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68. 걸어서 반 만 리

오늘의 쉼터 2017. 7. 11. 16:27

168. 걸어서 반 만 리



전동걸은 3개월 동안의 군사훈련을 마쳤다.

조선의용군의 기본 군사훈련은 혹독하리만큼 강도가 높고 맹렬했다.

사격이며 분대전투 같은 훈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유격전 훈련은 가히 살인적이라고 할 만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지니지 않고 완전무장을 한 채 태항산록

그 끝없는 골짜기와 봉우리를 열흘 이상씩 타넘는 것이었다.

먹을 것은 어떻게 해서든 산종에서 구해야 했다.

산열매도 따먹었지만 절대로 따먹으면 안되는 마을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끄고 있는 과실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생업으로 삼아오는데다 수확량도 엄청나 그 세 가지는

 태항산 명물러 널리 알려져 있을 정도였다.

그 열매들을 단 하나도 손댈 수 없는 것은 <인민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민을 적적으로 돕되 인민의 것은 지푸라기 하나도 손대선 안된다.

이것은 중국공산당 군대인 팔로군의 절대적 강령이었다.

일본군 척결을 위해서 팔로군과 합작투쟁을 벌이고 있는 조선의용군은

당연히 그 강령을 따라야 했던 것이다.

팔로군은 인민의 재산만 축내지 않는 것만이 아니었다.

이동중에 민박을 하더라도 절대로 방에 들어가는 일이 없었고,

기껏해야 헛간을 빌리거나 처마 아래서 이슬이나 서리를 피했다.

밥도 다 손수 해먹고 떠날 때는 집 안 청소며 헌 울타리 같은 것도 고쳐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팔로군은 태항산을 중심으로 한 해방구 안에 사는 인민들에게

일체의 세금을 물리지 않으면서 농번기와 추수철에는 농사일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일본군과 장개석의 국민당군으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주었다.
팔로군은 자신들의 그런 헌신적 행위에 대해서 누구나 이렇게 말했다.
우리 팔로군은 인민의 군대다.

그리고 우리들 자신이 인민이기 때문이다.

팔로군은 두 개의 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일본군이었고, 다른 하나는 국민당군이었다.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한 국민당군과의 국공합작은 작년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팔로군의 세력이 자꾸 확장되어 나가자 위협을 느끼게 된 장개석은 일본군들로 하여금

태항산을 집중공격하도록 유서 팔로군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바로 인민들이었다

인민들의 지지가 늘어나는 만큼 팔로군의 세력은 확장되는 것이었다.
배를 곯으면서도 신병들은 불평 한마디 할 수가 없었다.

교관이며 다른 고참병들도 자신들하고 똑같이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먹이를 현지에서 해결해 가며 굶어가며 싸워야 하는 유격전에 적응하기 위한 훈련이니

불평이 나올 수 없기도 했다.

그리고 신병들 모두가 강제로 끌려온 것이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려고

사선을 넘어 모여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유격전 훈련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시행되고 있었다.

첫째가 전반적 유격전술을 익혀 유격전용사의 기본을 갖추게 하는 것이었다.

둘째가 장대하게 뻗은 태향산록의 중요한 지점들의 지리를 익히는 동시에

일본군의 전방거점을 확인시키는 것이었다.

셋째가 민간인들을 상대로 팔로군과 똑같은 헌신적 생활을 몸에 익히는 것이었다.

넷째가 기동성을 발휘할 수 있는 체력단련과 함께 정신력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이틀 동안 꼬박 굶는 것은 물론이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게 하면서 줄기차게 산을 넘고

골짜기를 건널 때도 있었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어쩐지 물이 흘러가는 개울 옆을 지나가기도 했다

중국의 강물들은 거의가 투신자살을 하려 해도 망설여질 만큼 탁하지만 산중이라서 개울물은 맑았다. 그 물을 마시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는 고통을 참아내는 것, 그것이 훈련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사람의 시체를 뜯어먹고 산다는 승녕이고기든 까마귀고기든 못 먹을 것이 없었다.


"왜 채항산에 승냥이떼와 까마귀떼가 많은지 아십니까?

근년 사오년 동안에 사람들이 그만큼 많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쪽도 그렇지만 왜놈들도 많이 죽었습니다."


교관이 승냥이고기를 뜯으며 태연하게 하는 말이었다.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만드는 그 끔찍한 말을 들으며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

그것도 유격전 훈련 중의 하나였다.
조선의용군 본부는 화북에서도 장대하기로 이름난 태항산록 속의 오지산 아래

펼쳐진 드넓은 분지의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 군정학교로 되돌아온 신병들은 마침내 살아났다는 듯 환호성을 질렀다.


