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67. 거짓말의 현장

오늘의 쉼터 2017. 7. 11. 16:21

167. 거짓말의 현장



"바쿠온!(폭음) 바쿠온!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터져 나온 외침이었다.


"빨리 피해라!"


"방공호는 왼쪽이다, 왼쪽!"


"빨리 뛰어, 빨리!"


분대장들의 외침이 뒤엉키면서 규모 큰 집안은 금장 수라장이 되었다.

무더위 속에서 모기에 뜯기며 잠이 들려고 하던 병사들은 서로 부딪치고

소리치고 앞을 다투며 2층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야단법석이었다.


"빌어먹을, 폭탄이나 팍 떨어져 버려라!"


박용화는 오기를 부리며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건 오기만이 아니었다.


"정말 폭탄이 떨어져 이대로 세상이 끝장나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다."


"다께다, 이 새끼 죽고 싶어!"


분대장이 소리치며 박용화를 걷어찼다.


"그래, 죽고 싶다. 팍 죽고 싶어."


박용화는 분대장에게 쫓겨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속으로 되치고 있었다.

미얀마에 들어서면서부터 그런 생각은 부쩍 심해지고 있었다.
하늘이 깨지고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폭음은 요란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어둠 저편에서 붉고 푸른 불꽃들이 여기저기서 부챗살 모양으로 뻗쳐오르고 있었다.

방공호에는 군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조금 전의 소란은 간 곳이 없고 방공호 안은 종용하기만 했다.

그건 공포의 침묵이었다.

박용화는 갑자기 안으로 파고들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몸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새끼, 가만있어. 늦게 와서 이제 겁나나."


분대장이 박용화의 목덜미를 쳤다
딱! 하는 소리인지  땅! 하는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소리가 공중에서 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방공호 바깥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 밝은 빛은 방공화안에까지 비쳐들었다.


"아니, 이게 뭐야!"


"왜 이러냐!"


방공호 입구 가까이에 있는 병사들의 겁에 질린 소리였다.


"입 닥쳐! 조명탄이다."


분대장이 내쏘았다.
그 짙은 어둠은 다 어디로 가고 바깥은 눈부시게 환한 빛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저 위 공중에서는 푸른 서린 백광을 내쏘며 조명탄이 둥둥 떠서 느릿느릿 내려오고 있었다.

그건 낙하산의 느린 낙하와 흡사했다.


"뭐 저런 게 다 있나…"


말로만 들었던 조명탄을 처음 본 박용화는 두려움과 함께 신기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마치 백 촉짜리 전등이 낙하산을 타고 하늘에서 유유하게 내려오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씨에에엥, 쓰에에엥, 씨에에엥…


갑자기 귀청을 찢는 것 같은 날카로은 소리들이 싸이렌 울려대듯 했다.


쾅! 콰당! 꽝! 꽝!


잇따라 폭음이 울려댔다. 

땅이 뒤흔들리고, 방공호가 무너져 내리는 듯 진동하며 흙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아그그…"


"아으으흐…"


짓눌리고 으깨진 소리들이 비명인지 신음인지 보르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귀청을 찢어대는 칼날 같은 소리와 함께 폭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귀신울음처럼 기분 나쁜 날카로운 소리는 폭탄이 투하과면서 일으키는

마찰음이라는 것을 박용화는 깨달았다.


꽈당! 쾅! 쾅!


"으흐흐…"


"어으윽…"


폭탄이 터질 때마다 겁에 짓눌린 소리들은 흘러나오고, 모두 다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박용화는 손가락으로 두 귀를 꼭 막고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옆구리로 등 뒤로 동료들의 떨림이 느껴져 오고 있었다.

그 떨림에 자신도 떨고 있음을 느꼈다.


"야야, 무적의 황군…, 거짓말이야, 새빨간 거짓말이야.

일본은 형편 없이 지고 있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박용화는 배신감과 절망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런 감정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부터 점점 심해져 왔던 것이다.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다시 어둠이 뒤덮이고 폭음이 사라졌다 까마득한 시간이 지나간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병사들은 방공호를 벗어나고 있었다.


"미얀마 가 지옥은 지옥이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기지개를 켜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누구도 말을 받지 않고 병사들은 숙소의 계단만 오르고 있었다.

