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59. 두 여자

오늘의 쉼터 2017. 7. 7. 00:40

159. 두 여자



공원입구 언저리에는 행상들이 즐비했다.

산책객들에게 제 나름의 특색있는 먹거리를 만들어 파는 행상들이었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공원입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행상들이 손님을 부르는 소리들과 산책객들의 상쾌한 웃음소리들이 어우러지고 있었다.

전동걸은 그 술렁거리고 거리낌 없는 왁자함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모두 자유스러워 보이고 활기차 보였던 것이다.

전쟁의 분위기도 그곳까지는 제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동걸은 계속 미행에 신경 써가면서 사람들 속으로 섞였다.

사람들 사이사이를 재빨리 빠져나가며 먹을 만한 것을 찾아 행상들을 살펴 나갔다.

작은 알감자를 기름에 볶은 것과 기름에 막 튀겨내고 있는 꽈배기가 구미를 당겼다.

그 두 가지를 사들었다. 입구 가까이로 가니 아이스크림을 팔고 있었다.

살까말까 잠시 망설였다.

아직 오지 않았으면 녹을 것이고, 그냥 지나치자니 날씨가 좀 더운게 발목을 잡았다.

녹기 시작하면 내가 다 먹어치우면 되지. 이런 생각으로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들었다.

전동걸은 사람들 속에 섞여 공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람들 울타리는 금방금방 허물어져 갔다.
사람들은 여러 갈래의 길을 다라 넓은 공원으로 흩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전동걸은 넓은 중아로를 따라 걷다가 혼자가 되자 오른쪽의 아름드리나무를 향해 길을 건너갔다.

그리고 아름드리나무를 지나치는 듯하며 순간적으로 뒤를 살폈다.

 계속 확인해 온 대로 미행은 없었다.

전동걸은 오른쪽 세 번 째 길로 접어들었다.

공원에는 나무들이 많았고, 무성한 잎들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세  번 째 길로 들어서자 금방 풋하고 향긋한 숲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전동걸은 자신도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면서 왜 사람들이 공원을 찾아오는지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도시의 거의 끝이라고 하지만 조금 전까지 느꼈던 피곤한 도시의 번잡이

이처럼 말끔히 차단되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햇살이 스며들지 못하는 짙은 숲그늘 여기저기에는 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그 벤치에 누워 늘어지게 자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 숲이 깊어지지 않아서 그런지 끌어안고 있는 연인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 길은 한참을 가다가 세 갈래가 되었다. 전동걸은 갑자기 뒤를 돌아 보았다.

역시 미행은 없었다.

그는 비로소 안심하며 왼쪽으로 세 번 째 길로 접어들었다.

숲길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지요꼬가 왜 이런 장소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일일까? 이런 낭만적인 공원에서 산책을 즐기려는 것일까?

글쎄, 요즈음 상황이 그런 생각이 들게 좋지가 않은데, 아마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공원이긴 했지만 복잡하게 장소를 정하는 품이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길이 다시 두 갈래로 갈리면서 왼쪽 길 저쪽에 호수가 보였다.

공원으로 들어오고 잇던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이 근방에서는 사람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전동걸은 호수를 향해 걸었다.

나무숲은 호숫가에서 끝나고 있었다.

그 숲그늘을 따라 벤치들이 놓여 있었다.
전동걸은 어느 벤치에 앉을까 두리번거렸다.

그 호숫가의 벤치였지 몇 번 째 것이라고 지정된 것이 아니었다.

전동걸은 기왕이면 호수가 잘 바라보이는 벤치를 골랐다.

저쪽 벤치에 남녀 한 쌍이 다정하게 앉아 있었다.

전동걸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먹을 것을 내려놓고 벤치에 앉았다.

그때서야 그는 지금까지 아이스크림 두 개를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받쳐 들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픽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내려다보았다.

윗부분이 약간 녹을 기미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는 우선 자기 것부터 먹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전동걸 씨!"


아이스크림을 막 입에 대던 전동걸은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뒤에서 들린 소리는 남자 목소리였던 것이다.


"뭘 그리 놀래요?

역시 혼자 먹으려는 흑심을 들켜서 그런 거지요? 후후후…"


지요꼬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다가서고 있었다.


"이런 장난은…. 언제 왔소?"


전동걸은 실소를 하며 물었다.