"신병 동무 여러분, 그 어려운 유격전 훈련을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이렇게 당당하고

용맹스럽게 끝내준 것에 대해 격려와 함께 고마움을 표합니다.

지금부터는 휴식입니다. 맘껏 쉬십시오."


교관이 손을 흔들며 웃었다.


"와아아-"


신병 20여 명은 다 같이 함성을 질렀다.
교관이 돌아서고 그들은 해산했다.

전동걸은 마구 뛰기 시작했다.


"여보게 동걸이, 나 좀 보세."


사혁회 회장 최우한이 소리쳤다.


"여태까지 신물 나게 봤는데 뭘 또 봐."


전동걸이 고개만 돌리고 외쳤다.


"어딜 가는데 그래?"


"사람이 눈치 없기는."


"그 꼴로 임 보러 가?"


"한시가 급해."


"완전히 미쳤군."


"급한 건 내가 아니라 저쪽이야."


"저, 저 말하는 것 보라니. 빨리 오게."


"알겠네."


최우한은 무거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훈련을 같이 받은 회원은 둘뿐이었다.

지요꼬까지 합해 네 사람이 태항산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나머지 회원들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훈련을 떠나 있는 동안 어떤 회원이 도착하니 않았나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만약 아무도 더 오지 않았다면 나머지 회원들은 더 이상 못 오게 된 것이 분명할 거였다.

 아무 일도 없고서야 이토록 늦어질 리가 없었던 것이다.

전원이 무사하게 태항산에 도착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반수밖에 무사하지 못한 것은 너무 큰 손실이었다.


"지요꼬!"


전동걸은 선전부로 뛰어들며 외쳤다.


"어머, 동걸 씨!"


무슨 일을 하고 있던 지요꼬가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일손을 놓고 마구 전동걸에게로 뛰어갔다.
둘이는 서로 얼싸안았다.


"아, 보기 좋습니다."


"연극의 한 장면 같은데요."


그것 참 부럽소이다.


"사람들이 웃으며 한마디씩 했다."


"아이, 그러면 부끄러워 오래 못 안잖아요."


지요꼬가 전동걸의 품에서 벗어나며 사람들에게 눈을 흘겼다.


"부끄럽긴요. 여긴 해방굽니다.

생존의 자유를 보장하는 동시에 사랑의 자유도 보장하는 해방구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예 고맙습니다 이 정도면 흡족합니다."


전동걸이 능글능글 웃으며 받아넘겼다.


"훈련이 힘들었지요?"


선전부장이 담배를 권하며 물었다.


"아닙니다,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이제 비로소 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입니다."


전동걸의 진지한 대답이었다.


"호, 참 대단하시군요.

유격전 훈련을 받고도 그리 끄떡없으니…"


선전부장은 전동걸을 새삼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겨렸다.


"체력도 정신력도 대단하시군요."


다른 대원이 말했다.


"아닙니다. 고관님과 고참병들이 꿋꿋하시니까

저희 신병들이야 꼼짝 못하고 참아낸 거지요."


전동걸은 담배연기를 뿜으며 웃었다.

그동안의 훈련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그의 얼굴에 잘 드러나 있었다.

이제 전동걸의 얼굴에서는 동경에 있을 때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린 데다가 살이라고는 붙어 있지 않았다.


"부장 동무, 혹시 그동안에 저희 회원들은 더 오지 않았습니까?"


전동걸이 이야기를 바꾸었다.


"예, 더 없었소."


"그것 참…"


전동걸의 얼굴에 어둠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단념하는 게 좋을 거예요."


지요꼬의 말이었다.


"전 그만 실례하겠습니다."


전동걸이 몸을 일으켰다.


"지요꼬 동무도 함께 가시오. 일과도 다 끝나가는데."


선전부장이 지요꼬에게 눈짓했다.


"네, 고맙습니다."


지요꼬가 인사하며 발딱 일어섰다.
태항산의 연봉들이 석양빛에 현란한 색조로 물들고 있었다.

오지산의 다섯 봉우리는 정말 손가락 다섯 개가 하늘을 어루만지듯 하는 형상으로

석양빛을 받아 더 뚜렷해지면서 신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것 참 이상하네. 다 사고를 당한 걸까?…"


전동걸은 먼 산줄기를 바라보고 걸으며 중얼거렸다.


"아니에요, 중도포기한 사람도 있을지 몰라요."


지요꼬가 침착하게 말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소."


"더 기다리지 않는 게 좋아요.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어요.

조직부에서도 이젠 단념하는 눈치예요."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 참 안됐는데…"


전동걸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난 그때가 좋았어요."


