데에나 그런 부탁을 해놓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자아, 편히 앉으세요. 저는 강상호라고 합니다. "


"예, 저는 차득보라고 헙니다."


"여기에 우리 조선사람이 전부 다섯입니다. 서

로 줄을 대서 모인 거지요."


"다 여그서 혼인얼 허셨능게라?"


"아닙니다. 혼인한 사람은 셋입니다.

다른 두 분은 고향에 처자가 있어서요."


"글먼 도망 나오신 지 오래되셨능가요."


"예, 3년 됐습니다."


"예에, 근디 지럴 이리 구해 주신 것이 너무 고마운디,

그런 부탁얼 그 동네에만 허셨능게라?"


"아닙니다. 한 스무 개 마음에 해놓고 있습니다."


"아, 그러시구만요.

근디 이리 도망 나와 사는 사람덜이 및이나 되는지 다 아시는게라?"


"다는 알 수가 없고요, 1

50명이 되는 것까지는 알고 있습니다."


"참 아이누 이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예, 사람들이 순하고 인정이 많습니다.

그나저나 징용 끌려나온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 고생들이 참 큰일입니다."


"예, 그 수야 말로 헐 수 없이 만컸지요.

죽기도 억수로 죽고……"


강상호의 아내가 차를 끓여왔다.


"추운데 어서 드세요."


"예에……"


차득보는 잔을 들며 다시 목이 메었다.
일제는 160여만 명을 강제징용했고,

 30여만 명의 여자들을 위안부와 정신대로 끌어갔고,

 4천5백여 명의 학도병을 포함해 징병으로 전쟁터에 끌려간 젊은이들은 40여만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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