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63. 종군위안부들의 행로

오늘의 쉼터 2017. 7. 10. 01:18

163. 종군위안부들의 행로



"아이고, 이 얼굴덜 잠 보소.

둘 다 이쁜 얼굴인디 굶고 살아서 푸석푸석 붓고 마른 버짐 피고 요것이 머시여.

지대로 배불리 묵고 살먼 매화꽃이 부럽겄어,

목단꽃이 부럽겄어. 시상에 부러울 것 없는 이쁘고 이쁜 꽃으로 필 나인디."


여자가 입맛 다셔가며 입심 좋게 말했고, 복실이와 순임이는

창피스러워 고개를 수그리며 얼굴을 가렸다.


"날이 날마동 죽도 지대로 못 묵고 소낭구껍뎅이 빗게 묵고,

풀뿌랑구 캐로 댕기고 험서 집에만 붙어 있으먼 무신수가 생기드랑가?

다 배곯아 황달이나 들고, 그러다가 큰 병이 생기먼 이 존 나이에 한시상 보지도 못허고

저승질이제. 시방 소리소문없이 굶어죽는 사람덜 많은 것 알제?

고것이 강 건너 산 너머 넘덜 일인지 알제?

 아니여, 아니여, 바로 자네덜 집안일이여."


여자의 말에는 한층 시명이 오르고 있었다.

복실이도 순임이도 얼굴을 들지 못했다.

여자 앞에 풀뿌리죽을 내놓고 앉은 것 같은 창피스러움이 덮씌워져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말은 그런데가 하나도 없었다.

쌀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밀기울이 떨어진 지도 오래였고,

시래기마저 떨어져 죽을 끓일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소나무껍질이나마 마음대로 벗겨먹을 수 있은 것도 아니었다.

나무를 죽이고 산을 망친다고 관에서 금하고 있었다.

밤중에 몰래 소나무껍질을 벗기다가 잡혀가 매타작을 당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칡뿌리는 진작 동이 났고, 풀뿌리를 캐려고 산을 헤매야 했다.

쑥이며 나물 같은 것이 나오려면 아직도 한 달은 더 있어야 했다.

굶주리는 나날 속에서 하루 넘기기가 십년살이인데 한 달이면 까마득한 세월이었다.

그때까지 굶으며 기다리자면 죽어도 세 번은 죽은 수 있는 긴긴 날이었다.


"그러니 자네덜 좋고, 집안식구덜 살리고 허는 질언 나 말얼 듣는 일인 것이여.

이 선도금 20원이먼 당장 자네 식구덜이 시끄니 밥 척척 묵고 살 것 아니여."


여자는 지전 두 개를 펴서 복실이와 순임이 눈앞에다 빠르게 흔들어 보이고는,


"워디 고것만이간디? 자네덜 벌이가 얼맨지나 알어?

한 달에 30원이여, 30원. 그것도 다 믹에주고, 입혀주고, 재와줌서 30원이란 말이여.

그렁게 한 달 30원이 곰시라니 모아지는 것인디.

고것이 1년이먼 얼매여? 3백 60원 아니여? 글고 2년이먼 7백 20원이여.

 쓴다고 히도 7백원이 남어. 7백원, 7백원이먼 얼매나 큰돈인지 알제?

자네덜언 딱 2년 만에 떼부자가 되는 것이여.

초년 고상언 사서도 처드라고 2년만 돈벌이도 허고 일본 귀경도 허고 오먼 집안 부자 되고,

자네 덜언 딱 시집가기 존 나이 아니여? 어찐가, 가겄제? "


여자는 차지게 입맛을 다시며 복실이와 순임이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여자에게 눈길을 보냈다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은 서로에게 묻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눈자위는 상기되어 있었고,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저어…, 참말로 30원씩 주는게라?"


복실이가 물었다.


"하먼, 요 20원언 당장 주고, 한 달에 한분30원썩 준당게."


여자는 또 지전을 흔들어 보였다.


"무신 일얼 허는디 그리 많이 줘라?"


이번에는 순임이가 물었다.


"이, 공장서 일허제, 공장. 남자덜이 다 군대에 나갔응게 여자덜이 일허는 것이고,

자네덜맨치로 젊고 기운 좋아 일 잘헝게 30원썩 주는 것이로구만."


여자는 연상 절친한 웃음을 지으며 술술 대답했다.


"니 으쩔래?"


복실이가 물었다.


"니넌 으쩔래?"


순임이가 되물었다.


"하이고, 묻고 자시고 헐 것 머 있간디?

맘 딱 정허는 것이제. 요것보드라고, 나가 어디 거짓말허능가."


여자는 옆에놓인 보퉁이를 끌어다가 풀었다.


"음마, 요것이 머시여."


"아이고메, 옷허고 구두 아니여?"


그들의 눈은 휘둥글해졌다.
보퉁이에서 나온 것은 네모지게 접힌 옷 두벌과 뾰족구두 두 켤레였다.