그 침묵은 아직 폭격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기도 했고,

그 말에 동의하는 것이기도 했다.

미얀마가 지옥이라는 말은 학도병들이 조선을 떠나기 전에 벌써

그들 사이에서 퍼진 말이었다.

학도병들이 파견되는 곳은 크게 세 방향이었다.

남방, 중국, 일본. 그러나 일본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주로 남방과 중국이었다.

남방은 워낙 전선이 광대해 여러 곳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미얀마 는 가장 나빠

지옥으로 꼽히고 있었다.

또한 그래서 학도병들이 가장 많이 투입된 곳이기도 했다.


"저건 영국군이야 미국군이야?"


"알게 뭐야. 그놈들이 연합을 했으니."


"무시무시한데."


"글쎄, 생각보다 엄청나."


"우리 쪽은 뭘하고 있는 거지?"


"글쎄 말야…"


"계속 이렇게 당해야만 하는가?"


"비행기 없으면 별수 없지."


"왜 비행기가 없어. 우리도 있는데."


"모자라서 여기까지 배치가 안됐으면 여기야 없는 것 아닌가."


"…"


병사들이 모여앉아 나누는 수군거림이었다.

그들은 미얀마에서 당한 첫 번 째 야간폭격으로 완전히 기가 질려 있었다.

그들은 부산에서 싱가포르까지 배를 타고 온 한 달여 동안 일본해군력이

고사상태에 빠졌음을 너무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말레이시아와 태국을 거치면서 다시 공군력의 부재를 실감하다가

미얀마의 첫 번 째 도시 모울메인에 도착한 첫날 밤 이 일을 당한 것이다.

마치 영·미공군이 환영식이라도 베푸는 듯이. 미얀마 땅을 향해 기차로 북상하면서

걸핏하면 바쿠온! 바쿠온! 외침이 터졌고, 그때마다 기차에서 뛰어내려 논두렁이고

둔덕이고 가리지 않고 머리를 처박았던 것이 그 얼마인지 몰랐다.

하늘을 완전히 빼앗겨버린 전쟁,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불안과 공포가 커갔던 것이다.


"빨리 취침하라. 내일 출발이다."


분대장들이 이 방, 저 방에서 외쳤다.
병사들은 긴장과 공포로 기진백진한 몸들을 이국의 마룻바닥에 눕혔다.

박용화는 온몸에 땀이 끈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잠이 오지 않았다.
일본이 이 지경이 되어 있다니…, 참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시끌시끌하도록 대동아회의를 벌인 것이 몇 개월이나 되었다고

이꼴이 되어 있단 말인가.

아니, 달포 전 부산을 떠날 때만 해도 무적의 황국은 도처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다고

신분들과 방송은 떠들어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배로 동지나해를 지나고 남지나해를 자나면서

차츰차츰 확실하게 드러나기 시작했고,

보르네오해를 통과하면서는 그 누구나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5톤여 명을실은 수송선 우가마루는 폭격기와 잠수함의 공격을 피하느라고

야간에만 항해를 하면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적의 폭격기나 잠수함의 공격에 정확히 걸렸다 하면 5천여 명은 고스란히 물귀신이 되거나

고기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송선을 호위하는 비행기는 고사하고 호위선단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군은 제공권과 해상권을 적에게 완전히 빼앗긴 상태였다.
일본은 연전연승이 아니라 이미 전쟁에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깨달음은 너무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 충격은 그만큼의 배신감으로 바뀌었다.

또 소학교 선생을 걷어치운 것이 발등을 찍고 싶은 후회로 사무쳤다.

그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급수도 오르고 봉급도 오르고 장가도 들어

편안하게 살고 있을 거였다.

내가 왜 이렇게 큰 실수를 거듭하는가.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깨진 항아리였다.

학도병으로 나가는 것을 도저히 피할 수 없었으니 목숨이 안전한 곳으로 배치 받아 보려고

온갖 기회를 다 엿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훈련받는 동안에 남들보다 특출하면 좋은 보직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재력가들과 유지들이 뻔질나게 면회를 왔다.

그들은 장고를 불러내서 최고급 향응을 베풀고 뒷돈을 쓴다는 것이었다.

자식들을 사지로 보내지 않으려는 공작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면회 한번 온 사람이 없이 훈련기간이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배치 받은 곳은 남방 중에서도 지독이라는 미얀마였다.