지요꼬가 전동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길 옆의 옥수수밭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그 힘에 전동걸은 끌릴 수밖에 없었다.
지요꼬는 전동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입맞춤을 하기 시작했다.
전동걸은 지요꼬를 꼬옥 끌어안으며 봉천의 그날 밤을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 보겠소."


입술을 떼며 전동걸이 말했다.


"보면 어때요. 우린 공인받은 사인걸요."


지요꼬는 전동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자자, 이따가. 이 옷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 난다고…"


"괜차노아요, 다 당신 냄새니까."


그날 밤 이후 니요꼬는 단둘이 있을 때는 꼭 당신이라고 했다.

그때마다 전동걸은 이미화의 모습을 보았다.


"자아, 그만 갑시다. 최우한 동무가 기다리고 있소."


"난 여기가 좋고도 싫어요."


전동걸에게 끌려 옥수수밭을 나오며 지요꼬가 투정 부리듯이 말했다.


"알고 있소. 마음대로 사랑을 못하니까 싫으시겠지."


지요꼬가 눈을 곱게 흘기며 전동걸의 손을 꼬집었다.


"어떻소, 선전부 일이."


전동걸은 지요꼬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일이 새롭고 보람도 있어요."


지요꼬는 밝은 웃음과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마음에 든다는 뜻을 더 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잘됐소. 이제 총 쏠 생각 같은 건 하지 말고 그 일을 열심히 하시오."


지요꼬도 제식훈련과 사격훈련까지는 남자들과 꼭같이 받았다.

팔로군의 규정에 따른 것이었다. 팔로군에서는 남녀차별이 전혀 없었다.

권리의 차별이 없으니까 의무의 차별도 없어서 군인으로서 기본 훈련을 남녀가 똑같이 받았다.

그렌데 지요꼬는 기본 훈련을 받고 나서 선전부에 보직을 받았지만 자꾸 전투요원이 되겠다고 나섰다. 그 저의가 뻔해 전동걸은 비식비식 웃기만 했다.

조직에서는 지요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체력 부족이 그 이유였다.

그 명백한 이유 앞에서 지요꼬는 더 어쩔 수 없이 선전부로 갔다.
지요꼬가 선전부에 배치된 것은 그 학벌이 십분 참조된 것이었다.

지요꼬가 보직을 받으면서 조선의용군에는 일본 여자가 둘이 있었다.

한 대원은 초창기부터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최우한은 그동안 말끔하게 목욕을 하고 숙소에서 편안히 누워 있었다.


"최 동무, 고생 많으셨지요?"


지요꼬가 최우한과 악수를 했다.


"아이고 말도 말아요,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소."


최우한은 고개를 내 둘렀다.
지요꼬는 전동걸과 최우한의 반응이 너무 다른 것에 흠칫 놀랐다.

아까 전동걸이가 그렇게 의연하고 당당한 태도를 보여 여러 사람들이 다 같이

호감을 마타낸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웠던지 몰랐던 것이다.


"연인과 해후한 기분이 어떻소? 저 친구 아까 날 떼놓고 정신없이 도망갔는데."


최우한이 짖궂게 웃었다.


"아주 달고 고소해요. 이따가 만나요. 빨리 목욕하세요."


지요꼬는 생긋 웃으며 돌아섰다.


"이거 참, 역시 사람속은 모른다니까. 지요꼬가 자네한테 저리 반할 줄 어찌 알았겠나."


최우한이 벌렁 뒤로 드러누웠다.


"말 말게, 괴로우이."


최우한은 자신도 모르게 이 게 대꾸하고는 깜짝 놀랐다.

가슴 양쪽에 자리 잡고있는 이미화와 지요꼬 때문에 흘러나온 말이었다.

전동걸은 서둘러 목욕탕으로 갔다.
전동걸은 그날 밤을 생각했다. 어떻게 피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조사는 심하고, 부부행세는 해야 하고 , 한 방에 누워있으니……"


모두 평양의 대동상회는 꽤나 큰 잡화상이라서 접선하기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손님으로 들어가서 물건을 고르며 접선하고, 몇 가지 물건을 사가지고 나오면

그처럼 자연스러운 위장이 없었던 것이다.


"천진의 일우상회를 찾아가시오. 암호는 대동강 나룻배요."


평양에서 머물 때까지만 해도 그저 연인으로 위장했다 경의선을 타고

신의주에 이를 때까지만 해도 역시 그랬다.


"동걸 씨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요."


국경을 넘기 전에 검사가 시작되자 지요꼬가 한 말이었다.


"봉천, 용무가 뭐요?"


지요꼬가 한꺼번에 내민 기차표 두 장을 보며 이동경찰이 물었다.