"자네덜이 간다고 맘얼 정허기만 허먼 요것덜 딱 입고 신고 가는 것이네."


여자는 옷을 양쪽 손에 하나씩 들고 흔들었다.

그 옷은 분홍과 갈색의 원피스였다.
복실이와 순임이가 또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은 한층 더 동요하고 있었다.

신식 멋쟁이들이나 입을 수 있고 신을 수 있는 저 서양옷과 뾰족구두.

검정고무신 한 켤레 얻어신을 수 없는 처지에 그 옷과 구두는 너무 욕심나고

가슴 설레는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 가자"


순임이가 먼저 말했다.


"근디, 엄니헌티 말히야제."


복실이의 자신없는 대꾸였다.


"잉, 되았어, 자네덜만 맘 딱 정허먼 그담언 나가 달 알어서 헐 것잉게 아무 걱정덜 말어."


여자가 원피스를 다시 접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찌헐라는디요?"


복실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자네덜이 나가 허디끼 엄니덜헌티 달 말헐 재주 있는감?

나가 엄니덜 만내서 말허먼 제까닥잉게 아무 걱정얼 말고 낼 아칙에 떠날 채비나 혀두라고."


여자는 신바람 나게 옷과 구두를 다시 쌌다. 그

 여자는 월전댁을 붙들고 이야기를 엮어대기에 바빴다.


"자아, 그렁게 요 돈 딱 받고 복실이맨치로 맘 정허씨요."


여자는 월전댁의 메마른 손에 지전 두 장을 쥐어주었다.


"아니구만이라, 아그덜 아부지가 내래다봄서 생야단얼 칠 것인디요."


심한 굶주림으로 양쪽 볼이 푹 꺼지고 눈이 퀭한 월전댁이 고개를 저으며 돈을 되밀었다.


"아이고, 그 무신 실답잖고 새 날아가는 소리다요.

상감도 죽어불먼 그만인디 머시가 내래다보고 올래다보고 그래야. 허고 내려다본다고 칩시다.

편케 돈 잘 벌어 팔자 고칠 자리두고 저 에린 손지새끼덜 배 탈탈 곯려 부황 들게 맨글기럴 바래겄소. 아니먼 돈벌어 배불르게 믹여 잘 키우기럴 바래겄소?"


"……"


월전댁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자에게로 눈길이 갔다.

그런데 월전댁은 가슴이 뜨끔해졌다. 둘째손자를 안고 있는 며느리와 눈길이 마주쳤던 것이다.

월전댁은 얼른 눈길을 돌렸다. 20원이면 손자들을 배불리 먹이며 이 어려운 고비를

너끈히 넘길 수 있는 액수였다.


"알것소, 나가 복실이 말도 들어볼라요."


월전댁은 며느리의 눈길에 밀리듯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참, 뜸 오래 디인다고 밥이 더 맛있어지요?

아깝게 누룽밥만 뚜껍어지제. 아까 이 옷도 구두도 다 귀경허고 순임이란

처녀허고 가기로 맘 딱 정했단 말이오.

 일본 가는 배 타자면 낼 아칙에 꼭 떠야 허는디,

어찌 세월아 네월아 허고 앉었을라고 그러요. 글고 말이오,

복실이헌티 들어보나마난게 다된 일 돈 얼렁 받아갖고

저 불쌍헌 손지새끼덜 한끄니라도 더 빨르게 배 채와줘야제

무신 초 친 맛이라고 낼꺼정 굶길라고 그라요.

 고것이 할매가 헐 일이요? 얼른 돈 받어다 쌀 팔아오게 허씨요."


그 여자는 능란하게 월전댁의 아픈 데를 찔러대며 돈을 다시 손 사이에다 밀어넣었다.


"……"


월전댁은 돈을 다시 되돌려주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나 갈라요. 낼 아칙에 일찍허니 오겄소."


그 여자는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어무니…."


며느리가 울먹였다.


"암말 마라. 새끼덜 살래야제."


월전댁은 울음을 삼키며 일어났다.
두 손자는 오랜만에 보는 보리밥을 한 그릇씩 먹어치우고는 곧 잠이 들었다.

복실이는 그런 조카들을 보며 연신 방글거렸다.

월전댁은 목이 메어 밥을 제대로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복실아, 니 잘헐 수 있겄냐?"


월전댁은 딸하고 나란히 누워서야 입을 열었다.


"하먼, 아무 걱정 말어."


복실이의 목소리는 어머니의 근심스럽고 무거운 목소리에 비해 아주 밝고 명랑했다.


"타국서 고상이 많을 것인디…."


월전댁이 딸의 손을 더듬어잡았다.


"아니여, 농새일도 허고 살었는디 머."


복실이도 어머니의 손을 꼭 마주잡았다.


"다달이 30원썩이나 준다먼 그맨치 많이 부려묵을 거이다…"


"돈만 많이 줌사 고런 것이야 암것도 아니제."