판검사가 되고자 했던 꿈은 늑대사단 보병 168연대 학도병 이등병으로 낙착된 것이었다.

그런데 바다를 벗어나고 보니 상황은 한층 더 참담했다.

기차로 하루면 갈 거리를 사흘이고 나흘이고 걸리는 것이었다

그건 순전히 적기들의 내습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적군의 공군력에 해상에서나 육지에서나 철저하게 제압당해 기동력을

거의 상실하고 있었다.

 기차도 비행기들의 폭격 때문에 낮에는 아예 움직이지를 못했다.

그저 도둑고양이처럼 밤에만 움직였다.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야간폭격을 당해 발이 묶이게 되면 꼬박 하루 반을 숨어 있어야 하는

한심한 신세가 되는 것이었다.
'막강한 공군력을 가진 적을 상대로 육군만으로 싸우고 있다니,

 이것이 일본의 실체인가? 이건 호랑이와 토끼의 싸움이고,

고양이와 생쥐의 싸움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쟁은 전혀 승산이 없었다.

이 지옥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날 수 있을까…'
박용화는 극성스럽게 달려붙는 모기를 치며 뒤척거리고 있었다.
아침에 기상을 하자마자 신병들은 병참부로 식사를 타러 갔다.


"이거 생각보다 전황이 훨씬 나쁜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박용화는 걸어가며 원재빈에게 물었다.


"당연한 거 아니오."


얼굴 생김만큼이나 원재빈의 대꾸는 무뚝뚝했다.


"무슨 소리요?"


"목탄차 굴리고, 고찰 놋쇠그릇 쓸어가다 못해 다리 쇠난간까지 다 뜯어가는 것 보면서도

이런 꼴일지 몰랐소."


박용화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자신은 그런 것을 보면서 그저 전시의 물자부족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원재빈은 그런 현상을 통해 이런 패배적 전황을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이런 전황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단 말이오?"


이렇게 확인을 해보고 싶었지만 원재빈의 대꾸가 또 어떻게 나올지 볼라 그만두기로 했다

서양사를 전공했다는 그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말수가 적은데다 어딘가 거만해 보였다.

충청도가 고향인 그는 사회주의 물도 약간 든 것 같았다.


"고참병들은 어제 벌써 좋은 데 갔다 온 눈치들이던데?"


"그래? 그럼 우리도 오늘은 가야지."


"괜히 군침 흘리지 마. 잘못하다간 재미도 못 보고 엉덩이에 멍만 잡히니까."


일본인 병사 서넛이 걸어가며 나누는 말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곳이란 위안소일 거라고 박용화는 생각했다.
고참병들은 두셋씩 패를 짜서 어딘가를 다녀오는데 신병들은

고참병들의 총까지 분해해서 닦으랴, 밥을 타오랴, 식기들을 씻으랴

하루종일 잠시도 쉴 짬이 없이 보냈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부대는 다시 북행열차를 탔다.

마르타반을 거쳐 페구로 가는 동안 비행기들은 편대를 이루어 폭격을 해대고 있었다.

북쪽으로 갈수록 폭격이 심해지는 것은 전선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랑군에서 동북쪽으로 산악지대에 가까이 위치한 페구는 군사요지이며

늑대사단의 본부가 자리 잡을 곳이었다.

페구까지 가는 사이에 놓인 철교들은 군수품들을 내려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다.

그리고 다시 짐들을 기차에 옮겨 싣고 떠나는 형편이었다.

 날마다 적도하의 무더위와 모기에 시달리면서 그런 일을 되풀이하다 보니

군인들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벌써 체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라리아에 걸리는 병사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었다.
페구에 도착하자 병사들에게 위안의 시간이 주어졌다.

위안의 시간이란 무슨 오락시간이 아니라 부대별로 위안소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건 병사들을 전선에 보내기 전에 사단본부에서 베푸는 육체의 향연이었다.

여자를 상대하게 하는 그 일을 일본군 지휘부는 사기진작의 한 방법으로 써먹고 있었다.
위안소는 열대지방의 무성한 숲속에 자리 잡고 있어서 적기가 전혀 찾아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마음 놓고 짙은 그늘 아래로 줄지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긴 어떤 나라 피야?"


