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아리랑

157. 신탁통치설

오늘의 쉼터 2017. 7. 7. 00:38

157. 신탁통치설



식단 중앙에는 태극기가 구김살 하나 없이 반듯하게 부착되어 있었다.

태극기는 그 아래 앉아 있는 사람들이 왜소해 보일 마큼 엄청나게 컸다.

시단 앞면의 천장에서부터 드리워진 길고 폭넓은 현수막에는

신탁통치설비판자유한국인대회라고 큼직큼직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 커다란 태극기는 마치 '나를 신탁통치해? 안 돼,

절대로 안 돼'하며 엄하게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식장에는 3백여 명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여자들도 꽤나 많았다.

그들은 모두 숙연하고 엄숙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단상의 태극기가 유난히 큰 것은 그들의 마음의 표현인지도 몰랐다.


"만장하신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신탁통치설비판자유한국인대회를 개최하겠습니다.

다 같이 기립하시어 단상의 태극기를 향해 국기에 대한 배례를 올리겠습니다.

일동 기립!"


사회자의 말에 따라 식장의 모든 사람들이 일어섰다.


"국기에 대하여 경례!"


그들은 다 같이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다 올렸다.

투명한 고요 속에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더욱 숙연하고 엄숙해져 있었다.


"바로! 다음은 애국가 봉창이 있겠습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지휘봉을 들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 남자는 단상 앞쪽 중앙에 자리잡고 서더니 두 팔을 들어올렸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시이작!"


모든 사람들은 지휘자에 맞추어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애국가는 1절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2절을 부르고 다시 3절로 넘어갔다.

어떤 여자들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있었고,

노랫소리는 갈수록 우렁차면서도 슬픈 음조가 강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애국가를 4절까지 다 불렀다.
오늘만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공식적인 예식에서는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도록 되어 있었다.

4절까지 부르면서 조국의 독립을 생각하고 투쟁의 의지를 북돋우고

단결의 화합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다음은 독립투쟁의 전선에서 혁혁하게 싸우시다 장렬하게 순국하신

독립투사들을 추모하는 묵념을 올리겠습니다.

 다같이 묵념 시작!"


깊은 침묵이 장내에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 기억들을 따라 비로소 목이 메고 있었다.

 빠르게 스쳐가는 얼굴, 얼굴들은 수국이 누나에서 멈추어졌다.

수국이 누나는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생각할수록 가슴이 아렸다.


"바로! 예, 모두 착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리에 앉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은 경건하고도 침통했다.

그들은 모두 독립투쟁과 직접 관계되는 사람들이었고,

남의 나라  땅 중국 중경에서 올리는 국민의례였던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오늘의 본행사 첫 번 째 순서로 신탁통치설비판자유한국민대회

추진위원장님의 인사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50대 중반의 남자가 연단에 나와 섰다.

보통 키에 마른 편인 그 남자의 얼굴에는 고난에 찬 삶의 역정을 말하는 듯

굵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그 모습을 얼핏 보면 시들고 지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만장하신 여러분, 오늘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현하 세계정세는 독일과 일본을 적으로 하고 중국 영국 미국 불란서를 중심으로

연합국 사이에 대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여러분들도 너무나 잘 알고 계시는

주지의 사실입니다.

우리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진작에 대일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우리 청장년들이 이 전쟁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거도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심히 유감스러운 설이 들려 우리 조선인들을 분노케 하고 실망케 하고 있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신탁통치설입니다.

그건 연합국 중의 두 나라 대표인 영국의 처칠 수상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종전 후

처리문제 중의 중대사인 아세아와 아프리카 식민지국가들의 무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의 신탁통치란 무엇입니까!

일본이 패망하면 우리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연합국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건 우리 민족이 스스로 국가를 세울 능력도 없고,

국가를 운영할 자질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강대국의 일방적인 횡포이며, 처칠과 루스벨트의 무지를

백일하게 드러내는 거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재론할 여지도 없이 신탁통치란 우리나라를 또다시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음모이며,

우리 민족에 대한 모독인 동시에 조선인들의 자존심을 능멸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석 달 전인 2월에 임정의 조소앙 외교부장께서 비판의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족하지 않아 우리는 좌시할 수 없어서 오늘 이렇게 비판대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자를 통하여 신탁통치의 부당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신탁통치를 절대 거부하는

조선인들의 불굴의 결의를 만천하에 밝히고, 그리하여 처칠과 루스벨트가 자신들의 무지를

자각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탄없는 비판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이상으로 인사의 말씀을 갈음 하고자 합니다."


