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73. 허깨비군대

오늘의 쉼터 2017. 7. 11. 16:33

173. 허깨비군대



쿵! 쿵!


딸랑, 딸랑, 딸랑……


쿵! 쿵!


딸랑, 딸랑, 딸랑……


느닷없이 울려대는 요란한 소리에 윤철훈은 무선송신을 멈추며 후다닥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아찔해졌던 그의 의식은 섬광처럼 빠르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저건 도둑놈들이 아니다.

헌병대의 기습이다.

전파가 탐지됐다.

 어떻게……, 뒷문으로 도망가나? 아니다, 때가 늦었다.

괜히 길안내를 해주는 것이다. 아이들,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


쿵! 쿵!


딸랑, 딸랑, 딸랑……


사진관 문을 부수는 소리와, 문을 칠 때마다 문에 달린 종이 자지러지듯 울려대고 있었다.
윤철훈은 집으로 연결되어 있는 비상연락줄을 마구 잡아당겼다.

그걸 잡아당기면 안방에서 종이 울리도록 되어 있었다.


쿵! 쿵!


딸랑, 딸랑, 딸랑……


우지끈! 삐지직……


윤철훈은 줄을 잡아당기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가위로 줄끝을 잘라버렸다.

줄매듭만 손에 남고, 줄은 자취없이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우당탕탕!


"빨리빨리!'


'샅샅이 뒤져라!'


군화소리들과 함께 터지고 있는 일본말이었다.
윤철훈은 줄매듭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눈을 감았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절대로 여기 올라와선 안 돼!'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그건 이미 정해 둔 규칙이었다.

영리한 아내를 믿었다.

아내는 침착하고 기민하게 대피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을……


'손들엇!'


윤철훈은 눈을 떴다.

서너 개의 총구멍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헌병 둘이 달겨 들어 그의 팔을 꺾었다.

그리고 등 뒤로 쇠고랑을 채웠다.


"딴놈들 있나 더 뒤져라!'


"무전기 여기 있습니다."


"좋아, 빨리 챙겨."


윤철훈은 암실에서 촬영실로 끌려나왔다.


"다른 놈들은 없습니다."


''틀림없나?"


"옛, 두 번씩 확인했습니다."


"무전기 압수했습니다."


"됐다, 가자!"


윤철훈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다시 아내와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하얼빈으로 가서 조직의 도움을 얻어 국경을 무사히 넘자면 사오일은 걸릴 거였다.


'여보, 아이들 잘 부탁해…… 애들아, 건강하게 잘 커야 한다……'


윤철훈은 아내와 아이들을 작별했다.

이렇게 잡힌 이상 살아날 길은 없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무사한 것만도 천행이었다.
윤철훈은 자동차로 밀려 올라갔다.

자정르 넘긴 밤거리는 적막에 싸여 있었다.


'한곳에 너무 오래 있었어.'


윤철훈은 이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직종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옮겨다녔더라도 결국 장춘 시내였으니까 어차피 탐지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방심은 그것이었어……'


윤철훈은 청산가리를 휴대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그건 너무 오래 무사해서 비롯된 방심이었다.

단 몇초로 끝내 버릴 일을 너무 길게 끌게된 것이었다.
차은심은 비상종이 울려대는 것에 놀라 잠이 깼다.

다급하게 울려대던 비상종이 뚝 끊어졌다.

그건 남편이 위기에 빠졌다는 신호인 동시에 빨리 피하라는 신호였다.

차은심은 두 아이를 깨워 뒷마루방 아래 파놓은 지하실로 피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집 안을 뒤지는 기척은 전혀 없었다.

남편 혼자 잡혀간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차은심은 밖으로 나와 사진관의 동정을 살폈다.

사진관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진관으로 올라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건 어리석은 유혹이었다. 냉정해야 했다.

남편은 남편만이 아니라 조직원이었다.

자신도 아내만이 아니라 조직원이었다.

