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62. 학병의 파장

오늘의 쉼터 2017. 7. 10. 00:49

162. 학병의 파장



11월에 들어서 총독부에서는 대학. 전문대학. 고등학교에까지 징집영장을 일제히 발급했다.

그리고 중추원에서는 <학병 불지원자는 휴학시켜서 징용키로 결정>했다.

그러니까 학도지원병이란 <지원>은 허울좋은 장식일 뿐이었다.

이에 발맞추어 이광수와 최남선은 학병지원 권유연설을 하기 위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결국 제1차로 학병적격자 1천명 중에 959명이 지원을 완료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관부연락선 곤륜환이 미국잠수함에 격침되어 54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12월로 접어들면서 징병 적령을 1년 낮추는 긴급사태가 야기되고 있었다.
대나무숲이 겨울바람에 쓸리는 소리가 밤의 정적 속에서 스산하게 물결짓고 있었다.

그 소리에 실리듯 어디선가 다듬이질하는 방망이소리가 도드락도드락 멀게 들리고 있었다.

문풍지 떠는 겨울밤은 깊어가고 방안의 등잔불빛은 가물거렸다.


"유언비어 유포죄로 잡혀 들어가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고 있는데

요새 전시개황이 어떤지 모르겠소."


담배에 불을 붙인 정도규가 말을 꺼냈다.


"예, 지난번 관부연락선 격침이 사태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반격이 본격화된 상태에서 일본은 제공권을 위협당하기 시작했고,

거기다가 해상권마저 연락선이 격침당할 정도로 위협이 가중되고 있습니다."


이현상의 차분하면서도 힘이 실린 대답이었다.


"그럼 유언비어라는 게 사실이란 말입니까?

 비29라는 폭격기가 일본 상공에 나타나고,

남지나해에서 수송선들이 폭격당해 침몰하고 있다는 것이…"


유승현이 가부좌를 더 단단히 틀며 물었다.


"예, 그건 전혀 유언비어가 아닙니다.

그건 막연히 하는 소리가 아니라 분명한 근거가 있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두달 전 11월에 미국의 소리 단파수신사건으로

10여명이 실형을 받은 일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일본이 은폐하고 있는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현상이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그럴거요. 왜놈들이 제놈들한테 불리한 일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은폐하겠소.

헌데 신문이고 방송에서는 날이 날마다 승전보만 울려대고,

지식인들은 그것을 액면 그대로 다 믿고 앞다투어 친일 대열에 나서며 광분하고 있으니

한심할 노릇 아니오."


정도규가 세차게 혀를 찼다.


"예, 그게 이기적이고 약아빠진 지식인들의 박쥐근성 아닙니까.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새파랗게 젊은 놈들까지 서로 열성적으로 친일을 하려고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문필가라는 것들의 작태를 보십시오.

잡지마다 매달 아첨과 아부의 글을 경쟁적으로 써대느라고 정신들이 없습니다. 딱할 노릇이지요."


이현상이 쓰게 웃으며 담배를 빼들었다.


"저도 책방에서 더러 목차를 켰어보기는 하는데,

그런 사람들의 심중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글이란 자기 수명보다 몇 십 배 긴 것인데 무슨 생각들로 그런 글들을 쓸까요?

전혀 압력을 받을 것 같지 않은 신출내기 문사들까지 열렬하게 천황만세,

성전만세를 외쳐대고 있으니 말입니다."


유승현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예, 그거야말로 일본이 아세아의 맹주가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서는 자발적 친일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만주사변 이후부터 유행했던, 일본이 조선을 2백년 지배한다는 말이

근년에 다시 부쩍 유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게 다 그런 맹신 때문입니다. 2백년 세월이면 자기들이 30년을 더 산다고 치고

얼마나 까마득한 세월입니까.

그 계산을 해보고 안 되겠다 친일하는게 상수다 하고 나서는 겁니다.

그자들이 근자에 당당하게 떠들어대는 소리가 뭔지 아십니까?

친일 하지 못하는 것은 무능력자다.

참 대단한 능력들 가진 거지요. 허허허…."


이현상의 건조한 헛웃음이었다.


"그럴 거요. 자기네들끼리는 또 경쟁이 치열할 테니까.

그 말이 명언 중에 명언이요."


정도규도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저어. 긴급히 상의드릴 말씀이 한 가지 있습니다."


시국담은 그것으로 끝내고 밀행을 한 본론을 꺼내려는 듯 이현상이 앉음새를 고쳤다.


