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61. 정복되지 않는 혼

오늘의 쉼터 2017. 7. 9. 17:04

161. 정복되지 않는 혼



"아버님 건강은…"


"괜찮다. 아무 걱정 말어라."


송중원은 철망 사이로 아들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얼굴은 나쁜 편이 아니었다.


"더위가 심한데요…"


말이 짧은 송준혁은 또 위아랫입술을 맞물 듯 입을 굳세게 다물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그 입술에는 분노와 고통과 눈물이 뒤엉켜 있었다.


"괜찮다. 책 읽으면서 시원하게 보내고 있다."


송중원은 아들은 바라보며 그윽하게 미소를 지었다.

눈빛이 살아 있고, 분노와 증오가 살아 있는 아들이 대견했다.

수염자리가 완연히 드러나고, 얼굴의 틀이 완전히 잡힌 아들은

이제 어엿한 성인의 체모를 갖추고 있었다.
송준혁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삼복더위를 감방에서 지내시면서 시원하시다니…,

그만 눈물이 쏟아지려고 했다. 분노가 극에 달하면 차가워지는 것인가….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아버지의 심중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고생이 너무 심하십니다…."


"괜찮다, 나 혼자 당하는 일이 아니니."


송중원은 안타까워하는 아들을 쓰다듬듯 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들이 참아내고 있는 가슴속의 말을 다 들으면서.


"공부는 마음에 드느냐?"


면회시간이 자꾸 줄어들어 가는 것을 의식하며 이제 송중원이 물었다.


"예에…"


"그래, 고학하느라고 너무 고생이 많다."


"아닙니다. 가정교사라 편합니다."


송준혁은 일부러 <가정교사>라는 것을 강조했다.


"…."


송중원은 그런 아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눈길을 옮겼다.

 더 아들을 쳐다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허탁과 함께 고학을 할 때 아들이 또 고학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든 싸워나가면 자식 대에는 해방이 되리라는 꿈이 확실했었다.

그런데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세월은 무정하게 흘러가 오늘에 이르렀다.

어쩌면 아들도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며 고학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있는지고 몰랐다.


"그래, 공부 열성으로 해라."


송중원은 다시 아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아들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에는 말보다 더 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


"예에…"


송준혁은 아버지의 눈에 담긴 말을 읽어내고 있었다.

배움이 힘이다. 배워야 이긴다.


"만료"


간수가 외쳤다.


"저는 곧 떠납니다.

그간에 건강하십시오. 외할아버님이 안부 전하셨구요."


송준혁은 철망을 붙들며 한달음에 쏟아놓았다.


"너도 건강해라."


송중원이 괴로운 빛 깃들인 허전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섰다.

아버지가 걸음을 옮겨놓을수록 송준혁의 시야는 흐려지고 있었다.

송중원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문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송준혁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송준혁은 전주 형무소를 터덕터덕 걸어나왔다.

죄명도 형기도 없는 죄수, 그것이 아버지였다.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감옥마다 얼마나 될지 아무도 몰랐다.

오로지 총독부만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송준혁은 결국 그 고민을 아버지한테 말씀드리지 못하고 말았다.

그 문제를 의논드리기에는 면회시간이 너무 짧았고,

괜히 아버지의 마음만 산란하게 할 것 같았던 것이다.
에시마 교수는 자기 아들을 가르치며 자기 집에 와 있으라고 했다.

에시마 교수의 학점을 계속 잘 받은 데다 저서의 원고 정리를 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런 제안을 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학생으로서 일단 영광일 수 있었다.

교수한테 그만큼 인정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인 가정에 기식한다는 것이 못내 신경 쓰였다.

부자유와 불편도 문제였지만 일본인 가정에 산다는 것 자체가 더 문제였다.

그들과 어울려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의식에 변질이 생길지도 모르고,

남들의 눈에도 떳떳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거 전혀 고려할 것 없어.

에시마 교수가 정치성도 없고 인품 갖춘 순수한 학자이긴 하지만

일본인은 어디까지나 일본인이야.

그 집에 들어가면 당장 자취생활 면하는 것 하나는 이득이지.

그 대신 일거수 일투족이 얼마나 신경쓰이고 불편하겠는가.

그리고 정작 애 가르치는 것을따져봐.

교수 아들을 가르치는데 성적이 쑥쑥 안 올라가면 자네 입장이 어찌 되겠나?

그에 비하면 지금 자리는 얼마나 속편한가.

성적이 떨어지지만 않으면 됐지 김이도가 언제 조카 성적에 관심이나 쓰던가?

그러고 말야, 자네 거기 들어가 살게 되면 에시마 교수의 궂은일은 다 떠맡게 된다는 거나 알라구."


최문일은 가정교사 자리를 소개해 준 사람답게 이렇듯 반대가 단호했다.

최문일은 꼬집을 데를 정확히 꼬집은 것이었다.

그러나 교수의 제안이라서 함부로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좀 생각해 볼 여유를 달라는 말로 일단 피해 서기는 했다.