"어떤 걸 바라는데? 여기 미얀마에는 피가 네 가지야. 일본피, 조선피,중국피, 원지피."


"일본피야 장군용이니까 감히 어쩔 수 없고, 원지피는 피부가 시커매 사람 같지가 않고,

중국피는 3등 국민에 친숙하지가 않고, 그래도 조선피가 친숙한 게 제일 낫지 않겠어?"


"그야 그렇지. 조선피들은 그 위치도 아주 좋대잖아."


"맞어, 그런 소문이 있지. 히히히…"


"헌데. 이게 다 원지피면 어쩌지?"


"설마. 모울메인에서도 조선피였다는데. 상부에서 우릴 그리 푸대접할 리가 있어?"


"글쎄, 두고 봐야지."


일본인 병사들이 끼들거리며 들떠 있었다.
원재빈은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선처녀들이 위안부로 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안 것은 모울메인에서였다.

직접 보지 못하고 그곳을 다녀온 고참병들의 이야기를 스쳐들으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군인 전용 위안소가 있다는 것도 충격이었고,

 20여 명 전부가 조선처녀들이라는 것은 더욱 충격이었다.

왜 그런 것을 모르고 있었을까! 자신의 무관심을 힐책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을 떠나오면서도 일본은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지

이렇게 열세에 몰리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모르지 않았던가.

절대 비밀유지, 그것이 군대가 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위안소나 위안부 문제를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위안소 안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신입 이동부대다. 빨리 준비해, 빨리!"


한 씨가 아침밥을 먹고 있는 아가씨들을 몰아댔다.


"뭐가 그리 급해. 밥들도 안 처먹고 오나."


한 아가씨가 톡 쏘아붙였다.


"아유, 지긋지슷해. 또 까마귀떼야?"


다른 아가씨가 밥을 씹다 말고 몸서리를 쳤다.


"잔소리들 말고 빨리 하라니까"


한 씨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워째 갈수록 신입에다 이동에다 까마구떼 천지여. 참말로 못살겄네."


젓가락을 던지며 복실이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이것들이 왜 이리 말이 많아. 이번 신입병들은 다른 때완 달라.

우리 조선청년들도 들어 있어."


"네에?…"


아이고메, 조선청년덜?


"워쩐 일이다요?"


아가씨들은 모두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데 그 얼굴들에는 반가움이 역연했다.


"그래, 학병들이 섞여 있다."


한 씨가 야간 누그러지며 대답했다.


"학병이 머신디요?"


"응, 대학교 전문학교 학생들이 지원해서 군대에 나온 거야. 빨리 해, 빨리!"


한 씨는 두 팔을 휘저으며 다시 아가씨들을 몰아댔다.


"아이고, 진작에 그리 말헐 것이제."


"이거 어쩌나. 아직 분도 안 발랐는데."


아가씨들은 일제히 숟가락이며 젓가락들을 놓고 식당을 뛰러나갔다.
아가씨들이 말한 까마귀떼란 이동병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동병력이 밀어닥치면 그 수도 많을 뿐만 아니라 사납고 거칠었다.

한 아가씨가 하루에 예닐곱 명 정도 상대하다가 이동병력이 몰려들게 되면 삼사십 명으로 불어났다.

그 많은 수를 상대하다 보면 아가씨들은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아가씨들은 끝없이 덤벼드는 일본군들이 시체를 파먹는 까마귀떼처럼

자신들의 몸을 파먹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검은색 좋아하고 까마귀 좋아하는 일본사람들을 빗댄 말이기도 했다.
방문인 커튼이 걷혀지며 군인이 쑥 들어섰다.

병장이고, 일본사람이었다.

복실이는 손을 내밀며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 와서 숙달된 것은 계급장과 일본사람을 한눈에 식별하는 것이었다.

복실이가 내민 손에는 고무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군인보고 받아서 그것에 끼우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치마를 걷으며 바로 군인이 달려들었다.


"워메"


복실이는 눈을 번쩍 뜨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 바람에 복실이의 두 손이 군인을 떠밀었다.

막 덤벼들던 군인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군인은 각반을 한 채 바지가 무릎께에 내려가 있었다.

으레 이동부대는 수가 많아 각반을 풀어 바지를 벗고 어쩌고 할 새가 없었던 것이다.

