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60. 인간사냥

오늘의 쉼터 2017. 7. 7. 00:41

160. 인간사냥



"읍장님이십니까?"


"예…."


"아, 여기 경찰서장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이쪽으로 좀 오셨으면 합니다.

내지에서 징용대인 노무보국회가 나왔습니다."


"또요?"


하시모토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 순간 후회했다.


"예, 곧 가겠습니다."


하시모토는 다급하게 이 말을 잇대어 붙였다.
징용을 너무 마구잡이로 많이 끌어가 농촌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을 지경이 되어 있는데

또 징용대가 나왔다니까 벌컥 화가 치솟긴 것이었다.

그러나 전시체제 아래서 군사용무는 최우선적으로 처리하도록 규정 되어 있어서

하시모토는 자신의 실수를 황급히 덮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 용무에 적극 협조하지 않는 것은 천황폐하의 칙령을 어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칙령을 어기면 죽음이 있을 뿐이었다.
하시모토는 허겁지겁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 앞에는 도청에나 있는 포장 쒸운 트럭이 5대나 줄지어 서 있었다.

노무보국회 대원들이 벌써 도청을 거쳐 징용자 호송차를 끌고 온 것이 분명했다.

하시모토는 순간적으로 소리 질렀던 것이 후회되었다.

경찰서장이 입을 다물었어야지 그렇지 않고 자신이 한 대로 노무보국회 간부에게

 말을 해버렸다면 그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었다.

하시모토는 만일을 생각해서 변명할 말을 생각하며 경찰서로 들어섰다.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이시바시 동원부장이십니다."


경찰서장이 몸이 대살지게 생긴 40대의 남자를 소개했다.


"아 예, 원로에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읍장 하시모토입니다."


하시모토는 나이와는 상관없이 그 남자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다.

노무보국회는 육군성의 산하기관이었고, 전시체제 하애서 육군성은

모든 기관 위에 군림하는 가장 막강한 권력의 핵심부였다.


"예, 반갑습니다. 이시바시라고 합니다."


그 남자는 읍장 정도는 얕잡아 보는 태도로 악수를 청했다.

 아까 저지른 실수로 마음이 켕긴 하시모토는 그 젊은 남자의 손을 두손으로 받쳐 잡았다.

그런 하시모토를 경찰서장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서장님한테는 협조를 요청했습니다만 읍장님도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시바시는 국민복을 입고 있으면서도 군대식으로 말했다.


"아 예, 도움이 되신다면 무엇이든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하시모토는 무슨 명령이든 내리기만 하라는 식으로 연상 굽실거렸다.

그때 사환아이가 녹차를 내왔다.


"녹차 드십시오."


경찰서장이 이사바시에게 권했다.


"예, 조선녹차가 맛이 일품이라고 하던데 어디 맛 좀 볼까."


이사바시가 붉은 가죽장화를 툭 치며 다가앉았다.

삼복더위인데도 그는 장교용 가죽장화를 신고 있었다.

더위를 무릅쓴 과시용이 틀림없었다.


"조선에는 처음 행차십니까?"


하시모토가 눈치빠르게 물었다.


"예, 만주에서는 몇 년 근무했는데 조선은 처음입니다."


이시바시는 과히 좋지 않은 기색으로 찻잔을 들었다.


"아, 그러시군요. 초행 기념으로 제가 상품 녹차를 선사하겠습니다."


하시모토는 재빨리 말했다.


"아니 뭐 그런 것을…."


차를 한 모금 마신 이시바시의 얼굴에는 엷은 웃음이 피어났다.


"차맛이 어떠십니까.

조선 중에서도 이 전라도 녹차가 으뜸입니다."


경찰서장이 끼어들었다.


"예, 맛이 아주 기막힙니다.

향기가 진하고 깊고 두꺼운 게 역시 일품이라는 말을 들을만 합니다."


이시바시는 차맛을 무척 잘 아는 것처럼 말했다.

그는 처음과는 달리 기분이 많이 풀린 기색이었다.


"예, 역시 호걸이 호걸을 알아보더라고 이사바시상께서

조선녹차 맛을 단박에 알아보시는군요."


아첨기 역연한 하시모토의 비유는 거창하기 이를 데 없었다.


"뭐 한 20년 마시다보니 자연히 알게 된 거지요."


아시바시는 겸손한 척 거드름을 피웠다.


"그 연세에 다력 20년이면 다성이 되신 거지요."


경찰서장은 하시모토보다 한술 더 뜨고 있었다.


"아니 다성까지야 뭐….

그런데 조선에 와서 보니까 총독부 정책에 전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시바시는 담배를 입에 물며 거칠게 성냥을 그어댔다.


"아니, 그게 뭡니까?"


경찰서장이 어리둥절해했다.


"아 조선을 지배한 지가 언제고,

또 내선일체를 실행한 지가 언제라고 조센징들은 아직도 전부 흰 조선옷들이고,

그 상투라는 것에 갓 쓴 자들이 그리 많지요?

이래가지고서야 이게 조선 땅 그대로지 어디 일본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사비시의 말은 날카로웠다.


"예, 그게 글쎄….

