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64. 해바라기 군상

오늘의 쉼터 2017. 7. 10. 01:21

164. 해바라기 군상



"안녕하세요, 사장님."


"아 박 여사, 어서 오세요."


소파에서 무엇을 보고 있던 민동환이 사장실로 들어서는 박정애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전엔 계시는 것 알고 일부러 시간 맞춰 왔죠."


"예, 잘 오셨습니다. 박 여사는 세월이 갈수록 젊고 멋이 있어집니다."


민동환은 살찐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입에 발린 말을 했다.

그는 얼핏 몰라볼 정도로 살이 쪄 있었다.


"어머, 괜한 말씀."


박정애는 소파에 앉으며 진한 눈길로 민동환을 끌어당기듯 쳐다보며 묘하게 웃었다.

민동환의 말은 그다지 과장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편이었고,

몸치장은 지난날보다 훨씬 더 화려하면서 세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세월을 감추려는 듯 얼굴에 화장이 짙었다.


"박여사께서 어인 행차십니까?"


민동환은 손에 들고 있던 직사각형의 빳빳한 종이를 탁자 위에 슬적 던지듯 하며 대화를 이었다.

그는 박정애가 그것을 보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것이었다.


"네 용건은 문화계의 멋쟁이 민 사장님을 뵈려고요."


박정애도 미끈하게 사교적인 발언을 했다.


"아이구, 너무 과분한 말씀입니다."


민동환은 겸손한 척하면서도 아주 기분좋게 웃었다.


"아, 홍 변호사 청첩장 받으셨군요?"


어느새 탁자 위에 놓인 빳빳한 종이를 알아보고 박정애가 말했다.


"아 예, 역시 박 여사는 소식통이 빠르시군요."


민동환은 예상이 빗나가 문득 이상하게 생각하며 말했다.

청첩장을 박정애의 눈길이 끌리게 놓았던 것은 그녀를 놀라게 하고,

자신이 홍 변호사에게 청첩장을 받을 정도의 사이라는 것을 과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박정애는 벌써 홍 변호사의 아들이 결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뭐, 빠른 건 아니구요. 저도 어제 받았거든요."


박정애의 가벼운 대꾸였다.


"아, 그러셨군요. 두 분이 언제 화해를 하신 모양이지요?"


민동환은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글쎄요, 그런 것 한 일 없어요.

아마 박정애라는 인간한테 보낸 게 아니라 국민총력연맹 지부위 간부한테 보낸 것 아니겠어요?"


약간 비웃음을 띠고 있는 박정애의 말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녀는 국민총력연맹을 들먹여 민동환에게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었다.


"아 뭐, 그랬을 리가 있나요. 겸사겸사 해서 보낸 거겠지요."


민동환은 속마음과는 다르게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박정애가 중인 신분인 제 주제를 잊지 않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상이 묘하게 변해서 그렇지 박가가 감히 민 씨와 맞상대를 하고 들다니,

참 아니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눈치 빠르고 잽싸게 설쳐 국민총력연맹 지부의 간부자리를 차고 나섰으니

전혀 괄시하지 못하고 깍듯이 사람 대접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 더 비위 상했다.

홍명준 변호사가 박정애에게 청첩장을 보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홍 변호사가 신분적으로 박정애를 아주 무시하는 것을 생각하면 그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홍 변호사도 박정애가 차지하고 있는 사회적 비중까지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흥, 홍 변호사도 아주 약게 놀아요."


박정애가 코방귀를 뀌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민동환은 놀라움을 감추지못하고 눈이 커졌다.

아무리 당사자가 면전에 없다고 하더라도 박정애는

홍 변호사를 너무 나쁘고 고약하게 말했던 것이다.


"홍 변호사 사돈이 누군지 아시나요?"


박정애가 비웃음을 물며 민동환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아니오…"


민동환은 자신도 모르게 청첩장을 집어들었다.