그러나 이번에 개학을 하면 가부를 분명히 해야 했다.

송준혁은 아버지께 그 문제를 말씀드리지 않는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사소한 일로라도 아버지의 마음을 괴롭게 해드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고,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해결해야 될 문제였던 것이다.

마차를 타려고 공설시장 앞을 지나가던 송준혁은 걸음을 멈추었다.


"거 남자덜도 한 땀썩 뜹시다."


"남자덜언 안된다고 안혀."


"여자덜만으로 어느 세월에 천 땀얼 채우겄어."


"글씨 말이시, 근디 처녀로만 허먼 더 좋당마."


"그러다가넌 10년도 더 걸리겄네."


여자들이 길가에서 수틀 하나에 번갈아 가며 수를 놓고 있었고,

허름한 옷에 지게를 진 남자 서넛이 조금 떨어져서 이런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들은 많이도 아니고 꼭 한 땀씩을 뜨고는 시장 안으로 들어가거나 제 갈 길을 갔다.

송준혁은 그것이 천인침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보았다.

그런데 그가 걸음을 멈춘 것은, 저걸 왜 여기서도 하고 있나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천 사람이 한 땀씩 떠서 무운을 빈다는 그것은 일본에서는 벌써 몇 년 전부터 대유행을 이루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날이 날마다 전쟁터로 끌려가는 사람들은 많고,

그 사람들이 다 하나씩 몸에 지녀야 했던 것이다.


"저것얼 지닌다고 무신 효험이 있기넌 있을랑가?"


"몰르제, 효험이 있당게 허기넌 히얄 것 아니라고.

지서이먼 감천이라는 말이 있는디, 전장터에 자석 내보내는 에미 맘으로 어찌 그냥 보내지겄오."


"허기사 그려. 점도 굿도 다 그저 좋당게 허는 것이제.

그나저나 징용에다가 인자 징병꺼정 끌어가면 이 놈으 시상이 어찌 되는 것이여?"


"우리겉이 쓰잘디 는 늙다리덜만 남고 쓸 만헌 젊은 사람덜이야 다 파리목심 된 팔자제."


"참, 살수록 험헌 꼴만 보네."


"그려, 누가 이 나이에 지게품 팔로 나설지 알었드렁가. 생때겉은 자석덜 다 징용에 뺏기고."


"그려, 전답 뺏길 적만 히도 덜 서러웠든 것이여. 이 꼬라지가 참…."


"하먼, 그때야 젊기나 혔고,  땅허고 자석허고럴 댈 수가 있간디."


지게 진 늙은 남자들은 푹푹 한숨을 쉬어댔다.
송준혁은 그때서야 조선 땅에서도 징병제가 이미 실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송준혁은 못내 충격을 받았다.

작년 5월에 의결된 조선인의 징병제는

내년인 1944년부터 시행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전쟁의 확대와 계속되는 전사로 병력이 모자라게 되자 총독부에서는

슬그머니 금년 8월 1일부터 징병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송준혁은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누구를 위해 전쟁에서 죽어가야 하는 가. 송준혁은 바로 눈앞에 닥친 위기를 느꼈다.

그 위기는 저항감을 불러일으켰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독립투쟁을 하다 죽어야한다.

평소에 스쳐 지나가곤 했던 생각이 비석에 새겨진 글씨처럼 뚜렷하게 의식에 박히고 있었다.

 전쟁터에 끌려 나가 일본을 위해 죽는 것. 그건 할아버지의 뜻이 아니더라도

자기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진작 만주 땅으로 가야 하지 않았을까 송준혁은 낭패감으로 심정이 착잡했다.
송준혁은 수틀을 든 여자 옆에서 지나치며 슬쩍 눈길을 돌렸다.

수틀 가운데 있는 세로가 긴 천에는 무운장구 네 글자의 외곽선이 먹지의 흔적으로 그려져 있었고,

빨간 숫실은 무자를 거의 다 만들어가고 있었다.

수틀을 든 여자의 불안하고 초췌한 얼굴과 붉은 숫실글자가 되려면 아직도 먼 세 글자가

송준혁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다행히도 수틀을 본 여자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꼭 한 땀씩 뜨는 것이었다.

그런데 송준혁은 깜짝 놀랐다.

일본여자 하나가 게다짝을 딱딱거리며 다가섰던 것이다.


"나도 한 땀 뜰까요?"


일본여자가 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여자는 어색스럽게 웃으면서 수틀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일본 말을 알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틀림없이 무운장구할 거예요."


일본 여자는 연상 생글거리며 수틀을 돌려주었다.

여자는 초췌한 얼굴에 고마운 빛을 띠며 수틀을 받았다.

두 여자의 옷치장이며 얼굴색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일본 여자는 하늘색 바탕에 방울무늬가 있는 원피스를 입었는데

얼굴은 발그레하게 윤기가 돌고 있었다.