총독부에서도 여러 총독님들에 걸쳐서 지속적이고 다각적으로

우리 일본식인 검정 복장의 착용을 지시하고,

우리 경찰을 위시한 각급 행정기관에서는 총력을 다해 그것을 추진하고 있지만

만족할 만큼 실효가 나타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찰서장의 궁색스러운 설명이었다.


"그것 참 이해가 안 됩니다.

법으로 딱 정해 강압적으로 실시하면 될 거 아닙니까.

말 안 듣는 놈들은 다 감옥에 처넣고요.

조센징들이 검정옷을 안 입고 꼭 흰옷을 입고 버티는 것은

대일본제국에 반항하고 저항하는 것이 아니고 뭡니까.

왜 그걸 용납하는 겁니까?"


이시바시는 아주 예리하게 경찰서장을 공격하고 있었다.


"예,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총독부나 우리 경찰에서도 그 점을 논의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허나 그 문제에는 복잡한 점들이 많이 지나친 문제들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골칫거리가 다 아시다시피 독립운동을 한다는 불령선인들입니다.

그자들을 색출 검거해서 감옥에 가두는데도 감옥이 모자라 계속 신설하는 형편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다, 조센징들에게 흰옷이란 우리 일본 사람들에게 검정옷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입어온 뿌 리깊은 풍습인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 풍습을 강압적으로 바꾸고, 위반자를 감옥에 넣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건 한마디로 조센징들 전부를 독립운동가 만들고 불령선인 만드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특수한 불령선인들을 제외한 일반 대중들은 속으로 불만이 있다 하더라도 목숨이 아깝고

살아가기 위해서 그런대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괜히 별것도 아닌 옷을 가지고 강압책을 썼다가는 엄청난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개도 막다른 골목으로 쫓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괜히 조센징들 숨통을 막아 화근을 만들 필요가 없는 거지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우리가 합방하기 직전인 한 40여년 전에 조선임금이 솔선해서 상투를 자르고 단발령을 내렸어요.

그런데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전국 유생들을 선두로 온 백성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고,

심지어는 의병이라는 반군이 생기기도 했어요.

자기네 임금을 상대로 그 모양이었으니 우리가 강압적으로 검정옷을 입히고,

상투를 자르고 해봐요.

그 사태를 수습할 수 있겠어요?"


경찰서장은 어떠냐는 듯 이시바시를 빤히 건너다보았다.


"그것 참, 조센징들도 독한 데가 있군요."


이시바시는 더 공격할 말이 없는지 짭짭 입맛만 다셨다.


"예, 조센징들 아주 끈질기고 음흉하고 보통 골치아픈 종자들이 아니오."


경찰서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일 잘하는 것 하나는 쓸 만하더군요.

징용자들이 지금 전쟁수행에 큰 힘이 되고 있으니까요."


"예, 그리 말썽 없이 부려먹으려면 옷 같은 것으로 괜히 감정을 건드릴 필요가 없는 거지요."


경찰서장이 못 박듯이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일산 광목이 아주 많이 팔린다면서요?"


이시바시는 무언가 미심쩍은 기색으로 물었다.


"예, 조센징들이 쓰고 있는 광목은 전부 우리 일산이지요."


그건 자신의 영역이라는 듯 하시모토가 얼른 대답했다.


"그럼 아예 광목에 검정물을 들여 생산하면 될 거 아닙니까?"


이시바시는 아주 대단한 생각이라도 해낸 듯 기세 좋게 말했다.


"그랬다가는 우리 방직공장들이 다 망하게 되지요.

조센징들은 검정광목을 단 한치도 안 살 것이고,

조선여자들은 거의가 베 짜는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시모토의 입가에는 경멸하는 웃음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또 그리 되나요?"


이시바시는 연속적인 역공을 당해 면목이 없는 듯 쓰게 웃었다.


"저어, 이번에 몇 명이나 징용을 해가지게 되는지요."


경찰서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예, 상부로부터 할당받은 게 3백 명입니다."


이시바시는 일부러 <상부>를 앞세워 말했다.


"예, 3백 명이라…."


경찰서장은 하시모토를 힐끗 쳐다보았다.

하시모토는 억지로 웃음짓고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시바시의 얼굴이 긴장되며 목소리에 날이 섰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도청에서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몇 년째 징용이 계속되다 보니 곡창지대인 이곳에서는

노동력 부족으로 농사짓기에 어려움이 많은 형편입니다.

군량미 확보에 차질이 없어야 하니까 농사는 그전처럼 지어야 하고,

징용사업은 징용사업대로 지원해야 하고 그렇지요."


경찰서장은 웃어가면서 부드럽게 말하고 있었다.


"예, 그 얘기는 도청에서 잠깐 들었습니다.

그야 전시체제하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부족한 노동력은 여자들과 노소까지 총동원해 해결해야 될 것 아닙니까.

내지처럼 말입니다."이시바시의 말은 냉기가 끼쳤다.


"그야 물론이지요.

 여기서도 진작부터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경찰서장은 무슨 오해를 받을까봐 그런지 목소리에 힘주어 크게 말했다.


"예, 그래야지요. 오래 쉬었습니다.

차량과 병력 일부는도청에서 지원받았으니까

여기서는 병력 10명을 지원해 줘야 되겠는데요."