"시집가야 헐 나인디…"


"아니여, 엄니. 나 인자 열일곱잉게 2년 갔다 와도 열아홉밖에 안돼야.

요새 혼인 일찍 허는 것언 숭거리고, 나라서도 금허덜 안혀?"


"그려, 그러기넌 헌디…"


"나가 돈 많이 벌어갖고 와서 논도 사고, 집도 사고, 엄니 비단옷 해디리고,

금반지에 금비녀도 혀디리고 호강시킬라네."


"아이고, 나 호강시킬라 말고 니 시집이나 잘 가야제."


"글고, 엄니 나 없다고 심심해허덜 말어.

오빠 징용 간 지 벌써 1년 되았응게 인자 1년만 더 참으먼 오덜 안혀."


"아이고, 애긴지 알었등마 우리 딸이 다 컸네 웨."


월전댁은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 딸을 와락 끌어안았다.


"엄니…"


복실이가 어머니의 품에서 가느다랗게 어머니를 불렀다.


"이?……"


"나 엄니 젖 맨지고 잘라네."


"이잉, 숭허게."


월전댁은 말과 달리 가슴을 헤집고 드는 딸의 손을 막지 않았다.

오히려 막내둥이에 대한 정이 샘솟고 있었다.
남편이 재작년에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 과수원에서 아들네를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죽고 아들은 곧 징용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때부터 생활이 어려워졌다.

과수원에서 품을 팔았지만 그날그날 풀칠하기가 바빴고,

가을에 과일을 다 따고 나면 품팔이일이 없어져 죽 끓이기도 어려운 겨울을 나야 했다.

딸을 일본까지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놈의 토지 조사 사업으로 논을 빼앗긴뒤로 남편은 평생을 소작살이로 고생고생 하다가

결국  땅도 못찾고 한만 품은 채 저승으로 떠났다.

참 기막히게 살아온 세월이었는데 아들은 또 징용으로 끌려가고 막내딸도

처녀 몸으로 타국 돈벌이를 떠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월전댁은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월전댁은 웁쌀을 안쳐 딸에게만 쌀밥을 퍼주었다.


"이잉, 나도 쌀밥…."


"에잉, 고모만 쌀밥 묵고…"


두 손자가 칭얼거리며 몸을 내둘렀다.


"아이고, 요 속창아리 는 새끼덜아…"


월전댁은 주먹을 쥐어 보이며 눈을 부라렸다.


"엄니넌 참, 그렁게 무신 베실허로 간다고 나만 쌀밥얼 주고 그렁가."


복실이는 쌀밥을 듬뿍듬뿍 떠서 조카들의 보리밥 위에 보탰다.


"아서, 아서, 고것 너무 많다.

 배 타고 먼 질 가는디 쌀밥이라도 한 그럭 묵고 기운 채래야제."


월전댁은 손자들의 보리밥 위에 올려진 쌀밥을 절반씩 갈라서 다시 딸의 밥그릇으로 옮겼다.

그리고 자기 밥그릇에서 보리밥을 듬뿍 떠서 딸의 밥그릇에 보탰다.


"짜아아, 복실이 다 채비혔어?"


그 여자가 들이닥쳤다.


"시방 밥 묵소."


월전댁의 지게문을 열며 말했다.


"이, 많이 믹이 씨요. 나 순임이 딜고 올 것잉게."


여자는 활개치며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마음이 설렁거려 복실이는 밥맛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를 생각해서 밥을 억지로 다 먹었다.


"복실이 밥 다 묵었지야? 나오니라, 가자."


복실이는 작은 보퉁이를 들고 나왔다.


"고 보퉁이 머시냐?"


여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옷이오, 속옷"


월전댁이 재빨리 대답했다.


"아이고, 옷 다 준다고 안혔소, 어이, 두고 가."


여자가 앙칼스럽게 말했고, 복실이는 보퉁이를 슬그머니 마루에 놓았다.


"복실이 엄니, 멀리 따라나올 것 없이 작별언 여그서 헛씨요.

집 밖에 나와 울고불고허먼 넘덜 보기도 안 좋고, 우리 갈 질도 바쁜게라."


여자의 말은 차갑고 매웠다.
그 서슬에 월전댁은 주눅들며 순임이의 어머니가 여기까지 따라오지 못한 이유를 깨달았다.


"엄니, 그리혀."


복실이가 눈물 글썽해서 말했다.


"그려, 그려. 몸 성허고, 타관살잉게 몸 더 정히 간수히야 혀."


월전댁은 목이 메며 딸의 등을 어루만졌다.


"야아, 엄니도 무병허니…"


복실이는 어머니를 한번 더 쳐다보고 사립을 나섰다.


"그려, 그려…"


월전댁이 한 손으로 입을 막으며 어서 가라고 손을 저었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버스를 타고 전주로 갔다.