"예, 말씀 들읍시다."


정도규와 유승현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예, 다름이 아니오라 최근에 실시되고 있는 학병지원 문제 말입니다.

그걸 그대로 좌시, 방관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무슨 좋은 생각이 있소?"


정도규는 이현상이 무슨 방안까지 생각하고 있을 것임을 이렇게 물었다.


"예, 최대한 힘 닿는 데까지 구해 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동지들과 논의한 결과 지리산으로 학생들을 구출해 내자는 잠정적인 결론을 얻었습니다.

선배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지리산…."


정도규는 눈을 내리감았다.
한동안 방안에 침묵이 흘렀다.

대나무숲 쓸리는 소리와 문풍지 떠는 소리가 한결 가깝게 밀려들고 있었다.


"지리산이 깊고 큰 산이긴 하오만 두어 가지 문제점이 있지 않을까 싶소.

첫째가 왜놈들이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방임할 리가 없고,

둘째 언제까지 산중에서 도피생활을 할 것이냐 하는 문제요"


정도규의 말이 무겁고 어두웠다.


"예, 그런 점들에 대해서 충분히 토의하기는 했습니다.

처음에는 덕유산과 지리산이 거론됐는데 산의 규모로나 위치로나

덕유산이 지리산을 당할 수 없어 지리산을 택한 것입니다.

지리산은 삼도오군에 걸쳐 있어서 여러 지역의 학생들을 모아들이기에 용이합니다.

그리고 다 아시다시피 그 웅자가 어마어마하여 봉우리들과 골짜기들이 겹에 겹으로

이루면서 수도 없이 뻗어나가 산이면서 산맥을 이루고 있는 것이 지리산입니다.

전라도 쪽 노고단과 경상도 쪽 장터목 아래서 40년 넘게 약초를 캐며 살아온

두 영감님을 만나 보았습니다.

두 분 다 하는 말이 평생을 골골이 다닌다고 다녔지만 지금까지고 지리산을

다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골짜기, 저 골짜기에는 동학군들과 의병 잔류자들이 마을을 이루며

무사히 살고 있습니다.

학생들을 몇 명이나 피신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몇십 명을 말할 것 없고

몇백 명이 되더라도 지리산에서는 표도 나지 않습니다.

왜놈들이 그들은 잡아내려면 일이천 명 군대 동원해 가지고는 어림도 없습니다.

젊은 학생들이 신속하고 기민하게 그 많은 골짜기로 피해 다니는데 무슨 수로 당하겠습니까?

한 일이만 명 동원해서 산을 둘러싸면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왜놈들은 현재 큰 전쟁을 치르느라고 몇백 명의 병력도

따로 지리산에 투입할 여력이 없습니다.

얼마나 사정이 급하면 순사들까지 전쟁터로 끌어가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 째 문제입니다.

제가 전망하기로는 일본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길어야 5년이고 짧으면 2, 3년 내에 패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과 영국이 본격적으로 반격을 개시한 이상 일본을 오래 갈 도리가 없습니다.

물자가 부족해서 유기그릇들을 강탈해 가기 시작한 것이 벌써 언젭니까?

그것으로 폭탄과 총알을 만들어 물자 풍부한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습니까?

아니, 왜놈들이 10년을 버틴다고 해도 좋습니다.

우리 젊은이들도 산중에서 10년을 맞서 버텨내야합니다.

그게 왜놈들에게 끌려가 억울하게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리고 고학력 젊은이들이 군대에 끌려나가는 것은 이중 삼중의 피해를 자초하는 것입니다.

왜놈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 그렇고, 우군인 연합군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 그렇고,

해방을 하루라도 늦추게 하는 것이 그렇고,

죽게 되면 그 배움이 민족적 손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산중에서 젊은이들을 그저 무위도식 시키는게 아닙니다.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군사조직화하여 인근 지역의 왜놈들을 상대로

투쟁을 시도하고, 사회주위 사상학습을 철저히 시행하여 해방의 날에 대비시키는 것입니다.

대충 이런 토의였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빈틈이라고는 없이 논리정연하게 말을 마친 이현상을 정도규아 유승현을 번갈아 보았다.


"참 유익한 토의를 한 것 같소.

그런 주도면밀한 토의를 거쳤다면 그 건에 대해서 더 말할 것이 없이 찬성이오."


정도규는 흔쾌하게 찬성했고, 유승현도 폭넓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맙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루라도 빨리 학생들을 피신시킬 수 있을지 그게 문제입니다."