조직의 규율을 엄수해야 했다.

그리고 자신은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냉정해야 했다.
차은심은 방으로 들어왔다.

두 아이는 겁난 얼굴로 꼭 붙어앉아 있었다.

자신을 쳐다보는 그 말똥말똥한 눈을 보자 차은심은 가슴이 찡 울리며 왈칵 눈물이 나려고 했다.


"자라니까 아직 안 자니?"


차은심은 두 아이를 감싸안았다.


"잠 안 와."


큰아이가 말했다.


"나 무서워."


작은아이가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비행기가 가버렸으니까 이젠 자도 돼."


"비행기가 왜 밤에 오고 그래?"


작은아이가 물었다.


"그야 비행사 맘대로니까 그렇지."


큰아이의 대꾸였다.


"엄마, 형 말이 맞어?"


"음, 맞다."


"비행기는 밤이 캄캄하지 않나?"


"자동차처럼 불켜고 다니는데 뭐가 캄캄해."


"엄마, 형 말이 맞어?"


"으음, 맞네."


"비행기는 새도 아닌데 어떻게 하늘을 날아다녀?"


"멍청이, 그야 비행기니까 그렇지."



"못써. 동생한테 그런 말 하면."


"엄마, 형 말이 이젠 안 맞지?"


"으음, 반은 맞고 반은 안 맞는데."


"그럼 왜 날아다녀요?"


큰아이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응, 그건 너희들이 담에 더 크면 자세하게 알게 될 건데,

비행기가 새처럼 날아다닐 수 있게 기계장치를 해서 그런 거야.

그 기계장치는 공부를 많이 하면 알 수 있게 돼."


"거봐, 형도 틀리는 게 있지."


작은아이가 형에게 혀를 낼름했다.


"요게 그냥."


"에이, 그러다 또 싸울라고. 자아, 이제 그만 자자."


차은심은 두 아이를 눕혔다.


"아빠는?"


큰아이가 눈을 올려떴다.


"사진관에서 일하시지."


"아빠는 맨날 일이야."


작은아이가 방싯 웃었다.


"그래, 너희들 잘 키우려고 그러시지."


차은심은 두 아이의 눈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엄마는 안 자?"


"말 그만 하고 어서 자라니까."


차은심의 가슴은 울고 있었다.

이 어린것들에게 아버지가 없어지다니…… 그건 너무 기막힌 일이었다.

시종 긴장하고 불안한 생활이었지만 이런 일이 닥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일본이 패망하고,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갈 줄 알았었다.

일본의 패전은 임박해 오고 있었다.

관동군은 대거 중국전선으로 이동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영국군과 미군에게 계속 패배하고 있었다.

소련으로 돌아갈 날도 머지않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탐지되었단 말인가. 어디에서 허점이 생긴 것일까……
아이들은 곧 잠이 들었다.
차은심은 눈물을 참아가며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얼빈행 아침 첫차를 타야 했다. 짐은 작은 가방 하나로 줄였다.

짐 때문에 행동이 둔해져서는 안 되었고, 누구 눈에나 가벼운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보여야 했다.
날이 밝자마자 뒷방의 식모를 깨웠다.


"며칠 동안 길림의 친척집에 다녀올 테니까 너도 집에 가서 쉬어라."


차은심은 하얼빈과 정반대인 길림을 간다고 했다.


"아저씨 식사는 어쩌고요?"


"눈치 없기는. 아저씨도 함께 가시니까 그렇지."


"네에, 알겠어요. 며칠 계시다 오세요?"


"응, 닷새다."


"첫차로 갈 테니까 너도 어서 준비해라."


"네에, 고마워요 아주머니."


차은심은 아이들을 깨워 손수 낯을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다.


"엄마, 우리 어디 가?"


작은아이가 들떠서 물었다.


"응, 친척집에 간다."


"친척집이 어딘데?"


큰아이가 벙글거리며 물었다.


"응, 엄마 바쁘니까 자꾸 묻지 말어."