아까 뒤에서 전혀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먼저 와서 저쪽 나무 뒤에 숨어 있었지요.

전동걸 씨는 여러 가지가 낙제점이에요."


지요꼬가 벤치에 앉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뭐가 말이오?"


전동걸은 지요꼬에게 이이스크림을 내밀었다.


"제가 숨어 있는 것도 몰랐지요.

퇴로를 생각지도 않고 경치 좋은 자리만 골라 앉았지요,

자기 이름을 부른다고 모른 척하지 않고 그리 놀랐지요,

이게 얼마나 결정적인 것들이에요."


지요꼬는 단둘이 있을 때 전동걸을 꼭 부를 일이 있으면 <전동걸 씨>라고 했다.

전동걸이 창씨개명한 이름을 일본말로 부르는 것을 딱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전동걸 씨>는 순 조선식이라며 전동걸이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예,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 차후로 다시는 그런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전동걸은 정말 야단맞은 소학생이 선생님에게 하는 것처럼 고개까지 깊이 숙였다.

그러면서 그는 또 지요꼬와 이미화를 비교하고 있었다.

지요꼬는 역시 침착하고 냉정한 조직원으로서 적격이었다.


"후후후…… 그러니까 꼭 착한 소학교 생도 같네요."


지요고가 눈을 곱게 흘기며 아이스크림을 입으로 가져갔다.


"왜 무슨 일 있소?"


전동걸도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물고 용건부터 물었다.


"예, 문제가 좀 생겼어요."


지요꼬가 앉음새를 단정하게 하며 대답했다.


"…?"


전동걸은 다음 말을 눈으로 독촉했다.


"회장님한테 미행자가 따르는 것 같은 게 낌새가 이상하대요.

정기모임을 연기하고, 전원 조심하라는 전달이에요."


웃음기 사라진 지요고의 건조한 말이었다.


"그거 곤란한데…. 미행자 확인은 됐다는 거요?"


전동걸은 아이스크림 맛이 싹 가시는 걸 느끼며 물었다.


"더 이상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그런데 정기모임을 연기할 정도면 꽤 확실한 것 아니겠어요?"


지요꼬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이스크림은 계속 먹고 있었다.

그 여자 답지 않은 태연함에 자신의 긴장이 쑥스러워 전동걸은 아이스크림을 듬뿍 베물었다.


"이상한데…., 뭐가 단서가 됐을까?"


조직을 은폐하고 수사기관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조직원들이 노출행동을

절대 하지 않기로 되어 있는 원칙을 생각하며 전동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문젠 이젠 그만 생각하도록 해요.

더 생각하면 근거없는 추측만 많아질 뿐이잖아요.

그리고 추측이 많아지면 사태를 오판할 위험이 크니까요."


지요꼬의 냉정한 논리였다.


"물론 그럴 수 있소. 그리합시다."


전동걸은 동의했다.

지요꼬는 그 사실을 자신보다 먼저 알고 있어서 그런지 이미 감정이 정리된 상태였다.

그건 조직원으로서 이성적이고 옳은 태도였다.

어쩌면 지요꼬는 지금 당장 그 사실을 알았더라도 그런 태도를 취했을지 몰랐다.

지요꼬는 언제나 빈틈없고 판단이 빠르며 적극적인 여자였다.


"이건 뭐예요? 정문 앞에서 뭘 샀나보죠?"


지요꼬가 봉투를 가리켰다.


"아, 이것 먹읍시다. 미행을 확인하고, 애인하고 산책을 나온 것으로 위장도 하고,

시장하기도 해서 겸사겸사 산 거요."


전동걸은 봉투를 찢어 감자볶음과 꽈배기를 펼쳐놓았다.


"어머 참 맛있게 보이네요. 마침 배가 고팠는데."


지요고가 반색을 했다.


"많이 먹어요. 자아, 먹읍시다."


지요꼬는 서슴없이 꽈배기를 집어들었다.


"요즘 가끔 인간으로 태어난 게 혐오스럽기도 해요."


호수 쪽으로 눈길을 돌린 지요꼬가 갑자기 한 말이었다.


"혐오? 나이에 안 어울리게 염세는 아닐 것이고, 무슨 일 있소?"


전동걸은 혹시 가정교사를 하는 집과 무슨 일이 있나 생각하며 물었다.
"저것 보세요. 저 흰 거위들하고 오리들, 얼마나 사이좋고 평화로워요.