"봉천에 가는 게 아니에요. 서주에 주둔하고 있는 동생 면회를 가는거예요."


"아! 동생이 서주에서 보국층성하고 있군요. 당연히 면회를 가셔야지요."


이동경찰의 태도는 금방 달라졌다.


"그런데. 저분은…"


이동경찰의 날카로운 눈이 전동걸에게 멈추었다.


네, 제 남편이에요.


"조선사람… 같은데요…"


"네, 조선사람이에요. 왜, 안되나요?

총독 각하께서 주창하시는 내선일체 혼인론을 실행한 것인데요."


지요꼬는 기분 나쁘다는 듯 이동경찰을 꼬나보았다.


"아, 아닙니다.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원로에 편히 가십시오."


이동경찰은 황급히 기차표를 돌려주고 다음 좌석으로 가버렸다.
지요꼬는 기차표를 손가방에 넣고 있었고, 전동걸은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지요꼬의 손가락 하나가 전동걸의 허벅지를 살살 긁고 있었다. '

어때요, 어때요. 내 재주가 어때요',

하는 것처럼. 전동걸은 슬며시 소을 옮겨 지요꼬의 선을 꼬옥 잡았다. '

잘했소, 잘했소, 아주 잘했소', 하는 것처럼.
안동역의 조사에서도 그런 식으로 거뜬하게 넘어갔다.

봉천역에 내렸는데 출찰구를 지키던 경찰이 전동걸을 붙들었다.

거시서도 지요꼬는 매끈하게 해치웠다.
북경행 기차를 타려면 하룻밤을 자야 했다.


"어떻게 하지요? 여관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면."


"부부라면서, 방 따로 쓰는 부부도 있소?"


전동걸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말해 버렸다.
그리고 한 방에 들어갔다.

요와 이불이 한 채밖에 없는 것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위험한 길을 나선 이국 땅의 첫날 밤에 부부가 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것을 실천하듯이 한 몸이 되고 말았다.


임"신하면 어쩌지?"


전동걸이 지요꼬를 안은 채 말했고


"그렇게 바보로 보여요?"


지요꼬가 전동걸의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며 대꾸했다.
복경에서 바로 천진으로 기차를 갈아탔다.

일본을 벗으로 생각한다는 일우상회의 간파부터가 철저한 위장용이었다.

일우상회의 주인도 평안도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정해 준 숙소에서 이틀을 보내고 어떤 영감님을 따라 북경으로 돌아왔다.

북경 만주산 뒤의 은거지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태항산으로 갈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었다.

거시서 들으니 조선의 용군에서는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2년 전부터

조선사람들과 선이 닿는 비밀조직을 광범위하게 가동하고 있다고 했다.
다섯 사람이 안내원을 따라 길을 나섰다.

일본여자가 태항상으로 조선의용군을 찾아가다니…,

지요꼬는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지요꼬는 더듬거리는 조선말을 빨리 익히려고 애를 썼다.

회원들 사이에서도 기억력 좋기로 소문났던 지요꼬는 하루가 다르게 말을 잘 익혀나갔다.
채항산까지는 직선거리로만 쳐도 3천 리라고 했다.

그런데 일본군들을 피해 가며 안전지대로 가야 하기 때문에 이리저리 돌다보면

길이 얼마나 더 멀어질지 보른다고 했다.

그 길을 처음서부터 끝까지 걸어서 가야 된다는 것이었다.
"어느 지점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일본군의 경계선을 넘는 루트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사람 수가 두 명을 넘지 않을 때, 또는 긴급한 경우에만 쓰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아주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차를 세 명 이상이 이용한다는 것은 좀 곤란한 문제 아니겠습니까.

일본이 중국 대륙을 절반쯤 점령한 것을 놓고 흔히들 일본의 중국 점령이란

점과 선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그게 무슨 뜻인고 하니 점이란 도회지를 말하는 것이고 선이란 철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본군은 중국의 절반 중에서도 도히지들이나 철도밖에는 점령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일본이 사력을 다해 병력을 투입해대도 일본군의 점령지역 안에서도 일본군을

아직까지도 보지 못한 중국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실정입니다.

우리는 그 허점을 이용해서 점과 선을 피해 도보로 가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안전한 대신 시일이 많이 걸리고, 여러분들이 고생하시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을 안내원 하나가 위험을 무릅써가며 일을 마치는 시일이 대개 보름 걸립니다.

그런데 도보로 가면 네다섯 달이 걸리지만, 안전도에 있어서나, 안내원 활용의 효율성에 있어서니

도보가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한 가지 여러분들이 고생하시는 문제인데, 그것도 헛고생이 나닌 것을 명백히 알아두셨으면 합니다.