"아빠도 같이 가?"


작은아이의 물음이었다.

이 말은 그냥 피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아빠는 일이 바쁘시니까 우리만 가는 거야."


"아, 좋다. 아빠하고 같이 가면 재미없어. 아빤 무서우니까."


큰아이가 손뼉을 쳤다.


"그래, 그래, 아빠하고 같이 가면 우리 맘대로 못 놀아. 그치?"


작은아이도 깡충거렸다.
차은심의 가슴은 눈물로 젖고 있었다.


"으응, 아빠 어디 계셔? 인사하고 가야지."


큰아이가 집을 나서다 말고 두리번거렸다.


"응, 아빠는 바쁜 일로 누구 만나러 가셨다.

그냥 가도 괜찮아. 어서 가자."


"치이, 아빤 맨날 바빠."


작은아이가 서운한 얼굴로 입을 삐쭉했다.


'저것들이 무슨 마음이 쓰이는 것인가……'
차은심은 울컥 솟는 눈물을 참느라고 속입술을 깨물었다.
기차표는 2등으로 샀다. 3등을 타고 조사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기차 안에서 떠들면 안 돼. 시끄럽게 하면 일본 순사가 잡아가니까.

 쓸데없는 말하지 말고 얌전하니 가야 해. 알겠어?"


차은심은 두 아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엄한 얼굴로 일렀다.
두 아이는 시무룩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선에서도 그렇지만 만주에서도 <일본순사>는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호랑이보다 훨씬 더 위력이 컸던 것이다.
기차가 하얼빈을 향해 출발했다.

차은심은 창 밖을 내다보며 솟구치는 울음을 씹어넘기고 있었다.
'여보, 이게 뭐예요. 당신 혼자 두고……,

 아이들만 아니었으면 저는 안 떠날 텐데……

정말 미칠 것만 같아요……, 사랑해요……'
아무리 참으려고 애써도 눈물이 비어져 나와 차은심은 화장실을 찾아가씨다.

기차는 하얼빈까지 펼쳐진 몇백리 평원을 거세게 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한편 윤철훈은 지하고문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취조는 헌병대 도착 즉시 시작되었다.

그건 한시라도 빨리 조직을 일망타진하겠다는 의도였다.


"사진관을 차려놓고 무전송신을 해온 스파이! 여러 말 하지 않겠다. 하수인들을 대라."


뱀 같은 인상의 대위가 차분하게 말했다.


"……"


윤철훈은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을 때까지는 입을 열지 않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안 들리나? 하수인들을 대."


얼굴이 얇고 턱이 뾰족한 대위의 목소리가 약간 빳빳해졌다.


"……"


윤철훈은 첫 번 째 시도하고자 했던 것이 무위로 돌아간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며 헌병들을 걷어차고 도주하려고 했었다.

그건 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격을 유도해서 자신을 쏘게 하려는 것이었다.

가장 빨리 그리고 손쉽게 죽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차에서 내리기 전에 벌써 헌병 둘이 양쪽에서 팔짱을 단단하게 끼어버렸던 것이다.


"신사적으로 하려고 했는데 대접을 안 받겠다 그건가? 다시 묻는다, 빨리 하수인들을 대!"


눈이 유리알처럼 반들거리는 대위의 목소리가 팽팽하게 곤두섰다.


"……"


윤철훈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역전에서 밥장사를 하는 최규승과 인력거꾼 하 서방을

입에 올리지 않으리라고 또다시 결심하고 있었다.

자신이 죽으면 그뿐 그 사람들까지 희생시켜서는 안 될 일이었다.


"정말 피를 봐야 알겠나!"


마침내 대위가 감정을 폭발시키며 책상을 내리쳤다.


"……"


그 순간 윤철훈의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이발소와 음식점 주인을 하수인으로 끌어들이자는 생각이었다.