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손 모아 박수를 쳤다.


"추진위원장님의 인사말씀이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대한민국 신탁통치설 비판의 순서로 들어가겠습니다.

첫 번 째 비판자는 이동광씨입니다."


40대 중반의 건장한 남자가 연단에 나섰다.

짙은 눈썹와 큰 입이 야성을 풍기고 있었다.
"불초 소생은 나이 스물에 압록강을 건넌 이후로 26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러 가지 고초도 겪고 분한 일도 많이 당해습니다만 오늘처럼 죽고 싶도록

분통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더라고 한편인 줄 알았던 연합국들이 우리 조선을 신탁통치한다니

이 어인 일입니까.

좋습니다,

너희들이 나라를 빼앗겼으니 나라를 다시 세울 능력도 없고 또 나라를 지탱해 갈 자질도 없다,

그런 뜻인 모양입니다만 그건 천만의 말이올시다.

첫째 알아두어야 할 것은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친일파 조정대신놈들이었지 백성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는 자그마치 반만년인 5천 년에 이르고,

그 장구한 세월 동안에 많은 독립된 국가를 세우고 운영해 온 확실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매국노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장 33년 동안

조선의 백성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왜놈들과 피 흘려 싸워오고 있고,

싸우다 죽어간 분들만도 백만 숫자를 넘습니다.

넷째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우리 민족은 거족적인 3·1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계기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엄연히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다시 봅시다,

나라를 세울 능력이 없고 나라를 지탱해 갈 자질이 없는 민족이 5천 년의 독립된 역사를

보유할 수 있는 것입니까.

또, 나라를 세울 능력이 없고 나라를 지탱해 갈 자질이 없는 민족이 폭압과 살육을 밥 먹듯이 하는

일본놈들을 상대로 33년 동안이나 피어린 투쟁을 끈질기게 전개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나라를 세울 능력이 없고 나라를 지탱해 갈 자질이 없는 민족이 그 어느 나라의

경제적 원조도 없이 24년 동안이나 자력으로 망명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사실이 이렇듯 엄연한데 신탁통치라니

그 무슨 망발입니까! 연합국의 수뇌들은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강대국의 자만에 빠져 있지 말고 두 눈 똑똑히 떠서 조선민족의 역사와 조선사람들의

심중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노력과 성의를 보이지 않고 신탁통치를 강행하게 되는 경우에는

조선사람들 전체는 연합국을 일본과 똑같은 적으로 간주해서 제2의 독립투쟁을

전개하게 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해 두는 바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에 관한 것입니다.

그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현재의 연합국들을 중심으로 해서 세계 여러 나라에

수없이 승인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연합국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일본과의 관계 때문에 기피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연합국이 결성된 이상 일본은 우리 대한민국과 연합국의 공적인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연합국은 신탁통치 같은 망상을 하루빨리 철회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마 땅히

승인하여 3천만 조선미족을 동지로 삼을 것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이상으로 소생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옳소, 옳소!"


"옳소, 명비판이오!"


"최고요, 최고!"


사람들은 환성을 지르며 열렬하게 박수를 쳐댔다.

그칠 줄 모르고 이어지는 박수소리를 따라 장내의 열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저 사람 누구지요?"


송가원은 박수를 치며 방대근에게 물었다.


"아, 3·1운동 적에 학생 대표로 나섰다가 상해로 온 사람이오."


"그럼 민수희 여사하고 같은 경력의 소유자로군요."


"아, 그런 심이오."


"그후로는 임정에서 일했나요? 많이 배운 것 같은데."


"저 사람이 임정서 공부시킨 사람덜 중에 한나요."


"임정에서 공부를 시켜요?"


"그적에 공부럴 다 마치지 못허고 상해로 온 학생덜이 많었는데 그주이서 머리 존 학생덜얼 골라

김구 주석이 학비를 댄 것이오.