이시바시는 명령하듯 말하며 지휘봉 같은 막대기로 가죽장화를 쳤다.


"예, 지원하고 말고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내지인 경찰은 전선으로 많이 나가

그 자리를 조센징들로 채우고 있습니다.

 10명 중에 6명은 조센징들이니 믿지 말고 잘 다뤄야 합니다."


"아니, 그렇게 믿지 못할 놈들을 제국경찰로 채용해 먹여살리고 있어요?"


이시바시가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아, 오해 마십시오.

다 충성심이야 의심할 것 없는 충견들이지요.

그런데 개별적으로 조센징들에게 둘러싸이거나 하면 맥을 못 쓴단 말입니다.

특히 이런 식으로 강제징용을 할 때는 동네로 들어가 여자들에게 둘러싸이게 되는데,

여자들이 같은 조선사람인 것을 내세우며 덤비고 몰아대면 이게 곤란해진다 그 말입니다.

미안해한다고 할까, 마음이 약해진다고 할까, 뭐 그런 심정 있지 않습니까?"


"예,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시바시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며 또 막대기로 가죽장화를 쳤다.


"3백 명을 확보하지면 며칠 걸리시겠군요."


하시모토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뭐 며칠씩이나 걸리겠어요.

한 이틀이면 되겠지요."


이시바시의 거침없는 대꾸였다.
시건방진 놈, 현지 사정도 모르는 풋내기가 가불대기는,

 어디 한번 잘해봐라.


하시모토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는


"수고하시는데 제가 오늘 저녁에 대접을 했으면 합니다. 어떠신지요?"


그는 아주 친근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예, 그거 좋지요."


이시바시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예, 그러면 준비시키도록 하고,

우리 읍사무소에서도 몇 명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시모토는 더욱 우호적으로 말했다.


"아, 그래 주시면 더욱 고맙지요. 그럼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이시바시는 환하게 웃으며 탄력 좋게 몸을 일으켰다.
경찰서장과 하시모토는 재빨리 눈길을 교환했다.

그 은밀한 눈길을 이시바시는 눈치채지 못했다.

경찰서장이 굳이 하시모토를 부른 것은 징요대장에게 환심을 사는 동시에

뒷다리를 붙들 기회를 주기 위해서 였다.

하시모토가 녹차를 선사하겠다, 한턱을 내겠다 해서 환심을 사놓고,

읍사무소 직원들을 내보내 이시바시의 뒷다리를 잡을 참이었다.

하시모토는 그동안 자기 농장의 소작인들이 징용에 끌려가는 것을 막으려고 최대한 애써왔고,

그 일에 경찰서장은 공모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읍사무소직원들은 지원이 아니라

이시바시가 하시모토의 농장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막도록 되어 있었다.

하시모토가 그렇게 일을 꾸미는 것은 물론 소작인들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징용을 볼모로 잡으 며 하시모토는 쌀을 증산하라고 소작인들을 몰아치는 한편

소작료를 80%씩이나 뜯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반발하는 소작인이 생기면 재깍 징용으로 내보내버렸다.

 징용 끌려가면 뼛골 빠지고 고생하고 죽기 십상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판에

소작인들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시바시는 징용대 20여 명을 호송차 5대에 분승시켜 경찰소 앞을 떠나 차들은

곧 김제 읍내를 벗어나 들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저기 저쪽에 차 세워"


맨 앞차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이시바시는 막대기 끝으로 창 밖의 야산을 가리키며 운전수에게 명령했다. 운전수는 전주에서 온 조선인 경찰이었다.
앞차가 정거하자 뒤따라오던 차들이 차례로 멈추었다.


"전원 집합하라"


이시바시는 야산자락의 바위 위로 올라서며 외쳤다.


차에서 내린 경찰들과 읍사무소 직원들이 우를 모여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목검이 들려 있었다.


"지금부터 지시하는 것을 전원 똑똑히 들어라.

우리가 지금부터 사냥할 징용 숫자는 3백 명이다.

1개조 4명씩으로 편성하여 이틀 동안 임무를 완성해야 한다.

각각 1개조의 책임할당량은 75명씩이다.

이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특히 조선인 경찰들에게 경고하는 바이다.

같은 조선사람이라고 하여 사정을 보아주거나 임무 수행을 철저히 못할 시는

가차 없이 처벌할 것이다."


이시바시는 소리침과 동시에 칼을 휙 뽑아들었다.

그가 여지껏 몸에서 떼지 않고 있었던 지휘봉같이 생긴 막대기는 그냥 막대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틀어돌리면 속에서 칼이 나오는 이중으로 된 호신무기였다.

그 50센티쯤 되는 둥근 막대기 속에서 나온 칼은 폭이 좁고 길어서 유난히 예리해 보였다.
"우리가 수행하는 임무는 황공하옵게도 천황폐하의 칙령을 받들고 대 일본 제국 육군성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명심하라.

성전을 수행하고 있는 육군성은 징용자들을 화급히 필요로 하고 있다.

지금부터 남자는 눈에 띄는 대로 사냥하라.

제군들 임의대로 선별하지 말고 무조건 사냥해서 차에 태워라.

선별은 차후에 내가 한다. 지금부터 1개조씩 각 마을로 분산하여 사냥을 개시한다.