"호. 잡지사 사장님께서 왜 이러실까. 소식통이 영 캄캄하시군요."


박정애는 입바른 대로 거침없이 야유하고 있었다.


"이거 참…., 그 사람이 누굽니까?"


민동환은 멋쩍게 웃으며 청첩장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법원 판사 나으리십니다."


"그럼 일본인 아닙니까?"


"그렇다니까요."


"…."


민동환은 충격을 받으며 그때서야 박정애의 말을 알아듣고 있었다.

그러면서 <약게 논다>는 박정애의 말이 그다지 심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민 사장님, 뭐 그리 놀라실 것 없어요.

홍 변호사가 내선일체 혼인론을 몸소 실천하려고 솔선수범해서 나선 거니까

우린 적극 환영하고 뜨거운 축하를 보내면 되니까요."


박정애는 쌕쌕 웃으며 말했다.


"아 예, 그야 그렇지요."


민동환은 당황스럽게 대꾸했다.
박정애는 민동환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민동환이 놀라는 것은 실망해서가 아니라 선망해서이고,

그 속에는 질토가 섞여 있다는 것을 박정애는 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민동환은 홍 변호사의 그런 비약에 반사적인 질시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홍 변호사가 일본인 판사의 딸을 며느리로 얻은 것은 분명 신분의 비약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자신에게 장가들일 아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기분이 어떠세요?"


박정애는 바람이 팽팽하게 든 고무풍선을 바늘로 콕 찔러 터뜨리는 기분으로 물으며

또 민동환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 예, 축하할 일이고말고요.

 내선일체 혼인론을 솔선수범하는 것이니 그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일이지요.

저는 부조금이나 두둑이 준비해야 되겠습니다."


흥, 네까짓 게 날 놀리려고? 하는 생각으로 민동환은 정색을 하며 이렇게 받아넘겼다.

또한, 입이 빠른 박정애를 놓고 자칫 무슨 말을 잘못 했다가는 금방 홍명준에게

어떻게 전할지 몰랐던 것이다.


"네, 민 사장님은 과연 모범적인 황국신민이고 인격자로군요."


박정애도 아주 세련되게 웃으며 이렇게 되받아쳤다.

그러나, 저 미꾸라지 같은 놈, 하는 생각과 함께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은 떼칠 수가 없었다.


"아이구, 너무 황송스럽게…"


민동환은 겸손한 척해 보이며 담배를 빼들고는


"사실 말이지 내선일체 혼인론은 참 생각할수록 잘 고안된 것입니다.

말로만 내선일체를 부르짖으면 뭘합니까.

서로 피가 다르면 언제까지나 물에 기름이지요.

그런데 내선일체 혼인론을 실행해서 서로 사돈이 되고 서로 부부가 되고

하면 당장 한집안이 되어 어우러지는 거고, 자식을 낳게 되면

그야말로 완벽한 내선일체가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 효과로 보자면 창씨개명은 댈 게 아니지요."


그는 아주 진지하게 말하고 있었다.


"어머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민 사장님도 장차 내선일체 혼인론에 따라 자식들을 결혼시킬 건가요?"


박정애는 약간 놀라고 있었다.

송중원을 잡지사에서 내보내는 것을 계기로 민동환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그동안 내선일체 혼인론을 적극 찬양할 정도로 의식이 발전되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야 당연하지요.

대동아공영권이 성취된 마당에 우리가 종주국 국민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그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민동환은 얼굴까지 상기되며 말했다.


"그렇군요. 민 사장님이 그렇게까지 확고한 생각을 가지신 줄은 몰랐는데요."


박정애는 묘하게 웃었다.


"그 무슨 서운한 말씀입니까? 잡지 만드는 걸 보시면서도 그러십니까."


민동환은 정말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잡지는 잡지고 개인적인 자식문제는 좀 다른 줄 알았죠."


박정애는 민동환을 믿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닙니다.