그들한테서 필요한 정보를 얻어냈다고 하면 타당성도 있고,

사실 그들을 통해 얻어낸 정보들을 실토하면 그들은 물론이고

그들에게 그런 말을 흘려준 장교들까지 걸려들게 되는 것이었다.

최규승과 하 서방을 보호하면서 왜놈들끼리의 분란을 야기시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너무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이봐! 이 새끼 지하실로 끌어가."


벌떡 일어선 대위가 윤철훈을 걷어차며 소리질렀다.
윤철훈은 가죽채찍고문, 고춧가루물고문, 전기고문을 차례로 당하며 아침을 먹고, 점심까지 먹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시 시간조정을 했다.

이발소와 음식점 주인을 끌어들이게 되면 그들이 조사받는 동안에 그만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아내가 아침 첫차를 탔다면 지금쯤 하얼빈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오후 취조부터는 입을 열기로 했다.
"자아, 또 시작해 보실까? 아직도 고문이 부족하신가?

걱정할 것 없어. 우린 폴란드에서 수입한 45가지의 고문방법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보다시피 기운 센 고문기술자들도 얼마든지 확보하고 있고.

네놈이 입을 여는 건 하수인들을 도망시키려는 의돈데,

그게 네놈 뜻대로 되진 않아. 오늘 아침 9시를 기해서 신경 전역에 비상령을 내렸으니까.

네놈이 버텨봐야 오늘 못 넘기고 입을 열게 만들 수 있어.

어때, 더 맛을 볼 테야, 실토를 할꺼야? 누군가, 하수인들이?"


대위가 낮고 싸늘하게 말했다.


"예, 저어……"


윤철훈은 대위를 힐끗 보며 주먹질에 맞고 터진 아랫입술에 침을 발랐다.


"좋아, 어서 말해."


대위가 긴장하며 의자를 바짝 끌어당겼다.


"저어……, 사쿠라이발소하고 아사히음식점 주인들이……"


"사쿠라이발소하고 아사히음식점 주인들? 그거 내지인들 아닌가?"


대위가 깜짝 놀랐다.


"예……"


"아니, 내지인들이 너하고 한패라는 거야?"


대위는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


"예, 그들이 군사정보를 빼내줬습니다."


윤철훈은 일부런 <군사정보>라고 못을 박았다.


"이런 죽일 놈들이 있나.

조센징한테 군사정보를 빼주는 매국노 짓을 하다니.

이봐, 당장 출동 준비. 이 놈을 꼼짝 못 하게 묶어둬."


대위는 시뻘겋게 흥분해서 소리쳤다.
윤철훈은 양쪽 손목과 발목을 쇠사슬로 묶는 건 그 어떤 자해행위도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윤철훈은 생각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이발소와 음식점 주인들은 그 사실을 적극 부인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것을 간단했다.

그동안 입수했던 중요한 군사정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그것을 전부 그들한테서 입수한 것으로 몰아대면 되는 것이었다.

그들은 올가미를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치겠지만

그러나 그들의 말보다는 자신의 말을 더 믿게 되어 있었다.


"어디 너희들끼리 한바탕 두들겨 패고 맞고 해봐라.

장교도 몇놈쯤 쇠고랑을 차보고."


윤철훈은 멍든 얼굴로 비식이 웃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죽지 못한 것이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그런 보복이라도 하고 죽는 것이 그래도 뜻있는 일이라 싶었다.

소련스파이에게 이용당한 일본인들과 군사정보가 흘러나가게 한 장교들.

전시하의 군사재판에서 그들은 사형을 면키 어려울 것이고, 재수가 좋아야 무기징역일 거였다.
윤철훈은 그동안 무선송신해 온 정보들을 간추려보았다.

만주 주둔 관동군의 실태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해서 보낸 것이 보람이라면 보람이었다.

관동군은 한마디로 종이호랑이였고 허깨비였다.

무적의 70만 관동군-그건 이제 허풍이고 위장에 지나지 않았다.