그런데 수틀을 든 여자는 후줄근한 삼베치마저고리를 걸치고 얼굴은 햇볕에 그을려 검고 거칠었다.

송준혁은 그 광경을 어이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총독부에서는 징병을 끌어가고, 일본여자는 생글거리며 천인침을 거들고…

송준혁은 새로운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일본여자가 생글거리지 않고 좀 슬퍼하거나 안 됐어하는 표정만 지었더라도

그렇게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천인침의 바탕천은 여러 가지 색깔이었다.

그러나 글자를 수놓은 숫실은 반드시 빨간 색실이었다.

빨간색이 모든 액운을 막고 온갖 잡귀를 쫓는 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 사람의 정성이 모아진 천인침을 몸에 지니면 사지에서도 살아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일본식 미신인데 어느덧 조선 땅에까지 퍼지고 있었다.
앞으로 천인침을 얼마나 많이 만들게 될 것인가.
송준혁은 이런 생각을 하며 무거운 발걸음을 다시 옮겨놓기 시작했다.


"금예 아덜 이름 지어주고 떠나 그라."


아들과 함께 밥상을 받은 홍 씨가 말했다.


"제가요?…."


전동걸은 숟가락을 들다가 놀란 기색으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애비가 없응게…"


홍 씨의 반응은 진지했다.


"아이, 제가 어떻게 작명을 할 줄 아나요."


전동걸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본래 자석덜 이름이냐 아부지나 할아부지가 짓는 버인디,

애비가 징용 끌려가고 없으니 으쩌겄냐. 천상 니가 지어줘야제."


"그렇지만 제가 뭘 알아야지요."


"몰르기넌. 그 학식이먼 되았제."


"참, 어머니는. 제가 무슨 학식이 있다고 그러세요."


"여러 말 말어. 그 학식이면 넘치고 처진게."


홍 씨는 담담한 말에 비해 고집스럽게 밀어댔다.
전동걸은 더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무척 높은 학식이라도 갖춘 것처럼 믿고 있는

 어머니의 말이 우습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전동걸은 이틀 동안 끙끙했다.

여러 가지 뜻을 가진 이름들을 한 50개쯤 종이에 적어나갔다.

그리고 마음에 안 드는 것부터 하나씩 엑스표를 해나갔다.
"어머니, 이름을 지었습니다.

제일이라고요.

제도 제자에 날 일, 일본을 제압하는 큰 인물이 되라는 뜻입니다.

세상도 세상이고, 아버지가 징용 끌려가고 없는 동안에 태어난 원한을 갚으라고요."


전동걸의 뜻풀이였다.


"잉, 아조 좋다."


홍 씨는 환하게 웃고는,


"그려, 새 종이에다 배제일이라고 깨끔허니 잘 써라.

그러고 나허고 항께 갖다주로 가자."


그녀는 곧 일어날 것처럼 낭자머리를 매만졌다.


"예, 그러지요."


전동걸은 새 종이에다 만년필로 배제일을 정성스럽게 썼다.

한 아이가 평생 지니게 될 이름을 최초로 지었다는 기분과 아버지가

 징용 끌려가고 없는 동안에 그 아이가 외롭게 태어났다는 사실과,

어머니가 마음쓰고 기뻐하는 일이라서 자연히 정성이 들어갔다.


"아이고메, 참 명필이다."


홍 씨는 이름 쓴 종이를 두 손으로 잡고 높이 치켜들며 더없이 흡족해하며 밝게 웃었다.

그녀의 노리에는 아들의 이름을 한지에 붓글씨로 써 왔던 공허 스님의 모습이 스쳐가고 있었다.


"에이 참, 누가 들으면 웃어요."


전동걸은 계면쩍어 고개를 돌렸다.


"웃기넌, 에미 눈에 명필이면 명필인 것이제, 가자."


홍 씨는 이름 쓴 종이를 조심스럽게 반으로 접어가지고 방을 나섰다.

집을 나서는 홍 씨는 그 어느 때 없이 기쁨에 차 있었다.

전동걸은 어머니의 그 기뻐하는 모습 뒤에 감추어진 외로움을 보고 있었다.

홀로인 어머니의 외로움은 하루이틀 된 것이 아니지만 자신이 일본으로 떠나게 되면서

 더 깊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그나마 마음을 의지하고 산 것은 금예 모녀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금예의 아들 이름에 마음쓰는 것은 인정만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외로움을 풀 수 있는 또 하나의 대상을 찾는 것이었다.


"요것이 우리 동걸이가 작명헌 금예 아덜 이름이요."


홍 씨는 이름 쓴 종이를 방바닥에 펴놓고 몇번씩 손다리미질을 해가며 아들한테

들은 대로 이름풀이를 해주었다.


"아이고, 너무 과만허구만요.

걸이 학상이 너무 큰맘 쓰셨구만이라.

아즘찮이 아즘찮이 또 아즘찮이오."