인간들은 저런 평화가 무너지도 모르고 그저 서로 죽이고 죽는 싸움에 광분하고 있잖아요.

인간이라는 게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할수록 싫고 지겨워요."


"그거 생각해 봐야 과히 소득없는 거니까 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소.

인간이란 도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오.

그 능력에서부터 인간의 모든 행`불행은 좌우되기 시작한 거요.

저 거위와 오리들이 저만큼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건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이요."


전동걸은 호수에서 유유히 노닐고 있는 거위와 오리 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들은 정말 한가하고 평화롭게 물 위를 떠다니며 날개를 퍼득이기도 하고

물 속에 머리를 박고 물구나무를 서기도 했다.


"그런 것도 같군요. 인간이 인간을 대량살육하는 전쟁을 보면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웃음만 나와요."


지요꼬는 코웃음을 쳤다.


"그 말이야말로 인간이 얼마나 자만에 빠진 동물인지를 스스로 입증한 명언 중에 명언이오.

그런 말을 지어낸 어리석은 자만으로 그후로 또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어리석은 자만에

빠지게 만들었겠소.

그 말도 인간들의 불행에 크게 공헌한 것들 중의 하나요."


"말이 좀 어렵네요.

저어기 저 오른쪽 끝에 있는 거위 두 마리 있잖아요.

아주 사이가 좋아 보이지요?

저도 요즘 저런 거위가 되고 싶은 꿈을 가끔 꿔요."


전동걸은 가슴이 뜨끔해지는 걸 느꼈다.

그건 지요꼬다운 직설적인 표현이었던 것이다.

전동걸은 지요꼬의 인간에 대한 혐오가 어디에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를 포착했다.

지요꼬는 언제부터인가 사랑의 감정에 빠지기 시작했고,

그 깊이가 점점 깊어져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 굳이 이 장소를 선택한 것도 안전을 도모할 겸 그런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지요꼬가 자신에게 색다른 감정을 표시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화와 동행한 것을 목격한 다음부터였다.


"글쎄, 그런 꿈이 참 아름답긴 한데, 뭐랄까….

조직생활자로서는 너무 사적이지 않나 싶소."


전동걸은 지요고의 감정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조직을 슬쩍 내세웠다.


"조. 직. 생. 활. 자…."


지요꼬는 한마디 한마디를 꼭꼭 씹듯이 말하고는,


"그게 대립관계인지 병행관계인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쑥스러움이나 부끄러움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꽈배기며 감자볶음을 계속 먹고 있었다.


"대립관계이니 병행관계니 하니까 무슨 연구논문 같소.하하하…"


전동걸은 마 땅한 말이 없어서 웃음으로 말을 피하려고 했다.


"그럼요. 어떤 연구논문이 그보다 더 심각할 수가 있겠어요.

그거야말로 인생 전체가 걸린 문젠걸요."


지요꼬의 또렷한 말이었다.


'이거 야단났군.'


전동걸은 지요꼬가 육박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뒷걸음질 치는 기분으로 또 이미화와 비교했다.

이미화 같으면 속앓이만 할 뿐 입에 올릴 수 없는 말이었다.


"내가 철학 교수를 하나 소개해 줄 수도 없고 이거 큰일이군. 허허허…"


전동걸은 발 밑에서 조약돌을 하나 집어 들고 몸을 일으켰다.

호수를 향해 조약돌을 던지려는데 오리 한 마리가 다른 오리를 올라타고 있었다.


'저놈 저거….'


그 순간 전동걸은 이미화의 얼굴이 쑥 다가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그 오리를 향해 조약돌을 힘껏 내던졌다.


"우리 저쪽으로 산책해요."


지요꼬가 휴지를 챙겨가지고 일어났다.


"그럽시다. 여긴 숲이 아주 일품이요."


"그 잘난 신궁이 있어서 그래요.

그러니까 이 숲은 시민 휴식용이 아니라 신궁 치장용인 거지요.

비행기를 타고 전쟁을 하는 자들이 또 신궁을 떠받드는 건 뭔지 모르겠어요."


"그건 당연하지 않소.

군국주의자들은 국민들을 자기네 목적에 동원하는 수단으로

신궁을 최대한 이용해 먹고 있는 것 아니겠소?"


"네 맞아요. 헌데, 우리 위장을 하려면 아주 철저히 해요."