규정시간은 30분씩이었지만 군인들의 배설이 빠른데다 10분만 넘어도

밖에서 빨리 나오라고 난리가 나는 것이었다.


"이년이 왜 이래 이거!"


군인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눈을 부릅떴다.


"이거 끼워요."


복실이는 일본말로 내쏘며 고무주머니를 흔들었다.


군인은 그때서야 여자의 뜻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다시 덤벼들려고 했다.


"규칙위반, 헌병대에 알릴 거예요."


복실이의 목소리는 더욱 싸늘해졌다.

그런 일본말은 다 여기 와서 익힌 것이었다.
군인은 주춤하며 얼굴이 굳어졌다.


"건방진 년, 네가 끼워."


군인이 불뚝 선 그것을 복실이 앞으로 디밀며 손짓했다.
복실이는 비위가 획 상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외면을 하며 고무주머니를 그것에 끼웠다.

그것마저 거절했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 짓을 거절했다가 서너 차례 따귀를 맞고 걷어차이고 했던 것이다.

고무주머니를 끼지 않으려는 것은 규칙위반이었지만,

고무주머니를 끼워달라는 것이 어떻게 되는지는 아예 규정에 없으니

뭐라고 거절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고무주머니를 끼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었다.

우선 성병에 걸리지 말아야 했고, 또 임신을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복실이는 다시 드러누우며 이제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고무주머니를 빼버리지 않나 감시하고 있었다.

군인은 있는 대로 두 다리를 벌리며 자신의 거시에다 다시 한번 침을 재빨리 발랐다.

조금이라도 통증을 덜 당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군인의 그것이 몸 속으로 파고들자 복실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진저리를 쳤다.

남자의 그것만 보면 비위가 상하고 구역질이 솟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었고,

그것이 봅 속으로 파고들 때마다 더럽고 징그러워 소름 끼치는 것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군인은 긴 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무주머니를 빼서 던졌다.

복실이는 고무주머니를 얼른 집어 유리병에 넣었다.

유리병 옆에 군인이 던져놓은 전표가 있었다.

현관 옆의 사무실을 지키고 있는 한 씨한테 1원 50젼씩을 내고 받아온 전표였다.

하루 일이 끝나고 나면 그걸 모아다가 한 씨한테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복실이는 그 전표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 전표도 왜놈들의 그것만큼 더럽고 징그럽게 생각되었고,

그걸 꼬박꼬박 챙기다보면 자신의 신세가 더욱더 비참해지기 때문이었다.

 그 전표를 잘 챙겨와야 장부 숫자와 맞춰 보수 계산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 전표를 다시 써먹기 위해서 그러는 것뿐 여지껏 돈은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었다.

한 씨와 함께 있는 왜놈 야마가다는 돈을 저금했다가 한꺼번에 준다고 했다.
두 번 째 군인이 들어섰다.

 거기를 닦아낸 물수건을 마른 나뭇잎베개 옆으로 놓으며 복실이는 군인을 힐끗 쳐다보았다.

상등병에, 역시 일본사람이었다.

복실이는 고무주머니를 내밀며 또 눈을 질끈 감았다.


"새것 여기 있어"


복실이는 눈을 떴다.

군인은 바지를 까내리며 고무주머니를 흔들어 보였다.


"드러운 눔, 이골났네."


복실이는 씨익 웃는 군인에게 표독스럽게 눈을 흘기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양쪽 옆방에서 숨 헐떡거리는 서리들이 다 들려왔다.

방들이 좁은데다 판자 한 장이 벽이었던 것이다.

열세 번 째까지도 일본사람들이었다.

복실이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 수를 세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전에는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조선사람을 기다리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내가 왜 조선사람을 기다리고 이러지?

 이 꼴을 보이는 게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이라고.'


그러나 만나고 싶은 마음은 떼 칠 수가 없었다.

집을 떠나온 이후 이 위안소에만 갇혀 지내면서 조선사람이라고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가 누구든 만나면 반갑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에이꼬야, 여기 너희 고향 오빠 오셨다. 빨리 모셔가라".


복실이는 귀가 번쩍 뜨었다.

에이꼬는 여기 와서 야마가다가 지어준 이름이었고,

방문 위의 명찰에도 그렇게 씌어 있었다.