보름이는 홍 씨와 전동걸에게 연신 머리를 조아렸고,

 아이를 안은 금예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져 있었다.
"자아, 오늘보톰 이 이름으로 불르씨요.

 어서 귀에 익어야 헝게, 어디 외할무니가 질로 먼첨 불러보시오."


홍 씨는 이름 적힌 종이를 보름이 앞으로 밀어주면서 말했다.


"아부지가 먼첨 불러야 허는 것인디.

요런 소식얼 전허먼 얼매나 좋아라 헐지 몰르는디 핀지 한 장 없으니…"


보름이는 이름 적힌 종이를 쓰다듬으며 한숨지었다.


"금내 말이오. 왜놈덜이 핀지도 못 보내게 헐끄나?"


홍 씨는 아들에게 물었다.


"예, 아마 그럴 겁니다.

군사기밀 보호니 뭐니 해서 편지를 못 보내게 하기가 쉽지요."


전동걸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 몹쓸 인종덜이다.

사람덜얼 그리 무작시리 끌어갔으먼 핀지 내왕이라도 허게 히야제."


홍 씨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히야지라."


보름이가 체념적으로 말했다.

그건 딸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려라. 발써 1년이 지냈고, 인자 1년만 참으먼 된게."


홍 씨는 금예에게 눈길은 돌렸다.


"하먼이라. 세월 묶어놓는 장사 없응게라."


보름이도 홍 씨말을 거들며 잠들어 있는 외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떨군 금예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했다.

전동걸은 그런 금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결혼 한 달 만에 남편을 보내고 혼자서 애를 낳은 금예가 가엾고 안쓰러웠다.

그러나 마 땅한 위로의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금예야, 맘 강단지게 묵어라.

인자 아그헌티 젖 뽈림서 재롱 보다 보먼 날이 훨썩 잘 갈 것잉게."


홍 씨는 위로의 말을 남기고 몸을 일으켰다.


"참말로 고맙소."


보름이도 따라 일어서며 다시 전동걸에게 인사를 차렸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전동걸은 예를 갖추다가 금예와 눈길이 마주쳤다.

금예는 황급히 눈길을 떨구었다.

전동걸은 이틀 뒤에 부산으로 떠났다.
부산에 도착한 전동걸은 또 사르르 기분이 나빠졌다.

그건 처음 부산을 보았을 때 느겼던 생소한 거부감이었다.

처음 대한 부산은 너무나 일본 냄새가 심했던 것이다.

완전히 일본 같은 부산에서 조선사람인 것이 오히려 어색할 지경이었다.

아직도 조선 냄새가 압도적인 전주에서 학교를 다닌 전동걸로서는

나라를 빼앗긴 상실감이 새삼스럽게 너무 컸고 못내 기분이 나빴다.

그 뒤로도 부산을 거칠 때마다 처음 느꼈던 불쾌감은 어김없이 되살아나고는 했다.

전동걸은 이미화와 약속해 둔 장소로 갔다.

시간이 좀 일러서 그런지 이미화는 아직 와 있지 않았다.

전동걸은 창가에 자리를 잡고 담배를 피워물었다.

멀리 보이는 바닷가에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다.

전동걸은 갈매기들의 한가로운 비상에 눈길을 둔 채 그날 밤을 생각하고 있었다.

밤 깊어 일부러 갑판으로 나가자고 했던 것은 손수건에 수놓은 빨간 장미에 화답하기 위해서였다.

밤바다는 어둡고, 흐린 전등 서너 개가 밝혀진 갑판 위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갑판 한쪽 구석에서 투프게네프의 소설 이야기를 꺼내다가 슬그머니 이미화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이미화는 화들짝 놀라더니 손을 뿌리쳤다.

순간적으로 꽉 잡았지만 이미 손끝이 빠져 나갔다.

손을 뿌리친 기세로 이미화는 마구 달아나기 시작했다.

뒤쫓아 갈까 했으나 이미화의 달리는 기세가 너무 거셌다.

손에 남은 순간적인 감촉의 허전함을 느끼며 뒤쫓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심하게 놀란 이미화를 붙들어 무엇을 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미화가 순순하게 자신의 생각을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던 것이다. 역시 이미화는 내성적인 여자였고 전형적인 조선여자였다.

결혼하기 전에는 그 어떤 접촉도 허용하지 않는 조선의 윤리.

이미화가 하얀 손수건에다 장미꽃까지 수놓아 선사한 것은 순수한 마음의 표현이었을 뿐 그

것이 어떤 접촉을 허용한다는 신호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접촉을 시도했던 것은 손을 잡고, 끌어안고, 키스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작 1단계, 그것도 너무 허전하게 끝나버렸던 것이다.

먼저 팔짱을 끼어왔던 지요꼬와는 정말 너무 대조적이었다.

밤바다를 바라보면서 저렇게 놀라게 만들었으니

어떻게 얼굴을 대하나 하는 것이 약간 고민스러워졌다.