 나가 상해에 있을 적에 저 사람은 영어럴 잘허기로 소문나 있었소."


"김구 주석께서 인재들까지 길러내셨군요."


송가원은 처음 듣는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지고 있었다


"그적에 반대헌는 사람덜도 있었다는 디,

앞을 내다보신 것 아니겄겄소. 그렁게 이리 잘 써묵덜 않소."


긴 박수소리가 끝났다.
여자 한 사람과 남자 한 사람이 더 비판연설을 했다.

그때마다 열렬한 박수가 터져 왔다.


"그러면 이상으로 비판연설을 마치고 우리 3천만 민족의 결의를 나타내는

 구호를 삼창하기로 하겠습니다.

모두 힘차게 복창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한 젊은이가 단상 앞으로 나섰다.


"대한민국 3천만 민족의 결의를 합쳐 신탁통치 결사반대를 삼창하기로 하겠습니다.

신탁통치 결사반대!"


일어선 사람들이 모두 외쳐대며 팔을 치뻗어올렸다.


"신탁통치 결사반대!"


"신탁통치 결사반대!"


목소리들이 더 우렁차게 커졌다.


"신탁통치 결사반대!"


"신탁통치 결사반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운 박수가 터져 올랐다.
우리의 이 열렬한 외침이 오늘 발표된 비판연설문들과 함께 연합국 수뇌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순서로 만세 삼창이 있겠습니다.


추진위원장이 연단으로 나왔다.


"대한독립 만세에!"


"대한독립 만세에에!"


"한국광복군 만세에!"


"한국광복군 만세에에!

"
"연합국 승리 만세에!"


"연합국 승리 만세에에!"


"이상으로써 신탁통치설 비판 자유한국인대회를 전부 마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났지만 사람들은 부동자세로 서 있을 뿐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정면 단상의 태극기였다.
그 모임은 임정의 간부들이나 광복군의 간부들이 관여하지 않은 조선 사람들의

순수한 뜻이 합쳐진 것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더구나 중경까지 와 있는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독립투쟁에 헌신하고 공헌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3천만 조선민족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히 지나칠 것은 없었다.
식장을 나선 방대근 일행은 가까운 음식점을 찾아가씨다.

점심때가 다되어 있었다.


"참 분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묘하군요."


중국식 둥근 탁자에 모두 자리를 잡자 민수희가 말했다.

그녀의 눈가장자리에는 아직도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판이 어찌 될란지 참 큰일이오."


방대근이 담배를 꺼내며 한숨을 쉬었다.


"저걸 보내면 좀 효과가 있기는 있을까?"


윤주협이 호잣말처럼 말했다.


"아까 구호를 외칠 때 사진도 찍었으니

그걸 보면 그 사람들도 달라지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민수희의 말이었다.


"글씨…, 배불른 놈이 배고픈 사람덜 사정 아는 법 없는 것잉게."


방대근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쓰게 웃었다.


"예, 그럴 확률이 큽니다."


송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쩌지요? 괜히 헛일만 하는 거 아니에요."


민수희가 안타깝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로선 하는 데까지 해봐야지요.

 이것도 독립운동의 한 방법이니까요."


송가원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강대국이란 게 다 그 모양이라.

결국 개인이고 국가고 힘없는 쪽만 억울하고 서러운 거야."


윤주협이 한숨을 쉬었다.


"참, 고것이 그리만 안됐어도…"


무슨 생각인가를 하고 있던 방대근이 불쑥 말했다.


"뭐가 말인가?"


윤주협이 눈길을 돌렸다.


"광복군 말이시. 광복군이 시방 5천 명만 됐어도 요

일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란 말이시. 시기가 안 맞 어서 그런 것인디,

왜놈덜이 한 3년만 일찍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만주 동북항일 연국

조선병력얼 이짝으로 이동시켜서 광복군얼 맨글었으먼 연합국도 우리럴 무시 못헌단 말이시.

그런디 시가가 안 맞어 만주서 수천 명 아깝게 죽어가고 인자 광복군 3백여 명이니

강대국덜이 우리럴 무시 안헐 수가 있겄능가.

다 사후 약방문이기넌 헌디."


방대근이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감았다.