이현상은 다음 단계로 이야기를 끌어갔다.


"그런 별로 어려운 문제는 아닌 것 같소.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극비리에 지난날 조직을 되살려 학생들을 접촉하면 되잖겠소.

근동의 대학생들이야 파악하기가 쉬운 일이니까."


정도규의 빠른 대응이어 .


"예, 그렇게 해주시면 일이 빨리 진행되겠습니다.

수고스럽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이현상은 머리를 숙여 보였다.


"수고라니 무슨 말이오.

이 동지가 하는 수고에 비하면 우린 너무 면목이 없는 사람들이오."


정도규가 손을 내저었다.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현상이 재빨리 가부좌를 풀며 뛰쳐 일어날 기세를 보였다.


"아닙니다. 밤참을 준비했습니다."


유승현이 안심하라는 손짓을 하며 일어났다.
유승현이 받아가지고 들어온 상에는 삶은 닭 두 마리와 술병이 놓여 있었다.


"이 동지께서 이쪽 큰놈으로 한 마리 다 잡수십시오.

저희는 하는 일도 없고 이제 나이만 들어서 이것도 다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유승현이 이현상 가까이 상을 놓으며 말했다.


"원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현상이 쑥스럽게 웃었고


"이동지, 또 가실 길이 먼데 어서 드십시다. 자아, 잔 받으시오."


정도규가 다가앉으며 술병을 들었다.


"요새 웬 술이 다 있습니까. 저는 술을 안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현상이 잔을 가리며 사양했다.


"예, 요새 술이 아니고 이삼 년 전에 담아둔 매실줍니다.

약이 되니 한잔만 하십시오. 고기맛도 더 나고요."


유승현이 권했다.


"아닙니다.

술을 입에 대면 저는 꼭 한 잔이 열 잔이 되어 버립니다.

쉬어갈 처지가 못되니 아예 입에 안 대겠습니다."


이현상은 닭다리 한쪽을 찢어들었다.


"됐소, 그러하시오. 우리끼리 한잔 나눕시다."


정도규는 변함없이 철저한 지하활동가의 모습을 느끼며 유승현의 잔에 술을 따랐다.


어느 날 신세호의 사립 앞에서 목탁소리가 울렸다.


"이 추운디 동냥 나오신 시님이 다 기시네.

시상살이가 에로와진게 시주허는 사람도 없는갑다. 아가, 얼렁 쌀 내다디려라."


새로 손질한 옷에 인두질을 하며 신세호의 아내 김 씨는 며느리에게 일렀다.
신세호의 며느리는 사발에다 쌀을 수북하게 담아 나무 쟁반에 받쳐가지고 사립으로 나갔다.


"나무관세음보살, 소승 운봉이라 하옵니다. 신 선생님 기시온지요?"


운봉이 고개를 조아렸다


"야아, 쬐깨 기둘리시게라우."


신세호의 며느리는 약간 놀란 기색으로 서둘러 돌아섰다.


"아부님, 아부님, 운봉 시님이 아부님얼 찾아오셨는디요."


신세호의 며느리는 사랑방 앞에서 조심조심 말했다.


"응? 운봉 시님이!"


곧 방문이 열리고 신세호가 나섰다.


"쌀 여그 두고 얼렁 가서 모시그라."


신세호는 며느리에게 이르며 마루를 내려서고 있었다.
운봉과 신세호는 마당 가운데서 마주쳤다.


"그간에 평온하신지요."


운봉이 먼저 합장을 했다.


"예, 염려지덕으로, 이 엄동에 어인 걸음이시오? 어여 드십시다."


신세호가 반갑게 인사했다.


"긴히 의논디릴 일이 있어서…"


운봉이 자리를 잡으며 운을 떼었다.


"예, 무신 일이 있는가요?"


신세호는 불을 헤친 화로를 운봉 옆으로 밀어놓았다.


"저어, 큰외손자 일인디요…"


"…?"


신세호는 문득 운봉을 쳐다보았다.


"시방 어디 있는가요?"


"징집날짜 기둘림서 그저 집이서 그러고 있지요."


신세호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말 끝에 한숨이 이어졌다.


"학병에 안 끌려갈 방도가 있구만요."


운봉은 한시라도 빨리 신세호의 상심을 없애려고 이렇게 말했다.


"아니, 머시라고요!"


신세호의 허리가 곧추서며 눈에 불이 켜졌다.