그런 이튿날 이미화와 마주치면서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한 혼란에 빠졌다.

생글 웃는 이미화의 얼굴에는 그런 입장 난처해질 일이 언제 있었냐는 듯

전에 없이 생기가 돌았고, 그 눈빛은 다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 그렇구나.'


다음 순간 머리가 환해지는 깨달음이 왔다.

 여자란 저런 것이로구나.

완벽하리만큼 시침을 떼는 당돌함,

그리고 순간적인 피부접촉이 발휘한 효과…,

그 최초의 경험은 당혹스럽고도 황홀했다.

배를 내려가는 사람들이 빽빽한 계단에서 미친 척하고 이미화의 손을 잡았다.


"사람들이 봐요. 사람들이."


이미화는 다급하게 속삭였을 뿐 지난밤처럼 그렇게 거세게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꼬물거릴 정도였다.

그 꼬물거림은 오히려 손을 더 꼭 잡도록 자극하고 있었다.


"어머, 여기 계셨군요."


전동걸은 후딱 고개를 돌렸다.

바로 앞에 이미화가 한 떨기 꽃으로 활짝 피어 있었다.


"어서 오시오."


전동걸은 목마름 같은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이미화의 얼굴에 해맑은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아니오. 어서 앉아요."


전동걸은 자리를 권하며 이상한 착각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화의 그 친근한 웃음에 방학이라는 시간 간격이 녹아내리며

그전보다 훨씬 더 가까워진 것 같았던 것이다.


"창 밖을 보며 뭘 그리 생각하고 계셨어요?

철학도로서 인생이란 무엇이냐를 생각하셨나요?"


이미화가 자리잡고 앉으며 물었다.


"그건 이미 해답이 나와 있어서 나 같은 게 생각해 봐야 더 얻을 게 아무것도 없소.

그래 미화 씨 생각하고 있었소."


"어머, 거짓말…"


이미화는 곱게 눈을 흘기며 얼굴이 붉어지면서,


"그런 위대한 인물이 누군가요?"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거 있잖소. 석가모니와 예수라는 두 사나이."


전동걸은 담배를 빼들었다.


"그럼 그 뒤에 나온 그 많은 철학자들은 뭔가요?"


이미화는 마치 학생이 질문하는 것처럼 의문이 찬 눈으로 물었다.


"그건 다 풋내기 어린애들로 밥벌이한 거고,

나무로 치자면 잔가지들이고 강으로 치자면 지류들에 불과하오,

그런데 쓸 만한 사람을 뽑자면 딱 하나가 있긴 있소."


"어머, 그게 누군데요?"


"칼 맑스"


이미화는 놀라며 주위를 재빨리 둘러보았다.


"됐소, 그런 얘기하지 맙시다."


전동걸은 담배를 깊이 빨고는


"그간에 더 예뻐졌소."


그는 상체까지 내밀며 이미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머머…."


이미화는 어쩔 줄을 몰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전동걸은 이따가 배에서 결행할 일을 위해 지금부터 뜸을 들이고 있었다.
관부연락선은 출항하기 직전에 안내 방송을 했다.


"승객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립니다.

승객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립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본선이 출발한 이후 목적지 도착 시까지

일절 갑판 출입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최근 들어 미국 잠수함들의 출몰이 빈번해져 갑판을 완전 소등하기 때문입니다.

또 만약에 잠수함의 공격을 받게 되는 경우 본선에서는 대피를 해야 하지 때문에

요동이 심해져 갑판에 있다가는 바다로 추락할 위험이 큽니다.

승객 여러분들의 양해를 바랍니다."


전동걸은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너무 실망했다.

그러나 다음순간 갑판에 불이 전부 꺼지면 계획 실천이 더욱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잠수함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아슬아슬함을 즐기며 키스를 하면

더 한층 멋진 추억이 될 것 같았다.
전동걸은 갑판으로 나가보려고 했다.

그러나 문은 밖으로 잠겨 있었다.

전동걸은 맥이 빠져 돌아섰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미국잠수함들의 빈번한 출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건 한마디로 미국전력의 강화를 의미했다.

그리고 잠수함들이 조선과 일본의 근해까지 접근한다는 것은 공격의 적극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또한 잠수함들의 활동이 활발해질수록 일본의 모든 배들은 그만큼 피해를 당하게 되고,

또 그 만큼 해역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배에서 내리며 전동걸은 이미화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나 어젯밤 분해서 혼났소."


"왜요."


손가락들의 꼼지락거림이 전보다 한결 덜해진 이미화가 전동걸을 옆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놈의 출입통제 때문에 키스를 못했잖소"


"어머머."


전동걸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미화는 그의 손을 꼬집어 비틀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첫 키스의 맛이 이렇게 달고 고소한 것이로구나."


"어머, 나 몰라…"


이미화는 꼬집던 것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면서 전동걸이란 사나이에게 걷잡을 수 없이 휩쓸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전동걸은 이미화의 힘 빠진 손을 다시 감싸 잡으며 키스는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9월 중순경에 사혁회의 회합이 있었다.