이 말과 동시에 지요꼬는 재빨리 전동걸의 팔짱을 끼었다.

어어, 이거 곤란한데…. 전동걸은 당황했다.

그러나 팔을 뺄 수는 없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지요꼬와의 관계가 끝장나고 말 거였다.

그건 곧 조직의 와해와 직결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위장을 빙자하기는 했지만 여자가 먼저 팔짱을 끼다니….

전동걸은 그 적극성에 곤혹스러움과 거부감을 동시에 느꼈다.

지요꼬는 직접 사랑의 고백만 하지 않았을 뿐 이제 드러낼 마음은 다 드러낸 것이었다.

대낮에 청춘남녀가 팔짱을 낀다는 것은 아주 관계가 깊은 사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에서는 아무리 신교육을 받은 개명한 남녀라 해도 대낮에 팔짱을 끼고 다닌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선에 비해 일본은 서양풍조가 훨씬 더 유행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젊은 남녀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팔짱을 끼고 다닌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이렇게 하고 걸으니 기분이 어떠세요?"


지요꼬가 평소와는 달리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 위장이라 그런지 그저 그렇소."


전동걸은 시침을 뚝 떼며 덤덤하게 대꾸했다.


"어머, 멋없어, 위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지요꼬는 전동걸의 팔을 더 꼭 붙들며 말했다.


"글쎄, 난 문학적 소양이 부족해서 그런지 그런 상상력이 발동 안되는데요."


전동걸은 계속 피해 서기에 바빴다.


"동지의 선은 넘고 싶지 않다 그런 뜻인가요?"


지요꼬의 어조가 달라졌다.


"아니 꼭 그런 뜻은 아니오. 이거 너무 갑작스러워서…."


전동걸은 말이 궁해 얼버무렸다.,

사실 여자와 팔짱을 끼고 걷는 것이 난생 처음이라 어색스럽고 쑥스러울 뿐

지요꼬 같은 여자가 자신의 팔짱을 낀 것은 전혀 기분 나쁜 일이 아니었다.

조직원들 중에서 지요꼬에게 호감을 갖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네, 그래요. 조선 남자들은 아주 보수적인 데가 있어요.

특히 예의 범절과 이성문제에 대해서. 제 행동에 너무 부담 느끼지 마세요."


지요꼬는 오늘은 이 정도에서 끝내기로 했다.

더 적극적으로 나갔다가는 조선남자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 조선 여학생에게 쏠리지 않도록 그동안 꾸준하게 마음을 표현해 왔으니까

조금 더 뜸을 들일 필요가 있었다.
어쨌거나 그 여학생한테 전동걸을 빼앗길 수 없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조급한 마음을 눌러야 했다.
숲길이 깊어지면서 팔짱 낀 남녀들의 모습이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었다.

전동걸은 그 모습들을 눈여겨보며 어떤 새로운 감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이런 모습을 이미화가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그 순간 지요꼬의 팔을 뿌리치고 싶었다.

동지관계인 여자 때문에 이미화를 잃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지요꼬가 이렇듯 적극성을 띠는 것은 그 성격 탓도 있었지만 이미화 때문이기도 했다.

그동안 지요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미화를 입에 올리며 지속적인 관심을 써왔던 것이다.


"저 길로 돌아서 나가도록 해요.

또 족쇄를 찰 시간이 다가오고 있어요."


지요꼬의 풀죽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가정교사 노릇을 언제나 족쇄를 찼다고 표현하고 있었다.


"그럽시다."


전동걸은 또 지요꼬가 딱해졌다.

족쇄를 찼다는 망의 실감만큼 지요꼬에게 학비를 대주고 싶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그렇게까지는 여유가 없었다.
지요꼬는 숲은 벗어나면서 팔짱을 풀었다.

전동걸은 왼쪽 팔이 굳어진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소리없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위장이라 하더라도 팔짱을 낀 채 사람들 많은 정문 앞을 지나갈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만일 모르니까 정문 앞에서 헤어져요."


지요꼬는 조직원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럽시다. 조심해서 가시오."


"네, 조심하세요."

 
두 사람은 정문 앞에서 사람들 사이에 섞이며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전동걸은 전차를 타고 하숙으로 돌아가는 동안 줄곧 회장의 미행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러나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원인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회장이 만약 체포되면 어떻게 되나 하는 불안감이 이외로 크게 밀려들었다.