"아조 존 방도가 생겼구만이라. 그것이 그렁게…"


운봉은 유승현에게 들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하기 시작했다.


신세호는 이야기를 유심히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 그려서 지리산으로 피허는 것인디 어찌 생각허시능게라?"


운봉은 이야기를 끝내며 화로에 손을 쪼였다.


"그것이 좋기넌 헌디…"


신세호는 고개를 숙이며 무슨 생각엔가 잠겼다.
운봉은 부젓가락으로 재 위에 무심히 낙서를 하고 있었다.

재 위에 씌어지고 지워지고 다시 씌어지는 글씨는 공허라는 한문이었다.


"보내기넌 보내야 하겄는디, 그러고 나먼 집안이 성치럴 못헐 것이니…."


신세호가 한참 만에 중얼거린 말이었다.

그는 큰딸이 경찰서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할 것이 두려웠다.

그 고초를 모면할 방도가 없을 까 생각해 보았지만 딸의 얼굴만 눈앞에 가득할 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운봉은 그때서야 부모한테 우환이 닥치리라는 것을 생각했다.

경찰에서 부모를 끌어다가 호되게 다룰 것은 틀림없었던 것이다.

그 너무 당연한 일을 미리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 면목없기도 했다.

피신을 권유하려면 그에 대한 대비책도 마련했어야 했던 것이다.

그건 난관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난관을 피할 수 있는 묘안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소승이 그분헌티 무신 묘책이 없는가 알아보겄구만요.

선생님도 그간에 생각혀 보시고라."


운봉은 그저 신세호를 위로하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

유승현에게 물어보면 무슨 묘책이 생길 것 같기도 했던 것이다.


"참 진퇴양난이오.

중지럴 모아보먼 묘방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시님이 그리 히주시먼 고맙겄구만요."


신세호는 곰방대로 쌈지를 끌어당기며 말하고는


"정 방도가 없으먼 애미가 당허는 것이 도리겄지요"


는 결심하듯 무겁게 말했다.


사흘 뒤 깊은 밤 그림자 둘이 송중원의 집을 나섰다.

그 그림자들은 어둠을 헤치며 빠르게 마을을 벗어났다.

그리고 어둠이 장막을 친 그 어딘가로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날 오후에 하엽이는 경찰서로 달려갔다.

손에는 종이 접힌 것이 들려있었다.


"우리 아덜얼 잠 찾어줏씨요.

어지께 집얼 나가서 밤에 안 들어오고, 오늘도 하로 내내 기둘려도 안 들어와서

요상하다 싶어 방으로 들어가봉게 책상 우에 이 편지가 있었구만이라.

야가 어디로 죽으로 간 모냥인디, 지발 무신 일 저질르기 전에 찾어주시게라."


하엽이는 편지를 내보이며 울면서 애원했다.


모친 전상서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 이 글을 씁니다.

어머님께 먼저 불효를 사죄드립니다.
소자는 이제 더 이상 이런 세상에서 살아갈 힘도 용기도 없습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사느니 차라리….
부모님보다 앞서가는 것이 불효 중에 제일 큰 불효인 줄 잘 알고 있사오나

소자는 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불효자를 용서해 주시고 부디….


불효자 준혁 배상


"이거 유서 아닌가!"


"야아, 일 저질르기 전에 얼렁 잠 찾어주시게라우."


하엽이는 눈물을 흘리며 순사에게 매달렸다.


"그래, 아주 죽기로 작정을 했구먼."


"언제 집을 나갔다고요?"


"어지께요."


"그럼 벌써 열 번도 일 저질렀을 것 아닌가."


"당연하지, 죽기로 작정하고 집 나간 놈을 무슨 수로 찾어."


"젊은 놈들이 왜 이리 자살하는 것을 좋아해?"


"이 놈은 이거 학병 나가는 것이 무서워 죽을 작정을 했구만."


"누가 아니래나, 거 귀찮네 참"


"가시오, 가. 우리도 딴 일로 죽을 지경이오."


"아니고메, 이러시먼 으쩐당레가. 요런 일에 경찰서 안 믿고 누구럴 믿으라고 이러시오."


하엽이는 발을 구르며 더 매달렸다.


"자식 단속을 집에서 잘해야지 이제 와서 어쩌라는 거요.

가시오, 가서 집안 식구들하고 찾아봐요.

우리도 그보다 더 골치 아픈 일이 태산이니까"


순사들이 하엽이를 몰아냈다.