여자는 그들을 간판도 없는 어느 여인숙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여자를 맞이한 것은 일본 남자 하나와 조선 남자 하나였다.


"이분네덜이 느그덜얼 일본으로 달고 갈 것잉게 말덜 잘 들어."


여자가 복실이와 순임이를 골방 같은 데로 밀어넣었다.


"곧 올 테니까 빨리 옷 갈아입고 있어."


그가 보퉁이 두 개를 던지고는 문을 닫았다.

그런데 복실이와 순임이는 깜짝 놀랐다.

그 방에는 다른 여자들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멀 그러고 섰소? 얼렁 옷이나 갈아입제. 매 안 맞을람사."


어느 여자가 뚱하니 말했다.


'매?…'


복실이와 순임이의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보퉁이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치마저고리를 벗고 눈치껏 원피스라는 옷을 갈아입었다.

그 옷이 보기하고는 다르게 치마저고리보다 불편한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서야 방에 있는 여자들이 다섯이라는 것을 알았다.

조금 있다가 조선 남자가 가위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순임이의 머리채를 붙들더니 다짜고짜 가위를 들이댔다.


"아이고메 엄니, 워째 이러신게라?"


순임이가 질겁을 하며 복실이을 붙들었다.


"잔소리 말고 가만히 있어.

요런 조선년 머리 해가지고 일본 가면 조센징 촌년들이라고 놀림당하는 것 몰라?

조선년이란 표 안 나고 원피스에 어울리게 머리를 짧게 잘라야 취직이 되지,

저봐, 다른 애들도 다 잘랐잖아."


조선남자가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흔들며 말했다.
순임이와 복실이는 그때서야 다른 여자들의 머리가 다 짧다는 것을 알았다.
조선 남자는 싹둑싹둑 가위질을 해댔다.

순임이는 가위질소리가 날 때마다 몸을 움찔움찔 떨었다.


"다음 너"


남자의 퉁명스러운 소리와 함께 땋아내린 머리채가 다다미 위에 툭 떨어졌다.

그 머리채끝에는 아직 빨간 댕기가 묶여 있지 않았다.

초경을 치르지 않은 나이라는 뜻이었다.

그 멀채를 보면서 순임이는 팔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 묘한 심정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복실이도 머리채를 잘렸다. 복실이의 머리채에도 빨간 댕기는 묶여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전혀 바깥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두 남자의 감시 아래 겨우 변소를 오갈 수 있을 뿐이었다.

 밥도 하루 두끼 시켜다주는 것을 먹었다.

방이 좁아 7명이 누울 수가 없어서 웅크리고 앉아서 잤다.

서로 가만가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임실 장수 진안 같은 데서 온 것이었다.
이틀이 지나자 세 처녀가 또 들어왔다.

그런데 한 처녀는 집에 보내달라며 울다가 조선남자에게 사정없이 따귀를 얻어맞았다.
그 처녀는 줄곧 울면서 저녁밥도 먹지 않았다.

밤중에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모집네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순사에게 붙들여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선도금이고 뭐고 받은 것이 없었다.

왜 돈벌이 가기 싫다는 사람을 부모도 모르게 억지로 붙들어가는 것인지

모두 이상하고 의아해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처녀를 위로했다.

일본에 가서 집에 편지하고, 2년동안 함께 고생해서 돈 많이 벌어가지고 오자고.
다음날 일찍 여인숙에서 나가 기차를 탔다.

그 처녀는 지쳤는지 더 울지 않았고, 조선남자는 그 처녀를 따라붙듯이 감시하고 있었다.

처음의 그 여지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기차에서 내린 곳은 부산이었다.

그들은 해변가의 어떤 수용소로 들어갔다.

수용소에는 창고 같은 건물이 네댓 채 있었고, 일본군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간 건물에는 여자들이 한 20명 정도 있었다.
밥때가 되자 일본군들이 주먹밥 한 덩어리와 단무지 한 쪽씩을 나눠주었다.

건물 밖에서는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은 조선사람들이 감시를 하고 있었다.

감시가 아주 심해 변소를 갈 때도 꼭 한 사람씩 차례로 가게 했고,

그때마다 감시자가 따라다녔다.

거기서도 밥은 하루 두 끼밖에 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배고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한다고 더 줄 리도 없었고, 집에서 굶주리던 것에 비하면 그

나마 배불리 먹는 것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면서 먼저 와 있었던 20여명 중에

경상도와 경기도 처녀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다 합해 놓고 보니 전라도 처녀들이 단연 많았다.
그런데 복실이와 순임이가 놀란 것은 반수 가까이가 선도금을 받지 않고 왔다는 것이었다.

대개 돈벌이 좋은 공장에 취직시켜 준다는 것이 좋아 따라나섰고,

선도금 같은 말은 듣지도 못 했다고 했다.

그 처녀들은 뒤늦게 분해했지만 그 누구도 따지려고 나서지 않았다.