지금 시각 오전 11시, 오후 5시 정각에 이 지점에 재집결한다. 이상."


절도있게 지시를 마친 이시바시는 칼을 막대기에 꽂았다.

 차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기 논에 둘 있다. 빨리 가서 차 세워."


이시바시가 저 앞쪽의 논을 가리키며 약간 들뜬 소리로 명령했다.

운전경찰은 차를 빨리 몰기 시작했다.

두 대의 차는 벌써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차가 멈추기 바쁘게 이시바시는 차에서 뛰어내렸다.


"뭣들 하고 있나 빨리 내려서 저것들 잡아."


이시바시의 날카로운 외침에 뒤포장 속에서 세 명이 뛰어내렸고,

운정수도 허둥거리며 내려섰다.

그들 네 명은 둘씩 양쪽으로 갈라져 논두렁을 뛰어가고 있었다.

이시바시는 양쪽 팔을 허리에 받쳐올리고 서서 그들의 모습을

흡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곧 논에서 농부 둘을 끌어내 이시바시 앞으로 끌어왔다.


"아니, 늙은이들 아닌가"


이시바시의 얼굴이 일순간 짓구겨졌다.

손발에 진흙이 묻은 두 농부는 얼굴에 주름살투성이고 허리가 굽은 노인들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이시바시가 눈을 부라렸다.


"예, 청장년들은 징용을 많이 나가서…"


일본인 경찰이 어물거렸다.


"칙쇼 가자."


이시바시가 막대기로 허공을 내리치며 돌아섰다.


"왜 저리 화럴 내고 저려?"


"헛방쳤응게 그러제."


"치, 여그 실정얼 암것도 몰르는 구만."


이시바시의 차가 다시 달리기 시작하고,

그 뒤를 따르던 두 대가 갈림길이 나타나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머리를 돌렸다.

푸르른 들녘에는 머리에 수건을 쓴 여자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이거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군,

이거 징용을 이렇게 많이 끌려갔나, 이사바시는 초조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막대기로 가죽장화를 탁탁탁탁 치고 있었다.


"저기 저 부락 앞에 차 세워"


이사바시는 멀이 보이는 마을을 손가락질했다.
30여호의 마을을 멀찍이 앞두고 차가 멈추었다.

길이 좁아 차가 더 들어갈 수 없었다.


"2인 1조로 집집마다 샅샅이 뒤져라."


이시바시는 열받쳐 소리쳤다.
그들이 마을로 가까워지고 있는데 이쪽으로 오고 있던 여자 하나가

갑자기 돌아서서 뛰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빨간 댕기가 함께 뛰고 있었다.


"저걸 쫓아라. 틀림없다."


이시바시가 날카롭게 외쳤고, 네 명은 앞다투어 뛰기 시작했다.
이시바시는 당산나무 아래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며 담배를 꺼냈다.

 당산나무에서 매미들이 더위를 즐기는 듯 극성스레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이시바시가 담배를 거의 다 피워갈 즈음에 조장인 일본인 경찰이 한 남자의 뒷덜미를 잡고 끌고 왔다. 경찰은 그 남자를 이시바시 앞에 무릎 꿇어 앉혔다.

그런데 그 남자는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반항을 했습니다."


경찰이 코피를 흘리는 이유를 댔다.


"잘했어, 이 정도면 쓸 만하군."


이시바시는 남자를 살펴보며 경찰에게 어서 가보라고 손짓했다.

 잡혀온 남자는 마흔다섯이 넘어 보였다.

그런데 햇볕에 검게 그을리고 마른 얼굴에 비해 목이 굵고 어깨가 넓었다.

전형적인 농부의 체형이었다.

 얼굴을 떨군 그 남자는 코피를 닦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꺼냈는지 이시바시는 막대기 속에서 나온 칼을 꼬나들고 있었다.
"이거 어째 이려, 나넌 발써 4년 전에 낭인덜헌티 속아 규슈탄광서 2년 기한

 때우고 온 사람이란 말이여. 고건 주재소서도 다 아는 일이여…"


한 남자가 끌려오며 고래고래 소리지로고 있었다.


"나는 벌써 4년 전에…."


이시바시앞에 끌려온 그 남자는 일본말로 말을 시작했다.


"닥쳐라, 더 떠들면 아가리를 찢어놓겠다."


이시바시는 그 남자의 말을 자르며 곧 칼질을 할 것처럼 칼을 겨누었다.

서른 대여섯 되어 보이는 그 남자는 아랫입술을 질끈 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안되어라, 안되어라.

농새도 못 짓고 있는 병자럴 끌어가는 법이 어디 있다요."


다리를 절룩이며 끌려오는 남자 옆을 따라오며 한 여자가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앞에 대여섯 여자들이 나와 서 있었다.


"보시게라, 이 남정네넌 병자구만이라. 병자."


그 여자는 남편의 퉁퉁 부은 장딴지를 가리키며 이시바시에게 울상을 지었다.
이시바시는 그 남자의 위아래를 훑었다.

마흔다섯쯤 되어 보이는 그 남자는 키가 좀 작을 뿐 건강해 보였다.


"이건 병원에서 치료시키면 곧 낫는다. 저 여자 끌어가."