경찰에서 의심하게 되면 언제든지 잡아넣을 수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의심나는 조선사람을 잡아넣는 것은 일본경찰이 가장 손쉽고 마음대로 하는 일이었다.

조직원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잡혀 들어가면 조직은 위기였다.

물론 그 어떤 경우에도 조직의 기밀을 누설하지 않는다고 맹세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완전한 방어책일 수는 없었다.

그동안 검거된 무수히 많은 비밀결사들이 그런 맹세를 하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닐 것이었다.

맹세의 강도를 고문의 강도가 압도해 버리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죽음으로 몰아가는 고문의 혹독함 앞에서 인간은 강철일 수 없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전동걸은 책도 읽히지 않는 불안감 속에서 며칠을 보냈다.

그런데 이미화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너무 뜻밖이라서 전동걸은 어리둥절했다.


"조선여자 같던데 애인인가요?"


하숙집 주인 여자가 물었다.


"아 예, 뭐 그저…."


전동걸은 수화기를 전화통에 걸며 우물쭈물했다.


"뭘 숨기려고 그래요? 학생 같은 미남이면 애인이 있을 만도 하지."


40대의 주인여자는 야릇하게 눈을 흘겼다.

여자한테서 처음 걸려온 전화라서 그리 관심을 나타내는 모양이었다.


"하하하….

제가 미남이면 이 세상 남자가 다 미남이게요?

미남 소리 처음 듣습니다."


전동걸은 진짜로 웃었다.

남자답게 생겼다는 말은 가끔 들어왔지만 미남이라는 말은 정말 처음이었던 것이다.


"아니, 왜 그래요? 사람들이 얼굴을 볼 줄 몰라서 그렇지.

남자 얼굴이 여자처럼 예쁘고 매끈해야 미남인가요?

학생처럼 남자답게 생겨야 미남이지."


주인여자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예, 빈말이라도 감사합니다.

앞으로 용기를 내서 살겠습니다."


전동걸은 그런 말 듣기가 민망해 좀 과장되게 몸짓을 지으며 돌아섰다.


"내 말 믿어요.

여자들이 반하게 생긴 매력적인 얼굴이니까."


"예, 믿겠습니다."


저 아주머니가 왜 저리 인심이 후하신가.

여자한테서 저화가 걸려오니까 갑자기 마음이 동하시나.
전동걸은 2충으로 올라가며 떫게 웃고 있었다.

생선 한 토막이라도 잘 얻어먹으려면 하숙집 주인 여자가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을 때 잘 눌러주라는 말을 생각하며.

그 말은 유학생들 사이에 흔히 오가는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정조관념이 희박하고 성이 개방적인 일본 여자들이라서 하숙생들과 관계를 갖는

주인 여자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주인여자와 딸을 동시에 상대하다가 들통이 나서 줄행랑을 친 학생도 있다고 했다.

어쨌거나 일본여자들이 몸을 함부로 내돌리는 것은 조선여자들과 정반대인 것이 사실이었다.

전동걸은 그런 성풍속이 영 마 땅찮았다.

여자들이 그리 헤프고 난잡하다 보면 마누라가 낳은 아이가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를 판이니

그건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지요꼬가 그렇게 적극적인 것이 애정 때문인가, 성풍속 때문인가?"


전동걸의 머리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었다.

지요꼬의 의지 강한 얼굴이 떠오르면서 전동걸은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요꼬는 상식적인 여자가 아니었다. 일본여자이기 이전에 일본사람으로서 갖추기

어려운 의식을 가진 지극히 희귀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상식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지요꼬에 대한 모독이고,

자신의 천박성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었다.
전동걸은 단골 카페로 나갔다.

이미화와 첫 만남을 가 던 카페가 단골이 되었다.

무슨 의미를 부여하듯 이미화가 그 카페를 좋아했던 것이다.

이미화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이거 미안합니다. 영국신사가 못돼서."


전동걸은 흔히 쓰는 <영국신사>라는 말을 끌어다대며 웃었다.

일본사람들이 중절모자에 양복과 스틱까지 같춘 차림을 유행시키면서

<영국신사>라는 말도 일상어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아니에요. 아직 시간이 다 안됐는걸요."


이미화가 반가움 담긴 얼굴로 잔잔히 웃으면서 말했다.


"아, 그래요? 그럼 영국신사 자격이 없진 않군요."