"시상에, 시상에 요런 야박헌 인심이 어디에 또 있다요."


하엽이는 몸부림치고 통곡하며 경찰서를 떠밀려 나왔다.


"야 김명철, 너 술 사는 거 아깝냐?"


술이 취한 박용화가 갑자기 소리질렀다.


"야 임마, 그게 무슨 소리야"


이마가 툭 불거진 김명철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았다.


"야, 거짓말 말어. 내가 눈치도 없는 줄 아냐? 아까 보니까 기분이 싹 안 좋던 걸 뭘 그래."


왼쪽 팔을 받치고 비스듬하게 앉은 박용화는 사뭇 시비조였다.


"야 술맛 떨어지게 그따위 소리말어, 내가 그랬으면 개자식이다."


김명철은 박용화의 심정을 생각해 무슨 말을 하든 받아주로 했다.


"너 그거 정말이냐?"


"당연하지. 친구지간에 이까짓 술 사면서 아까워하면 그게 어디 사람이냐."


"그래, 그래, 고맙다. 우린 친구지간이야, 친구지간."


박용화는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고는


"그래, 우린 광주사범의 동창이야.

호남 천재들의 요람 광주사범의 동창이라구"


김명철의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야 누가 듣는다. 그놈의 천재라는 소리 좀 빼라."


김명철이 상을 찌푸리며 웃었다. 그는 박용화보다 덜 취해 있었다.


"아니, 천재를 천재라고 하는데 감히 어떤 놈들이 뭐라고 해,

어떤 놈들이고 까불면 나오라고 해, 다 박살을 내고 말 테니까."


박용화는 금방 태도가 바뀌며 술상을 내리쳤다.


"야, 야, 누가 뭐라는 사람 없으니 술이나 마시자."


김명철이 술잔을 들었다.
박용화는 술을 질질 흘려가며 잔을 비웠다.


"어떤 놈들이고 말야 이 박용화 앞에서 까불면 다 죽일 거야.

암, 다 죽이고 말고, 야 김명철, 너 알지? 내가 학생 때 그 백돼지 때려눕힌거."


박용화는 곧 누구든지 때려눕힐 것처럼 제 눈앞에다 죽먹을 부르쥐어 보였다.

 힘이 잔뜩 들어간 그 눈과 얼굴에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하하하… 그래, 그 싸움 한번 볼 만했지,

넌 그 덕에 우등생을 대표하는 주먹의 왕자가 되고 말야."


김명철이 고개를 젖히며 웃어댔다.


"그래. 난 그때처럼 아무나 실컷 두들겨패고 싶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부수고 깨고 싶다.

아니야, 이 세상 전부를 두들겨 부수고 박살내 보리고 싶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야. 유달산 위에서 떨어져 죽고 싶어.

 저 많은 무인도 어디로 가서 바다에 빠져 죽고 싶어.

그런데 그것도 뜻대로 안돼, 난 너무 왜소하고 한심해.

거대한 무장권력집단 앞에서 개인은 너무 무력하고 비참해,

내가 이렇게 개미새끼처럼 작고 초라해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야.

이건 죽을 수도 살수도 없는 참 더러운 처지야."


박용화는 술이 전혀 취하지 않은 것처럼 심각하게 말하고 있었다.
김명철은 그런 박용화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영화의 장면들이 바뀌듯이 감정변화가 심한 박용화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박용화는 하병 입영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그의 입장은 다른 대학생들과 달랐다.

만약 대학에 가지 않았더라면 학병에 끌려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박용화의 심정은 더 복잡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김명철은 그런 박용화를 꼭 호의로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국민학교 선생 정도는 우습게 알고 더 출세해서 잘살아 보겠다고 뛰다가 제 꾀에 넘어가

 덫에 걸리는 놈, 이런 아니꼽고 가소로운 생각도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었다.


"야, 너 우정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지?"


박용화가 또 갑자기 소리쳤다.


"그래, 넌 변했냐?"


"나야 변하고 싶어도 변할 수가 있냐.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신세에, 너 변하지 않은 우정으로 나한테 한 가지 약속해라."


"그래 말해봐"


"약속 꼭 지키는 거지?"


"말을 해봐야 알지."


"너 임마, 약게 놀지마. 네 마누라 빌려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약속부터 해"


"저놈 저거 순 억지네, 그래 , 약속하지"


김명철은 싫은 기색을 또 어색스런 웃음 속에 감추었다.