이시바시는 조선인 경찰에게 명령했다.


"요런 숭악헌 놈덜아아, 병자럴 끌어가는 법이 시상에 어딨다냐아."


여자는 몸부림치고 목놓아 부르짖으며 마을로 끌려가고 있었다.


"안돼야, 안된당게로. 갸넌 안직 신체검사도 안 받은 애기여."


여자노인이 경찰에게 매달리며 소리치고 있었다.

경찰에게 끌려오고 있는 것은 영다섯 살쯤 나 보이는 사내였다.


"이게 이래봬도 등짐질을 잘하는 걸 보고 끌어왔습니다."


사내를 이시바시 앞에 세우며 일본인 순사가 말했다.


"안돼야, 안돼야, 갸넌 열다섯도 안 묵은 애기여, 애기"


여자노인이 펄펄 뛰며 소리쳤다.


"저 늙은이는 뭐라고 떠드는 거야?"


이시바시는 얼굴을 찌푸렸다.


"예, 열다섯 살도 안 먹었다는 겁니다.

순 거짓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열일곱 살은 먹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데, 골격도 잡히고."


이시바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간단하지, 그놈 바지를 끌어내려"


일본인 순사에게 고갯짓을 했다.


"아, 예"


일본인 경찰은 그 말뜻을 알아듣고 무릎 꿇은 사내를 일으켰다.


"바지 벗어라."


"야아?"


사내는 질겁을 하며 바지춤을 움켜잡았다.


"빨리 내려"


경찰은 목도로 사내의 등을 내리쳤다.


"아이고메, 사람잡네"


여자노인이 펄쩍 뛰었다.

사내는 어쩔 수 없이 바지를 까내렸다.

그런데 사내의 손은 그것이 보일락말락한 데서 멈추었다.


"더 내려"


경찰이 또 목도를 치켜들었다.


사내의 바지가 좀더 내려갔다.

사내의 불두덩에 거웃이 거뭇거뭇 돋아나고 있었고

뭉특한 성기의 끝은 속살이 빠끔히 드러나고 있었다.


"맞었어, 거짓말이야, 저 늙은이 끌어가"


이시바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상으로 다 끝났습니다."


일본인 경찰이 말했다.


"아 그런가, 그런데 남자가 이것밖에 안되나?"


이사바시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들에 나간 자들도 좀 있을 것이고,

요행히 딴 데 가서 피한 자들도 좀 있을 겁니다."


"그렇겠군, 이 놈들을 빨리 차에 실어."


이시바시는 칼을 꽂으며 명령했다.


"이 놈덜아, 안돼야, 안돼야"


"이 베락맞어 뒤질 놈덜아"


"요런 개만도 못헌 인종덜아"


남자들은 묵묵히 끌려가고 있었고, 여자들은 발악적으로 소리 지르고 있었다.

남자들이 차에 다 태워질 때까지 여자들은 당산나무 아래서 목이 잠기도록 소리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 울부짖음은 매매들의 울음소리에 섞여 더 애처롭게 퍼지고 있었다.

포장 친 자동차는 다시 짙푸른 들녘 가운데를 달리기 시작했다.


"이거 왜 이리 덥나. 물통을 준비할 걸 깜빡 잊었군, 어디 물 마실 데 있나 찾아봐"


이시바시는 손바닥으로 방정맞게 부채질을 해대며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운전경찰이 엉덩이를 들썩하며 대답했다.

한동안 달리던 자동차는 외딴집 앞에 정거했다.

그 집은 주막이었다.

그들은 주막으로 들어섰다.


"저기, 저놈 잡아라."


마당으로 막 들어서던 이시바시가 외쳤다.

한 남자가 마루에 걸터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두 명의 경찰이 잽싸게 쫓아가씨다.

다른 경찰 두명은 차에서 사람들을 지키고 있었다.


"어째 이러요, 어째"


두 경찰에게 붙들린 남자는 몸부림치며 소리 질렀다.

그의 입에서 보리밥 알갱이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 놈아, 꼼짝 말어"


조선인 경찰이 남자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풀이 꺽이고 말았다.


"아이고, 어러신덜, 아이고 앉으시게라, 아이고 이 더운디, 아이고…."


부엌에서 나온 늙은 주모는 비굴한 웃음을 피워가며 수선스럽게 아첨을 떨어댔다.

젊은 여자는 부엌 안에 몸을 감추고 얼굴 반쪽만 내밀고 있었다.


"얼렁 시언헌 찬물 갖고 와"


조선인 경찰이 주모에게 일렀다.


"야아, 씨언헌 것 있제라."


주모는 허둥지둥 돌아섰다.


"아이고, 어러신, 아니 대장님. 지가 집에 앓아누우신 노모가 기시구만요,

 글고 처자석언 보고 떠얄 것 아니겠능게라.

이리 장사 나와갖고 떠불먼 식구덜이 어찌 되겄능게라.

담에, 다음 판에 나가게 사정 잠 봐주시씨요."


서른서넛쯤 나 보이는 그 남자는 이시바시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두 손을 비비대며 애걸하고 있었다.


"끌어가라."


이시바시가 싸늘하게 명령했다.