담배를 든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예, 그 말씀에 일리가 있습니다.

5천 명은 안 되더라도 2,3천 명만 있어도 달라지겠지요.

힘에는 힘밖에 효과를 내는 게 없으니까요. 연합군이 동남아전선에서

우리 병력을 이용하기 위해서라도 임정을 승인할 수 있고,

정부를 승인한 상태에서는 신탁통치니 뭐니가 나올 수가 없는 일이지요."


송가원의 말이었다.


"그럼 이런 사태에 대비하지 못한 임정의 잘못도 크지 않소?"


윤주협이 정색을 했다.


"아니시, 이 일언 그 누구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시.

일본이 그리 비밀리에 전쟁을 일으킬지 몰르고 미국도 당헌 판 아닌가.

우리넌 그간에 도처에서 최선얼 다해 싸운 것이고,

인자 새 싸움에 지면헌 것이나 알먼 되네."


방대근이 이야기를 정리하듯 말했다.


"참 옥비 씨, 얼마 전에 말한 부인회 있잖아요,

곧 재건대회를 갖게 될 거예요. 꼭 가입하도록 하세요."


민수희가 말머리를 돌리며 옥비를 건너다보았다.


"지가 무신…"


그때까지 없는 듯 앉아 있던 옥비는 부끄럽게 웃었다.

머리모양이며 옷이 완전히 중국식이었다.

남자들도 그렇듯 여자들도 철 따라 한복을 갖춰 입기 어려운 형편 때문이었다.

그런 옥비의 모습은 천상 중국여자였다.


"아니에요, 부인회에는 옥비 같은 분이 꼭 필요해요.

그 특출한 재주올 회원들의 마음도 좀 위로해 주고,

학예반에서 아이들도 좀 지도해 주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요.

송 선생님, 웃고만 계시지 말고 응원을 좀 하세요."


민수희는 송가원을 쳐다보았다.


"예, 저는 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죠,

옥비 씨? 명창으로 무대에 많이 서셨을 것이니 부끄러워서 그럴 리 없고,

만주서 항일연군으로 투쟁하셨으니 애국심이 약해서 그럴 리 없고,

뭐가 맘에 안 드는 게 있으세요?"


민수희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옥비에세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아, 아니구만요. 애기가 안직 에래서…"


옥비는 수줍게 웃었다.


"아아, 지극한 모성애 때문에 그렇군요.

그건 염려 아하셔도 돼요. 평소에는 애도 데리고 나와서 세상 구경도 좀 시키시고,

애를 떼어놓고 해야 될 행사에는 당분간 빠지면 되니까요. 어떠세요?"


민수희는 그 성격답게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그거 괜찮은 방안인게 가입허는 것이 좋겄소.

여그서 조선사람으로 그저 손놓고 있어서넌 안된게."


방대근의 나직한 말이었다.


"예에…"


옥비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 방 대장님, 무슨 마술 부리세요?

제 권유는 그렇게 안 듣는데 어찌 그리 한마디로 해결을 지으시나요?"


민수희가 어리둥절해했다.


"여보, 방 대장님하고 당신하고가 어디 같소?

방 대장님은 그야말로 옥비 씨의 대장님 아니오.

항일연군, 그게 어디 예사 군대요.

이 세 분들 손에 남아 있는 동상 흉터를 보시오.

이 흉터가 남아 있는 한 이분들은 영원히 항일연군이란 걸 알아두시오. 허허허…"


윤주협의 농담 같은 말이었다.


"어머, 그렇군요. 방 대장님하고 당신이 영원히 의열단인 것처럼."


민수희가 의미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옥비는 탁자 아래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만주의 설한풍 몰아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환자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자신이 부르는 입 속의 노래를 듣고 눈물 글썽이며 좋아하던 환자들,

그들 중에 몇 사람이나 살아 남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때 어떻게 그 추위와 위험 속에서 견디고 살아났는지 언제 생각해도 꿈만 같았다.

모든 것이 생시 같지가 않은데 한 가지는 확실한 것이 있었다.

송가원을 의지하고 믿은 것이었다.

그가 있기만 하면 그 어떤 고초든 참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앞으로가 참 큰일이오.