전동걸은 이미화의 곱고 함초롬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 싱글벙글하며 의자에 앉았다.


"뜻밖에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좋은일 있어요?."


다른 날과 달리 상기된 기색에 명랑해 보이는 이미화를 바라보며 전돌걸은 담배를 꺼냈다.


"네에…."


이미화는 방그레 웃음지으며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무슨 일인지 맞혀보라고 하는 듯.


'아, 예뻐라'


전동걸은 가슴이 꿈틀하는 것을 느꼈다.

제게 정말 꽃이라면 당장 꺾고 싶다는 충동이 일고 있었다.

이미화는 의가만 했던 꽃에서 발그레하게 물든 꽃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에도 어느 순간마다 갖고 싶은 마음이 동하고는 했었다.

그러나 그건 욕심이었지 지금 같은 충동은 아니었었다.


"그게 무슨 일일까?…."


전동걸은 자신의 마음을 눈치챌까봐 눈길을 돌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생각해 보세요."


이미화의 목소리가 명랑했다.


"오늘, 오늘이 무슨 날일까? 조선이 망한 날도 아니고….,

우리가 만난 날도 아니고……, 미화 씨가 시집가는 날도 아니고…"


전동걸은 담배를 뻐끔거리며 계속 고개를 갸웃갸웃했고,

이미화도 입을 가리고 쿡쿡거리며 웃었다.


"나 그런 것 맞히는 데 소질 없어요."


전동걸은 두 팔을 반쯤 들어 보였고


"안되는 데요, 꼭 맞해셔야 해요.

돌걸 씨한테 관계되는 날이에요."


이미화가 재미있어 하며 말했다.


"나하고 관계된 날? 글쎄요.

오늘이 왜 나하고 관계가 있나…."


전동걸은 장난기 사라진 얼굴로 생각을 더듬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글쎄요. 모르겠는데요."


전동걸은 포기하겠다는 듯 헤식게 웃었다.


"정말 모르시겠어요?"


"예, 모르겠어요."


"가르쳐 드려요?"


"예, 가르쳐주세요."


꼭 소년처럼 말대답을 하고 있는 전동걸이가 이미화는 그렇게 좋은 수가 없었다.

얼마나 큰일에 몰두하고 살면 자기와 직접 관계되는 날도 어떤 날인지 모를 것인가.

그런 전동걸이가 더없이 남자답고 매력적이었다.


"생일을 축하드려요."


이미화는 전동걸 앞에 선물을 불쑥 내밀며 말했다.


"예? 내 생일?…."


전동걸은 어리둥절해졌다.


"네, 어서 받으세요."


이미화는 선물은 더 내밀었다.

하얀 한지에 빨간 끈으로 포장된 선물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습니까?"


전동걸은 선물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계속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언젠가 말씀하셨잖아요."


"내가요?"


"네, 제가 물어서."


"아, 그랬던가요?"


전동걸이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쳤다.


"팔 빠지겠어요."


"아 예에, 고, 고맙습니다."


전동걸은 얼떨결에 선물을 받으며 말을 더듬었다.

그 선물은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고 생소하기도 했던 것이다.

생일날 반찬 푸짐하게 차린 생일상을 받는 것은 익숙했지만 생일 선물을 받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해마다 생일날 아침에 쌀밥과 미역국에 반찬 푸짐한 생일상을 차려주고는

<무병허게 잘 커라> 하는 말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유학을 오고 나서부터 생일날은 까맣게 잊고 지나갔다.

그런데 이미화가 생일을 챙겨주다니! 전동걸은 이미화의 그 자상함에서

어머니의 따스함을 물큰 느꼈다.


"이거 풀어 봐도 됩니까?"


전동걸이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어머, 안돼요. 이따가 혼자서 보세요."


이미화는 당황하며 얼굴이 빨개졌다.


"예, 알았어요."


전동걸은 선물의 앞뒤를 살펴보며 포장도 얌전하고 예쁘게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 이제 이미화와 지요꼬를 비교하고 있었다.

지요꼬 같았으면 선물을 풀어보라고 했을지 몰랐다.

그러나 선물을 풀어보라고 하는 것보다는 풀어보지 못하게 하면서 얼굴 빨개지는

그 부끄러워함이 훨씬 더 여자답고 아름다
운 모습이었다.


"저녁은 내가 살 테니까 뭐 맛있는 거 시켜요."