 내선일체가 하루빨리 이루어져야 한다는 건 저의 확고한 신념입니다."


민동환은 주먹까지 쥐어 보였다.


"내선일체 혼인론을 실행시켜 나가는 것도 우리 국민총력연맹의 주임무 중위 하난데,

총독부 정책에 적극 호응한다 하더라도 조선사람이 자식의 문제까지 그렇게 생각하기는

 쉽지 않거든요.

민 사장님은 그 계기가 뭔가요?"


박정애는 아까와는 완연히 다른 친근감을 내보이며 물었다.


"예, 뭐…. 잡지의 편집을 바꾼 것부터가 현실을 현실로 냉엄하게 직시하자는 것이었고,

그러니까 그 계기가 굳이 따지자면 대동아회의라고 할 수 있겠지요."


민동환은 아부 섞인 웃음을 지었다.


"역시 대동아회의의 위력은 대단하군요.

지식인들을 다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야 더 말할 것 있습니까.

대동아공영권의 실현이란 게 지식인들의 상상으로 가능이나 한 일이었습니까.

그 충격이 자발성으로 바뀌지 않을 수가 없지요."


대동아회의란 작년(1943년) 11월 5일에 만주국. 중화민국. 필리핀공화국. 타이국. 미얀마 국의

대표들이 동경에 모여 일본천황을 배알하고, 5일과 6일 이틀 동안 제국의사당에서 도조 수상을

의장으로 하여 대동아백년의 평화와 번영을 논의한 회의였다.

그건 다름 아닌 황국이 영국. 미국. 네덜란드 등의 아시아 식민지국가들을 해방시키고

새롭게 대동아공영권을 실현시켰음을 일본이 온 세상에 과시한 것이었다.

그 소식을 조선에서도 신문과 방송을 총동원해 대대적으로 알렸음은 물론이었다.


"그래도 아직도 그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는 지식인들이 있으니 문제 아닌가요?"


박정애는 국민총연맹 지부 간부답게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까짓 자들이 몇이나 됩니까.

그런 자들은 곧 고사하고 말 테니까 아무 걱정할 게 없습니다."


민동환은 자신에 차서 말했다.


"꼭 그럴까요?"


"예, 틀림없습니다.

우리 잡지에 성전을 찬양하고, 황군 지원을 독려하고,

내선일체를 역설하는 각종 글들이 청탁 없이도 쇄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도도한 물결 속에서 몇몇이 버틴다고 가면 얼마나 가겠어요."


"예, 그 말도 일리는 있는데, 그렇다고 방임은 금물이에요.

능력자는 하나라도 더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지요."


박정애는 자못 의젓하게 말하며 <우리 편>이라는 말을 썼다.


"그야 물론 그렇지요."


"예,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 오늘 여기 온 목적 중의 하나가 윤일랑 씨 거처를 알아보기 위해서였어요."


"윤일랑이요? 그자를 왜요?"


민동환의 얼굴이 일시에 구겨지며 말이 거칠어졌다.


"아니, 왜 그리 기분 나빠하지요?"


"그 자식 그거 아주 형편없는 놈입니다.

그놈 얘긴 꺼내지도 마세요. 좀체로 욕을 하는 일이 없는 민동환은

욕을 거침없이 내뱉으며 감정이 격해져 있었다.


"무슨 기분 나쁜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럼 얘기하지 맙시다.

난 그 사람 능력을 생각해서 회유도 할 겸 도와주기로 할 겸 해서

우리 극단에서 장막희곡을 쓰게 할 작정이었거든요."


"글쎄요.

그놈이 능력이고 재주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괜히 헛수고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놈이 회유될 놈이 아니거든요."


민동환은 거칠게 성냥을 그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럴까요? 내가 보기엔 요즈음이 아주 좋은 기회일 것 같은데요.

그동안 윤일랑도 생활고에 시달릴 만큼 시달렸고 배가 고플 만큼 고팠어요.