"나 이제 죽으러 갈 날이 열흘도 안 남았다. 그때까지 매일 술을 좀 사라."


박용화는 술기 가득한 눈으로 김명철을 쏘아보았다.


"알았어, 그렇게 하지"


김명철은 내키지 않았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박용화는 언제 폭발하지 모르는 불발탄이었고,

술자리의 약속이란 술 깨고 나면 잊을 수도 있고 어길 수도 있는 것이기도 했다.


"역시 내 친구는 너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목포에 우리 동창은 너밖에 없냐.

몇놈 더 있으면 좋은 텐데 말야."


박용화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천장을 오려다보며 슬픈기색을 드러내더니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몇사람 만나보고 싶으면 이 근방 가까이서 근무하는 애들을 불러모을 수도 있지,

참, 너하고 함께 자취했던 유기준이 있지? 걔가 여기 영산포에서 근무한다."


"뭐, 유기준이가? 그놈이 진돈가 어디 섬으로 밀려갔었잖아"


박용화가 놀라며 정신을 차리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래 섬에서 고생했으니까 순환전근된 거지."


"그놈 그거 사회주이잔데 용케 견디네."


박용화가 입에서 불쑥 나온 말이었다.


"뭐, 뭐라구?"


김명철이 깜짝 놀라며 문 쪽을 살폈다.


"아니야, 아니야…"


박용화는 제 실수를 깨달은 듯 두손으로 얼굴을 훔치며 얼버무렸다.


"너 그게 무슨 소리지? 아무리 취중이라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서야 되겠어?"


김명철은 불쾌한 표정으로 따지듯이 말했다.


"이봐, 함부로 입 놀리는 게 아냐, 다 그런 근거가 있으니까 하는 말이지"


박용화가 눈을 치떴다.


"근거? 너 정말 사람 잡을 소리만 가려가면서 하는구나. 근거는 무슨 근거냐?"


김명철의 얼굴은 더 불쾌하게 찌푸려졌다.


"흥 아무것도 모르면서 너 그렇게 기분 나빠할 것 없어. 내가 자취하면서 발견한 건데,

그놈이 사회주위 학습 프린트물들을 책 싼 껍데기 속 같은 데다 감춰두고 있었지.

너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놈 성적이 자꾸 떨어졌었지? 왜 그런지 아나?

그게 다 그 프린트물들이 원인이었지. 이래도 근거가 없는 말이야?"


박용화는 전혀 술이 취한 것 같지 않게 오래된 일을 며칠 전의 일처럼 말하며 느물느물 웃고 있었다.


"유기준이가? 그것 참…"


김명철은 유기준이가 그랬다는 것도 그렇고,

박용화의 그 똑똑한 기억력에도 가슴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나도 그놈이 너무 음흉한 데 무척 놀랐었지. 끝까지 모른 척하고 좋게 헤어졌지만 말야"


"그게 뭐 대단한 게 아니라 그 나이 때 흔히 갖는 호기심 같은 것이었겠지."


"허 그런 소리 말어. 호기심이 그렇게 성적까지 뚝뚝 떨어지는 호기심도 있냐?

우리 사범학교 성적이라는 게 어디 보통 인문학교 성적하고 똑같으냐?

우리 성적은 바로 직장이 걸려 있고, 직장은 바로 목숨 아니었냔 말야.

내가 모른 척하고 넘어갔으니까 그렇지 그 뒤를 캤더라면 아마 주렁주렁 볼만했을 것이다."


박용화는 묘하게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그래, 그랬을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그것은 고사상태 아닌가. 괜히 술맛 떨어지니까

그 얘긴 그만 하자."


김명철은 <사회주의> 라는 말조차 입에 담는 것이 두렵다는 듯 <그것>이라고 했다.


"아닐걸, 그자들이 얼마나 무서운데그래.

유기준이 그놈을 한번 만나 노골적으로 물어봐야겠군. 흐흐흐흐…."


박용화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어댔다.


김명철은 가슴이 섬 해졌다.

유기준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그나저나 자네 일로 모친께서 상심이 크시겠네."


김명철은 박용화의 머리에서 유기준을 모아내려고 느닷없이 그의 어머니들 들이댔다.


"어? 우리 어머니?"


박용화는 깜짝 놀라더니 얼굴이 싹 굳어졌다.

그리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런데 술잔을 놓는가 싶더니 손수 술을 따라 또 들이켜버렸다.