여러분들은 군인이 되기 위해 이길을 택하셨습니다

태항산에 가면 엄청나게 힘든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 훈련을 이겨내자면 미리 한 4,5천 리 걸어 신체를 단련해 두는게 좋습니다.

그리고 걸으며 걸으며 산천 구경을 실컷 하십시오.

세상만사 음양이 있는 법이니 여러분들은 음도 양으로 바꿀 줄 아는 훈련을

지금부터 시작하시는 겁니다.

여기는 만만디의  땅 중국입니다.

모두 마음을 느긋하게 가지십시오."


안내원의 논리적이면서도 구수한 설명이었다.
곧 겨울이 시작되었다. 겨울옷을 사입어가며 날마다 걸었다.

아무리 춥고 눈이 많이 오는 날이라고 해도 길을 떠났다.

단 3,4리를 걷더라도 장소를 옮겨야만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전동걸은 그런 것을 다 요령으로 받아들였다.
성을 황이라고만 하는 젊은 안내원은 공산주의 이론에도 밝았고,

특히 세계정세에 통달하고 있었다.

조선의용군에서 그런 교육을 시킨다고 했다.

밤이면 그에게 중국의 복잡한 상황에서부터 세계정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건 단순히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의용군이 될 예비교육이기도 했다.

그러나 걷는 것이 완전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일본군의 망대 아래를 밤중에 통과하기도 했고,

또 어느 때는 철길을 가로질러 건너기도 했다.

아직 일본군의 점령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있었다. 그래도 걷는 것은 끝나지 않았다.

석 달이 넘으면서 지요꼬는 종담을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조선말이 숙달되어 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배우려는 의욕이 뜨거운데다 날마다 전동걸에게 매달리듯

팔짱을 끼고 걸으며 배우는 것이니 효과가 안 날수가 없었다.
봄이 짙어지면서 광막한 대지가 초록색으로 뒤덮이고 온갖 꽃들이 낭자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들 모두는 중국말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안내원이 이야깃거리가 동나게 되자 중국말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는 이러다가 일본말 잊어버리겠어요."


지요꼬의 엄살이었고


"잘됐지요 뭐. 어차피 남편 삼으면 조선여자 되는 것 아닙니까."


안내원의 말에 모두 소리내어 웃었고, 지요꼬는 놓아서 전동걸의 팔을 더 꼭 붙들었다.


"저어기 보이지요, 저 산. 저게 태항산입니다."


어느 날 마침내 안내원이 팔을 뻗치며 손가락질했다.

아슴하게 먼 저쪽에 긴 산줄기가 누워 있었다.


"와아아!"


그들은 모두 어린애들처럼 환성을 질렀다.


"아직 마음들 놓지 마세요.

오면서 많이 보았지만 빤히 보이는 것도 가다보면 아주 멀지 않습니까.

산은 높아서 아주 멀리서도 보이니까 더 그렇습니다."


안내원의 말이었다.


"저게 아무리 멀어도 북경보다는 가깝겠지요."


지요꼬가 이렇게 말해 사람들을 웃겼다.
거기까지 여섯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얼굴들은 햇볕에 그을리고 말라 거칠어져 있었다.

그러나 눈들이 빛나고 있어서 그런 모습들은 지쳐 보이는 게 아니라 강인해 보였다.

변하지 않은 사람은 안내원 하나였다.

그는 애초에 막일꾼이나 농사꾼 같은 모습이었으니 변하고 말고 할 것이 없었던 것이다.
태항산 속으러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곳이라고 해서 안전하지가 않았다.

산마을들을 따라 일본군의 망루들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저놈들이 저희들 말대로 동계토벌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고는 팔로군과 조선의용군을

발붙이지 못하게 하계다고 저리 망루나 포대를 세운 겁니다.

하나 저걸 무서워하는 조선의용군이나 팔로군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태항산록이 워낙 넓고 깊어 활동할 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이렇게 자유롭게 오가는데 우릴 잡겠다는 저놈들은 오히려 저 속에서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꼴이지요.
안내원이 비웃으며 한 말이었다.
태항산록은 산줄기가 겹겹으로 겹쳐져 펼쳐지고 뻗친 장대한 산악이었다.

그런데 나무들은 그다지 풍요롭지가 못했다.

산마을들은 두 산줄기사이의 평지나 골짜기의 산자락 또는 분지 같은 곳에 이루어져 있었다.

그 마을 마다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계단식으로 밭을 일군 것이었고,

감나무 호도나무 대추나무를 꼭 과수원 하듯이 많이 가꾸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특색은 마을들이 모두 불탄 흔적과 허물어지고 무너진 데가 많다는 점이었다.
"저게 모두 일본군들이 초벌 나와서 한 짓들입니다.