따져봤자 받지도 못하고 얻어맞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걸핏하면 주먹질을 해서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이모집에 심부름 갔다 오다 잡혀왔다는

처녀처럼 아무도 모르게 잡혀온 처녀들이 예닐곱이나 되었다.

왜 그런 못된 짓을 한 것인지 복실이는 생각할수록 의심이 깊어지기만 했다.
닷새가 지나자 처녀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우린 어디로 가나요?"


처녀들은 감시하는 사람들에게 조심조심 물었다.


"가긴 어디로 가, 일본으로 가지."


"걱정 말어, 배가 와야 가지."


감시자들의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7일 만에 수용소에서 트럭을 타고 부두로 나갔다.

겨울이 가고 있었지만 바닷바람은 찼다.

부두에 모인 처녀들은 모두 80명이었다.

군인들과 감시를 하던 남자들은 처녀들을 두 패로 갈랐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서로 갈리지 않으려고 손을 잡고 꼭 붙어섰다.

50명은 오사카로 가는 배를 탔고, 30명은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를 탔다.

복실이와 순임이는 50명 속에 들어 있었다.
오사카에서는 군부대 안의 군인 막사에 들어갔다.

다음날 안 일이지만 그 옆의 막사에는 50여명 가량의 조선처녀들이 먼저 와 있었다.
그곳에서도 주먹밥은 두 끼밖에 주지 않았고, 감시는 훨씬 더 심해졌다.

그런데 일본에 왔는데도 공장에 보내줄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5일이 지나고 10일이 가까워오자 처녀들은 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처녀들은 자기들을 데리고 온 남자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왜 공장에는 안 보내주나요?"


"잔소리 말고 기다려."


2주일이 지났다. 처녀들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수군거렸다.

처녀들은 더욱 불안해졌다.


"참 이상하네요. 왜 공장에는 안 보내주냐구요."


"딴 곳으로 가니까 그렇지."


"글쎄, 잔소리 말고 기다려."


그리고 또 5일이 자났다. 모두 트럭에 타고 실려간 곳은 다시 부두였다.

100여 명은 무작정 배로 떠밀려 올라갔다.


"왜 배를 또 타요?"


"어디로 가는 거예요?"


"어디긴 어디야. 배를 타고 딴 도시로 가는 거지."


배는 5층으로 엄청나게 컸다.

그런데 배에는 군인들이 가득 타고 있었다.

처녀들은 세 패로 나누어져 빈 선실로 들어갔다.


"요것 요상허다. 우리럴 전쟁터로 끌어가는갑다."


복실이가 쪼그리고 앉으며 겁 실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머시여? 고것얼 어찌 알어?"


순임이가 눈이 휘둥글해졌다.


"아이고 이 멍청아, 저 많은 군인덜얼 봐. 군인덜이 전쟁터 아니먼 어디로 가겄냐."


"금매…. 근디 우리럴 어디다 써묵을라고 전쟁터로 끌어가겄냐.

저군인덜도 일본 딴 디 어디로 옮기는 것 아니겄어? 니가 너무 눈치가 싼것이제."


"글씨…, 그럴랑가도 몰르제."


복실이는 마음이 석연치 않으면서도 나쁜 쪽으로 생각하기가 싫었다.

밥은 하루 세 끼씩 식당에 가서 타먹었다.

반찬은 단무지 한 쪽과 우메보시(매실을 소금에 절이고 풀잎으로

붉게 채색한 것.) 한 개씩이었다.
지독하게 시면서 짠 우메보시는 뱃멀리믈 낫게 하고 배탈이 나지 않게 한다고 꼭 먹으라고 했다.

밥은 세 끼라고 했지만 양이 적어서 주먹밥 두 끼를 먹을 때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우메보시라는 것은 먹기만 고약했지 아무 효과가 없었다.

배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처녀들은 뱃멀미로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앓아 눕고

선실은 지저분하고 어수선하게 되어갔다.

그러나 배는 멈출 줄을 모르고 며칠이고 갔다.
마침내 배가 정박했다. 처녀들을 다 밖으로 끌어냈다.

 그리고 두 패로 갈랐다.

그런데 복실이와 순임이는 갈라지고 말았다.

앞뒤로 서지 않고 손을 잡고 양쪽으로 섰기 때문이었다.


"복실아, 복실아"


"순임아, 순임아"


둘이는 서로를 부르며 줄에서 벗어났다.


"이년들아, 가만히 있지 못해"


"바가야로"


조선남자가 순임이를 걷어찼고, 일본남자가 복실이의 따귀를 후려쳤다.
순임이가 속한 패가 사람수가 더 많았다.

그들 60여 명은 배에서 내렸다.

날이 어두워지며서 배가 떠날 때쯤 해서야 복실이는 그곳이 오키나와라는 것을 알았다.
배에서 내린 순임이네는 다시 20명씩 세 패로 갈려 트럭에 실렸다.