"아이고메, 시상에 요런 법이 워딨어,

이리 모질게 사람 생이별시키는 법이 워딨어어"


그 남자는 끌려가며 무슨 큰 짐승이 우는 것 같은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다.

그가 먹다 만 개다리소반 옆에는 네모진 등짐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시바시는 무표정하게 물사발을 천천히 기울이고 있었다.


"부장님, 정오가 지났는데 여기서 식사하시겠습니까?"


다시 돌아온 일본인 경찰이 물었다.


"에이. 틀렸어, 이 고약한 냄새가 뭐야 이거"


이시바시는 코 끝에 손부채질을 해대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주막에는 돼지고기 삶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 화식당은 면소에 가야 있습니다."


"괜찮아, 한끼 굶어도 안 죽는다."


이시바시는 마루에서 일어났다.
자동차가 달려가고 있는 들녘에 여자들의 느리고 한스러운 가락이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고 있었다. 따가운 햇살은 푸르른 볏잎들에 부서져 내리고,

무심한 제비들이 더위를 가르며 경쾌하게 비행하고 있었다.
오후 5시에 5대의 자동차는 이시바시가 지정한 장소에 다시 모였다.


"뭐라고, 총 43명 그동안 뭣들했나. 자빠져 잤나,

술들을 쳐마셨나. 이래가지고 언제 3백 명을 채우겠나.

모두 파면당해야 정신차리겠나, 내가 상부에 보고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너희들은 당장 파면이야. 파면.

아무리 사정이 좋지 않더라도 최소한 한 조에 10명씩은 넘어얄 것 아닌가.

그런데 평균 7명도 못된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이시바시는 분통을 터뜨리며 막대기에서 뽑아낸 칼을 휘두르고 가죽 장화발로  땅을 굴러댔다.

이시바시가 붙잡은 사람은 모두 16명이었다.

그는 차를 타고 돌아오며 나머지 4개조가 평균13명 정도씩, 52명으로 계산했다.

그래도 자기가 잡은 것을 다 합쳐 68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3백 명을 채우려면 5일이나 걸려야 했다.

그는 계획 차질이 너무 심해 못내 속이 상해 있었다.

그런데 막상 모아놓고 보니 4개조가 잡아온 것은 27명에 지나지 않았다.

예상이 너무 빗나가 그만 그의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부장님,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오늘이 첫날이라 일 시작이 너무 늦었고,

부장님께서 잡으신 것을 견본 삼아 내일부터는 성과를 극대화시키겠습니다.

부락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정일에서 큰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으니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일본인 순사가 나서서 절도있는 태도로 사과했다.


"좋아, 내일 다시 보겠다.

내일부터는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사냥시간을 연장한다.

다들 내가 잡아온 놈들을 똑똑히 봐둬라."


이시바시가 잡아온 사람들 16명이 모두 끌어내려졌다.

순사들과 읍사무소 직원들은 한 줄로 세워진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들은 몸이 아픈 사람에다 아직 다 크지도 않은 사내까지 잡아온 것에 내십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견본>으로 하라고 하니 감히 할말일 없었던 것이다.
잡혀온 사람들은 경찰서에 맡겨졌다.

장딴지가 아픈 병자만 골라내 병원으로 보냈다.
맘껏 술을 마시고 기생까지 끼고 하룻밤 자고 난 이시바시는

 피곤한 기색이 역연한 채로 징용대 앞에 섰다.


"오늘은 2개조로 편성한다.

 자동차 3대가 1조, 나머지 2대가 2조다.

다들 정신 바짝 차리도록!"


이시바시는 조를 분산시켜 어제 같은 결과가 오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었다.

그 3대의 자동차를 직접 지휘해서 대원들의 태만과 불성실을 막으려는 것이었고, 4

명 1개조가 한 동네를 뒤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아침 일찍 논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고 다시 지게를 지고 나서던 차득보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순사 두 명에게 붙들렸다.


"이거 어째 이러시오!"


차득보는 불끈 기운을 쓰며 두 순사를 좌우로 떠밀었다.


"이 놈이 이거!"


순사 하나가 재빠르게 목도를 휘둘렀다.


"윽!"


차득보는 비명을 토하며 옆구리를 싸잡았다.

순사가 휘두른 목도가 여지없이 옆구리를 강타했던 것이다.


"이이고메 연희 아부지!"


연희네가 부엌에서 뛰쳐나오며 부르짖었고,

마루에서 놀던 두 아이가 아앙 울음을 터뜨렸다.
차득보가 몸을 제대로 펴지도 못하는데 두 순사는 그를 끌어냈다.


"아이고, 무신 죄를 졌다고 이러시오."


연희네가 순사 하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징용 가는 거여, 징용!"


순사가 연희네를 뿌리치며 내쏘았다.


"아이고 으쩌끄나, 으쩌끄나……"


연희네가 울음을 터뜨리며 발을 굴렀다.
차득보는 사립 밖으로 끌려 나가며 기어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좀 이상했다.

징용은 으레 끌려가기 이틀이나 사흘전 에 통고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안 단속도 하고 옷가지도 챙길 여유가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야반도주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차득보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 고샅 저 고샅으로 순사들이 뛰고,

이 집 저집에서 여자들의 울부짖음과 통곡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차득보는 아내를 잠깐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농사와 아이들에 대한 당부는 한마디 해야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순사들의 기세로 보아 말을 들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막상 아내를 두고 떠나자니 가슴이 먹먹해지고 콧날이 매워졌다.