중국과 동남아 전선으로 엄청나게 투입되고 있어서 이제 지난날의 관동군이 아니었다.

그건 너무 놀라운 사살이었다. 정보를 수집한 사람이 놀란 형편이었으니

그 정보를 수신한 소련에서는 얼마나 더 놀라고 또 반가워했을 것인가.
어쩌면 임무가 거의 끝나가고 있는 시점에서 이런 불행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패전은 얼마 안 남은 것 같았다.

중국과 동남아 전선에서 패배가 거듭되고, 만주가 이렇게 비었는데 유럽전선에서 승리한

소련군이 만주로 진격하면 일본은 그야말로 사면초가, 패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무사한 것만으로도 천행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더 고통당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빨리 죽는 것이었다.


"이 새끼, 왜 거짓말이야! 네놈이 스파이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는데."


대위가 지하실로 뛰어들며 외쳤다.


"허, 그야 당연하지요.

스파이가 스파이라고 하면서 활동하는 법도 있나요?

그 사람들은 나한테 술 얻어마시고, 화투해서 돈 따먹고 하면서

자기들도 모르게 스파이 하수인 노릇을 했지요.

이 사실도 부인한다면 나한테 데려오세요.

그 사람들한테 어떤 군사정보를 얻었는지 하나하나 다 밝혀줄 테니까요.

그럼 그 사람들은 그 정보를 누구한테서 빼냈는지 알게 될 것 아닙니까?"


윤철훈은 태연하게 말했다.


"뭐, 뭣이라고. 이 놈이 아주 악질적인 방법을 썼네.

병신 같은 새끼들이 조센징놈의 꾀에 당하다니."


대위는 책상다리를 걷어차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한참이 지나 이발소와 음식점 주인이 지하실로 끌려 들어왔다.

풀죽은 그들은 윤철훈을 보자 자기들의 결백을 주장하듯 욕을 퍼부었다.


"이 개같은 놈아!"


"요런 쳐죽일 놈아!"


"당신들을 이용해서 미안하오."


윤철훈은 그들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는 기분으로 똑똑하게 말했다.


"저놈 말 들었지! 저놈이 이용했다는데도 너희들은 이용당하지 않았다는 거야?"


대위가 소리를 꽥 질렀다. 그 소리가 지하실을 크게 울렸다.


"글쎄, 군사기밀이 될 만한 것은 알려준 게 없다니까요."


이발소 주인이 부들부들 떨었다.


"예, 예, 저도 조센징한테 그런 것 알려준 게 없습니다."


음식점 주인도 떨며 말했다.


"병신 같은 새끼들, 조센징한테 이용이나 당하고.

스파이한테 이용당한 네놈들 죄가 얼마나 큰지 알기나 해?"


대위는 두 사람을 증오스럽게 노려보고는,


"이 새끼들 끌고 올라가 유치장에 처넣어. 대질심문은 이따가 하겠다."


그는 두 부하에게 일렀다.


"대위님,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대위님, 한번만 눈감아주십시오."


두 사람은 지하실을 끌려 나가며 절박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대위는 담배를 피워 물며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너 소속이 어디야? 공산당이야, 국민당이야?"


대위는 그런 행위를 하는 조선사람은 으레껏 중국의 그 어느쪽에 속한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윤철훈은 어떻게 대답할까를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굳이 소련이라는 것을 기피할 필요가 없었다.

괜히 공산당이나 국민당 어느쪽이라고 했다가 거짓말한 것이 드러나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고,

대위가 예상하지 못하고 있는 소련을 들이대 놀라는 꼴도 좀 보고 싶었다.


"쏘련이오."


"뭐, 뭐라고?"


대위는 윤철훈의 생각보다 훨씬 더 놀랐다.


"너 정말 쏘련이야?"


대위의 목소리가 칼날이었다.


"예."


"하, 이것 참!"


주먹으로 책상을 치는 대위는 무척 낭패스러운 얼굴이었다.