트럭은 가가기 다른 방향으로 달렸다.
순임이는 트럭에 타자마자 구두를 벗었다.

구두가 발에 맞지 않아 발가락이며 뒤꿈치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고 해서

너무 쓰라리고 아팠던 것이다.

다른 여자들도 구두를 벗으며 투덜거리고 있었다.
순임이네 트럭은어느 군인부태로 들어갔다.

지붕이 둥근 건물들이 여기저기 많았다.

그들은 그 눈에 선 건물의 맨 끝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들의 눈에 선 것은 건물만이 아니었다.

키가 껑충하고 잎들이 갈기갈기 갈라진 나무들도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여게가 어덴데 와 이리 덥노."


"그러게 말야, 속옷을 벗어야 되겠네."


"얄궂어라, 여그도 일본 땅일랑가?"


하나가 벗기 시작하자 처녀들은 다 따라서 속옷을 벗어댔다.

 해거름이 되자 군인 넷이 주먹밥을 가지고 왔다.

그들은 처녀들을 한 줄로 세우고 주먹밥을 받게 했다.


"어머머머…."


"워메, 엄니"


처녀들이 놀란 소리들은 질렀다.
군인들이 주먹밥을 나눠주며 처녀들의 젖가슴을 만지고 쥐어잡고 했던 것이다.

앞의 네 처녀가 그런 일을 당하자 나머지 처녀들은 혼비백산 흩어져 양쪽 나무침상으로 올라갔다.


"아하하하하…"


"어허허허허…"


군인들은 통쾌하게 웃어젖혔다.

그러고는 주먹밥을 놓고 밖으로 나갔다.


"저런 문디이 자석덜 보래."


"이상해, 아무래도 이상해. 계속 군부대로만 데리고 다니고…"


처녀들은 부쩍 두려워하고 의심스러워하며 입모아 수군거렸지만

이곳이 어딘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주먹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지 배타기에 지칠 대로 지친 처녀들은 하나 둘씩 잠이 들었다.

그런데 문이 벌컥 열리면서 군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군인은 한둘이 아니었다.

군인들은 처녀들을 향해 침상으로 뛰어올랐다.


"엄마아"


"엄니이"


잠들지 않고 있던 처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려 했고 막 잠이 들었던

처녀들이 소스라쳐 일어났다.

그러나 처녀들은 삽시간에 군인들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처녀 하나씩을 붙든 군인들은 무작정 처녀들을 바닥에 넘어트리며 눕히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어무이요"


"안돼, 안돼"


"엄니, 엄니"


처녀들은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며 군인들을 떠다밀고 비명을 질렀다.


"바가야로"


"칙쇼"


군인들의 이런 욕설과 함께 따귀 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철퍽철퍽 울리고 있었다.

처녀들의 반항이 차츰 수그러들었다.
군인들은 제각기 바지를 끌어내렸다.


"아아으…. 엄마…"


"으아으…."


"워메 엄니…"


군인들의 씩씩거리는 숨소리에 섞이는 처녀들의 신음이었다.

처녀들의 원피스는 위로 걷혀 올려져 있었고, 군인들의 바지는 발목에 걸려 있었다.
군인들이 바지를 끌어올리며 하나씩 나가기 시작했다.

옆으로 웅크리고 누워 흐느끼는 처녀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군인들이 다 나가자 처녀들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군인들이 또 쏟아져 들어왔다.

좀더 어두워진 속에서 군인들은 여자를 차지하려고 법석이었고,

처녀들은 다시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며 비명을 질렀다.


"칙쇼"


"바가야로"


또 욕설이 터지며 따귀 치는 소리들이 철퍽거렸다.
군인들의 거친 숨소리가 처녀들의 신음을 휩쓸고 있었다.

군인들이 바지를 끌어올리며 나가기 시작했다.

다 나갔나 싶자 또 군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번에는 몸부림치거나 발버둥치는 처녀들이 없었다.

군인들이 나가고 또 쏟아져 들어왔다.

군인들이 나갔다, 또 쏟아져 들어왔다.
다섯 차례 되풀이된 다음에 군인들은 더 들어오지 않았다.

한 처녀에게 다섯 명씩, 100명의 일본군이 거쳐간 것이었다.


'엄니, 엄니, 나 어째야 좋당가, 인자 나 어째야 좋당가, 돈벌이 다 거짓말이여.

우리럴 속인것이여. 요 일얼 어째야 좋당가…'


순임이는 그때서야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으며 흐느끼고 있었다.

모든 처녀들은 어둠 속에서 오열하며 자기들이 어떤 신세가 되었는지 깨닫고 있었다.
그들은 6일 동안 그 퀸세트막사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해만 지면 그일을 당했다. 적어서 다섯 차례였고 많은 때는 열 차례도 되었다.

처녀들은 아랫배와 거기가 아파서 걸음도 제대로 못 걸었다.

순임이는 날마다 거기서 피가 흘렀다.