자신이 떠나고 말면 아내는 그야말로 외톨이였다.

자신도 부모없고 아내도 친정이 없었다.

옥녀마저 없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아내는 어찌할 것인가.

서로 고적한 신세라 더 정분 깊게 살아온 사이였다.


"물팍 꿇어라."


이시바시 앞에 이르자 한 순사가 차득보에게 명령했다.


"나가 무신 죄졌소. 징용 나가먼 되았제"


차득보는 순사를 노려보았다.


"이 놈의 새끼가"


순사가 차득보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윽…"


차득보는 무릎이 꺾였고, 두 순사가 우악스럽게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 놈이 뭐랬나?"


이시바시가 억지로 무릎 꿇는 차득보와 순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예, 징용을 나가면 됐지 죄진 것 없으니 무릎을 안 꿇겠다는 겁니다."


"하 제법 똑똑한 놈이로구나.

똑똑해 봤자 버는 것 매밖에 없다는 걸 똑똑히 알아둬야 해. 이 조센징놈아."


이시바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막대기끝으로 차득보의 머리를 톡톡 때리고 있었다.


차득보네 동네에서는 8명이 붙들렸다.

그들이 차에 실리기 직전에 여자 몇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들 중에 연희네도 섞여 있었다.

그 여자들은 작은 보퉁이를 하나씩 안고 있었다.

여자들은 무작정 남편들에게로 달려갔다.


"출발이다. 빨리 태워라."


이시바시가 외쳤다.

남자들은 아내들에게 보퉁이를 받아들었고,

 여자들은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남편들을 따라 걷고 있었다.


"아그덜 잘 키우고…, 농새 잘 돌보고…"


차득보는 목메임을 참느라고 침을 삼켰다.


"야아…"


목이 메어 대답이 제대로 안 나오는 연희네의 눈에는

곧 쏟아져 내릴 듯이 눈물이 가득했다.


"무신 일 있으면 운봉 시님 찾어가고…"


"야아…"


"얼렁얼렁 타라"


"얼렁 타, 얼렁"


순사들이 사람들을 잡았다.


차득보는 아내의 손을 잡았다.


"야아, 당신도…"


연희네가 남편의 손을 맞잡았다.

마침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루룩 쏟아져 내렸다.


"야, 얼렁 타"


순사가 차득보의 어깨를 쳤다.

차득보는 차로 밀려 올라갔다.

차가 곧 출발했다.


"아이고메, 으쩌끄나"


"이 놈덜아, 이 웬수덜아"


"시상에나, 시상에나…"


여자들이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그때서야 서너 여자가 보퉁이를 안고 뛰어오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해지면서 들녘에 석양빛이 물들고 있었다.

초록빛에 감도는 불그레한 석양빛은 그지없이 신비스럽고 아름다웠다.

그 황홀한 색조 속으로 하얀 해오라기도 작은 제비들도 둥지를 찾아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풍광에 어울리지 않게 자동차 세 대가 흉물스럽게 달리고 있었다.
그 자동차들은 사람 네댓 명을 태운 마차를 앞질러 갔다.

그러나 잠시 후 자동차들은 차례로 정거했다.


"저 마차에 탄 놈들을 다 끌어내려라."


이시바시가 차에서 뛰어내리며 외쳤ㄷ.


순사들이 뒤따라오고 있는 마차를 향해 우루루 몰려갔다.

마차가 멈춰지고 사람들이 멱살을 잡히고 뒷덜미를 잡히고 해서 끌려내리기 시작했다.


"이 놈덜아, 나가 누군지 아냐. 이 놈덜아, 여그 못 놓겄냐"


그들 중에 한 사람이 유난히 목청 높게 호령을 해대면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두 팔을 허리에 받쳐올리고 선 이시바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남자의 하는 꼴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놈덜아, 나가 누군지 아느냔 말이여.

나넌 만경 만석꾼 정방현이여, 정방현이 느그놈덜이 뒤질라고 이러냐. 여그 못 놓겄어."


그 남자는 더 몸부림치며 양쪽 순사의 다리를 걷어차고 있었다.

그는 과연 정상규의 큰아들 정방현이었다.

그는 허풍을 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만석꾼 지주였다.

정상규가 병상에서 서너 달을 끌다가 죽어버렸으니

만석꾼 재산은 고스란히 그의 차지가 된 것이었다.

그는 전주 나들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봉변을 당한 참이었다.


"그 자식이 왜 그리 까불어?"


이시바시가 가까워진 순사에게 눈을 치떴다.


"예, 만석꾼 지주랍니다."


조선인 순사가 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만석꾼 지주? 흥, 조센징들 거짓말, 빨리 쳐넣어."


이시바시가 막대기로 허공을 치며 돌아섰다.

두 순사가 정방현을 사정없이 차로 떠밀어올렸고,

정방현은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이시바시는 예정보다 3일이나 늦은 5일 만에 3백 명의 징용자들을 그의 말대로 <사냥>했다.

그들은 전주에서 기차에 실렸다.

그런데 붙잡힌 사람들 중에서 꼭 한 사람이 풀려났다.