대위는 담배를 빡빡 빨고 나서 반도 안 탄 담배를 구둣발로 잉끄려댔다.


"이 새끼, 쏘련 어디로 송신했나?"


"블라디보스톡입니다."


"침투도 거기서 했나?"


"예."


"다른 조직이 또 있지?"


"그건 모릅니다. 저는 혼자였으니까요."


"잔소리 마라. 다른 조직을 대!"


"고정스파이가 고정스파이끼리 연락이 안 된다는 건 상식 아닙니까.

특히 쏘련조직은 단독활동입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몇놈이나 훈련을 받았나?"


"그때부터 저 혼자였습니다."


"사진관 개설자금도 그때 가져왔나?"


"예."


"다시 말한다.

여기서 포섭한 조센징 조직을 대."


"그건 정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주임무가 군사기밀 탐지였기 때문에 조산사람을 포섭해 보았자

아무 쓸모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교들의 출입이 잦은 고급 이발소와 고급 음식점의 주인들에게 접근한 것입니다."


"사진관에도 장교들 출입이 많았지?"


"예."


"여우 같은 놈. 정보수집을 많이 했나?"


"아닙니다. 위장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정보수집에는 별로 효과가 없었습니다.

사진관은 이발소나 음식점하고는 달라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지도 않고,

제가 조선사람이라 장교님들이 하시해서 감히 무슨 말을 붙일 수도 없었습니다."


윤철훈은 술술 말을 꾸며대고 있었다.


"한 달에 몇번씩이나 송신했나?"


"정규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전파를 탐지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정보들을 모아 한꺼번에 보냈습니다."


"여우같은 놈, 바로 그래서 네놈을 그리 오래 못 잡았던 거야.

이발소와 음식점에서 빼낸 정보가 뭐지?"


"주로 병력이동 상황이었습니다."


"그걸 그자들이 어떻게 알지?"


"그런 고급 영업소의 단골손님들은 거의가 장교님들이시고,

부대가 이동하면 장교님들도 이동해서 영업에 지장이 생기니까

그 주인들은 부대 이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장교님들이 이동을 앞두고 이발하고 술 드시면서 무심코

이동한다는 말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그런 말들 중에는 어떤 부대가 어느 곳으로 이동한다는

식의 중요한 정보가 적지 않았습니다."


윤철훈은 이발소와 음식점 주인 그리고 장교들을 한 올가미에 넣어 조이고 있었다.


"하, 이런 놈의 일이 있나!"


대위는 한숨을 푹 쉬며 담배를 빼물었다.
그 한숨소리에서 윤철훈은 승리의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넌 너 나름대로 수집한 정보를 벌써 다 송신했고, 넌 이미 잡혀 있다.

지금까지 대답은 사나이답게 잘했다.

 지금부터 묻는 말도 사나이답게 대답하라. 알겠나?"


대위가 다가와 윤철훈의 오른손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인 담배를 내밀었다.


"예, 알겠습니다."


윤철훈은 고분고분하게 행동을 취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자신을 믿게 해야 이발소와 음식점 주인 그리고 장교들의 올가미가 더 조여질 수 있었던 것이다.


"관동군이 어디로 이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중국전선입니다."


"다른 데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윤철훈은 <동남아전선>은 살짝 피해 섰다.

이건 완전히 유도심문의 시작이었다.

송신된 내용을 파악하려는 것이었고,

그에 따른 응급대책을 강구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관동군이 얼마나 된다고 알고 있지?"


"관동군 사령부에서 말하는 대로 70만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동안 부대이동 정보에 관심을 많이 쓴 모양인데, 얼마나 이동했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제가 짐작하기로는 한 3분의 1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윤철훈은 담배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이거야말로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절반이 넘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지만 슬쩍 3분의 1로 줄였다.


"3분의 1이라. 꽤나 정확하게 아는 편이군."


대위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윤철훈은 또 승리의 쾌감을 맛보고 있었다.