무고한 사람들도 많이 죽였지요.

전과를 올리지 못하니까 무고한 인민들에게 분풀이를 한거지요.

적진아퇴로, 일본군이 태항산을 넘어오면 조선의용군과 팔로군은 미리 태항산을 벗어나

산록 주변의 크고 작은 마을들을 상대로 선전, 선동 활동에 들어갑니다.

그렇게 되니 열이 받친 일본군들은 엉뚱하게 인민들을 살해하고 방화하는 겁니다.

다음에 차차 보게 되겠지만 저쪽, 일본군의 점령지 쪽의 태항산 줄기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살아 있는 게 없다시피 합니다.

토벌을 한다고 일본군들이 끝없이 불을 질러댄 겁니다."


자꾸 걸음이 빨라지며 안내원이 설명하고 있었다.
마을들을 지나고, 골짜기를 올라 산등성이를 넘고, 다시 나타나는 마을을 멀리 바라보며

 또 산등성이를 넘으며 산은 자꾸 깊어져 가고 있었다.

서산에 해가 뉘었뉘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까마귀떼가 검은 바람을 일으키며 휘돌다가 먼 숲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비탈진 수수밭과 조밭사이로 오솔길이 구불구불 나 있었다.

안내원의 걸음이 어찌나 빨라지고 있는지 그 뒤를 따르느라고 다른 사람들은 숨을 헉헉거렸다.

그들은 그때서야 안내원이 자신들의 느린 걸음에 맞추어주었다는 것을 알았다.
고식밭이 끝나자 비탈의 경사가 급해졌다.

오솔길은 더 구불거렸다. 경사가 어찌나 심한지 서너 발짝 앞의  땅이 코에 부딪칠 지경이었다.

안내원은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그들만 비탈길을 오르느라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디선가 까마귀떼의 까욱거리는 음산한 울음소리들이 들리고 있었다.

몸집 작은 새들의 짹짹거림도 숲속에서 들려왔다.

작은 산꽃들이 잡풀들 사이에서 앙증맞게 피어 있었다.
그들은 한동안 바탈길을 올라채서 고갯마루 가까이에 이르렀다.

안내원은 돌 위에 편안하게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수고들 하셨습니다. 마침내 다 왔습니다."


안내원은 왼쪽 팔을 들어 가리키며 벌떡 일어섰다.


"와아!"


"아아…"


"어머나"


그들은 고갯마루에 올라서는 대로 탄성을 울렸다.

그들의 눈앞에 확트인 조망은 아주 딴 세상이었단 것이다.
태항산록이 줄기줄기 굳건히 뻗어가며 우람한 봉우리들을 받치고 있는 속에

드넓은 문지가 아늑하게 깃들여 있었다.

깊고 깊은 산속에 그렇게 넓은 분지가 펼쳐져있는 것은 자연의 오묘함이 아닐 수 없었다.
감나무 호도나무가 무리지어 여기저기 소담한 숲들을 이루고 있는 사이로 하얀 모래밭이

뱀 형상으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가운데로 석양빛을 반사하며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 강을 끼고 띄엄띄엄 자리잡은 마을들 주위로는 곡식밭들이 초록빛 비단을 펼쳐놓은 듯

곱고 싱그러웠다.

그 아름다운 전원풍경 속에 조선의용군 본부며 팔로군 군구사령부가 있다는 것은

ale어지지 않았다.


"다들 가시지요. 저래봬도 또 한 20리는 걸어가야 합니다."


안내원이 걸음을 옮겨놓았다.


"아이고, 이제 2백 리도 단숨에 가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뜬 소리로 말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비탈길을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반 만리를 걸어온 그들의 다리에서는 새로운 힘이 솟고 있었다.
전동걸은 목욕을 끝내며 그때의 회상에서 벗어났다.

그는 얼굴을 닦다말고 자신의 알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두 다리에 불끈 힘을 주었다. 허벅지에 불뚝불뚝 근육이 드러났다.

여기 오기 전에는 아무리 힘을 주어도 밋밋했던 허벅지였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그 근육에서 비로소 독립군이 된 것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하면, 학병으로 끌려갈람사 독립군이 돼야겄제. 나가 인자 허는 말인디…,

니 아부님도 독립군니셨니라…"


어머니의 담담한 말이었다.


"예에 그, 그럼 산소는 어딨나요."


"독립군이 산소가 워디 있어. 만주 땅 그 어디서 돌아가신 것이제."


그리고 어머니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독립군이 산소가 워디 있어…'


그 말은 지금도 귓속을 쟁쟁히 울
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남편의 산소도 모르며 서러움을 삭이고 살아온 강인함 때문이었을까.