전동걸은 선물을 탁자 가장자리로 조심스럽게 밀어놓으며 이미화를 바라보았다.


"아니에요. 생일날 본인이 밥을 사는 법이 어딨어요.

오늘은 제가 전부 맡을 거예요. 축하하려고 제가 먼저 연락했잖아요."


이미화는 평소와는 다르게 아주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하아…."


전동걸은 놀라움인지 어리둥절함인지 잘 구분이 안되는

얼굴로 이미화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아니오, 그럼 내가 영화 구경을 시켜드릴 테니까 밥을 사세요."


전동걸은 이미화를 꼭 끌어안고 싶은 마음으로 말했다.

평소에는 잔잔하다가도 어떤 경우에는 그렇게 자기 의사를

또렷하게 밝히는 이미화가 너무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네, 그렇게 하세요."


영화 좋아하는 이미화가 살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인가 활동사진은 영화라는 새 이름으로 바뀌어 있었고,

활동 사진이라고 하면 촌사람 취급을 당했다.
이미화는 거침없이 값이 제일 비싼 비프스테이크를 시켰다.


"이거 너무 과용하는데…."


"걱정 마세요. 우리 아버지 편하게 돈 잘 버는 거 아시잖아요."


이미화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에이, 미화 씨가 나같이 사상 불건전한 놈한테

이렇게 돈 막 쓰는 줄 아시면 아버지가 혼줄을 낼 거요."


"네 그렇잖아도 큰일이 한 가지 있어요.

동걸 씨 만나면서 자꾸 이야기 듣다보니까

아버지를 점점 무시하게 되고 싫어지고 그래요.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이미화의 말은 진지했다.


"너무 그럴 것 없어요. 미화 씨와 아버지는 생각에 있어서는 별개고 독립체니까

미화 씨 생각을 아버지와 연결시키지 말고 독립시키도록 해요.

아버지 같은 분들은 대화로도 설득으로도 의식이 바뀌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정치성이 있거나 사회성이 있는 대화는 피하면서 그냥 아버지로만 대하도록 하시오."


전동걸의 말 또한 진지했다.


"말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니까 문제지요.

글쎄 아버지는 아버지 생각을 자식들한테까지 주입시키려고 하신다니까요."


"그거야말로 쉽지 않소.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버려요."


"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이런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전동걸은 무엇보다도 보람스럽고 즐거웠다.

이미화는 처음에 비해 의식의 채색화가 많이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그 의식의 변화는 곧 자신에 대한 애정의 반증이기도 했다.


"근데 남동생이 내년에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데 아버지 생각이 문제예요."


이미화가 고개를 가로지르면서 말했다.


"어떤 과를 원하시오?"


"권세 좋아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 있잖아요."


이미화는 말하기도 창피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법학부 말이오?"


이미화는 속상하는 표정으로 전동걸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은 뭐라고 하지요?"


"어디 우리네 가정에서 자식들이 무슨 발언권이 있어요?

아버지 말이 법이고, 저처럼 동생도 꼼짝 못 하고 법학부로 가야지요."


"어쩔 수 없는 일이오.

동생이 일단 법학부로 진학한 다음에 똑바른 의식을 갖게 하는 수밖에는."


이미화가 반색을 했다.


"수업료는 안 받겠소. 미화 씨 동생이니까."


전동걸은 이미화와 눈길을 맞추며 능청스럽게 웃었고,

이미화는 얼굴이 붉어지며 눈길을 떨구었다.


"영화는 볼 만한 게 있소?"


전동걸은 커피를 저으면서 물었다.


"네, 또오…. 슬픈 애정영환데요."


이미화가 목을 움츠리듯 하며 말을 주저했다.


"그거 좋지요."


"유치하다고 생각하시지요?"


"아니오, 호들갑스럽게 기뻐하는 것보다는 슬픈 게 낫고,

사무라이영화보다는 애정영화가 낫소.

조선 람들 거의 다 슬픈 것 좋아하쟎소."


영화는 <비련의 강>이라는 제목처럼 여자들이 눈물깨나 짜도록 슬펐다.

그러나 전동걸은 영화의 슬픈 사연보다는 그 남자주인공이 하는 것처럼

하고 싶은 유혹을 몇 번씩이고 느끼고 있었다.

아니, 그것들 전부는 너무 과한 것이었다.