제아무리 지조인지 고집인지가 센 윤일랑도 굶주림 앞에 거금을 내놓는데 별수 있겠어요?

일에는 다 기회가 있는 것 아닌가요?"


박정애는 아주 부드럽고도 능란하게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윤일랑의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민동환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의 뇌리에는 그날의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송중원이 회사를 떠나고 서너 달 지난 어느 날이었다.

예기치 않게 윤일랑이 사장실로 뛰어들었다.

대낮인데도 그는 술이 취해 있었다.


"야 임마 민동환, 너도 사람 새끼냐."


윤일랑은 다짜고짜 삿대질을 하고 덤벼들었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오."


"이 새끼, 몰라서 물어? 잡지를 해처먹으려면 똑똑히 해처먹어,

이 새끼야, 친구 형님을 그 따위로 야비하게 몰아내고도 네놈이 고이 잡지 해먹을 것 같으냐?

돈이면 다냐? 이 대가리에 똥밖에 안 든 친일파놈아."


"당신이 뭔데 이래. 남의 일 간섭말고 당신 글이나 똑똑히 써."


"뭐야!"


윤일랑은 민동환의 멱살을 잡는가 싶더니 그대로 얼굴을 들이받았다.


"어쿠!"


민동환은 주저앉았고, 조금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윤일랑은 사라지고 없었다.
민동환은 그 일을 계기로 사원들을 다 갈아치워 버렸다.

그리고 그 봉변을 누구에데도 이야기하지 못하는 대신 잡지 내용을 대폭 바꾸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내선일체 혼인론을 실행하기에는 아직 아이들이 어리고,

그전에 실천해야 될 일이 있을 것 같은데요."


박정애가 이야기를 돌렸다.


"그게 뭐지요?"


민동환은 불쾌한 기억을 지우려고 하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집에서 아이들이 무슨 말을 쓰지요?"


"그야…"


민동환은 순간적으로 박정애의 말뜻을 깨달으며 아차 싶었다.


"국어를 안 쓰고 조선말을 쓰는군요?"


박정애는 가차없이 민동환의 허점을 찔렀다.


"그게 글쎄…"


민동환이 어색스럽게 어물거렸다.


"민사장님만 그러는 게 아니라 대개 그렇게 철저하지 못해요.

내선일체의 기초는 어린아이들일수록 국어를 상용시켜 몸에 완전히 배게 하는 것 아닌가요?"


박정애는 그야말로 국민총력연맹 간부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예, 그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총독부에서도 국어상용을 그렇게 강조하고 있지요. 제가 그만…"


"그야 총독부뿐만이 아니지요.

우리 국민총력연맹에서도 가장 중요시하는 사업이 첫째 성전 지원,

둘째가 국어상용운동 아닌가요. 섭섭하군요.

아이들이 국어를 상용했더라면 제가 <국어상용의 가> 표창을 상신할 수도 있었는데."


박정애는 슬쩍 미끼를 던졌다.


"아 그렇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일본말, 아니 국어를 저보다 더 잘합니다."


민동환이 다급하게 말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아닌가요? 뭐, 때는 늦지 않았어요."


박정애는 좀더 고소한 미끼를 던졌다.


"예, 알겠습니다. 당장 국어를 상용하도록 하지요."


민동환은 일본식으로 연거푸 고개를 까닥거렸다.
총독부와 직통하고 있는 전국적인 거대 친일조직인 국민총력연맹에서는

전쟁 지원을 위해 유기그릇을 강탈하고 성금을 걷고 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일본어 상용을 강요해 가면서 그 추진의 효과를 위해서

<국어상용의 가>라는 표창을 시행하고 있었다.

 집안에서도 조선말을 일체 쓰지 않고 일본어를 쓰는 가정을 골라

모범이라고 해서 표창장을 주었다.