김명철은 그런 박용화를 곁눈질하며 자신의 방법에 저으기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 참 불쌍하신 분이지.

불쌍하고 말고. 평생 부두에서 생선 배따기로,

온갖 행상으로 형과 나를 가르치려고 고생고생 하셨지…

그런데 난 판검사가 되겠다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몇푼씩 보내드리던 용돈을 끊어버렸어.

대학 갈 학비를 모아야 했으니까.

그래도 어머니는 털끝만큼도 서운해하지 않으시고 내가 대학에 들어가기만 바라셨지.

아니, 오히려 학비를 못 대주는 걸 가슴 아파하셨지.

우리 형은 자기가 원하는 직장으로 옮기지 못하는 좌절감에 빠져 마음에 안 드는

하급직장에 다니며 술타령이나 해대고, 형수라는 여자는 독해서 시어머니한테

용돈 한푼 안 드리고 구박만 했지.

어디 내가 판검사가 되고 나서 보자하고 벼르고 별렀는데 이 꼴이 되고 말았어.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지.

그대로 선생질을 해먹었더라면 어머니 괄시당하고 살지 않게 하고,

나도 사지로 끌려가지 않아도 되는데, 이 미친놈이 헛지랄 다 한 거야.

난 불효새끼야, 세상에 둘도 없는 불효새끼야.

우리 어머니 불쌍하고 또 불쌍하지. 이것저것 생각하면 나 미치겠어,

환장을 하겠어. 어머니, 불쌍한 우리 어머니…"


박용화는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아니, 넘 장사 망칠라고 환장혔소.

술취했으면 고이 삭힐 것이제. 싸게 나갔씨요. 싸게."


주인여자가 방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무슨 잔소리가 많아. 술이나 가져와!"


박용화가 술상을 내리치며 외쳤다.

그는 이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야, 정신차려. 그만 일어나자."


김명철은 주인에게 가라고 손짓하며 박용화를 붙들었다.


"그만 일어나긴, 더 마셔야지."


박용화는 김명철을 뿌리쳤다.


"오늘은 너무 취했어. 너 돈 아까워서 그러냐?"


"어허, 무슨 딴소리야"


"난 죽으러 가는 판에 넌 돈이 아깝다 그거지, 야 임마, 너도 사람이냐?"


"좋아, 여기서 나가서 딴 집에 가서 새 기분으로 마시자구"


"그래, 그래야지. 역시 내 기분 알아주는 놈은 너뿐이야"


박용화는 비틀거리며 김명철에게 끌려 술집을 나왔다.
1월의 밤바람은 매웠다.

그 바람에 갯내음이 실려 있었다.


"두마앙강 푸른 무울에에 노젓는…."


"야, 야, 그 노래 부르면 잡혀간다."


김명철이 박용화를 흔들었다.


"머라고? 왜, 왜 잡혀가?"


박용화가 혀가 꼬부라지고 있었다.


"금지곡이니까 잡혀가지"


"뭐야? 왜 그게 금지곡이야?"


"조선인의 민족감정을 자극하고 불온사상을 촉발시킨다는 거야."


"허! 언제 금지시켰는데?"


"작년 말이니까 서너 달 됐어."


"씨부랄 것, 개좆같아 못살겠다.

노래도 맘대로 못 부르게 하고 말야."


"그래 잡혀가고 싶으면 맘대로 떠들어라.

잡혀 들어가나 끌려가나 피장파장이다."


"어 씨발놈, 저는 안 끌려간다고 아주 속편하게 말하네."


"모르겠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그들은 비틀거리고 서로 의지해 가며 한참을 걸었다.


"야 명철아, 우리 저기 들어가자."


"뭐야? 저긴 유곽 아니냐"


"그래, 유곽. 저기 가서 몸풀면 기분 최고지. 가자, 어서."


"야 임마, 정신차려. 내가 누군지 아냐?"


"네 놈이 누구냐. 도끼대가리 김명철이지."


"임마, 난 명색이 선생님이야.

저런 데 들어갔다가 어떤 학부형이 보기라도 해봐.

내 신세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


"야 임마, 잘난 척하지 말고 따라와."


박용화가 김명철을 잡아끌었다.


"글쎄 안된다니까"


김명철이 팔을 힘껏 뿌리쳤다.

박용화가 팔을 놓치면서 비틀거렸다.


"너 혼자나 몸 풀어. 난 간다."


김명철은 뛰기 시작했다.


"야 임마, 돈이나 주고 가야지. 나 빈털터린 것 몰라?"