그는 정방현이었다.

그가 정말 만석꾼 지주인 것이 밝혀지자 당황한 것은 경찰이었다.

 만석꾼은 무시해서는 안 되는 고액납세자였고,

식량 생산자였으며, 전쟁 후원금을 내는 후원자였던 것이다.

조선사람치고 제 1급에 속하는 재력가이면서 세도가와 더욱 친목을 돈독히 해야 할 형편에

이틀이나 생지옥살이를 시켰으니 그 입장 곤궁하기가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순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그들 3백 명이 내린 곳은 여수항이었다.

그들은 관려 연락선 여수환을 탔다.

관려연락선은 시모노세키와 여수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것을 알았다.


"존 시절 다 가부렀소."


차득보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고


"참말로 그 때가 꿈만 같소."


서근호도 씁씁하게 웃으며 한숨을 지었다.

그들이 말한 <좋은시절>이란 사회주위 운동 비밀조직에 속해 서로 연락임무를 맡았던 때였다.

그들은 배를 탈 때 한 방에 들어갈 수 있도록 나란히 줄은 섰다.

차득보 뒤로는 동네사람 7명이 따라 붙어 있었다.

한동네 사람들은 서로 한덩어리가 되려고 애를 썼다.

뱃고동 소리를 길게 울리며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선실은 싸늘할 만큼 조용해졌다.

사람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침울하고 슬픔에 차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울기도 했다.


"요리개 끌어가디끼 허는 것이 무신 연고다요?"


서근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금매 말이오. 육시헐 놈덜이 똥줄이 타도 되는 타는 것 아니겄소."


차득보가 쓰디쓰게 웃었다.


"참 징허고 징헌 놈으 시상이오.

요런 놈으 시상이 은제꺼정 갈라는지 원."


그들은 한숨만 쉴 뿐 더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그런 식의 징용방법이 어째서 생겨났는지 알 까닭이 없었다.

 지금까지의 징용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건달패인 낭인들에게 속아 인신매매를 당한 경우였다.

낭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상대로 몇 푼의 전도금을 주면서

일본에 가면 돈벌이가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꾀었다.

<모집>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끌고 간 낭인들은 탄광이나 광산, 철도공사 같은 데다 팔아넘겼다.

낭인들이 받은 돈은 끌려간 사람들의 임금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그들은 몇 년동안 감시 속에서 골빠지게 일만하고 빈털터리로 고향에 돌아와야 했다.

이 방법은 벌써 1910년 경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두 번 째는 관에서 알선하는 방법이었다.

이것은 일본의 국익. 군수산업체서 필요한 조선인 노무자들을 관의 행정계동을 따라 조달하는

것이었다.

사업소-현의 지사-후생성-조선총독부-지방관서의 절차로 이루어졌다.
징용법이 시행되고 나서도 이 방법은 한동안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 방법의 문제점은 행정절차 때문에 노무자 조달이 3개월 이상씩 걸린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자꾸 확대되어 가고, 석탄 생산이며 군사시설 같은 것은 하루가 급한데 3개월이란

너무나 긴 기간이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이 세 번 째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노무자 징용은 때와 장소에 따라 이 세 가지 방법이 함께 사용되는 것이었다.
18시간의 항해 끝에 그들은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그들은 경찰의 감시 아래 부두에 커다란 창고들에 갇혔다.

숨이 막히는 더위 속에서 그들은 사흘을 보냈다.

그들은 하루에 한 끼밖에 얻어먹을 수 없었다.

그것도 제대로 된 밥이 아니라 주먹밥 한 덩어리에 단무지가 한 쪽씩뿐이었다.
그런데 그 밥을 해오는 것은 조선여자들이었다.


"요것 묵고 어찌 살라고 이러요."


사람들의 노여움이 빗발쳤다.


"우리가 멀 아나요.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요."


여자들의 힘없는 대꾸였다.


"우리 어디로 가게 되는 거요?"


이런 것은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가 그런 걸 어찌 아나요."


여자들이 근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나흘째 되는 날 기차를 탔다.


"우리 어디로 가는 겁니까?"


일본말을 할 줄 알면서 더는 참을 수가 없어 차득보는 순사에게 물었다.


"닥쳐라, 가보면 안다."


순사가 개머리판으로 차득보의 어깻죽지를 갈겼다.
그들이 탄 것은 객차가 아니라 화물차였다.

도주 방지와 군공사의 기밀 보호 때문에 강제연행된 노무자들은

전부 화물차에 태우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들은 굶주림과 더위에 시달려 객차든 화물차든 따질 겨를이 없었다.

기차가 밤낮으로 달려 그들은 어느 항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그들은 수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을 알았다.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어디선가 반수는 딴 곳으로 간 것이었다.

차득보는 배를 타고 나서야 홋카이도로 간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늙은 선원한테 살짝 물어본 것이었다.

차득보는 홋카이도가 섬이라는 것뿐 그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소설방 > 아리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2. 학병의 파장   (0) 2017.07.10
161. 정복되지 않는 혼   (0) 2017.07.09
159. 두 여자   (0) 2017.07.07
158. 승자와 패자   (0) 2017.07.07
157. 신탁통치설   (0) 2017.0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