남자 주인공은 애인이 손을 잡는 것은 물론이고,

차츰 입도 맞추고, 인적없는 수풀속에서 안고 뒹굴고,

어느 비오는 날에는 젖도 만지고, 허벅지도 만지다가 끝내는….

그런 것들 중에서 첫 번 째인 손이라도 슬그머니 잡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미화가 너무 영화에 취해 눈물을 짜고 있어서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분위기를 깨버리면 이미화가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전동걸은 줄곧 눈물을 흘릴 정도로 영화에 몰입하는 이미화가 이상스럽기도 했고 부럽기도 했다.

자신은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중요한 고비고비에서 꼭 저건 영화니까 하는

 김빠지는 생각이 들어버리는가 하면 영화의 장면을 벗어나 어처구니없게도

스크린 전체가 눈에 들어오고 마는 것이었다.
전동걸은 쓴 입맛을 다시며 또 이미화와 지요꼬를 비교했다.

지요꼬도 저렇게 눈물을 흘릴 것인가?

어쩌면 지요꼬는 애정영화 자체를 보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지요꼬와 영화를 본 일이 한번도 없었다.

영화를 볼 사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 일의 긴장 속에서 영화 같은 것을 볼 여유가 없었다.


"그 여자 누구지요? 아주 예쁘던데요."


지요꼬가 무표정하게 물었던 말이었다.


"요새도 영화 자주 보나요?"


그리고 가끔 이렇게 물었었다.

그러면서 지요꼬는 감정표현이 적극적으로 바뀌어갔다.
영화관을 나와 한참 걷다가 전동걸은 입을 열었다.


"방학이 얼마 안 남았는데 언제 집에 갈 거요?"


"바로 가야지요."


"함께 가는 게 어떻겠소."


"네에?"


이미화는 화들짝 놀랐다.


"관부연락선 말이오."


"아 네에, 그거 좋겠네요."


이미화는 하를 긴 숨을 내쉬었다. 집에 함께 가자는 줄 알았던 것이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함께 건너는 것은 바라는 바였다.

함께 배를 타면 그 지루한 뱃길이 얼마나 짧아질 것인가.

전동걸은 하숙방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선물을 풀었다.

책이 나왔고, 책 위로 따로 네모지게 싼 것이 있었다.

책은 투르게네프 단편집이었다. 톨스토이는 거의 다 읽었지만

투르게네프는 아직 손대지 않은 터라 전동걸은 반가웠다.

네모진 포장지를 뜯었다.


"…."


전동걸은 가슴에서 화끈 불길이 이는 것을 느꼈다.
포장지 안에서 나온 것은 새하얀 손수건이었다.

손수건 여자가 남자에게 손수건을 선물하는 것은 사랑의 고백이었다.

그것도 하얀 손수건은 순결을 바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네모지게 접힌 손수건의 한쪽 끝에는 새빨간 장미 한 송이가 수놓아져 있었다.

장미는 또 무엇인가. 그것도 사랑을 뜻하지 않던가.

그런데 장미만 수놓아진 것이 아니었다.

꽃송이 아래로는 초록빛 가지가 뻗어 있고,

그 가지에는 두 개의 잎이 마주보고 있었다.

마치도 <당신과 나, 장미꽃 같은 사랑을 꽃피워요.> 하는 것처럼.
전동걸은 주먹으로 제 가슴을 쳤다.


'아이고, 내가 왜 손을 안 잡았지. 입맞춤을 해도 괜찮을 것을'


전동걸은 황홀한 기분으로 손수건을 보고 또 보면서 장미꽃을

한 땀, 한 땀 수놓아 간 이미화의 마음과 정성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이미화와 지요꼬를 비교했다.

두 여자가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은 너무나 달랐다.

감칠맛이 있고 아름답고 여자다운 것은 역시 이미화였다.

전동걸은 이미화를 안 듯 손수건을 가슴에 대고 상체를 마구 흔들어댔다.
기말시험을 다 끝내고 귀국 채비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경도에서 조선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가 검거되었다는 신문보도가 나왔다.

전동걸은 충격 속에 그 기사를 읽어났다.

체포된 학생들 중에 운동주 송몽규 같은 이름이 나왔다.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동지였고 동포였다.

전동걸은 그들이 왜 체포되었는지

또 풀 수 없는 미궁으로 빠져들며 주먹을 부르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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