"잉, 알었응게 쬐깨 기둘려."


복실이는 군인이 숨을 헐떡거리고 있거나 말거나 맞소리를 질렀다.

군인이 멈칫 놀랐다.

복실이는 문득 미안한 생각이 들어 눈을 찡긋해 보이며 끌어안았다.

군인은 좋아라 하며 더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군인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복실이는 방을 튕겨나갔다.


"히데꼬야, 나 왔다."


복실이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가만히 말했다.


"들어와, 어서."


커튼이 젖혀지며 히데꼬가 손을 잡아끌었다.


"이 오빠 고향이 목포시래."


히데꼬는 반가움이 넘치는 얼굴로 거침없이 오빠라고 부르며

우뚝 서있는 군인에게 인사를 시켰다.


"안녕허신게라우, 지넌 김제구만이라우."


복실이는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히데꼬는 전라남도든 북도든 가리지 않고 넌전라도를 늘 못 잊어했던 김제를 고향으로 댔다.


"아 저 말씨…"


박용화는 아가씨의 말을 듣는 순간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는 기분이 잔뜩 언짢아져 있던 참이었다.

자신을 조선사람으로 알아보는 것도 거북했고,

더구나 고향여자까지 불러대는 바람에 재미를 보려던 기분은 완전히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가씨의 말씨는 그대로 어머니의 말씨였던 것이었다.


"예, 만나서 반갑소."


박용화도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다.


"너무 보기 좋다. 기왕이면 고향 오빠 위안해 드리는 게 낫지, 그치? 빨리 저쪽 방으로 가세요.

 저는 에이꼬 방에 노는 사람 붙들어올 테니까요."


경기도가 고향인 히데꼬는 눈치 빠르게 움직이며 두 사람을 밖으로 밀었다.


"어떵게 이런 데까지 왔소?"


박용화는 판자바닥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그는 심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위안소에 있는 조선여자들이

유곽에서 온 그렇고 그런 여자들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대하고 보니 아직 스물도 안 되어 보이는 앳된 어녀들이었던 것이다.


"속아서… 속아서…"


고개를 떨군 복실이는 복이 베었다.


"속다니, 어떻게 말이오? 무슨 좋은 데다 취직시켜 준다고 했소?"


복실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등으로 눈을 훔쳤다.


"못된 놈들… 그럼 집에서는 이런 걸 전연 모르고 있을 것 아니오?"


박용화는 가슴 저리는 아픔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이런 일이 벌어니거 있는 줄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복실이는 더 프게 고개를 끄덕이며 흑 물음을 터뜨렸다.


"참, 아가씨들 신세니 우리 학병들 신세나 다 똑같소.

이따위 사람  땅으로 끌려 다니고 있으니. 나 담 배나 한 대 피우고 가겠소."


박용화는 담배를 꺼내며 왜 첫 번 째 처녀가 그렇게 반가워하며

서슴없이 오빠라고 물렀는지 알 것 같았다.


"저어…, 지가 맘에 안 드시먼…"


복실이는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박용화를 쳐다보았다.


"아니오, 그게 아니오.

애가 어찌 왜놈들하고 똑같이 그 짓을 할 수 있겠소."


박용화는 이 말을 하면서 최초로 피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구만이라, 아니구만이라…"


복실이는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그 말만이라도 너무 고마웠다.

아니, 그 말이 고마워서 다른 군인들하고는 다르게 옷을 다 벗고 저 사람을 맞이하고,

자신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표할 수가 없었다.


"나 그만 가봐야겠소."


박용화가 일어섰다.


"은제 떠나시능게라…"


복실이도 따라 일어섰다.


"잘 모르겠소."


"잴 시간 있으시먼…"


복실이는 박용화를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알겠소."


박용화는 그 눈물어린 눈이 애처롭게 곱다는 것을 느끼며 복도로 나섰다.


"후미꼬야, 느그 충청도 고향 오빠다아. 얼렁 모시고 가그라,"


어느 방에선가 또 외치고 있었다.


"아이고, 그려? 알었어어."


어느 방에서 다급하게 화답하고 있었다.
복실이는 박용화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어떤 군인에게 떠밀려 방으로 들어왔다.

여자들이 변소 갈 짬도 없이 군인들은 줄을 잇대었다.