친일파들 사이에서 그것을 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일본사람들이 그 표창장을 대단하게 생각했고,

그 표창을 받은 사람들을 달리 대했던 것이다.
박정애는 국민총력연맹이 확대 강화되는 기회를 틈타 재력을 앞세우고

연극단체를 배경 삼아 지부의 여성분야 간부직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 연맹에서도 박저애 같은 활동적인 여자는 대환영이었다.

박정애는 국민총력연맹에 들어가면서부터 양쪽 어깨에 날개를 단 격이 되었다.

그 연맹의 사회적 영향력을 십분 이용해 가며 맘껏 여류인사로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래 전에 허탁이 홍명준에게 한 말이 적중한 셈이었다.


"제가 여류시인 하나를 소개하면 어떨까요. 제 후밴데 아주 시를 잘 써요."


박정애는 마침내 본론적인 용건을 꺼내놓았다.


"예, 좋습니다. 박 여사께서 추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대환영입니다."


민동환은 과장되게 반겼다.

그 속에는 박정애를 머잖아 이용해야 한다는 계산이 직감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네, 고맙습니다.

그럼 며칠 있다가 동행할께요.

홍 변호사댁 결혼식장에서 또 뵙도록 하지요."


박정애는 살짝 눈웃음치며 일어섰다.


"이거 점심을 함께 하려고 했는데요."


"아, 선약이 좀 있어서요."


민동환과 박정애는 송중원의 말은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헤어졌다.

그들은 분명 송중원을 매개로 하여 알게 된 사이였던 것이다.

또한 민동환도 홍명준 변호사를 송중원을 통해서 알게 된 사이였다.

그런데 그는 송중원을 그런 식으로 몰아내고서도 홍명준과는 계속 사교를 해오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송중원이 있을 때보다 더 사이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러기는 홍명준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윤일랑은 마분지 봉투에 번역원고를 넣어가지고 동대문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광대뼈가 불거지고 두 볼이 움푹 파일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얼굴만큼 옷도 낡아 있었다.

그의 몰골에서는 가난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니…"


윤일랑은 길을 건너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저 앞쪽에 괴상한 차림으로 걸어가고 있는 남자에게 윤일랑의 눈길은 박혀 있었다.

그 남자는 국민복에 일본군 전투모자를 쓰고, 다리에는 각반을 차고 있었다.

그리고 한손에는 스틱을 들고 있었다.


"저놈이 저거…"


윤일랑은 눈을 껌벅이며 다시 확인했지만 그 꼴불견의 차림을 한 것은

틀림없이 소설가 김 아무개였다.


"저넘이 저거 완전히 미쳤군. 새파랗게 젊은 놈이 저게…"


윤일랑은 그 소설가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
그 젊은 소설가는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그런 해괴망측한 차림을 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는 스틱을 치켜들며 내선일체를 외치거나

천황폐하 만세를 부른다고 했다.

총독부의 눈에 띄여 좋은 자리에 취직을 하고 싶어 그런다고도 했고,

군대에 안 끌려가려고 과잉충성하는 것이라고도 했고, 사실 미친 기가 좀 있다고도 했다.

윤일랑은 그동안 그런 소문을 들었을 뿐 직접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국민복에 전투모와 각반은 뭐며, 스틱은 또 무엇인지, 그 꼴이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수치도 창피도 모르는 사람이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무슨 기적 같기만 했다.

그 꼴은 자발적 친일문사의 극치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소설가는 언행일치를 시키려는 듯 여기저기 지면에다 성전 찬양과 군대지원 독려의 글을

부지런히 써대고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 런 부류의 문사들은 관으로부터 아무런 억압도 받지 않은

 미미한 존재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운이 없던 윤일랑은 더 맥이 빠져 잡지사까지 터덕터덕 걸어갔다.


"선생님,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는데요."


윤일랑이 들어서자 잡지사 직원이 반색을 했다.


"마감날짜 아직 안 지났는데."


윤일랑은 의자에 몸을 부렸다.