그런데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아리요시 동지는 방학 동안에 군대를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우리 계획이 실패한 것입니다.

 이제 아리요시 동지가 무사하지만을 빌 수밖에 없습니다."


회장 최우한이 침통하게 말했다.
회원들도 모두 침울해졌다.

자신들이 중국으로 탈출하게 되는 경우 아리요시 동지는 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징병은 더욱더 극심해지고 있습니다.

공장의 노동자들이 절반을 훨씬 넘게 여자들로 바뀐 형편이고,

농촌에서도 여자들이 대거 농사에 동원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전쟁터가 확대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쟁이 치열해서 계속 전사자들이 속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날로 악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은 이미 우리가 예측했던 대로입니다.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우리가 결의한 바를 실천할 수 있는 중국 쪽의 부대들을 알아보았습니다.

중국의 만주에는 현재 투쟁하는 부대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관내에는 두 가지 부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국민당군 내의 8로군으로 변해 있는 중국공산당의 홍군이고,

다른 하나는 8로군 영역 내에 있는 조선의용군입니다.

조선의용군은 8로군과 긴밀한 협동체제를 이루는 동시에 독자적인 부대조직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 부대원들의 절대다수가 조선사람들이며,

그들 모두가 공산주의자들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두 부대 중 어느쪽을 택할 것인지 토의를 통해 결정했으면 합니다."


최우한의 보고였다.
회원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방안에 가득한 무거운 침묵이 그들의 심중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건 굳이 토의할 필요도 없는 문제 아닌가 합니다.

당연히 조선의용군으로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 회원의 의견이었다.


"그렇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다른 회원들의 찬성이었다.


"예, 그럼 토의를 생략하고 가결토록 하겠습니다.

역순으로 묻겠습니다.

조선의용군 선택에 반대하시는 분 거수해 주십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예, 만장일치로 조선의용군 선택이 결정됐습니다.

그럼 이제 구체적으로 그 시기와 탈출방법에 대해 논의 했으면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 시기는 우리 조선학생들도 징집하는 조처가

취해지는 시점부터 신속하게 대처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그리고 탈출하는 방법은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조선의용군을 찾아가자면 여러 가지 난관이 많고,

둘 이상 행동하게 되면 의심받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회장의 의견 제시였다.


"예, 일리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탈출방법에 대해 이의가 있습니다.

여긴 저를 포함해서 여자가 둘 있습니다.

그런데 머나먼 길을 여자 혼자서 간다는 것은

 여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자 둘이서 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그 위험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위험이 다소 감소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위험을 거의 완전하게 해소시킬 수 있는 방안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남자회원 한 사람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연인이나 부부로 위장되어 남자회원의 안전까지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 일석이조의 방안에 대해서 적극 검토, 결정이 내려지기를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지요꼬가 내놓은 의견이었다.


"예, 찬동합니다."


다른 일본여자회원의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예, 그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의견입니다.

그런데 그게 좀 난처한 문제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두 배 이상 많은 남자회원들 중에 누가 동행자가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다수결 원칙으로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비를 뽑을 수도 없고…"


회장이 회원들을 둘러보았다.


"결투로써 결정해야지요. 뭐."


어느 회원의 말에 모두 낮은 소리로 웃었다.


"예, 회장님이 좋은 말씀 해주셨습니다.

그 선택권은 여자회원들에게 위임해주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동지적 신뢰감과 남성적 신뢰감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요꼬의 분명하고도 단호한 말이었다.


"명언이오, 사실 내 마음 나도 모르니까."


어느 회원의 말에 또 웃음소리가 낮게 흘렀다.


"이번에 뽑히는 두 남자는 성인군자 아니면 고자라는 증거다."


다른 회원의 말에 또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예, 좋습니다. 농담 속에서 다 동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럼 두 여성 동지께서는 선택권을 행사하시지요."


회장이 웃으면서 두 여자회원을 바라보았다.


"회장님도 너무하십니다.

뽑히지 못한 남성동지들의 자존심도 고려하셔야죠.

차후에 개인적으로 통보하겠습니다."


지요꼬는 농담조 섞어 재치 있게 받아넘겼고


"네, 그게 좋겠습니다."


다른 여자 회원도 동조했다.


"예, 선택권을 인정한 이상 그 방법에 대해선 당사자들의 자유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예, 됐습니다."


회장이 그 문제를 매듭지었다.
회합이 끝나고 전동걸과 지요꼬는 다른 장소에서 만났다.


"어때요? 저하고 동행하게 된 기분이?"


지요꼬가 자리에 앉자마자 쌔액 웃으면서 물었다.


"악랄하긴. 선택권만 있는 줄 아시오? 거부권도 있소."


전동걸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호, 괜히 착각 마세요. 거부권은 결정된 바 없으니까요."


지요꼬가 생글생글 웃었다.