그들을 거쳐가는 것은 인근 부대의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7일째에 다시 배를 탔다.

지난번에 비하면 절반도 안되는 배였다.

배에는 군인들은 없었고 무슨 물건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처녀들은 이제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모두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다.

배는 며칠 만에 어느 섬들 옆을 지나고 있었다.

짙푸르고 맑은 넓고 넓은 바다에 섬들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선원들이 저기가 사이판이고 그 아래로 있는 것이 아프섬이고,

 너희들은 파라오섬에서 내릴 거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 말을 귀담아 듣는 처녀는 아무도 없었다.
파라오에 내린 그들은 두 줄로 서서 낯선 나무들이 우거진 숲그늘을 따라 걸었다.

그때까지 그들을 줄곧 감시하고 때리고 일본인과 조선인 두 남자는

 이제 더 감시할 게 없다는 듯 앞서 걸어가며 웃어대고 있었다.


"우리 조선이 어느짝이겄냐?"


집이 임실이라는 삼월이가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같은 전라도라 자연히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몰르겄어."


순임이는 시름겨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ㅁ천리넌 왔겄지야?"


"그려, 그럴 것이여."


별로 오래 걷지 않아 그들이 도착한 곳은 판자로 기다랗게 지은 기역자집이었다.

그 집은 단층이었는데 터가 아주 넓었다.

넓은 마당 한쪽에 가꾸어진 화초밭에는 색색의 꽃들이 싱싱하게 피어 있었다.

그 꽃들도 처녀들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넓은 마당을 빙 둘러서 있는 나무들은 그대로 울타리였다.
그들을 맞이한 건 일본인 남녀였다.

그들이 부부라는 건 한눈에 표가 났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남자는 조선말을 곧잘 했다.

여자는 서툴렀지만 알아듣기는 다 알아듣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 집은 빈집이 아니었다

그들이 도착한 것을 알고 이방, 저방에서 여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고, 신마이들이 또 왔구나."


"조선 처녀 씨도 안 남겄다. 쯧쯧쯧…"


"다들 들어가지 못해"


우락부락한 남자가 빽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릅떴다.

그 험상궂은 얼굴에 쫓겨 열댓 명의 여자들이 우르르 방으로 흩어져 졌다.


"지금부터 방을 배정한다.

방 배정이 끝나면 방 번호순서대로 빨리빨리 목간을 해라.

몸에서 이렇게 냄새가 나서 어떻게 손님을 받겠나. 모두 날 따라와"


처녀들은 처음 줄을 선 그대로 두 줄로 그 주인남자를 따라갔다.

현관과 맞붙어 있는 것이 주인방이었고, 그 옆에 주방과 사무실이 잇달아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방들이 죽 이어져 있었다.

그 방들 문 위에는 번호표들이 붙어 있었다.

주인남자는 15번 방에서부터 처녀들을 하나씩 밀어넣었다.

순임이는 21번 방으로 등이 떠밀려 들어갔다.
직사각형의 방은 두 평 남짓이어 . 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었고,

조그만 창문 반대쪽 구석에 옷장 하나가 놓여 있을뿐이었다.

순임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방 가운데 오두마니 서 있었다.


"목간 시작이다야, 순서대로 빨리빨리 해, 15번, 15번 나와"


주인남자가 복도에서 외치는 소리가 찌렁찌렁 울렸다.

판자벽은 너무 얇았던 것이다.
복실아, 니 어디 있냐. 니도 요런 꼴 당허지야? 우리가 바보다.

그런 거짓말얼 믿은 것이. 시상에 요런 숭헌 일얼 두고 어찌

그리 찰덕 묵디끼 거짓말얼 헐끄나, 복실아…,

나 말이여, 나 더 살고 잡지 안혀,

배타고 옴서 및분이고 바다에 빠져 죽으라고 혔는디….,

엄니가…., 불쌍헌 엄니가 생각나서…, 니가 있으먼 또 몰르겄는디……,

나 미칠 것 겉으다, 환장헐 것 겉당게, 복실아…. 복실아…
순임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지어 흐르고 있었다.


"순임아. 얼렁 목간혀, 저 끝이여."


20번인 삼월이가 저쪽 복도끝을 가리켰다.


"물은 한 통 빨리 빨리"


목욕탕 앞에서 회초리를 든 주인여자가 어설프게 조선말을 지껄였다.
서너 개의 커다란 물통 옆에 작은 나무물통 하나가 있었다.

그것을 쓰라는 것이었다. 순임이는 그 물에 얼굴부터 씻었다.

그 물이나마 대하니 살 것 같았다.

집에서 떠나온 뒤로 낯을 제대로 씻어본 적이 별로 없었다.

머리를 감기 전에 거기를 몇번이고 씻었다.

남자들의 그 더러운 것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것만 같았던 것이다.