"선생님, 그게 아니구요.

며칠 전에 선생님을 급히 찾는 전화가 왔었습니다."


"전화?"


"예, 저희가 선생님댁을 알아야 연락을 드리죠.

박정애 씨라는 분이 급히 연락을 달라고 그러시더군요.

좋은 일이라구요. 여기 전화번호 있습니다."


직원이 쪽지를 내밀었다.


"…"


"전화 걸어드릴까요?"


"아니, 됐네."


윤일랑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직원이 머쓱해서 돌아섰다.
윤일랑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편집장에게 원고봉투를 내밀었다.


"예, 수고하셨습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안색이 안 좋으신데요."


편집장이 봉투를 서랍에 넣으며 물었다.


"아니오, 영양실조라서 그렇소. 나 원고료나 좀 주시오."


윤일랑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글쎄요. 될지 모르겠는데요."


편집장이 한 쪽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다는 바라지도 않소. 번역이나 해먹는 놈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선생님은 참, 글 쓸 능력이 없어서 번역을 하면 큰일나겠군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편집장이 그 심정을 안다는 듯 스산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났다.
윤일랑은 지난달의 잡지를 건성으로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선정적이거나 엽기적인 야담과 실화를 엮어서 내는 대중잡지였다.

그 가운데 번역한 탐정소설이 한두 편 연재되고 있었다.

야담과 실화를 소설 형식으로 쓰는 것은 번역보다 원고료가 많았다.

그러나 윤일랑은 그 일거리에 절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런 일로 소설 쓰는 붓끝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탐정소설 번역으로 겨우겨우 호구를 해결해 가고 있었다.

탐정소설은 엄연히 필자가 따로 있어서 원작에 충실하게 번역을 하면 소설 쓰는 능력을

팔아먹어 가며 선정적 문장을 꾸며내고, 엽기적 장면을 조작해 내고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일을 맡게 된 것은 이 잡지다 장사만 열심히 할 뿐 일체 친일적 정치성을

띠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잡지에서는 성전 찬양이나 군대지원 독려같은 시 소설 나부랭이들이 실리지 않았다.
윤일랑은 송중원이가 말하는 방향으로 소설을 써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것도 무의미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소설로 써야 될 쓰라리고 뼈저린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데 그것 다 외면하고 옛날이야기나 쓴다는

것이 전혀 내키지 않고 회의스러웠다.

그런데 송중원이가 잡지사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민동환을 들이받은 것을 계기로

윤일랑은 붓을 꺾기로 결심했다.

친일로 치달아가는 와중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최소한의 저항을 하는 데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나마 글을 쓰지 않게 되지 곧바로 생활고가 밀어닥쳤다.

최소한의 저항을 시도한 대가는 처자식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굶주림이었다.

그것과 싸우기 위해 찾아낸 일거리가 번역이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다 긁었는데 절반밖에 안됩답니다."


편집장이 난색이 되어 봉투를 내밀었다.


"아니, 그만하면 고맙소."


윤일랑이 희미하게 웃었다.


"선생님, 나가셔서 차 한잔 하실까요?"


"갑시다. 내가 살 테니."


"아닙니다. 대접은 제가 하겠습니다."


편집장이 봉투를 들고 앞장섰다.


밖에는 5월의 햇살이 눈부셨다.


"아, 햇빛 좋다. 역시 5월은 계절의 여왕입니다."


편집장이 두 팔을 뻗어올리며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계절의 여왕이라…."


윤일랑의 눈앞에는 노천명의 모습이 불쑥 떠올랐다.


'성질 깔끔하고 칼칼한 여인이여, 그대마저 친일로 돌아서다니.

성질만큼 결벽증도 심하더니 그건 어느 정도 의지의 소산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고난 성품에 지나지 않았던가?

서정도 남달리 투명하고, 그러면서도 여류시인답지 않은 질량감 있는 시를 써낸

그대는 꼿꼿하게 버틸 줄 알았다.