박용화는 비틀거리면서 소리질렀다.

그러나 김명철은 아무 대꾸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흥 잘도 도망가는 구나. 그래, 귀찮다 그거지?

그래, 귀찮겠지. 내가 아무 쓸모가 없는 놈이니까.

아, 더럽다, 정말 더럽다. 내가 왜 이꼴이 됐지?

그때 참도 견뎠어야 되는 건데 잘못 생각한 거야.

그때 참았으면 지금쯤은 그 곡성 산골을 벗어나 목포나 여수 같은 데로 전근이 됐을지 모르는데,

유기준 같은 놈도 섬에서 빠져나오는 판인데,

다 그년 에이꼬 때문이야.

그년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성적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럼 곡성 같은 산골에 처박히지 않았을 것이고,

도회지에서 근무를 했다면 딴마음을 먹었을 리가 없었다.

에이꼬 그년이 원수야. 아니, 구니와께 그놈도 아주 재수없는 놈이야.

그놈이 주둥이를 재수없게 놀리더니 꼭 그대로 됐어.

그놈의 새끼를 그냥 죽일 수도 없고….

 아아,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다."


박용화는 비틀거리고 걸으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하, 법관이 되시려고? 꿈이 더 커져서 좋소.

 꿈이야 크게 가질수록 좋다고 했는데,

그렇지만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르니 조심하시오.

 세상에 꿈대로 다 되는 일은 없으니까>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송별회에서 구니와께가 또 술이 취해 한 말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그 때 아가리를 찢어놨어야 하는 건데."


박용화는 침을 내뱉고는 이를 뿌드득 갈았다.

그는 들어가기 싫은 집을 향해 비틀비틀 걸었다.


"흥, 또 술이구만이라?"


판자대문을 따주며 박용화의 형수가 것질렀다.


"마셨소. 뭐가 잘못됐소?"


박용화도 시비조로 맞섰다.


"성제간에 자조 잘덜 허요."


"뭐가 그리 말이 많소. 언제 술 마시라고 돈 한푼 줘봤소."


"하이고, 바랠 것이 따로 있제.

나가 죽자도 양잿물 사묵을 돈이 없는 판이오."


"아이고, 아이고, 밤 짚은디 어찌 또 이러냐. 용화야, 니가 참어라."


뒤늦게 뛰어나온 반월댁은 작은 아들의 등을 밀었다.


"엄니, 그 천인침인가 지랄인가 만들지 마세요.

그게 다 왜놈의 새끼 미신이니까요.

한 방이면 사람이 즉사하는 총알 앞에 그따위 몸의 붉은 글씨가 무슨 소용이 있어요."


박용화는 방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리며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외치듯하고 있었다.


"그려, 그려. 알었응게 어여 잠이나 자."


반월댁은 울 듯한 얼굴로 작은 아들의 윗도리를 벗겼다.

반월댁은 이제 늙을 대로 늙어 있었다.
박용화는 곧 잠이 들었다.

반월댁은 이불로 작은 아들을 덮어주며 또 눈물이 글썽글썽해지고 있었다.

선생 노릇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대학공부를 떠난다고 했을 때 말리지 못한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었다.

선생이나 면서기 그리고 금융조합 같은 데 다니는 사람들은 징용이고 징병이고

다 면제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던 것이다.

그 똑똑하고 영리한 작은 아들이 어찌 이 일은 내다보지 못했는지

가슴을 쥐어뜯을 만큼 안타깝기만 했다.
박용화는 아침 늦게 잠에서 깨어났다.

술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서 머리는 욱신거리며 아팠고 속은 느글거리고 메슥거렸다.
박용화는 밖으로 나와 찬물을 마시고 둘러보았지만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엄니 어디 가셨소?"


"어디 갔겄소. 장헌 작은 아덜 위허니라고 천인침인가 먼가 뜨로 나갔제."


그의 형수가 톡 쏘며 돌아섰다.
박용화는 고개를 젖히며 한숨을 토해냈다.

 어머니는 또 역으로 어디로 사람들 많은 데를 찾아다닐 거였다.

목포 시가지에는 수틀 들고 종종걸음 치는 여자들이 부쩍 늘어나 있었다.

박용화는 어머니가 하는 그 일을 막을 수도, 안 막을 수도 없었다.

또 하루가 가고, 입영날짜는 한 발짝 더 앞으로 다가왔다.

박용화는 고개를 떨구며 또 한숨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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