지원병이라고 허는 조선청년덜이 왜놈덜 전선에 배치되고 있는디.

기맥히게도 동족상쟁얼 허게 생겼시니."


방대근이 쓴 입맛을 다셨다.


"지원병은 또 그렇지만, 곧 징병제가 실시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더 많은 청년들이 끌려올 텐데 그때는 정말 동족상쟁의 비극을 피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송가원의 침통한 말이었다.


"나가 알아보닝게 지원병이라는 것도 태반이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라고 헐 수가 없는 것이 문제요.

왜 그런고 허니, 살기넌 에롭고 돈언 준다고 허고 헝게 가난헌 소작인 자석덜이 나슨 경우가

너무 많으요."


방대근이 혀를 찼다.


"그럼 그만 일어보실까요."


민수희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이거 점심이 너무 부실해서 죄송합니다."


송가원은 돈을 치르려고 먼저 일어났다.


"임정 간부덜도 점심 굶는 날이 많은디 이만허먼 성찬이오."


방대근이 대꾸하며 잔에 남은 물을 마저 마셨다.

그들이 한 식사는 면종류로 간소했다.
음식점을 나와 방대근과 윤주협이 짝지어 떠났고,

옥비는 아이가 기다린다며 발길을 서둘렀다.

송가원과 민수희는 병원으로 향했다.


"방 대장님은 생각보다도 용케 혼자 잘 견디시네요."


민수희가 멀어져 가는 방대근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그녀는 아지곧 방대근을 결혼시키지 못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평생 그렇게 살아오신 분이니까요.

저런 분들은 오히려 누구하고 함께 사는 걸 불편해하실 겁니다."


송가원이 말하는 저런 분들이란 아직까지도 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몇몇 의열단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천상 타고난 투사들이지요.

저런 분들이 신탁통치설을 듣고 어떤 심정일까를 생각하면 막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요."


"예, 그 흉금을 형용할 수가 없겠지요.

윤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너무 분해하면서 자꾸 술만 마시려고 해요."


당연하지요.

나 같은 사람이 감정을 주체하기 어렵게 분한데 평생 혈


"투를 벌여온 분들 심정이야 오죽하겠어요.

가끔 술 좀 드시게 하세요."


"후원금 낼 돈도 모자라는걸요.

근데 한 가지 의문이 있어요.

혹시 우리나라가 독립을 해도 나라를 지탱해 갈 능력이 부족한 건 아닌가요?

30여년 동안 능력있는 분들이 너무나 많이 희생되어서 말이에요."


"아 예, 그거 좀 특이한 발상이군요.

그동안 유능한 분들이 너무 많이 희생된 건 사실이지요.

그러나 신학문을 통헤 배출된 지식인들이 그동안 또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알기로 국내와 만주의 감옥에 갇혀 있는 분들만 2만이 넘습니다.

그리고 국내에서 타협하기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는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중국에서

활동하는 분들을 합하면 또 2만 명은 될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대학과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식민지의 역사를 체험하고 자각한 대중들이 있습니다.

타민족의 지배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대중들의 역사체험과 자각은 우리 민족이 3백 년,

아니 3천 년을 굳건히 설 수 있는 더없이 튼튼한 지반이 될 것입니다.

다시는 나라를 빼앗기지 말자는 전민족적 결의와 결속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나라를 세우고

그 나라를 보존해 나가는 데 4만여 명의 지식층은 너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전문가는 아닙니다만 그 점에 대해서는 낙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머, 전문가가 따로 없으시네요.

지금 말씀하신 측면에서 송 선생님이 오늘 비판자로 나섰더라면 참 좋았을 걸 그랬어요."


민수희는 걸어가면서 정색을 하고 송가원을 쳐다보았다.


"에이, 무슨 말씀을…"


송가원은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저는 또 한 가지 걱정이 있어요.

연합국이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하는 걸 보면서 일본이 전쟁에서 질 거라는 건 확신하게 되는데,

우리가 해방이 되고 나라를 세우면 그 많은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은 다 어쩌나 하는 걱정이

생기거든요."


"다 죽여야지요."


거침없이 터져 나온 송가원의 목소리는 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네에?"


민수희는 깜짝 놀라 송가원을 쳐다보았다.