그런데 친일이라니, 무엇을 위해서인가?

출세를 위해서인가? 혼자 몸이면서 편히 살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어느 누구의 말마따나 남들이 다 변하니까 따라서 그런 것인가.

그대에게 기대한 건 없다만 괜찮은 시 몇 편이 아깝다.'


윤일랑은 시인 노천명을 특별히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류문사들도 이미 친일의 대열에 가담했고,

미술가며 음악가들도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판이어 .

그리고 종교계며 교육계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지식인들은 친일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그건 다 작년11월의 대동아 공영권 성취라는 것을 계기로 벌어진 사회의 급격한 변화였다.

다만 시 한 구절 때문에 노천명이 생각난 것이었고,

다시 생각해도 그 시적 재능이 아까웠던 것이다.
"선생님, 아까 직원이 말씀드렸던 그 박정애라는 여자분 말입니다.

저한테 따로 전화를 해서 선생님을 꼭 좀 뵙게 해달라고 당부하던데요.

선생님께 도움 될 일이라구요."


편집장이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꺼낸 말이었다.


"김형, 그 여자 직함이 뭔지 아시오? 국민총력연맹 경성지부 간부요."


"예에?"


편집장이 빨던 담배를 입에서 뗄 정도로 놀랐다.


"그런 여자가 나한테 도움을 주면 무슨 도움을 주겠소."


윤일랑은 쓰디쓰게 웃었다.


"회유하려는 것이로군요?"


"그 얘긴 더 하지 맙시다."


윤일랑이 찻잔을 들었다.


"예, 알겠습니다. 전 그런 것도 모르고 선생님께 도움 될 일이라고 해서…"


편집장은 담배를 연거푸 빨고는


"선생님, 참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그는 앉음새를 고쳤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윤일랑은 찻잔을 놓으며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묻고 있었다.


"만해 선생이 타계하신 것 말입니다."


"아니, 한용운 선생이?"


윤일랑은 깜짝 놀랐다.


"예, 며칠 됐습니다."


"아아, 그분마저 돌아가시다니…"


윤일랑의 메마른 얼굴이 침통하게 일그러졌다.


"그분은 더 사실 분인데 아사나 마찬가집니다.

 배급타먹기를 거부 하셨으니까요."


"배급타기를 거부했다는 건 알고 있소.

그렇다면 그분은 장기간 동안 아사투쟁을 해 오신 거요?"


"예, 그렇습니다."


"참, 꼭 계셔야 할 분들이 그렇게 가시다니…"


윤일랑은 뭉텅이진 한숨을 토해냈다.


"이육사 선생도 가시고 만해 한용운 선생도 가시고…,

이제 문단도 친일문사들의 독무대가 됐습니다."


편집장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열여덟 차례씩이나 투옥을 당하면서 치열하게 독립투쟁을 전개해 왔던

시인 이육사는 지난 1월에 북경감옥에서 옥사했던 것이다.


"참, 갈수록 암담한 세상이오."


윤일랑의 어금니 맞무는 소리가 뿌드득 들렸다.
둘 사이에 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저쪽 자리의 남자들이 계속되는 일본군의 승리에 대해 아는 척을 하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선생님, 이거 새 일거립니다."


편집장이 봉투를 내밀었다.


"고맙소"


윤일랑은 봉투를 받아놓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신문지에 싼 조그만 것이었다.

윤일랑은 신문지를 펴더니 무슨 가루를 입에 털어 넣었다.


"아직도 소다를 드십니까?"


"아직도가 뭐요. 갈수록 많이 먹게 되는걸."


물을 꿀렁거려 넘기고 난 윤일랑이 쓰게 웃으며 대꾸했다.


"왜 자꾸 그걸 드십니까."


"이 놈의 세상이 이걸 안 먹게 생겼소.