자신을 떠나보내면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이틀을 휴식한 다음 전동걸은 출동 명령을 받았다.

군복을 벗고 사복을 입으라고 했다.

조선의용군 군복은 팔로군과 똑같이 초록색이었다.

휴대하는 무기는 권총과 단검이었다.

동행은 고참병 한 명이었다.

둘 다 허름한 사복에 허름한 배낭. 누가 보거나 중국인 촌뜨기요 농사꾼이었다.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간다는 임무 하달이 없었다.

그건 고참병이 이미 알고 있을 거였다.

전동걸은 적진 침투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코가 뭉툭하면서 강인한 인상인 고참병은 처음부터 발 빠르게 걸었다.

유격전 훈련을 하면서 유격전의 성패는 기동성에 달려 있다고 수없이 강조했다.

조선의용군들은 하루에 평균 150 리를 갈 수 있는 주력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적이 100리씩 추격해 온다면 50리의 차이는 이틀 만에 완전히 적의 배후를 칠 수 있게 되고 ,

옛날이야기에 흔히 나오는 축지법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조선의용군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조선의용군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 하루 평균 2백 리를 걷는다고 했다.

어쩌면 그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일 지도 모른다고 전동걸은 생각했다.

키도 별로 크지 않은 사람이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5분이 미처 못돼

간격이 벌어져 뛰어야 하는 것이었다.

신병들 중에서는 잘 걷는 축에 들었는데 그 사람 앞에서는 어림없었다.

분지를 벗어날 즈음에 의용군 20여 명이 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 보였다.

농사짓는 당번이 된 부대원들이었다. 조선의용군은 자급자족 원칙이었다.

싸우면서 농사를 짓는 것이었다.
고참병은 말 한마디 없이 줄기차게 걷기만 했다.

서너 시간을 쉴 새 없이 걸으니 전동걸의 다리는 뻣뻣하게 굳어져 오고 있었다.

그렇다고 쉬어가자고 할 수도 없었다. 어떤 임무수행을 겸한 시험인지도 몰랐던 것이다.

점심때가 되어 고참병은 꽤 번화한 동네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바로 식당으로 들어갔다.


"힘들지요."


전동걸의 물 잔에 차를 따라주며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아, 아닙니다."


전동걸은 당황해서 대답했다.

고참병은 서른 살쯤 되어 보였다.


"미안하오. 갈 길이 급해서 빨리 걷는 것이니 힘들더라도 좀 참으시오

그 대신 식사는 양껏 하시오."


"예, 괜찮습니다."


혹시 무슨 일을 하려 가는지 말하려나 기대했지만 고참병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음식이 푸짐하게 나왔다. 전동걸은 오후에 또 정신없이 걸을 것을 생각해 배부르게 먹었다.

끊이지 않은 물을 먹으면 설사하고 열 오르고 구토하는 풍토병에 걸리기 때문에

따끈한 차도 네댓 잔이나 마셨다.
그러나 그게 큰 잘못이었다.

아픈 다리를 쉰 데다가 배가 물러 걷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고참병과 간격은 자꾸 벌어지는데 고참병은 인정사정없이 빨리 걸어가고 있었다.

먹은 것을 도로 토해낼 수도 없고, 전동걸은 '아이고,

이 미련한 놈아'를 되뇌이며 헐떡거리고 뛰었다.
고참병은 해가 져도 걸음을 멈출 줄을 몰랐다.

 전동걸은 이를 악물고 걸었다. 젊은 내가 질 수 있느냐 하는 오기가 뻗쳐오르고 있었다.

벌써 150리는 걸어오지 않았는가 싶었다.
고참병은 어두워서 더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어 느초라한 마을로 들어섰다.

여자노인네 혼자 사는 집에서 저녁밥을 얻어먹고 자려고 들어간 곳은 헛간이었다.

고참병은 헛간 바닥에다가 거적을 깔더니 태연하게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전동걸도 거적 위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말로만 들어온 팔로군식 생활을 처음으로 겪는 것이었다.

전동걸은 묘한 기분으로 담배를 맛있게 빨았다.

너무 빨리 걷느라고 담배 피울 틈도 없었던 것이다.


"일찍 잡시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하니까."


고참병은 벌렁 드러누웠다. 전동걸도 따라 누울 수밖에 없었다.
헛간문 밖으로 밤하늘이 가득했다. 별밭이 휘늘어져 있었다.

중국하늘에서 바라보는 은하수가 묘하게 슬펐다.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문득 떠올랐다.

그리고 이미화의 그 희고 가녀리고 안온한 얼굴이 은하수 저편에 걸려 있었다.