"너 같은 놈은 조센징인 게 아깝다."


대위는 이 말을 남기고 지하실을 나갔다.


"새끼, 건방지게 까부는군. 관동군은 허깨비군대라고 송신된 것이나 알아둬."


윤철훈은 담배를 맛있게 빨며 쓰게 웃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나흘 동안 이발소와 음식점 주인과 대질심문이 계속되었다.

윤철훈은 계획대로 그들을 몰아댔다.

그들은 그런 말 한 일 없다고 펄펄 뛰었지만 그때마다 몽둥이질이며 채찍질을 당할 뿐이었다.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런 정보를 흘린 장교들을 대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매를 견디다 못해 장교들의 이름을 대고는 했다.

수사는 윤철훈의 의도대로 그들 사이의 싸움으로 변해 있었다.
윤철훈은 저희들끼리 두들겨패고 물어뜯는 싸음을 느긋한 마음으로 즐기고 있었다.
윤철훈은 <특별수송자>가 되어 6일 만에 차에 실려 헌병대를 떠났다.

물론 윤철훈은 자신이 <특별수송자>인 것을 모르고 있었고,

알았다 하더라도 그 뜻이 무엇인지를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특별수송자>란 세균전부대에 생체실험용으로 보내는 그들의 암호였다.
윤철훈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기차를 탔다.

헌병 둘이 감시를 했고, 등뒤로 채워진 쇠고랑은 풀어주지 않았다.

윤철훈은 이제 마지막 길을 가는 거라고 생각했다.

전시상황 속에서 스파이는 재판이고 뭐고 없이 총살을 시키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이 심한 갈증처럼 보고 싶었다.

고문의 고통만큼 진한 그리움으로 보고 싶었다.

그것들이 애비 없는 한세상을……,

어둠 짙은 차창에 아내와 두 아이의 모습이 어리고 있었다.

윤철훈은 눈물을 씹으며 아내와 아이들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여보, 아이들을…… 얘들아, 건강하게……'


기차는 어둠 속을 줄기차게 달리고 있었다.

윤철훈은 이번 사건의 마무리에 더없이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게 자체 분란을 일으키게 만든 것도 통쾌했지만

최규승과 하 서방이 무사하게 된 것이 무엇보다 기뻤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이 빨리 그리고 편하게 죽는 것뿐이었다.
윤철훈은 줄곧 기차에서 뛰어내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헌병은 변소까지 따라다녔다.
새벽에 기차에서 내리고 보니 하얼빈시의 빈강역이었다.


'왜 여기로 데려온 것일까?……'


너무 뜻밖이라 윤철훈은 잠시 멍해졌다.

하얼빈, 아내가 좋아한 도시였다.

도시의 형태는 모스크바를 본뜨고 건물들은 유럽풍으로 지은 신하얼빈은

길바닥까지 돌을 네모지게 깎아 반원형 연속무늬로 치장한 도시였다.

아내는 그런 도시의 꾸밈보다는 바로 도시 옆을 흘러가고 있는

그 폭넓은 송화강과 강변에 줄지어 선 가로수 그리고 송화강에 지는 노을을 좋아했다.

잠시 거쳐가면서 다시 오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윤철훈은 자동차에 실려가면서도 아무리 생각해 보았지만 왜 하얼빈으로 데려온 것인지

짚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윤철훈은 헌병대에서 내렸다.

조사를 다시 하나 하는 생각에 윤철훈은 가슴이 섬뜩해졌다.

유치장에 갇혀서 하루를 보냈다.

점심도 굶기며 하루종일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늦은 저녁밥을 먹고 윤철훈은 또 차에 태워졌다.

아무리 노려도 빨리 그리고 편하게 죽을 기회는 오지 않았다.
어느 건물 안에서 차를 내렸다.

 헌병 둘이 윤철훈의 팔짱을 단단히 끼었다.