"왜 그리 놀라십니까?"


송가원의 얼굴은 냉정했다.


"그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


"예, 대충 백 50여만이라고 보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을 다…"


"많은 게 문제가 아닙니다.

그 두 배, 3백만이라도 다 죽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놈들은 왜놈들과 함께 동족을 살해한 공동살인범들이기 때문이고,

미족 전체를 박해하고 고통 속에 몰아넣은 공동가해자들이기 때문이고,

그놈들이 훼손시킨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그놈들이 짓밟은 민족정의를

바로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 이후 지금까지 도처에서 죽어간 동포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줄잡아 3백만이 훨씬 넘습니다.

그래도 그들을 다 죽이는 게 수가 너무 많습니까?

그건 왜놈들이 죽였지 그들이 죽인 게 아니라고 말하진 맙시다.

그건 해방이 되는 날 바로 그놈들이 하게 될 뻔뻔스럽고 파렴치한 변명이니까요.

물론 그놈들 중엔 직접 죽인 놈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놈들도 있지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그들 모두가

왜놈들의 살육에 가담한 공동살인범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민 선생도 3·1운동의 선봉에 섰으니까 잘 아시겠지만 그 때 총질을 하고

고문을 한 게 왜놈 순사와 형사들뿐이었습까?

그때의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2년 전인 41년에 임정이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게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에 대한 가차 없는 처벌을 첫 번 째로 꼽은 점입니다.

그 문제의 처리는 독립투쟁만큼 중요합니다."


송가원의 뇌리에는 아버지와 함께 항일연군 전사들의 모습모습들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네, 알겠어요. 전 역시 여자의 한계를 못 벗어나나 봐요."


민수희는 마치 수술실에서 의사의 지시를 받는 간호원 같은 태도로 말했다.


"아닙니다. 여자의 한계라기보다 인정이 너무 많은 거지요.

인정은 선인에게 베풀 때 선이지 악인에게 베풀면 악이 될 뿐입니다."


"…"


민수희는 가슴 서늘함 느끼고 있었다.

송가원이 의지가 굳고 절도가 있는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 가혹하리만큼 단호한 의식을 품고 있는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기는 그런 의식 없이 편안한 의사생활을 버리고 항일연군으로 뛰어들었을 리 없기도 했다.

항일연군의 가열찬 투쟁은 관내에까지 잘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방 대장님은 요새도 맡으신 직책이 없으신가요?"


민수희는 좀 가벼운 이야기를 꺼냈다.


"그저 광복군 노병이지요 뭐."


"참 대단하신 분이에요. 어찌 그리 직위에 초연할 수 있으신지."


"글쎄요, 속이 넓은 분이지요."


민수희가 말하는 것은 광복군 개편 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는 작년 5월에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그에 따라 광복군은 개편되면서 간부들의 변동도 생기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양쪽의 갈등이 야기되었다.

그런데 투쟁경력이 그 누구보다 혁혁한 방대근은 제일 먼저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자리다툼에서 물러서고 말았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능력대로 일을 맡아야지요."


송가원은 힐책하듯이 말했다.


"나가 송 선생 춘부장 어러신얼 왜 높이 받드는지 아시오?

그 어러신언 당신으 능력얼 알아보고 기는 직책언 맡으셨어도

감투럴 탐해 암투럴 벌인 적은 한번도 없으셨기 땜시오.

그러고 아랫사람덜헌티도 하찮은 감투에 연연히서 대의럴 그르치지 말라고 갤치셨소.

 나가 그 가르침얼 어겨야 되겄소?"


방대근이 지그시 웃으며 한 말이었다.
송가원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방대근은 평복 차림처럼 아무 직책도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비밀감찰대장이었다.

그에게 맡겨진 그 직책은 어느 조직표에서도 찾을 수 없이 그야말로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중경에 잠입하고 있는 첩자나 밀정들을 색출해 내는 것이 그 조직의 의무였다.

그래서 송가원마저도 그가 광복군의 노병인 줄만 알고 있었다.
방대근은 며칠이 지나 송가원한테서 연락을 받았다.

 허진이 위독하다는 것이었다.

 윤주협과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허진은 이미 숨이 끊어진 뒤였다.