"내가 새삼스럽게 놀랐소. 어찌 그리 머리가 잘 돌아가는지."


전동걸이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래요. 동걸씨는 더 잘 돌아가면서."


지요꼬가 입을 삐쭉했다.


"그 문제가 나오면서 나는 계속 가슴이 두근두근 했소."


전동걸이 뚱하니 말했고


"그랬을 줄 알아요.

제가 동걸 씨 이름을 거론해 동지들한테 입장 난처해질까봐 얼마나 속이 탔겠어요."


지요꼬는 장난스럽게 쿡쿡거리며 웃었다.
1943년 10월 20일 일본 육군성은 조선인 학생의 징병유예를 폐지했다.

그건 곧 학병제 실시였다.

육군성은 잇따라 제1회 학병징병검사를 시작했다.
어느날 전동걸은 지요꼬한테서 쪽지 한 장을 받았다.


탈출 개시


쪽지에 적힌 글씨였다.


"사흘안에 출발이오. 준비완료하시오. 연락은 내가 하겠소."


쪽지를 입에 넣고 씹으며 전동걸이 말했다.


"알겠어요. 뭘 시킬 일은 없나요?"


"내가 다 알아서 하겠소."


"네, 그만 가보겠어요."


지요꼬와 헤어진 전동걸은 준비할 것을 생각해 보았다.

준비할 것이란 별달리 없었다.

학교는 안 나가면 그만이었고,

굳이 하자면 시모노세키까지 기차표나 미리 끊어두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그건 이미화였다. 알리고 떠날 것인가.

그냥 가버릴 것인가? 막상 떠날 날이 박두하자 막연하게 생각했을 때와는 달리

그 문제는 심각한 무게로 가슴을 눌렀다. 이미화가 그렇게 비중이 있었던가?

그는 새삼스럽게 자신의 감정을 더듬고 저울질했다.
전동걸은 일단 하숙으로 돌아가씨다.

하숙방에 들어서니 생각에 넣지 않았던 것들이 있었다.

책들이며 책상 이부자리…. 전동걸은 잠시 생각했다.

그것들을 다 팔아치우기로 결정했다.

책들을 집으로 부칠가 생각 했지만 일이 번거롭고,

저것들을 언제 또 보게 되랴 싶었다.

헌책방에 팔아치워서 한푼이라도 더 비용에 보태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전동걸은 그것들을 다 아래로 끌어내렸다.


"아니, 웬일이에요? 하숙 옮겨요.?"


주인여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학병 나가게 됐습니다."


전동걸의 대꾸는 퉁명스러웠다.


"아 그렇군요, 성전에 나가게 됐으면 어쩔 수 없지요. 축하해요."


주인여자가 서운한 기색이면서도 성전 출병을 축하해야 한다는 듯 웃었다.


"예 감사합니다. 제가 나머지 짐 내리는 동안 짐꾼 좀 불러주시겠어요?"


전동걸은 어느 때 없이 당당하게 말했다.


"예 그러지요. 왜 전쟁이 끝날 줄을 모르고 자꾸 심해지기만 하는 지…"


중얼거리듯 하는 주인 여자의 말에는 하숙생들은 잃어야 하는 불만이 담겨 있었다.


헌책방과 고물상에다가 그것들을 다 팔아치우고 나니 전동걸은 더 할 일이 없었다.

이미화를 언제 만나야 할 지 잠시 망설였다. 내일 만날까 했지만 사흘이란 시간은 너무 촉박했다.

오늘로 벌써 하루는 갔고, 내일이 지나면 모레는 떠나야 했다.

하루의 여유도 없이 만나면 이미화의 놀라움이 더 커질 것 같았다.

다른 할 일도 없는데 오늘 만나기로 했다.
전동걸은 이미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따가 만나 저녁을 먹읍시다. 서양말로 파티라는 걸 하게"


"파티요?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나쁜 일이요."


"네에?"


"아니, 이별파티라니요?"


"자세한 얘기 만나서 합시다."


"동걸 씨도 학병 나가시나요?"


"그 정도로 알아두고 만나서 얘기합시다."


"네에…. 어서 만나요"


이미화가 전화 속에서 울먹이고 있었다.


"언제 나가세요?"


이미화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모레요."


"어머, 나 몰라…"


이미화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기선 차나 한잔 마시고 어디 술 마실 수 있는 조용한 데로 갑시다.

좀 할 얘기가 있소"


전동걸은 이미화의 감정을 어루만지듯 말했다.


"…."


'난 몰라, 난 몰라.

저 울림 좋은 목소리를 못 듣게 되다니.

 어떡하면 좋아.'


이미화는 터지려는 울음을 애써 참아내며 목젖이 아프도록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전동걸은 조용한 술집을 찾아가씨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금년부터 술은 배급제로 통제되고 있었다.

곡식을 아끼기 위해서 취해진 조처였다.

그러다보니 술값은 엄청나게 치솟았다.