윤철훈은 그들을 따라 어두운 마당을 가로질러 계단으로 내려갔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의 불빛은 너무 흐려 계단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헌병 둘이 문을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불빛이 밝아졌다. 또 문이 나타나면서 헌병 하나가 지키고 있었다.

지하실에서는 습기와 함께 곰팡이냄새가 났다.
두 번 째 문을 통과하자 복도와 함께 양쪽으로 사무실 같은 것이 나타났다.

 아주 넓은 지하실이었다. 왼쪽 첫 번 째 사무실로 들어갔다.

네다섯 명의 헌병들이 앉아 있다가 그들을 맞이했다.
윤철훈을 데리고 온 헌병 중의 하나가 서류를 내밀었다.

서류 확인이 끝나자 두 헌병은 돌아가씨다.

윤철훈은 다시 두 헌병에게 끌려 복도로 나왔다.

윤철훈은 오른쪽 두 번 째 방으로 끌려갔다.

방으로 들어서던 윤철훈은 흠칫 놀랐다.

사람들이 열대여섯쯤 있었던 것이다.

윤철훈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쇠사슬에 발목이 묶였다.

윤철훈은 그들이 모두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들은 거의가 얼굴에 피멍이 잡히고 옷에 피얼룩이 든 채 맥이 빠져 있었다.

그들을 헌병 하나가 지키고 있었다.
헌병들은 한 시간 간격으로 교대를 하면서 그들이 서로 말도 못하게 하고 앉지도 못하게 했다.

그들은 밤이 깊어 지하실에서 끌려나왔다.

그들은 뒷문이 달린 뚜껑 덮은 차에 밀려 올라갔다.

헌병 둘이 타고 뒷문이 닫히면서 차가 출발했다.
한동안이 지나자 차가 심하게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하얼빈 시내를 벗어나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것이었다.


'그래, 이제 죽으러 가나보다……'


윤철훈은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차가 한 시간 남짓 달려 덜컹거리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차가 멈추고, 철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또 차가 멈추고, 철문 열리는 소리가 나고 하기를 네댓 차례 했다.
그들은 차에서 끌려내렸다.

차는 지하실 입구에 멈춰 있었다.

그들이 끌려간 곳은 목욕탕이었다.

헌병들은 간 곳이 없고 육각몽둥이를 든 건장한 청년들이 그들을 지휘했다.


'목욕을 시켜? 이곳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곳인가?'


총살을 시키리라는 예상이 빗나가고 전혀 엉뚱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

윤철훈은 갑자기 의심이 솟았다.

그렇다고 육각몽둥이를 휘둘러대는 거친 청년들에게 물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런 말을 꺼내면 그 청년들은 대답 대신 육각몽둥이로 입을 부술 것 같은 기세였다.
목욕을 끝낸 그들은 번호가 찍힌 푸른 죄수복으로 갈아입었다.

윤철훈은 자신의 번호를 내려보았다. 2983.


'여기가 감옥인가? 아닌데, 감옥이 아닌데.'


한밤중에 죄수들을 목욕부터 시키는 감옥이 있을 리 없고, 목욕시설도 너무 좋았던 것이다.

윤철훈은 의심이 부쩍 더 생겼다.
그들은 2층 감방으로 끌려갔다.

윤철훈은 3인감방으로 밀려 들어갔다.

 눈 높이로 난 구멍이 난 철문이 쿵 닫혔다.
윤철훈은 다른 두 사람이 중국공산당 지하공작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도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이지 무척 궁금해했다.
이튿날 아침밥을 먹자마자 윤철훈네 감방문이 덜컹 열렸다.


"셋 다 빨리 나와. 예방주사 맞으러 가야 하니까."


육각몽둥이를 든 청년 셋이 버티고 서 있었다.
세 사람은 청년 셋에게 팔을 붙들려 각기 다른 방향으로 끌려갔다.


"자아, 호열자 예방주사를 맞게."


오십객의 남자가 윤철훈의 팔에 주삿바늘을 꽂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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