폐결핵 합병증으로 입원한 그는 혼자 외롭게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하루쯤 일찍 가르쳐주지 그러셨소."


윤주협이 원망스러운 듯 송가원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인체란 워낙 예측하기 어렵고…, 아닙니다, 제가 서툴러서 그렇습니다."


송가원이 죄진 듯 고개를 숙였다.


"아니오, 그런 뜻이 아니오. 하도 허망해서 그냥 하는 소리요."


윤주협이 당황해서 송가원의 팔을 붙들었다.


"자네 맘 허망하다고 그간에 애쓴 의사 선생 입장 난처허니 맨글지 말어. 가세, 장례준비허로."


방대근이 걸음을 떼어놓았다.


"참, 사람은 죽어도 백화는 난만이군."


현관을 나서던 윤주협이 걸음을 멈추었다.

병원은 넓은 마당에는 눈부신 햇살이 가득했고,

담을 따라 가꾸어진 화단에는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인생무상이제…"


방대근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참, 자네 허진이가 시 썼던 것 알지?"


윤주협이 무슨 생각이 난 듯 물었다.


"그려, 시 써서 여자덜 꾀고 그랬제."


"인생은 무상하다. 그러나 역사는 치열하다.

식민지의 슬픈 역사 위에 나는 불붙어 타고 싶은 하나의 가랑잎.

이런 시 기억하나? 허진이가 쓴 거야."


"참, 기억력도 좋네."


"기억력이 좋은 게 아니라 상해 있을 때 우리 심정을 얼마나 잘 나타 냈나.

그래서 한번 읽은 뒤로는 영 잊혀지지가 않아."


"그렇구만. 아조 절절헌 맛이 있네."


"이렇게 저렇게 하나하나 떠나가고 이제 신흥무관학교 출신은 몇 안 남았네."


신흥무관학교!
그때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노병갑이었다.

살려달라면서 벽쪽으로 밀려가던 그 겁에 질린 모습.

그 모습은 가끔 꿈에 나타나고는 했었다.

절친한 친구 중의 하나였는데 살려줄 길이 없었다.

언젠가 술을 마시고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윤주협이가

노병갑이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했었다.

그러나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방대근은 노병갑의 이야기를 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을 지우고 말았다.
그렇다고 마음의 괴로움이 가실 것도 아니었고,

노병갑의 잘못이 고쳐지는 것도 아니었다.


"가세."


방대근은 먼저 계단을 내려섰다.


"단장님한테 연락부터 해야 되지 않겠나?"


윤주협은 한 계단 뒤에 따라오며 말했다.

그가 말하는 단장이란 김원봉이엇다.

김원보은 이제 광복군 부사령관이었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오래 입에 붙은 대로 그저 단장이었다.

김원봉이 의열단 단장이 된 이후 여러 차례 그 직함이 바뀌었지만,

직함 앞에 부자가 붙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임정에서는 그동안 배척해 왔던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을 수용하기로 태도를 바꾸었고,

그 실현은 광복군 개편으로 나타났다.

모든 이념이나 정파의 통합은 김원봉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추진해 왔던 바라

그는 광복군 부사령관의 직책을 흔쾌히 수용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한국광복군은 미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들이 각자의 이념을 초월하게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자고

한덩어리로 뭉친 통합체였다.


"기왕 떠나부렀응게 이따가 일과 끝나고 허는 것이 낫제.

허진이도 일에 방해되는 것 원허덜 않을 것잉게."


방대근이 정문을 나서면서 말했다.
윤주협은 그 예사로운 것 같은 말에서 가슴 섬뜩한 것을 느꼈다.

그 말은 상급간부가 하는 독립의 일은 잠시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냉정이었다.
한편, 하와이에서 한 달을 넘겨 중경에 도착한 6명의 지원자들은

그동안 군사훈련을 마치고 광복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국 땅 하와이에서 온 이색저인 존재로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고,

그 멀고먼  땅 하와이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우러 온 애국심은 광복군 병사들의 사기를

드높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능력이 실질적으로 발휘되기 시작했다.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과 인도 주둔 영국군 동남아전구사령관 마운트마트 대장이 체결하는

상호군사협정 과정에서 그들은 영어회화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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