서민들은 술 한잔 입에 댈 수 없는 고달픈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미화 씨, 지금부터 감정을 가라앉히고 우리 파티를 시작합시다.

이별은 이별이되 우리가 서로 싫어서 결별하는 것이 아니고

재회가 약속된 일시적인 이별이니까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며 즐겁게 파티를 합시다."


전동걸은 이미화의 잔에 술을 따르며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말을 썼다.


"……"


싫어, 싫어, 보내지 않을 거야.


이미화는 잔에 술이 차오르는 것을 보면서 부르짖고 있었다.


"자아, 영화에서 하는 것처럼 많이는 말고 조금만 마셔 봐요."


전동걸이 술잔을 들었다.


"……"


'싫어요, 취

하도록 마실 거예요.

망할 놈의 세상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어요.

 이런 세상 살고 싶지가 않아요.'


이미화는 서슴없이 술잔을 들었다.


"자아, 우리의 이별과 재회를 위해서"


전동걸이 술잔을 내밀었다.

이미화가 술잔을 부딪혔다.
전동걸은 정종잔을 단숨에 비웠다.

술잔을 놓던 전동걸은 깜짝 놀랐다.


"아니, 술 어디 갔소?"


이미화의 술잔이 비어 있었고,

이미화는 얼굴을 찡그린 채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마셔도 되겠소?"


"저도 몰라요. 죽고 싶어요."


이미화가 울먹거렸다.


"미화씨, 진정하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똑똑히 들어시오.

자아, 무슨 말인고 하니 학병으로 전쟁터에 나가는 건 일본을 위해 싸우는 것이요.

 그러다가 재수가 없으면 죽소.

그런데 그 반대로 일본을 상대로 조국을 위해 싸우는 방법도 있소.

물론 그때도 목숨을 잃을 수 있소.

조선 남아로서 이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을 택해야 되겠소?"


"절 소학교 1학년으로 아시나요?"


이미화가 눈을 똑바로 뜨며 전동걸을 쏘아보았다.


"됐소, 내가 그동안 비밀로 해왔던 얘기를 하려고 물은 거니까 오해는 마시오.

 내가 간략하게 얘기할 테니까 잘 들으시오. 난 그동안…"


전동걸은 사혁회에 대해서 간추려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그래서 모레 출발하기로 된 거요."


"…."


이미화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


전동걸은 눈길을 피하며 술잔을 비웠다.


"그런데 안전하게 도착한다는 보장이 없잔아요."


이미화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학병에 끌려나가도 생사가 보장되지 않소."


이미화는 아랫입술을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괴로움에 차서 일그러지고 있었다.


"정말 이런 세상에서 더 살고 싶지가 않아요."


이미화는 목이 메어 말하며 술잔을 들었다.

전돌걸은 자신이 이미화의 가슴에 어느 만큼의 크기와 무게로 자리잡고 있는지

비로소 확인하고 있었다.

그건 무한한 기쁨인 동시에 아픔이었다.


"술 많이 마시지말아요."


"아니예요. 어디 도망갈 데로 없고 어쩌란 말이에요?"


이미화는 자꾸 울먹이며 술을 마셨다.
통금이 임박해 술집을 나섰을 때는 이미화는 몸을 가누기 어렵게 취해 있었다.

전동걸은 이미화의 팔짱을 끼어도 안 되어 껴안고 걸었다.


"저도 데려가요. 혼자 가지 말아요"


"우리 그냥 현해탄에 빠져 죽어요"


"동걸 씨 정말 죽고 싶어요."


이러다가 이미화는 전동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저를…. 저를 다 드리고 싶어요. 다 드리고 싶어요."


알몸인 이미화는 전동걸의 알몸을 끌어안은채 울었다.


"사랑해, 미화를 사랑해. 나 꼭 살아서 돌아올 거야"


전동걸은 오래 기억하려는 듯 이미화의 알몸을 샅샅이 매만지고 쓰다듬었다.


"내일 몇 시에 떠나시나요?"


"기차표 사고 나서 이따가 연락할게"


전동걸의 말이 자연스럽게 낮추어져 있었다.


그들은 다시 함께 밤을 보내고 다음날 역으로 바로 나갔다.


"기다려. 나는 꼭 살아서 돌아와"


전동걸이 이미화의 손을 꼭 잡았다.


"네, 10년이든 20년이든 기다릴 거예요."


눈물 번지는 눈으로 전동걸을 쳐다보며 이미화도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전동걸이 개찰구를 나가자 이미화의 눈에서 눈물이 줄지어 흘러내렸다.


지요꼬 먼저 와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전동걸은 지요꼬 앞을 지나치며 눈짓했다.

그들은 만약을 몰라서 자리를 따로따로 잡았다.

방학도 아닌데 관부연락선에는 조선 학생들이 많았다.

 형사들은 다른 때와는 달리 학생들의 검문을 심하게 하지 않았다.

그자들은 학생들이 학생징병검사를 받으러 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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