속상하는 일들을 보고 들을 때마다 속이 화끈화끈해지고 뜨끈뜨끈해지면서

소화가 안되고 먹먹하고 더부룩하니 어쩌겠소."


"선생님, 소다를 오래 드시면 나쁘다던데요.

그러지 마시고 큰 병원에 가서 근본적인 진찰을 받아보세요."


"그까짓 것, 죽기밖에 더하겠소."


윤일랑은 허전하게 웃었다.
태전위산이나 호시위산의 매상을 올려주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한번 병원에 가면 고작 이삼일치 먹을 약을 주고는 3, 4원이나 받았다.

그런데 위산은 40전이면 삼사일을 먹을 양이었고, 1원이면 열흘 넘게 먹을 양이었다.

그리고 10전이면 두부가 한 모였고, 솔가지 한 묶음 값이었다.

그것에 비하면 병원비는 터무니없이 비싼 것이었다.

의사하고 변호사는 면허증 가진 도둑놈이라는 말은 결코 우스갯소리만이 아니었다.

애당초 병원에는 갈 엄두조차 낼 수가 없었다.
편집장과 헤어진 윤일랑은 곧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죽도 끓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점심은 아예 굶는 것이고, 밥보다는 죽을 더 많이 끓이는 형편이었지만 번역하는

원고료 가지고는 여섯 입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윤일랑은 사는 것이 모래밭 걷기 같고,

앞날이 캄캄한 밤길 걷기 같을 때마다 송중원을 생각하곤 했다.


"지식을 팔아먹으려고 해서는 안 되네. 그게 바로 친일의 길이니까."


송중원이 떠나면서 남긴 말이었다.


"어서 애들 밥해 먹이시오."


윤일랑은 아내에게 급히 돈봉투를 내주었다.


"아빠, 돈벌어 왔어?"


눈이 퀭해 누워 있던 막내아들이 얼굴이 환해지며 벌떡 일어났다.


"그래, 엄마가 곧 밥 많이 해줄 게다."


윤일랑은 막내아들을 꼭 끌어안았다.

어린것의 몸에 뼈만 남아 있었다.

윤일랑은 가슴이 찡해졌다.

자신은 만해처럼 죽을 수는 없었다.

그만큼 큰 용기도 없었고, 네 아이들이 너무 어렸다.


"엄마, 빨랑 밥해 줘. 나 어지럽고 눈에서 별이 왔다갔다해."


막내아들이 휘청거리듯 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어떻게 해서든 저것들을 먹여 살리며 버텨내야 한다. 왜놈들이 망할 때까지.'


윤일랑은 다시 마음을 다지며 봉투에서 책을 꺼냈다.

책 제목은 <지하실의 살인>이었다.

윤일랑의 얼굴에 서글프고 찬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달포쯤 되어 국민총력연맹 경성지부에서는 표창식이 거창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표창을 받을 사람은 열서너 명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미끈한 양복 차림이었고, 살찌고 혈색 좋은 얼굴들에는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누가 보거나 한눈에 돈깨나 있고 행세깨나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 민동환도 엄숙하고 긴장된 얼굴로 끼어 있었다.


"여러분들은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에 적극 호응하여 국어상용에 솔선수범함으로써

타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지부장의 장황한 인사말에 이어 표창이 시작되었다.
표창장은 두꺼운 모조지였고, 거기에는 국어상용의 가 라는 글씨가 크고 뚜렷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민동환은 그 빳빳한 종이를 감격스러운 얼굴로 보고 또 보았다.

그러기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민 사장님, 축하해요."


식이 끝나자 박정애는 민동환에게 다가와 거침없이 손을 내밀었다.


"아, 예에…"


오히려 민동환이 악수하기를 주저했다.


"기분이 어떠세요?"


"예, 고맙습니다. 모두가 박 여사님 덕분입니다."


민동환은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원 별말씀을. 앞으로 더욱 충성하셔야 해요."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민동환과 박정애는 더없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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