이미화와 몸을 섞었던 그날 밤을 생각하며 전동걸은 아른아른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전동걸은 고참병이 깨워서야 눈을 떴다.

미처 어둠이 걷히지 않은 사방에는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물이나 한잔 마시고 떠납시다. 아침은 가다가 먹고."


고참병이 따끈한 차를 내밀었다. 먼저 일어나 차를 끓인 것이었다.

물이 나빠 의용군들도 중국사람들처럼 잎차를 상비하고 다녔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일어나 했어야 하는데요."


전동걸은 정말 미안하고 면목이 없었다.


"아니오, 전혀 그런 신경 쓰지 마시오.

 팔로군이나 우리나 계급이 없는 군대요.

할 수 있는 사람이 먼저 하면 되는 거요."


고참병이 약간 웃었다.
계급이 없이 부서와 직책만 있는 군대,

그러면서도 목숨을 거는 명령이 통하고,

세력이 날로 확장되어 가고 있는 군대.

그것이 조선의용군이고 팔로군이었다.

이런 군대가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를 생각했다.
전동걸은 차를 한 모금 입에 담으면서 문득 첫날 조선의용군 본부에 들어섰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본부의 정면 벽에는 태극기와 중국공산당 기가 깃대를 서로 엇갈리게 해서 붙어 있었다.

그건 조선의용군과 팔로군이 공적 일본군을 상대로 합작투쟁을 하고 있다는 상징이었다.

그것은 가슴이 뭉클하도록 인상적이었다.

동경에서 사혁회가 꿈꾸었던 바가 바로 실현되고 있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조선의용군이 태국기를 내걸게 된 것은 팔로군 태항산군구사령관인 팽덕회 장군의

권유에 따른 것이라는 말을 며칠 뒤에 들었다.

젊은 축들은 붉은 기를 내세우자는 의견도 내놓았지만, 인민들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으려면

인민들의 눈에 친숙하고 감정이 융화되어 있는 태극기라야 좋다고 팽 장군이 권유했다는 것이었다.
고참병은 또 안개를 헤치며 걷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걷고 어제처럼 어두워져서야 숙소를 정했다.

전동걸은 오히려 다리가 풀려 어제보다 걷기가 나아진 것을 느끼고 있었다.
다음날 점심은 어느 산골짜기에서 미리 준비한 빵을 먹었다.


"읽어보시오."


고참병이 접힌 종이를 불쑥 내밀었다.
전동걸은 종이를 펼쳤다.
조선동포 및 조선학도병에게 고함.
등사된 삐라의 제목이었다.
조선청년들은 조선의용군에 동참하라. 현재 일본군에는 조선의 학생들이 강제로 끌려와 있다.

그들이 탈출하면 동포들은 그들을 적극 보호하고, 조선의용군으로 안내하라.

학도병 여러분들은 하루빨리 일본군을 탈둘하여 조선의용군으로 오라.
전체가 한글로 된 삐라의 내용이었다.


"학병 두 사람이 일본군 점령지역 안에 지금 은신해 있소."


"학병이오?"


"석달 전부터 이 삐라를 뿌린 효과일 거요"


전동걸은 가슴이 뜨겁게 벌떡거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학병들이 탈출하고 있구나… 그건 생각만으로도 가슴 뜨거워지는 일이었다.


"여기서 한숨씩 잡시다"


고참병은 비탈에 몸을 눕혔다.


"…"


전동걸은 어리둥절해서 고참병을 쳐다보았다.


"아, 저 비행기를 보시오."


고참병의 엉뚱한 말이었다.

전동걸은 고개를 젖혔다.

나뭇잎들 사이로 뚫린 저편 하늘로 새하얀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태항산으로 걸어오는 동안에 많이 보았던 B51 폭격기였다.


"저게 뜰 때마다 왜놈들은 망해 가고 있소."


고참병의 말은 안내원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나무숲을 벗어난 비행기가 푸르른 하늘 저 높이 날아가고 있었다.

전동걸은 비행기가 반짝거리는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오fo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어둡기 시작해서 그들은 산을 넘었다.

산 아래쪽이 일본군 점령지역이었다.

산을 내려가 일본군의 망루를 몇 개나 피해 가며 점령지역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배꼽을 넘는 강도 두 번이나 건넜다.

거의 자정에 가까워질 무렵 어느 산굽이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어떤 청년이 뒷산으로 앞장섰다.

바위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토굴이 나타났다.

ㄱ 자로 꺾인 토굴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청년이 성냥을 켰다.

과연 일본군복을 입은 청년 둘이 서 있었다.

고참병과 전동걸은 그들을 와락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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