"빨리빨리"


주인여자가 회초리로 문짝을 쳤다.
순임이는 몸에는 물을 끼얹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왔다.
목욕이 다 끝나자 사무실로 모이라고 했다.


"이것은 삿쿠다. 군인들한테 이것을 꼭 끼고 일을 보게 해.

그래야 성병도 안 걸리고 임신도 안한다. 다들 알았지."


남자주인이 거칠게 말했고, 그 마누라가 삿쿠"콘돔"를 한 통씩 나누어 주었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안남미밥으로 저녁을 먹었다.

된장국과 단무지 한 쪽이 반찬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만에 대하는 된장국맛에 밥들을 다 먹었다.
주방과 함께 있는 식당에서 방으로 돌아와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밖이 왁자하게 시끄러워졌다.

조금 있다가 순임이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군인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순임이는 질겁을 했고, 군인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헤벌쭉 웃으며

담뱃갑만한 크기의 종이를 내밀었다.

순임이는 그걸 받을 생각도 않고 자꾸만 뒤로 물러나앉고 있었다.

그건 군인이 주인에게 돈을 치르고 받아 온 전표였다.

군인은 전표를 던고 바지를 까내렸다.

그리고 순임이의 두 발목을 잡아 사정없이 끌어당겼다.


"엄니이…"


순임이는 이를 맞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한편, 복실이가 탄 배는 낮에는 미군 비행기들의 폭격을 피해 밤에만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날씨는 더워졌다.

복실이는 날짜가 가는 것을 셈하려고 마음먹었지만 뱃멀미와 더위에 시달려 잘되지 않았다.
배가 오사카를 떠나 20여 일쯤 되었나 싶은데 어느 곳에 도착했다.

트럭을 타고 수용소에 들어가서 그곳이 사이공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수용소에 20명의 조선처녀들이 와 있었다.

거기서 비로소 복실이 일행은 자기네들이 위안부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처녀들은 울고불고 야단법석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소란도 오래가지 못했다.

감시원들이 몽둥이를 휘둘러대고 욕을 퍼부어대는 바람에 처녀들은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감시가 무척 심해졌다.

변소에 일일이 따라다니고, 밥으 ㄹ끼니마다 갖다주는 것은 물론이었고,

서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하게 했고, 잘 때도 몇번씩 돌아보았다.
거기서 60명은 20명씩 세 패로 갈라졌다.

복실이가 속한 조는 배와 기차를 바꿔 타며 한정 없이 갔다.

열흘인지 얼마인지 지나 랑군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복실이를 끌고 온 그 일본남자와 조선남자가 계속 함께 갔다.
랑군은 숨을 쉬기 어렵게 더웠다.

복실이네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탔다.

트럭에는 일본군 열댓 명이 타고 있었다.
트럭은 서너 시간을 계속해서 산길로만 달렸다.

산은 갈수록 깊어졌다. 날이 어둑어둑해져서야 트럭은 험한 산속의 어느 집 안에 정거했다.

그 집 앞에는 위안소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숲속에서는 구령소리와 많은 군인들이 걷는 발소리들이 들리고 있었다.

일본군 부대가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것이었다.

가끔 대포소리도 쿵쿵 산을 울리고 있었다.
위안소 건물은 쌍둥이처럼 두 채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건 새로 지은 건물로 사이에 길이 나 있었다.

한 건물에 처녀들의 방은 10개씩이었다. 곧 방배정이 시작되었다.
복실이는 8호실로 들어가 . 방은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정도의 넓이였다.

벽과 바닥은 판자였고, 방구석에 담요 두장이 있을 뿐이었다.

방 출입구에는 문이 달려 있지 않고 커튼이 쳐져 있었다.
저녁밥은 군인들이 커다란 통에다가 한꺼번에 담아가지고 와 .

처녀들은 사무실에 둘러앉아 그대로 모둠밥을 먹었다.


"저쪽 세면소에 가서 목간을 하고 푹 쉬어."


한 씨가 처음으로 웃으면서 큰 인심을 쓰듯이 말했다.

랑군에 내리면서 누가 조선성이 뭐냐고 묻자

그는 마지못한 듯 자칭 <한 씨>라고 했던 것이다.

그는 내내 와다나베라는 일본성을 써왔던 것이다.

목욕을 다 끝낸 처녀들이 이방, 저방 모여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군인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


"다 장교님들이시다. 다들 얌전하게 잘 모셔야 해. 빨리 방으로 들어가."


긴장한 한 씨가 처녀들을 향해 소리쳤다.
처녀들은 질겁을 해서 제각기 자기네 방으로 뛰어들었다.
복실이는 두 팔을 엇갈리게 해서 손으로 양족 어깨를 틀어잡은 채

방구석에 바짝 쪼그리고 앉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런데 커튼이 걷히며 군인 하나가 쑥 들어섰다.


아이고메, 엄니
복실이는 눈을 질끈 감으며 진저리를 쳤다.


"하하하…"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손이 복실이의 치마를 헤집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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