그래서 여자들은 이동부대가 나타나면 진저리를 쳤다.

스물다섯 명 정도가 넘으면서 복실이는 거기가 부어오르면서 속이 쓰라리고

화끈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복실이는 그 학도병 생각과 집 생각이 자꾸 겹쳐지면서 끝없이 밀려드는

군인들이 더 지긋지긋해지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어 군인들이 끊어졌다

그때서야 야자들은 앞다투어 변소로 뛰기 시작했다.

변소를 다녀온 그녀들은 다른 날과 달리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미얀마 여자 둘이 어쩐 일이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점심은 처음부터 굶어왔는데 식당으로 모여드니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너희들 어땠니, 어땠니?"


히데꼬가 여덟 명 중에 넷을 둘러보았다. 네 명 다 고개를 저었다.


"넷 다 안하고 그냥 갔어?"


"우릴 더럽다고 무시했나? 다 대학생님네들이라."


다른 아가씨가 내뱉었다.


"아니여 , 우리도 왜놈덜허고 똑겉은 짓얼 히서 되느냐고 했어."


복실이는 재빨리 말대꾸를 했다.


"맞다, 내가 만낸 오빠는 곧 울라캤능기라."


"그래, 그래. 역시 배운 사람들이라 생각도 깊다.

우리 서러움을 그리 알아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니."


히데꼬가 울음을 씹듯 하는 얼굴로 말했다.


"그라니께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안카드나."


"그런데 왜 우리 네 사람은 없었니?"


"아니여, 근데 저쪽 애들도 우리처럼 눈치 빠르게 했을까?"


"가볼까? 모르고 있으면 가르쳐주게."


"그러자. 가자!"


그들 여덟은 우루루 복도로 몰려나갔다.

처음에 양쪽 건물에 열씩이었다.

그런데 복실이네 쪽에서는 두 명이 탈이 생겼다.

하나는 두 달 만에 목매달아 죽었고,

다른 하나는 네댓 달 전에 실성을 해서 부대병원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저쪽 건물에서는 하나가 군인의 칼에 찔려 죽었다.

30분 동안에 세 번씩 덤벼들던 군인이 자기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는다고

칼을 마구 휘두른 것이었다.


"다들 어디 가!"


사무실에서 밥을 먹고 있던 한 씨가 소리를 빽 질렀다.


"가긴 어딜 가겠어요. 고작 옆집이지."


히데꼬가 야무지게 쏘아붙였다.
다른 아가씨들도 눈을 흘기고 입을 삐쭉거리고 하며 밖으로 나갔다.

점심시간이 끝나자 군인들은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숨이 막히도록 날은 덥고 군인들은 쉴 새 없이 밀려들고,

아가씨들의 몸은 땀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속에서도 서로 고향사람 찾아주는 외침은 이어지고 있었다.

 해가 기울면서 저 밥 때가 되자 군인들이 끊어졌다.

복실이는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어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거기가 퉁퉁 부어오르고 속이 쓰리고 욱신거리고 화끈거리는데다

불두덩이며 아랫 배 전부가 터지는 것 같고 찢어지는 것같이 아파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40명을 치렀는지 50명을 치렀는지 알 수도 없었다.

다른 아가씨들도 몸이 퍼져 꼼짝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북적거리던 군인들의 발길이 끊긴데다 아가씨들마저도 움직이지 않아

ㅇ위안소 안은 괴괴한 적막에 싸여 있었다.
한참이 지나 아가씨들이 한둘씩 변소로 목욕탕으로 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들은 벽을 짚어가며 걸음을 엉기적거리고 있었다.

목욕을 끝낸 아가씨들은 고통스러움과 서글픔으로 일그러진 얼굴들로

엉기적엉기적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그녀들이 들어설 때마다 쉰 가까이 되어 보이는

미얀마여자 둘이 뜨거운 물수건을 건네주고는 했다.

아가씨들을 바라보는 두 여자의 얼굴에는 안쓰러워하는 빛이 가득했다.

그 뜨거운 물수건을 아랫배에 대라는 것이었다.

그건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두 여자가 시작한 일었다.

뜨거운 물수건을 대면 처음에는 더 아픈 것 같지만 차츰 아랫배의 통증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 여자들은 무슨 나무열매 즙을 가져와 거기 부은 데다 바르라고도 했다.

그걸 바르면 부기가 다소 빠지기도 했다.
아가씨들은 모두 등받이 없는 걸상에 앉지를 못했다.

선 채로 안남미밥을 한 그릇씩 받아들었다.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은 채 밥을 떠넣고 있었다.

 아가씨들은 식사를 끝내는 대로 앓는 소리를 가늘게 내며 자기들 방으로 들어가 쓰러졌다.

이 방, 저 방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모깃 소리와 함께 열대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복실이는 아침 일찍 잠이 깼다. 어젯밤에 장교들이 하나도 오지 않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 그 사람들이 밤중에 떠났구나!"


복실이는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동부대가 오고, 밤에 자고가는 장교들의 발길이 뚝 끊어지면 그날 밤 이동부대는 떠난 것이었다.


"그 사람 이름이나 알아둘 것을…"


복실이는 아쉬움 속에서 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히데꼬처럼 오빠라고 불러보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말았다.
복실이는 밖으로 나왔다.

아침의 서늘함이 숲속에 가득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부대 쪽을 바라보았다.

군인들이 움직이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많은 군인들의 움직임은 아니었다.

밤새 이동부대가 떠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부디 무사허시게라…"


복실이는 그 남자와 다른 학병들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싸움터는 북쪽이고, 그쪽에서는 사람들이 거기서 죽으면

자기네보다도 더 못한 신세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실이는 걸음을 옮겼다.

저쪽 나무 없는 데에 유난히 색깔 짙은 열대의 꽃들이 아침햇살을 받으며 활짝활짝 피어 있었다.

향기도 짙고 아름답기도 한 꽃들이 늘 피는 것은 좋지만 사시장철 여름뿐인 이  땅이 지겹고

지루해 고향을 더 그립게 만들었다.


"엄니이…"


복실이는 언제 돌아가게 될지 모를 집 생각을 하며 또 가슴이 먹먹해졌다.


"잔소리들 그만 하고 빨리빨리 삿쿠 씻어놓고 그래."


한 씨가 식당으로 얼굴을 디밀며 소리쳤다.
아가씨들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며 좋지 않은 기색들로 자리를 떴다.

한 씨는 야마가다에게 못지않았다.
복실이는 고무주머니가 든 병을 들고 말숙이와 함께 가까운 개울로 나갔다.


"여그넌 물도 어찌 이리 맑덜 못허고 쿵쿵허니 이런지 몰르겄어."


말숙이는 또 물타박을 했다.


"어디 물만 그러냐. 사시장철 덥고 모구 많고, 요겻이 어디 사람 살디냐."


복실이가 한숨을 푹 쉬며 병 속의 고무주머니들을 풀섶에 쏟아놓았다.


"근디 왜놈덜언 멀라고 요 못쓴  땅얼 차지헐라고

 그리 사람덜얼 많이 죽여감서 전쟁얼 헐끄나?"


"긍게 미친놈덜이제."


"어지께 그 사람덜이 무사해야 헐 것인디."


"금매 말이여…"


"요 빌어묵을 짓도 참 징허다."


말숙이가 고무주머니를 물에 넣으며 진저리를 쳤다.


"나년 요 짓얼 헐 때마동 팍 그냥 죽어북고 잡다. "


복실이는 침을 내뱉으며 나뭇가지젓가락으로 고무주머니를 집었다.

복실이는 침을 내뱉으며 나뭇가지젓가락으로 고무주머니를 집었다.

복실이는 고무주머니를 씻는 일이 치떨리게 싫었다.

그것을 씻어서 말려 하얀 가루를 뿌려 소독을 해서는 찢어질 때까지 다시 사용해야 했던 것이다.


"요런 물건이나 잠 잘 대주제. 요런 것이 무신 값나가는 물건이라고."


"요런 짜자헌 물건도 뒷대덜 못허는 판이니 왜놈덜언 곧 망헐 것이여."


복실이가 세차게 말했다.


"아이고, 누가 듣겄다."


말숙이가 빈 주먹질을 했다.
아득하게 비행기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복실이와 말숙이는 고개를 들었다.

몸체가 하얀 비행기 네 대가 햇볕에 반짝거리며 북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비행기들은 날이 갈수록 자꾸 더 많이 떠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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